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민의 보좌관 일기] 12.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 앞에서

2025-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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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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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6일 아침, 기울어진 배가 뉴스 화면에 나왔다. 수학여행 가는 아이들이 타고 있다고 했다. 해경이 갔으니 구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전원구조 속보에 마음을 놓았다. 아이들이 빠져나오지 못하리라고는 손톱만큼도 생각하지 않았다. ‘아이구, 얘들아 놀랐겠다. 다치지 않게 조심해’정도의 심정이었다. 그런데, 눈앞에서 배가 가라앉았다. 뉴스를 보면서도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탑승자 476명 중 304명이 사망했다. 그중 학생이 250명이었다. 어떤 옷을 입을까, 어떤 가방을 가지고 갈까, 제주도는 어떨까. 얼마나 들떴을지, 얼마나 즐거웠을지, 배 안에서 밤새도록 얼마나 재잘댔을지. 그리고, 그 순간 얼마나 무서웠을지.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큰아이가 1997년생이다. 세월호를 타고 수학여행을 갔던 단원고 학생들과 같은 해에 태어났다. 아이를 안고 “사랑한다” 말했다. 갑자기 다가온 ‘죽음’이라는 거대한 공포 앞에서 할 수 있는 건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뿐이었다. 한동안 교복 입은 아이들을 쳐다볼 수도 없었다.

 

그날 온 사회가 받았던 슬픔과 충격을 생각하면, 이후의 논란은 상상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진상규명을 위한 법을 제정하는 게 그토록 어려운 일이 될 줄 정말 몰랐다. 참사 발생 7개월 만인 2014년 11월 19일, 유가족의 목숨 건 단식과 정치인들의 동조 단식 끝에 「4·16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이 마침내 제정되었다. 법이 제정되었으니 이제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가 설치되어 진상조사 작업을 시작할 수 있겠구나 했는데, 이 또한 쉽지 않았다. 특조위는 바로 구성되지 못했고, 참사 발생 16개월여가 지난 2015년 8월 4일에야 구성되었다. (특조위는 2017년 5월 3일까지 활동한다. 설립일과 해산일을 둘러싸고도 논쟁이 계속되었다.)

 

특조위가 해산되기 직전인 2017년 3월 21일에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선체조사위원회는 2017년 7월부터 2018년 8월까지 활동했다. 그 뒤로는 「사회적 참사의 진상 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에 따라 설치된 사회적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사참위)가 2018년 12월부터 2022년 9월까지 활동했다. 사참위는 4·16 세월호 참사뿐만 아니라 가습기 살균제 사건까지 포함하여 발생원인, 수습과정, 후속 조치 등의 사실관계와 책임소재의 진상을 밝히고 피해자를 지원하며, 재해·재난의 예방과 대응방안을 수립하는 것을 목적으로 설립되었고, 가습기 살균제 참사 종합보고서와 4·16 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를 포함해 총 7권의 보고서와 1권의 특조위 운영백서를 발간했다. 가장 최근인 2024년 6월 4일, 「4·16 세월호참사 피해구제 및 지원 등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단일 사건을 두고 4개의 특별법이 제정되었고, 3개의 법에 따라 한시적 조사기구가 운영되었다. 이전에는 없던 일이다. 그만큼 특별했고, 그만큼 갈등이 심했다. 의회가 만든 법에 따라 구성된 조사기구의 활동을 행정부가 방해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마주하기도 했다. 조사의 범위부터 조사위 구성, 활동 기간 연장을 둘러싼 논쟁까지 언제나 ‘7시간’이 있었다. 이는 박근혜 대통령이 사고 관련 지시를 내렸다고 주장한 10시 15분 무렵부터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를 방문한 5시 15분까지 행적이 불분명한 시간을 말한다. 참사의 진상규명을 위한 출발이기도 했다.

