앞으로 이 지면을 통해 한국 사람 열이면 열 모두에게 미움받는 그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 한다.
때로 현안 이야기도 하겠지만, 조금은 더 긴 시간의 지평에서 어쩌다 여기에 이르렀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볼 것이다. 이 지면이 국회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면서도 조금은 더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쌓이는 공간이면 좋겠다.
"국회 이야기"를 연재하며
나는 국회가 좋다. 이 말이 생뚱맞게 들릴 수 있겠다. 나도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다. 그 곳은 내 첫 직장이었다. 5년을 근무했는데, 책에서 배운 민주주의 의회의 모습과 우리 국회 간의 괴리는 컸고, 이해할 수 없는 모습투성이었다. 어쩌다 이런 모습이 되었을까? 국회에 대한 내 관심은 그렇게 시작된 것 같다. 국회의 역사를, 제도를, 사람들의 행태를 들여다보기 시작한 지 열다섯 해가 넘어간다. 그러다 보니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시나브로 변해 온 것 같다. 긴 독재 체제를 겪고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가 조금씩 변모해 왔지만 여전히 한 켠에는 독재 체제의 긴 그림자를 껴안고 있고 다른 한 켠에는 지난 30년 민주주의의 울퉁불퉁한 상처까지 담고 있는 국회의 모습은 애잔하기까지 하다. 앞으로 이 지면을 통해 한국 사람 열이면 열 모두에게 미움받는 그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 한다. 때로 현안 이야기도 하겠지만, 조금은 더 긴 시간의 지평에서 어쩌다 여기에 이르렀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볼 것이다. 이 지면이 국회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면서도 조금은 더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쌓이는 공간이면 좋겠다.
***
국회 이야기 ①
‘국회(國會)’는 어디에서 왔을까?
글쓴이 ㅣ 서 복 경(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첫 이야기는 ‘국회’(國會)라는 이름에서 시작해 보자. 우리나라 입법부 명칭인 국회라는 이름은 어디에서 왔을까? 많은 나라에서 입법부 명칭은 근대 민주주의 형성의 역사를 그대로 담고 있기에 나는 오래전부터 이 이름의 기원이 궁금했다.
이름은 역사를 담는다
현존하는 각국 의회의 명칭 중 가장 오래된 것은 930년에 첫 소집된 아이슬란드 의회 알싱(Alþingi, 영어식 표현 Althing)으로, 지금도 아이슬란드 의회는 이 명칭을 사용한다. 물론 처음부터 현재와 같은 보통선거로 선출된 대표들의 회의체는 아니었지만 전국 단위 대표들의 회의체로 출발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국회의 영어식 표기 ‘National Assembly’는, 지금은 우리나라 이외의 여러 국가들에서도 사용되지만, 근대적 대표 체제의 명칭으로서의 기원은 프랑스 대혁명기 등장한 ‘국민의회’(Assemblée nationale)였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은 알려진 대로 루이 16세가 왕실 재정의 고갈을 메우기 위해 소집했던 삼부회에 기원을 둔다. 당시 제1, 제2, 제3신분으로 구성된 삼부회의 운영에 불만을 품은 ‘제3신분’(Tiers État)의 대표자들은 베르사유궁 테니스코트에 별도로 모여 스스로를 ‘국민의회’라 칭하고 프랑스 인민 전체를 대표한다고 선언했다. 군주와 귀족, 성직자 계급이 엄연히 존재했던 신분제 사회에서 제3신분이 국가 전체를 대표한다는 선언은 그 자체로 혁명 선언에 다름 아니었다. 지금도 프랑스 하원 명칭은 ‘국민의회’로, 현존 프랑스 정치체제가 프랑스 대혁명에 그 기원을 두고 있음을 분명히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양원제가 아닌 단원제를 택한 의회들이 이 명칭을 사용하곤 했는데 우리나라도 그런 관례를 따른 것 같다.
