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민의 보좌관 일기] 13. 좌절, 그리고 새로운 도전

2025-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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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좌절, 그리고 새로운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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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은 줄 알았다. 나는 감정이 무딘 사람이니까.


하지만 세월호 참사가 있었던 2014년을 제대로 이겨내지 못했다. 국회에서 보좌관으로 일한 지 10년 4개월이 되던 그해 9월 의원실을 떠났다. 견딜 수가 없었다. 무엇을 견딜 수가 없었는지도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무엇 때문에 견뎌야 하는지도 모르겠는 심정이었다. 정치의 의미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다. 그건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다는 말이었다.


세월호 유가족의 단식농성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광경이었다. 단장의 고통을 겪고 있는 부모가 곡기를 끊었다. 바라는 것은 하나였다. 죽음의 진상을 밝혀 달라는 것이었다. 정치인들의 단식농성이 이어졌다.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이었던 문재인 대통령이 동조 단식을 했고, 내가 몸담았던 진보정당의 의원단도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단식농성을 했다. 이른바 ‘일베’라고 불렸던 극우 세력의 ‘얼굴’을 보게 된 것도 이때였다. 온라인에만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누군가의 가족이고, 친구인 ‘똑같은’ 사람이었다. 그들이 단식하는 유가족 앞에서 치킨과 피자를 먹었다. 똑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나는 사실 단식농성을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단식하는 당사자를 비롯해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단식농성은 약자들의 최후의 수단으로만, 정말이지 최소한으로만 사용되어야 한다. 그동안 수많은 단식농성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본 끝에 내린 결론이다. 민주노동당 강기갑 의원은 2005년 10월 국회 본청에서 쌀 시장 개방 저지를 위해 29일간 단식농성을 벌였다. 강의원은 21일째 호흡곤란으로 입원해 수액을 맞고도 다음 날 단식을 재개한다. 건강에 위험이 너무 큰 상황이라 그냥 두고 볼 수 없어 민주노동당과 농민단체 대표단이 함께 단식 중단을 간곡히 요청한다. 순순히 들을 리가 없다. 강 의원은 거부한다. 결국 민주노동당은 단식 중단을 '당론'으로 결정해 통보한다. 강의원은 내키지 않아 하면서도 그제서야 “당론을 거부할 수 있겠는가”라며 대표단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농민 여러분, 살아서 농촌을 지킵시다” 눈물의 기자회견으로 단식을 멈췄다.


내가 함께 일했던 현애자 의원은 2007년 6월 제주도청 앞에서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에 반대하며 27일간 단식농성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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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의원의 농성은 당시 김태환 제주지사가 제주도민의 여론조사 결과에서 찬성 의견이 높게 나왔다며 서귀포시 대천동 강정마을에 해군기지 건설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데 따른 것이었다. 해안 생태계를 파괴하는 대규모 군사기지 건설이 옳은지 그른지는 사실 판단하기 어려운 일이다. 주민의 반대에도 국가 정책적으로 결단해야 하는 일이 종종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 과정에는 매우 높은 수준의 정치적 기예가 필요하다. 여론조사에서 찬성이 높게 나왔다고 추진할 일이 아니다. 만약 대대손손 평생 살아온 집에 대한 철거 여부를 여론조사로 결정한다면 어느 누가 수용할 수 있을까? 당사자들에게 찬반을 묻는 것도 좋은 방법이 아니다. 한 가족을 일시에 두 동강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생활에 쪼들려 당장 돈이 필요한 사람은 보상금을 받는 데 찬성하고, 노부모와 함께 전통을 지키며 살아온 사람은 고택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길 수도 있다. 수용성이 낮은 정책을 집행하기 위해서는 더욱 원칙에 충실해야 한다. 절차를 제대로 밟고, 필요와 목적을 잘 설명하고, 반대 의견을 최선을 다해 들어야 한다. 고전적으로 들리지만, 더 나은 방법은 없다. 


강정마을 주민들은 마을이 최우선 대상지로 선정된 이후 2016년 2월 26일 해군기지가 완공되기까지 9년 동안 극심한 갈등을 빚었다. 제주 주민들은 외부인이 범접할 수 없는 모종의 ‘결계’가 있다. 정치적 선택도 제주 토박이들끼리 소리 없이 결정한다. 여당도 야당도 아닌 ‘괸당’이라고 불렀다. 그런 지역의 바닷가 마을에서, 모두가 일가친척이자 가족보다 가까운 이웃사촌인 곳에서 주민들이 찬성파와 반대파로 나뉘어 서로 다시 보지 않을 것처럼 다퉜다. 정부가 한 마을을 내전 상태로 만들었다. 잔인한 일이었다. 현 의원의 단식농성은 제주 문제를 전국적 사안으로 끌어올렸고, 이후 대책위 출범의 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정치적 방법이라고 보긴 어려웠다. 결국 사업 추진을 막지도 못했고, 주민 갈등을 해결하지도 못했다. ‘주민과 같은 자리’에 있는 것으로 정치적 역할을 대신하는 일은 이제 그만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때 제주도에서 먹고 자며 한 달 동안 함께 지냈다. 막내가 2006년생이다. 갓 돌이 지난 아이를 떼놓고 제주에 가 있었으니 돌아보면 참 모진 세월이었다. 의원이 단식농성을 하면 보좌진은 쉴 새가 없다. 잠자는 시간 빼고는 모두 일하는 시간이라고 보면 된다. 현 의원이 단식농성을 하는 이유, 즉 해군기지를 반대하는 이유를 널리 알리고 공감대를 넓히기 위한 사업을 기획하고 추진했다. 나중에 이 기록을 모아 <희망의 발견-평화를 향한 27일의 기록>이라는 제목의 소책자 형태 의정보고서를 펴냈다. 6월 7일부터 7월 3일까지 매일 작성한 단식농성 일지와 사진, 해군기지 관련 논평, 보도자료, 언론 보도 등을 모은 것이다. 여성의원 중 최장기간 농성을 했던 현 의원은 체중이 11㎏ 줄고 혈압이 최저 50까지 떨어지며 건강이 악화되자 주변 만료로 단식을 정리한다. 