 

2016년, 제20대 국회에 구성된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특별위원회>를 우리 의원실이 맡았다. 국정조사는 나의 보좌관 경력 중 가장 힘든 일이었다. 단기간에 국정 전반을 살펴야 했기 때문이다. 의원실은 수사도 취재도 아닌, 오로지 자료를 통해 의혹을 밝혀야 한다. 제보나 정보가 쏟아졌지만, 충분한 근거가 없는 것은 함부로 말하지 않았다. 덕분에 조사 기간 내내 산더미 같은 서류에 파묻혀 살았다. 안종범 청와대 경제수석이 수첩에 쓴 메모도 우리가 살펴봐야 할 중요한 자료 중 하나였는데, 어찌나 알아보기 힘들었는지 ‘글씨를 또박또박 쓰자’는 다짐을 했다. 국정조사 질의문은 그 양도 어마어마해서 5차 청문회 한 회 분량만 A4 용지 166쪽에 달했다. 국정조사가 끝나고 질의문과 속기록을 모아 백서를 냈는데 5백 쪽이 넘었다.

 

수많은 국정농단 진상규명 과제 속에 ‘세월호 7시간’을 밝히기 위해서도 노력했다. 대통령은 국가위기 상황에서 최고 지도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 국민이 위임한 권력에는 ‘지휘하고 통솔하는 권한’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시간의 공백은 통치의 공백이기도 했다. 최순실이라는 인물이 드러나기 전까지, 그러니까 세월호 참사 발생 이후 국정조사가 이뤄지기까지 2년여 시간이 흐르는 동안 정부의 대응과 여당의 태도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왜 그리 완강히 ‘7시간’의 비밀을 지키려던 것인지 그때야 알게 되었다. 비밀은‘최순실의 존재’였다. 우리가 선출하지 않은 권력이 나라를 통치한 것이다. 위임받은 권력을 재위임할 수는 없다.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든 일이었다.

 

현대 민주주의는 선거를 통해 유지된다. 정해진 주기에 따라 시민은 권력을 위임하거나 회수함으로써 여당과 야당을 교체한다. 대통령을 선출하는 것은 특정 정당의 지도자에게 일정 시기 나라를 통치할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다. 대통령제는 권력이 집중되며 그만큼 남용될 위험이 있다. 대통령제를 만든 미국은 권력을 과도하다 싶을 만큼 분산하여 위험을 피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헌법을 만든 사람들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대통령제에서 대통령과 의회는 경쟁하며 견제한다. 대통령의 실정을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해 ‘충성스러운 반대자’ 역할을 하는 것은 정권교체를 바라는 야당이지만, 정권의 실정에 대한 책임은 어디까지나 대통령을 배출한 정당의 몫이다. ‘박근혜 정부’가 아니라 ‘새누리당 정부’라고 불렸다면 달랐을까. 대통령 탄핵은 여당이 정권에 대한 책임을 외면했을 때 발생한 최악의 결과였다.

 

2022년 10월 29일 밤, 또다시 참사가 발생했다. 서울 시내 한복판 이태원이었다. ‘할로윈’은 코로나19(COVID-19)로 인해 유지되던 집합금지 조치가 해제된 이후 처음 열린 큰 이벤트였다. 십 대, 이십 대들은 예쁘게 꾸미고 친구와 연인을 만나러 나갔다. 기대하고 기다리던 축제였다. 시험이 끝난 직후이기도 해서 다들 마음 편히 놀 수 있었다. 푸르른 청춘의 기운이 별처럼 반짝이던 밤이었다. 우리 집은 이태원역과 같은 지하철 6호선에 있고, 2호선 홍대입구역에서도 가깝다. 이날 아이들은 이태원과 홍대 중에 놀러 갈 곳을 선택했다. 우리 아이들의 친구들도, 친구의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선택이었고, 그 선택이 생사를 가를 줄은 아무도 몰랐다. 이날 밤 젊은이들은 누구든 사고 장소에 있을 수 있었다.