프랑스의 상원 명칭 Sénat(영어 Senate)은 미국 등 양원제를 채택하고 있는 다른 많은 나라의 상원 명칭으로도 사용되곤 하는데, 그 역사는 훨씬 더 오래된다. 고대 로마의 원로원( 라틴어 Senatus)에 기원을 갖는 이 회의체는, 라틴어로 ‘나이든 사람’을 의미하는 ‘senex’의 모임이라는 뜻을 갖는다. 이때 ‘나이든 사람’은 그저 나이를 많이 먹은 사람이 아니라, 번역어 ‘원로’의 뜻처럼 덕망이 있고 권위가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로마는 왕정에서 출발해 공화정, 제정으로 정치체제가 변화했는데, Senate은 왕정 시대 때부터 왕의 자문 기구 역할을 했다. 유력 가문의 수장이나 공로를 세운 사람들 중 일부들이 모여 왕에게 국정에 대한 자문 역할을 했고, 공화정 시대에 민회가 설치되어 여러 결정들의 권한이 넘겨졌을 때에도 Senate은 유력 가문의 대표자들, 고위 공직을 경험한 전직자들로 구성되었으며 시대에 따라 그 권한은 다양하게 유지되었다. 오늘날 각국 상원은 그 구성 방식도 다르고 기능도 다양하지만, 1인 1표의 보통선거권 체제 원리에 따라 구성되는 하원과는 다르다는 의미에서 Senate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고 있다.
영국이나 캐나다 하원의 명칭은 ‘House of Commons’로, 직역하면 ‘평민들의 원’ 정도가 되겠다. 잉글랜드에서 기원한 이 명칭은 봉건제 신분 사회에서 납세자이면서도 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받았던 평민들이 ‘영주(귀족)들의 원’(House of Lords)과 구분하여 자신들의 이해를 대변하기 위해 만들었던 회의체에 그 기원을 둔다. 지금도 입헌군주제를 택하고 있는 이들 나라에서 하원의 명칭은 ‘평민들의 원’이다.
반면 미국 하원의 이름은 ‘평민들의 원’이 아닌 ‘대표자들의 원’(House of Representatives)이다. 식민지에서 출발한 아메리카 대륙의 각 주들은 태생부터 왕이나 귀족계급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귀족원’과 대비되는 ‘평민원’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대신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주별 대표자들이 모여 싸웠고, 그들은 나중에 ‘주들의 연합’(United States)을 결성했으며 주 연합의 중대 결정을 위해 대표자들의 원을 구성했다.
미국 상·하원을 통칭하는 명칭인 Congress 역시 국가 형성기의 역사를 담은 그릇이다. 미 연방헌법 제1조는 상·하원을 모두 포괄하는 연방의회의 명칭으로 Congress를 사용했는데, 그 연원은 1774년부터 미국 독립 때까지 식민지 각 주들의 대표자들이 모였던 회의체의 명칭인 ‘대륙회의’(Continental Congress)에서 온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입법부의 명칭인 ‘국회’는 어떤 역사를 담고 있을까?
1919년 대한민국임시헌장 제10조
1919년 ‘3・1운동’ 이후, 4월 10일 상하이에서 29인의 전국 대표자들이 모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입법부인 임시의정원을 개원했다. 의정원은 4월 11일 약식 헌법에 해당하는 ‘대한민국임시헌장’을 채택했으며 임시정부의 각료들을 구성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알렸다.
※출처: [임시정부의정원문서 1](1974), 오른쪽으로부터 3-5쪽.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로 선포’한다고 밝힌 임시 헌장은 총 10개 조로 구성되어 있고, 제10조에는 “임시정부는 국토 회복 후 만 1개년 내에 국회를 소집함”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1948년 개원한 대한민국 ‘국회’는 ‘대한민국’이라는 국호와 함께 1919년 임시정부에서 그 기원을 가지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일제강점 전 ‘대한’제국에서 ‘대한’을 취하고 제국이 아닌 ‘민국’임을 조합한 것이다. 임시 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제’를 정치체제로 채택함을 밝히고 있어, 이를 뒷받침한다. 대한제국 시기 전제군주제와 입헌군주제를 둘러싼 갈등은 일제강점과 고종의 사망 이후인 이 시기 ‘민주 공화제’ 채택으로 합의되었고, 헌장 제2조는 ‘대한민국은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해 통치’함을 밝혀, 입헌주의 혹은 의회주의의 원리를 밝히고 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하며(제3조), ‘대한민국의 인민으로서 공민의 자격이 있는 자는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있’다고 밝혀(제5조), 보통선거권 체제에 의한 입법부의 구성 원리를 확인하고 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 헌장’에 의해, ‘국회’는 민주 공화제를 택한 대한민국이 국토 회복 후 소집하게 되어 있는, 보통선거권 체제하의 선거를 통해 구성할 대표체의 명칭이라는 것이 확인된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한 가지 의문은 남는다. 1919년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입법부 명칭은 ‘의정원’(議政院)이었고, 대한제국 시기 만들어진 자문 기구의 명칭은 ‘중추원’(中樞院)이었다. 미 군정기 군정의 한인 입법 자문 기구 이름은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南朝鮮大韓國民代表民主議院), ‘남조선과도입법의원’(南朝鮮過渡立法議院)으로 모두 ‘원’(院)을 사용했다. 그런데 왜 국토 회복 후 소집할 대표체의 명칭은 ‘국회’였을까?
