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민의 보좌관 일기] 3. 식구, 함께 밥을 먹은 사람들

2025-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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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민의 보좌관 일기>


3 식구, 함께 밥을 먹은 사람들


텃밭은 나의 보물창고였다. 갑자기 손님이 와도 툭툭 뜯어온 아욱잎에 마른 새우 넣어 된장국을 끓이고, 풋고추에 상추만 올려도 한 상 푸짐했다. 밑동까지 베어내도 사흘이면 또 자라있는 부추는 황금알을 낳는 오리 같았다. 배고팠던 시절, 쑥쑥 자라는 여름 부추를 보고 ‘쌀나무’가 부추 같았으면 좋겠다고 했다던가. 텃밭을 잘 가꾸는 만큼 반찬값이 줄어드니 정성을 들여야만 한다. 하지만 돌보기가 생각보다 어려워 농사일보다 더 애를 먹었다. 논과 밭은 농기계를 사용하고, 가끔 일꾼도 쓰고, 풀과 벌레를 잡기 위해 농약도 치지만 마당 안 텃밭은 오로지 내 손으로 심고 길러야 한다. 게다가 텃밭 일은 농사일, 집안일에 지장을 주지 않는 시간에 틈틈이 해야 한다. 해가 뜨면 본 일터인 하우스로 가야 하니 텃밭은 막 동이 트는 어스름이나 논밭에 나가기 어려운 한낮 땡볕에 해야 하는데, 갓난아기를 키우는 입장에서 그 시간을 빼는 게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그게 참 이상하게도, 매일매일 풀을 매고 북을 주는데 왜 그렇게 잡초가 많이 나는지, 온 동네 풀씨가 다 우리 텃밭으로 날아오는 것만 같았다. 장마 끝엔 사자와 코끼리가 뛰놀 지경이 되었다. 빗발이 잦아들었다 싶으면 비옷을 입고 부지런히 풀을 맸는데도 정글이 되는 걸 막을 수 없었다. 대체 다른 집 텃밭은 어떻게 그렇게 정갈한 것인지 농사짓는 8년 내내 가장 큰 의문이었다. 변명을 좀 더 하자면, 말이 마당 안 텃밭이지 고추밭만 해도 대여섯 고랑은 되었으니 반 마지기 밭 크기였다. 종일 기어 다녀야(사실적 표현) 겨우 감당할 수 있는 규모다. 하긴, 장독대 옆 손바닥만 한 텃밭도 사나흘만 방심하면 풀이 수북했으니 규모 때문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동네 안에서 한 번 이사를 했는데, 예전 집은 우리가 이사를 나오고는 거짓말처럼 풀이 사라졌고, 새로 이사한 집은 동네 한가운데 있어서 풀이 많을 래야 많을 수가 없는 집인데 딱 반 년 만에 밀림이 되었다. 식물도 대화하는 게 아닌가 의심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왜 온 동네에서 오로지 우리 집만 잡풀이 무성하겠나. 풀들 사이에 만만한 초보 농사꾼이 있다는 소문이 났던 게 틀림없다. 마당 안에는 원래 농약을 치지 않지만, 도저히 풀을 감당할 수 없으니 제초제를 뿌리기도 했다. 제초제가 풀만 골라 죽이는 영리한 녀석들이 아니라 엄한 꽃들까지 허옇게 죽어가곤 했지만, 열대우림 정글에서 벗어나려면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냥 두면 안 되냐고? 나도 풀이 자라거나 말거나 내버려 두고 싶었다. 풀 속에서 찾아내는 호박은 더 반갑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 집은 ‘우리’만의 집이 아니다. 풀이 많다는 건 그저 ‘게으름’의 표상이었고, 우리 동네 사람들과 남의 동네에서 다니러 온 사람들까지 백 마디 말을 보탰다. 외지인이 원주민에게 인정을 받으려면 기본적으로 부지런하고 성실해야 한다. 늘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의심의 시선을 받아야 하고, 그건 곧 신뢰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사실 우리가 두 번째 살던 집은 온 가족이 야반도주하여 비어있던 곳이다. 초등학생, 중학생 아이 둘을 키우는 살가운 성격의 부부는 동네 사람들과 잘 어울렸고, 덕분에 대출 보증을 여기저기서 받을 수 있었다. 당시에는 연대 보증 제도가 있어서 채무자가 대출을 갚지 않으면 보증인에게 압류가 들어왔다. 보증은 서로 얽혀 있어 한 가족이 도망가면 한 마을이 초토화 되었다. 그러니 외지에서 온 사람을 쉽게 믿지 않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농민운동을 하려면 믿을만한 사람이 되어야 했고, 텃밭은 모두의 눈에 띄는 징표였다. 농사 8년에 상일꾼을 자처하던 나였지만 텃밭 농사만큼은 동네 할매들을 따라잡지 못했다. 해마다 ‘올해는 기필코 풀과의 싸움에서 이기리라’ 다짐하고 부지런을 떨어도 매번 장렬히 패배했다. 그래서 지금도 정갈한 텃밭을 보면 감탄한다. ‘저 밭의 주인도 어지간히 부지런한 사람이로군. 동트기 전 일어나자마자 텃밭으로 먼저 걸음 하는, 평생 농사를 지어온 베테랑 할매겠지. 초보 농사꾼은 절대 아닐 거야.’ 고마웠지만, 원망스러웠고, 사는 내내 도전 과제였으며 결국 이루지 못한 꿈이 되었다. 나의 텃밭을 무한히 사랑했다.