 

구급차 사이렌 소리가 끝없이 울렸다. 참혹한 밤이었다. 이날 159명이 사망했다. 전쟁도, 테러도 아니었다. 2022년 대한민국 서울시 한복판에서 일어난 사고였다. 냉정함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화를 참을 수 없었다. 이태원은 인도와 차도가 모두 좁고, 건물에 가려 주변 시야가 확보되기 어렵고, 지하철역과 골목이 곧장 이어져 있어 완충지대가 거의 없다. 인파가 몰리면 대피할 수 있는 공간 자체가 없는 곳이다. 이날은 사람이 많이 몰릴 것으로 충분히 예상되었고, 이른 시간부터 실제로 많은 사람이 몰렸다. 질서유지와 사고 예방을 위한 사전 조치가 있었어야 마땅했다.

 

왜 위험하다는 신고가 잇달았음에도 관계기관의 적절한 대응이 이뤄지지 않았을까? 왜 피해자가 속출하는 동안 구급 조치가 원활하지 못했을까? (구급대원들의 헌신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초기에 구급차 진·출입 자체가 어려웠다) 지방자치단체는 무엇을 했나? 당일 경찰 배치는 적절한 것이었나? 경찰과 행정 간 협조가 왜 원활하지 못했는지, 경찰과 행정 인력이 적절하게 운용되지 않았다면 그 원인이 무엇인지, 대통령실이 용산으로 이전한 영향은 없었는지 규명해야 할 사안이 많았다. 조사가 필요했다.

 

(※ 2025년 10월 23일 국무총리실이 총괄하는 합동감사 테스크포스(TF)는 대통령실 용산 이전으로 인해 이태원 일대에 경찰 경비인력이 배치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참사 당일 대통령실 인근에 경비인력이 배치가 집중되면서, 이태원 일대에는 경비인력이 전혀 배치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정치권의 논의는 순조롭게 흘러가지 못했다. 특별법이 제정되기까지 세월호보다 더 오래 걸렸다. 참사가 발생한 지 1년 6개월이 지난 2024년 5월 1일에 이르러서야 「10·29 이태원참사 피해자 권리보장과 진상규명 및 재발 방지를 위한 특별법」이 제정됐다. 그나마도 윤석열 대통령이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하여 무산시킨 지 넉 달 만에 영수회담을 계기로 가까스로 통과된 것이다. 다행이라고 하기엔 너무 늦었고, 마음을 놓기엔 너무 일렀다. 법 제정 후 4개월이 더 지난 9월 13일, 참사 발생원인, 수습 과정, 후속 조치 등에 관한 사실을 밝힐 책임을 부여받은 ‘10·29 이태원참사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를 위한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가 출범하면서 한고비 넘어서나 했는데, 더 높은 고개가 기다리고 있었다. 특조위가 본격적인 조사를 개시한 것은 해를 넘긴 2025년 6월 17일이었다. 법 통과 13개월, 참사 발생 962일, 특조위 출범 9개월 만이었다. 조사는 정권이 바뀌고야 시작될 수 있었다.

 

대체 왜 비극적 참사가 ‘갈등 의제’로 다루어지게 된 것일까?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 이후 정치권은 각자의 정치적 목표를 잠시 내려놓고 사회적 변화를 위한 합의를 만들어 가는 데 힘을 모았어야 했다. 희생자와 유가족을 조롱하는 극우 세력의 등장에 공동의 대처를 했어야 했다. 정당들은 입법부의 일원이자 민주주의의 수호자로서 책임과 역할을 다했어야 했다. 하지만, 갈등을 해결해야 할 정치가 오히려 갈등을 격화시켰다.