국회(國會), 협회(議會), 민회(民會)
“…… 외국의 예를 보더라도 국회는 국가가 세우는 공립으로 국가와 국민의 이해를 의결하는 곳이고, 협회는 국민이 세운 사립으로 함께 모여 토론하는 곳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국민이 세운 협회가 개명 진보에 도움이 된 건 사실이지만 정치를 평론하고 정부 관리의 진퇴를 논하는 것은 원래 협회의 규칙이 아닌데 정해진 장소를 떠나 집회를 열고 상소를 바치면서 대궐 문을 막고 정부 관리를 협박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국회에도 이런 권리가 없는데 협회에 있을 수 없으니, 오늘 이후에는…… 어느 협회를 불문하고 무리를 지어 치안을 방해하는 경우에는 엄벌에 처하도록 할 것이다”(『황성신문』, 1898/10/24; 김정인 2015, 286 재인용).
위 글은 대한제국 시기 독립협회의 활동에 대해 고종이 ‘독립관 이외의 지역에서 집회를 열지 말라’는 내용을 담은 조서의 일부이다. 이 조서에서 고종은 국회를 ‘국가가 공립으로 세우고 국가와 국민의 이해를 의결하는 곳’이라는 정의를 사용하고 있으며, ‘국민이 사립으로 세우고 함께 모여 토론하는 곳’이라는 협회의 정의와 대비하여 사용한다. 군주제였던 대한제국에서 군주 스스로 국가적 의결기관으로서 국회에 대한 정의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당시에 이미 국민의 대표체인 의회에 대한 인식이 널리 공유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민간 결사체인 협회와 국가적 의결기관인 국회의 차이를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다. 실제로 1896년 설립되어 1898년 강제 해산된 독립협회는 언론·집회의 자유, 국민 참정권 운동, 입헌군주제로의 전환과 의회 설립 운동을 추진했다.
“…… 외국의 예에도 민회는 행정을 잘못하면 전국에 알려서 민중을 모아 질문하고 논핵해서 인민이 승복하는 바가 아니면 감히 물러가지 아니하는 곳이지 토론만 하는 곳은 아니다. …… 오늘날 민의가 없으면 정치와 법률이 무너져 어떠한 재앙이 어느 땅에서 일어날지 알 수 없다. 우리 집회는 사사로운 것이 아니라 서울과 시골에서 뭇 인민의 마음이 모두 하나 되어 모인 것이다”(신용하 2001, 414-417; 김정인 2015, 286-287 재인용).
위 글은 집회를 제한하는 고종의 조서에 대한 독립협회의 반박 상소문 중 일부다. 독립협회는 고종의 집회 제한에 대해 당시 개최되었던 ‘만민공동회’, ‘관민공동회’ 등의 대중 집회를 ‘민회’로 정의하고 민회의 공적 기능을 주장한다. 민회는 기관으로서 협회나 국회와 달리, 인민의 언론·집회의 자유를 실현하고 공론을 모으는 장으로 정의되었다.