단식농성을 해본 사람(또는 바로 곁에서 지켜본 사람)은 알겠지만, 단식은 시작보다 종료가 중요하다. 시작은 강한 의지만으로 가능하지만, 종료는 명분이 있어야 한다. 이 과정을 잘 준비하는 것도 보좌진의 몫이다. 또 중요한 것이 있다. 건강관리다. 단식 중은 물론, 단식 이후에도 ‘관리’가 중요하다. 단식이 끝났다고 바로 밥을 먹으면 큰 탈이 난다. 그래서 보통 단식기간의 3배로 복식기간을 잡는다. 미음으로 시작해 옅은 농도의 흰죽에서 점차 짙은 농도의 죽으로 옮겨가면서 천천히 속을 달래고 나서 ‘된 밥’을 먹는다. 그리고도 한동안 자극적인 음식은 먹으면 안 된다. 나는 학창시절 일주일 단식농성 직후 젊은 혈기에 요구르트와 떡볶이를 먹었다가 평생의 고질병인 위장질환을 얻었다. 현 의원도 단식 종료 후 외부와 단절된 곳에서 기력을 회복하는 시간을 가졌다. 복식이 끝나갈 무렵 함께 밥을 먹는데 반찬 밑에 깔린 상추를 조금 뜯어 먹더니 ‘맛’이 생생하게 느껴진다며 좋아했다. 나는 웃지 못했다. 목이 뜨거워져 괜히 맹물만 마셨다.


정치인 중 역대 최장기간 단식을 한 사람은 심상정 의원과 고 노회찬 의원이다. 2011년 7월, 진보신당 상임고문이었던 두 의원은 서울시청 인근 대한문 앞에서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를 촉구하며 30일간 단식농성을 벌였다. 이재명 정부의 초대 노동부 장관에 임명된 김영훈 당시 민주노총 위원장도 농성에 함께 참여했다. 덕수궁의 정문인 대한문은 서울시청 광장을 바라보고 있다. 이곳은 최악의 농성 장소다. 교통량이 워낙 많은 곳이라 매연과 소음이 심하다. 햇빛도 강하다. 길거리에 자리를 잡고 앉아있으면 모든 게 열 배 크고 강하게 느껴진다. 특히 저녁 시간에는 자동차 소리가 훨씬 더 크게 들려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다. 나는 이곳을 ‘사람을 갉아먹는 장소’라고 불렀다. 한진중공업 사태는, 2010년 한진중공업이 경영상의 이유를 들어 400여 명의 정리해고를 단행한데 따른 것이다. 노동조합은 격렬하게 저항했다.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안에 있는 35미터 높이의 85호 타워크레인에 올라가 309일간 고공농성을 벌였다. 응원과 연대를 표시하기 위해 시민들이 버스를 타고 자발적으로 모였다. ‘희망버스’라는 유명한 이름이 붙여졌다. 2011년 11월 '정리해고자 1년 내 재취업'에 노사가 합의한 뒤 김 지도위원은 고공농성을 해제했지만, 그 뒤로도 오랫동안 해고자들은 공장에 돌아가지 못했다. 


정치는 ‘유효한 정치세력’ 간에 벌어지는 일이다. 한국의 정치 구조에서 의석을 갖지 못한 정당은 사실상 발언권이 없다. 심상정, 노회찬 의원의 단식농성은 원외 정당이 정치에 개입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건강 악화로 병원에 실려가는 두 의원을 보면서 이들의 ‘최장기간’ 단식농성이 정치인의 마지막 단식농성이 되길 바랐다. 정치인이 단식농성을 해야 할 만큼 중대한 사회적 문제가 발생하지 않기를, 부디 정치적 방법으로 해결해 갈 수 있기를, 우리의 정치가 그만큼 튼튼해지길 바랐다. 2014년, 나의 바람은 바람처럼 사라지고 나는 다시 단식농성장 앞에 있게 되었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휴일도 없이, 밤낮도 없이 일했다. 어린 아이들은 엄마의 돌봄 없이 스스로 컸다. 해야 할 일은 끝이 없었다. 결승점이 없는 마라톤 같았다. 결말이 없는 블록버스터거나. 별다른 취미도, 특별한 재능도 없는 나는 일이 제일 재미있었다. 그게 정치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청소년 시절의 꿈은 과학자였다. 평생 한 가지 주제만 연구하는 과학자가 되고 싶었다. 보좌관은 인생에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꿈이었다. 정치는 내게 냉정했고, 모질었고, 제 멋대로였지만, 만인의 연인답게 매력적이었다. 정치를 통해서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에게 정치는 ‘사회에서 배제된 사람들이 성장하는 방식’이었다. 거기엔 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내가 가진 것보다 언제나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날강도 같은 정치를 사랑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온전히 나의 것이 되지 못하는 정치 앞에서 ‘저는 이만 물러섭니다’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정치는 나의 능력을 벗어나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