 

민주주의 사회라면 비극은‘갈등 의제’가 아니라 ‘합의 의제’가 되어야 한다. 보수는 보수의 입장에서, 진보는 진보의 입장에서 문제를 진단하고, 해결책을 제시하여 공통의 합의점을 찾아가면 된다. 서로의 입장을 바꾸자는 것이 아니다. 똑같은 입장을 가질 필요도 없다. 다만, 비극 앞에서는 잠시 멈춰서서 무엇이 사회를 위해 나은 길인지, 우리가 무엇을 위해 정치를 하는 것인지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인간이 아무리 선악의 양면을 가지고 있다 해도, 정치가 아무리 불완전한 인간의 본성에 기반한 제도라 하더라도 최소한 지켜야 할 규범이 있다. 그 어떤 격렬한 싸움을 하고 있었더라도 비극 앞에서는 멈춰야 한다. 비극을 둘러싸고 정치권이 갈등하는 순간, 사회는 분열하고, 위로받아야 할 유가족은 투사가 되어 거리로 나오게 된다. 애도의 시간은 사라지고 상실감과 분노가 그 자리를 채운다. 정치권이 참사를 공격을 수단으로 삼으면서 동료 시민은 서로에게 악마가 되었고 우리 사회는 적대적 정치가 불러온 지옥도에 갇혀 버렸다. 비극 이후의 비극이다.

 

우리 앞에는 과거에 경험하지 못한 난제가 놓여있다. 과거에는 시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국가폭력이 문제였다. 국가폭력으로부터 기본권을 지키기 위해 분투했다. 그게 민주화였다. 모두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긴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는 강한 공권력이 아니라 공권력의 부재가 문제였다. 시민의 안전을 지키라고 권력을 위임했는데, 정작 위임받은 공권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정부가 무엇을 했을 때가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때 ‘대규모 참사’가 발생했다. 이때의 책임은 명령을 한 사람이 아니라 명령을 하지 않은 사람에게 있다.

 

링컨은 “국민들의 자유를 억압할 정도로 너무 강하지 않으면서도 중대한 위기 상황에서는 그 자유를 지킬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강력한 정부란 과연 어떤 정부인가” 물었다. <정치를 옹호함> p39

 

너무 강하지 않으면서, 충분히 강력한 정부는 어떤 정부인가? 그리고, 그런 정부는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 ‘잊지 않겠다’라는 다짐을 지키기 위해, 우리가 되뇌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4번째 스승의 날>

“선생님 생신 축하드려요” 아이들의 까르르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선생님도 환하게 웃으셨겠지.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4월 16일은 김초원 선생님 생일이었다. 세월호 참사에서 숨진 정교사 일곱 분은 순직이 인정되었지만, 2학년 3반 김초원 선생님, 2학년 7반 이지혜 선생님은 기간제 교사라는 이유로 순직 심사조차 받지 못했다. 순직 인정 이야기가 나오면 유가족을 향해 ‘돈 때문 아니냐’라는 악의적인 공격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순직 인정을 받는다고 더 많은 보상을 받는 것이 아니다. 순직을 인정받으면 공무원연금법에 따라 유족연금과 보상금이 지급된다. 순직이 아니라면, 기간제 교사는 산재보험이 적용되고 의사자 지정을 받을 수 있다. 박근혜 정부는 순직 인정과 산재보험의 차이, 의사자로 지정되면 받게 되는 연금 액수의 차이와 혜택까지 이야기하면서 유가족의 순직 신청을 포기시키려고 했다.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두 선생님의 순직을 인정하는 것은 4만 명이 넘는 기간제 교사들을 공무원으로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규교사와 똑같이 담임교사를 하는 기간제 교사가 절반이 넘는다. 순직 인정은 두 분의 명예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지만, 우리 사회 불평등과 차별의 문제이기도 하다. 윤소하 의원은 2016년 8월 23일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기간제 교사의 순직 인정 촉구 결의안」을 발의했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두 분 선생님의 순직 인정이 확정되었다. 오늘은 세월호 참사 후 4번째 스승의 날이다. 단원고 2학년 3반 김초원 선생님, 2학년 7반 이지혜 선생님, 두 분께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2017년 5월 15일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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