1898년 여름, 독립협회는 대한제국의 관료들과 인민들이 함께 참여하는 ‘관민공동회’를 개최했고, 관민공동회는 국가주권의 자주화, 국가 이권의 수호, 국가 재정의 일원화, 국민 자유권의 보장, 인사행정의 공정화 등과 함께 군주의 자문기관인 중추원을 대의기관으로 변화시키는 방안을 담은 ‘헌의 6조’를 채택했다. 근대적 대의기관의 설립안은 군주의 재가를 받았고, 시행되지는 못했지만 중추원을 관선 25명, 민선 25명의 의석을 가진 기관으로 재구성하는 ‘중추원 관제’에 반영되었다. ‘민회’를 통해 모아진 ‘의회’ 설립 요구가 비록 좌절되긴 했지만 ‘국회’의 설립으로 이어질 뻔한 순간이었다.
국회(國會)는 근대적 대의체제 그 자체였다
대한제국 시기의 용어 사용 맥락을 고려하면서 1919년 임시정부 헌장을 다시 생각해 본다. 대한제국 시기 절대 군주정을 고수하려 했던 세력과 근대적 정치체제로서 입헌군주제를 도입하려 했던 세력 간의 갈등, 민회를 통해 공론을 모아 나갔던, 아래로부터의 정치과정을 통해 선출된 대표체로서 의회의 필요성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1919년 3월 전국적인 독립 선언 운동이 있었고, 민주 공화제를 채택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국토 회복 후 1년 내 소집하기로 예정된 ‘국회’는, 그 이전에 있었던 중추원, 의정원 등 일개 기관의 명칭이 아니라, 민주 공화제라는 전혀 다른 정치체제에서 ‘국가가 세우고 국가와 국민의 이해를 의결’하는 최고 대표체 자체를 의미했다. 민간 결사체인 협회와도 다르고, 공론장으로서의 민회와도 다르며, 대한민국이라는 민주 공화정 자체를 대표하는 ‘곳’으로, 특정 기관을 칭하는 고유명사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게 국회는 대한제국 시기 좌절된, 근대적 민주주의를 향한 노력을 담고, 일제강점기 유보된 민주 공화정에 대한 꿈을 담는 그릇이 되었다.
<끝>
참고 문헌
● 김정인. 2015.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시대의 건널목, 19세기 한국사의 재발견』. 책과함께.
● 신용하. 2001. 『갑오개혁과 독립협회운동의 사회사』. 서울대학교 출판부.
서복경 l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5년간 국회도서관 입법 정보 연구관을 거쳐 현재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연구원으로 있다. 한국의 선거, 정당, 의회정치, 정치과정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한국 1세대 유권자의 형성』(2016), 『탄핵광장의 안과 밖』(2017, 공저), 『양손잡이 민주주의』(2017, 공저), 『표심의 역습』(2016, 공저), 『좋은 정부의 제도와 과정』(2016, 공저) 등이 있으며, 역서로 『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2013), 『민주주의, 약자들의 희망이 될 수 있을까』(2007)가 있다.
앞으로 이 지면을 통해 한국 사람 열이면 열 모두에게 미움받는 그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 한다.
때로 현안 이야기도 하겠지만, 조금은 더 긴 시간의 지평에서 어쩌다 여기에 이르렀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볼 것이다. 이 지면이 국회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면서도 조금은 더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쌓이는 공간이면 좋겠다.
"국회 이야기"를 연재하며
나는 국회가 좋다. 이 말이 생뚱맞게 들릴 수 있겠다. 나도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다. 그 곳은 내 첫 직장이었다. 5년을 근무했는데, 책에서 배운 민주주의 의회의 모습과 우리 국회 간의 괴리는 컸고, 이해할 수 없는 모습투성이었다. 어쩌다 이런 모습이 되었을까? 국회에 대한 내 관심은 그렇게 시작된 것 같다. 국회의 역사를, 제도를, 사람들의 행태를 들여다보기 시작한 지 열다섯 해가 넘어간다. 그러다 보니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시나브로 변해 온 것 같다. 긴 독재 체제를 겪고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가 조금씩 변모해 왔지만 여전히 한 켠에는 독재 체제의 긴 그림자를 껴안고 있고 다른 한 켠에는 지난 30년 민주주의의 울퉁불퉁한 상처까지 담고 있는 국회의 모습은 애잔하기까지 하다. 앞으로 이 지면을 통해 한국 사람 열이면 열 모두에게 미움받는 그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 한다. 때로 현안 이야기도 하겠지만, 조금은 더 긴 시간의 지평에서 어쩌다 여기에 이르렀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볼 것이다. 이 지면이 국회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면서도 조금은 더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쌓이는 공간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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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이야기 ①
‘국회(國會)’는 어디에서 왔을까?
글쓴이 ㅣ 서 복 경(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첫 이야기는 ‘국회’(國會)라는 이름에서 시작해 보자. 우리나라 입법부 명칭인 국회라는 이름은 어디에서 왔을까? 많은 나라에서 입법부 명칭은 근대 민주주의 형성의 역사를 그대로 담고 있기에 나는 오래전부터 이 이름의 기원이 궁금했다.
이름은 역사를 담는다
현존하는 각국 의회의 명칭 중 가장 오래된 것은 930년에 첫 소집된 아이슬란드 의회 알싱(Alþingi, 영어식 표현 Althing)으로, 지금도 아이슬란드 의회는 이 명칭을 사용한다. 물론 처음부터 현재와 같은 보통선거로 선출된 대표들의 회의체는 아니었지만 전국 단위 대표들의 회의체로 출발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국회의 영어식 표기 ‘National Assembly’는, 지금은 우리나라 이외의 여러 국가들에서도 사용되지만, 근대적 대표 체제의 명칭으로서의 기원은 프랑스 대혁명기 등장한 ‘국민의회’(Assemblée nationale)였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은 알려진 대로 루이 16세가 왕실 재정의 고갈을 메우기 위해 소집했던 삼부회에 기원을 둔다. 당시 제1, 제2, 제3신분으로 구성된 삼부회의 운영에 불만을 품은 ‘제3신분’(Tiers État)의 대표자들은 베르사유궁 테니스코트에 별도로 모여 스스로를 ‘국민의회’라 칭하고 프랑스 인민 전체를 대표한다고 선언했다. 군주와 귀족, 성직자 계급이 엄연히 존재했던 신분제 사회에서 제3신분이 국가 전체를 대표한다는 선언은 그 자체로 혁명 선언에 다름 아니었다. 지금도 프랑스 하원 명칭은 ‘국민의회’로, 현존 프랑스 정치체제가 프랑스 대혁명에 그 기원을 두고 있음을 분명히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양원제가 아닌 단원제를 택한 의회들이 이 명칭을 사용하곤 했는데 우리나라도 그런 관례를 따른 것 같다.
프랑스의 상원 명칭 Sénat(영어 Senate)은 미국 등 양원제를 채택하고 있는 다른 많은 나라의 상원 명칭으로도 사용되곤 하는데, 그 역사는 훨씬 더 오래된다. 고대 로마의 원로원( 라틴어 Senatus)에 기원을 갖는 이 회의체는, 라틴어로 ‘나이든 사람’을 의미하는 ‘senex’의 모임이라는 뜻을 갖는다. 이때 ‘나이든 사람’은 그저 나이를 많이 먹은 사람이 아니라, 번역어 ‘원로’의 뜻처럼 덕망이 있고 권위가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로마는 왕정에서 출발해 공화정, 제정으로 정치체제가 변화했는데, Senate은 왕정 시대 때부터 왕의 자문 기구 역할을 했다. 유력 가문의 수장이나 공로를 세운 사람들 중 일부들이 모여 왕에게 국정에 대한 자문 역할을 했고, 공화정 시대에 민회가 설치되어 여러 결정들의 권한이 넘겨졌을 때에도 Senate은 유력 가문의 대표자들, 고위 공직을 경험한 전직자들로 구성되었으며 시대에 따라 그 권한은 다양하게 유지되었다. 오늘날 각국 상원은 그 구성 방식도 다르고 기능도 다양하지만, 1인 1표의 보통선거권 체제 원리에 따라 구성되는 하원과는 다르다는 의미에서 Senate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고 있다.
영국이나 캐나다 하원의 명칭은 ‘House of Commons’로, 직역하면 ‘평민들의 원’ 정도가 되겠다. 잉글랜드에서 기원한 이 명칭은 봉건제 신분 사회에서 납세자이면서도 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받았던 평민들이 ‘영주(귀족)들의 원’(House of Lords)과 구분하여 자신들의 이해를 대변하기 위해 만들었던 회의체에 그 기원을 둔다. 지금도 입헌군주제를 택하고 있는 이들 나라에서 하원의 명칭은 ‘평민들의 원’이다.
반면 미국 하원의 이름은 ‘평민들의 원’이 아닌 ‘대표자들의 원’(House of Representatives)이다. 식민지에서 출발한 아메리카 대륙의 각 주들은 태생부터 왕이나 귀족계급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귀족원’과 대비되는 ‘평민원’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대신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주별 대표자들이 모여 싸웠고, 그들은 나중에 ‘주들의 연합’(United States)을 결성했으며 주 연합의 중대 결정을 위해 대표자들의 원을 구성했다.
미국 상·하원을 통칭하는 명칭인 Congress 역시 국가 형성기의 역사를 담은 그릇이다. 미 연방헌법 제1조는 상·하원을 모두 포괄하는 연방의회의 명칭으로 Congress를 사용했는데, 그 연원은 1774년부터 미국 독립 때까지 식민지 각 주들의 대표자들이 모였던 회의체의 명칭인 ‘대륙회의’(Continental Congress)에서 온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입법부의 명칭인 ‘국회’는 어떤 역사를 담고 있을까?
1919년 대한민국임시헌장 제10조
1919년 ‘3・1운동’ 이후, 4월 10일 상하이에서 29인의 전국 대표자들이 모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입법부인 임시의정원을 개원했다. 의정원은 4월 11일 약식 헌법에 해당하는 ‘대한민국임시헌장’을 채택했으며 임시정부의 각료들을 구성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알렸다.
※출처: [임시정부의정원문서 1](1974), 오른쪽으로부터 3-5쪽.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로 선포’한다고 밝힌 임시 헌장은 총 10개 조로 구성되어 있고, 제10조에는 “임시정부는 국토 회복 후 만 1개년 내에 국회를 소집함”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1948년 개원한 대한민국 ‘국회’는 ‘대한민국’이라는 국호와 함께 1919년 임시정부에서 그 기원을 가지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일제강점 전 ‘대한’제국에서 ‘대한’을 취하고 제국이 아닌 ‘민국’임을 조합한 것이다. 임시 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제’를 정치체제로 채택함을 밝히고 있어, 이를 뒷받침한다. 대한제국 시기 전제군주제와 입헌군주제를 둘러싼 갈등은 일제강점과 고종의 사망 이후인 이 시기 ‘민주 공화제’ 채택으로 합의되었고, 헌장 제2조는 ‘대한민국은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해 통치’함을 밝혀, 입헌주의 혹은 의회주의의 원리를 밝히고 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하며(제3조), ‘대한민국의 인민으로서 공민의 자격이 있는 자는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있’다고 밝혀(제5조), 보통선거권 체제에 의한 입법부의 구성 원리를 확인하고 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 헌장’에 의해, ‘국회’는 민주 공화제를 택한 대한민국이 국토 회복 후 소집하게 되어 있는, 보통선거권 체제하의 선거를 통해 구성할 대표체의 명칭이라는 것이 확인된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한 가지 의문은 남는다. 1919년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입법부 명칭은 ‘의정원’(議政院)이었고, 대한제국 시기 만들어진 자문 기구의 명칭은 ‘중추원’(中樞院)이었다. 미 군정기 군정의 한인 입법 자문 기구 이름은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南朝鮮大韓國民代表民主議院), ‘남조선과도입법의원’(南朝鮮過渡立法議院)으로 모두 ‘원’(院)을 사용했다. 그런데 왜 국토 회복 후 소집할 대표체의 명칭은 ‘국회’였을까?
국회(國會), 협회(議會), 민회(民會)
위 글은 대한제국 시기 독립협회의 활동에 대해 고종이 ‘독립관 이외의 지역에서 집회를 열지 말라’는 내용을 담은 조서의 일부이다. 이 조서에서 고종은 국회를 ‘국가가 공립으로 세우고 국가와 국민의 이해를 의결하는 곳’이라는 정의를 사용하고 있으며, ‘국민이 사립으로 세우고 함께 모여 토론하는 곳’이라는 협회의 정의와 대비하여 사용한다. 군주제였던 대한제국에서 군주 스스로 국가적 의결기관으로서 국회에 대한 정의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당시에 이미 국민의 대표체인 의회에 대한 인식이 널리 공유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민간 결사체인 협회와 국가적 의결기관인 국회의 차이를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다. 실제로 1896년 설립되어 1898년 강제 해산된 독립협회는 언론·집회의 자유, 국민 참정권 운동, 입헌군주제로의 전환과 의회 설립 운동을 추진했다.
위 글은 집회를 제한하는 고종의 조서에 대한 독립협회의 반박 상소문 중 일부다. 독립협회는 고종의 집회 제한에 대해 당시 개최되었던 ‘만민공동회’, ‘관민공동회’ 등의 대중 집회를 ‘민회’로 정의하고 민회의 공적 기능을 주장한다. 민회는 기관으로서 협회나 국회와 달리, 인민의 언론·집회의 자유를 실현하고 공론을 모으는 장으로 정의되었다.
1898년 여름, 독립협회는 대한제국의 관료들과 인민들이 함께 참여하는 ‘관민공동회’를 개최했고, 관민공동회는 국가주권의 자주화, 국가 이권의 수호, 국가 재정의 일원화, 국민 자유권의 보장, 인사행정의 공정화 등과 함께 군주의 자문기관인 중추원을 대의기관으로 변화시키는 방안을 담은 ‘헌의 6조’를 채택했다. 근대적 대의기관의 설립안은 군주의 재가를 받았고, 시행되지는 못했지만 중추원을 관선 25명, 민선 25명의 의석을 가진 기관으로 재구성하는 ‘중추원 관제’에 반영되었다. ‘민회’를 통해 모아진 ‘의회’ 설립 요구가 비록 좌절되긴 했지만 ‘국회’의 설립으로 이어질 뻔한 순간이었다.
국회(國會)는 근대적 대의체제 그 자체였다
대한제국 시기의 용어 사용 맥락을 고려하면서 1919년 임시정부 헌장을 다시 생각해 본다. 대한제국 시기 절대 군주정을 고수하려 했던 세력과 근대적 정치체제로서 입헌군주제를 도입하려 했던 세력 간의 갈등, 민회를 통해 공론을 모아 나갔던, 아래로부터의 정치과정을 통해 선출된 대표체로서 의회의 필요성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1919년 3월 전국적인 독립 선언 운동이 있었고, 민주 공화제를 채택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국토 회복 후 1년 내 소집하기로 예정된 ‘국회’는, 그 이전에 있었던 중추원, 의정원 등 일개 기관의 명칭이 아니라, 민주 공화제라는 전혀 다른 정치체제에서 ‘국가가 세우고 국가와 국민의 이해를 의결’하는 최고 대표체 자체를 의미했다. 민간 결사체인 협회와도 다르고, 공론장으로서의 민회와도 다르며, 대한민국이라는 민주 공화정 자체를 대표하는 ‘곳’으로, 특정 기관을 칭하는 고유명사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게 국회는 대한제국 시기 좌절된, 근대적 민주주의를 향한 노력을 담고, 일제강점기 유보된 민주 공화정에 대한 꿈을 담는 그릇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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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 김정인. 2015.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시대의 건널목, 19세기 한국사의 재발견』. 책과함께.
● 신용하. 2001. 『갑오개혁과 독립협회운동의 사회사』. 서울대학교 출판부.
서복경 l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5년간 국회도서관 입법 정보 연구관을 거쳐 현재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연구원으로 있다. 한국의 선거, 정당, 의회정치, 정치과정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한국 1세대 유권자의 형성』(2016), 『탄핵광장의 안과 밖』(2017, 공저), 『양손잡이 민주주의』(2017, 공저), 『표심의 역습』(2016, 공저), 『좋은 정부의 제도와 과정』(2016, 공저) 등이 있으며, 역서로 『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2013), 『민주주의, 약자들의 희망이 될 수 있을까』(2007)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