하루에 여섯 끼를 차려냈다. 아침밥, 오전 새참, 점심밥, 오후 새참, 저녁밥, 손님이 왔을 때는 밤참까지. 치킨은커녕 짜장면도 배달해주지 않는 곳이고, 주변에 가게가 없고, 오일장에 자주 나갈 수도 없으니 텃밭이 없었다면 여섯 끼를 감당하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다. 


텃밭에서 나온 것들을 주재료로 삼아 냉장 보관 식품과 장기저장 식료품을 더해 요리를 했다. 말하자면, 부추와 호박과 김치와 멸치와 밀가루 같은 것들이다. 다섯 가지 재료가 있으면 120가지 요리를 할 수 있다(5!). 새참은 비빔국수, 잔치국수, 수제비, 아무 재료나 있는대로 넣은 비빔밥, 김치전, 감자전, 부추전, 파전 등등 온갖 종류의 전이 단골 메뉴였다. 가끔은 호박죽을 끓였고, 농약을 친 날엔 오이냉국을 먹었다. 당연하지만, 나는 요리사가 아니다. 시간이 걸리는 요리는 하지도 못하고, 할 수도 없다. 일하다 들어와 후루룩 뚝딱 만들어 후루룩 뚝딱 먹고 후루룩 뚝딱 치우고 다시 일하러 가야 하기 때문에 거창한 요리는 꿈도 못 꾼다. 나야말로 15분 요리의 원조다.


사실 요리는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다. 설거지도 아니다. 제일 힘든 건 물 끓이는 일이다. 여름이면 커다란 주전자와 들통으로 매일 물을 끓였다. 저녁이면 물을 팔팔 끓여 보리차를 넣고 식혔다. 아침이면 전전날 얼려놓은 물을 꺼내고 전날 끓여 식혀놓은 물을 페트병에 담아 그 자리에 넣었다. 세상 모든 노동이 그렇지만 이 또한 말처럼 쉽지 않았다. 에어컨이 없는 천장 낮은 집에서 물을 끓이면 부엌은 한증막 저리 가라 상태가 된다. 무거운 주전자를 두 손으로 들어 페트병에 담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한 번 끓이면 1.5리터 페트병 10병 정도가 나온다. 하루면 다 마시는 양이다. 냉장고가 작아서 그 이상은 못 넣는데 일손을 많이 쓰는 날이면 얼음물이 모자라 대차게 욕을 먹게 된다. 무더운 날일수록 물을 많이 찾으니 여름이면 종일 물을 끓이고 식히는 일을 반복해야 한다. 농사일은 ‘농사일’만 하는 게 아니다. 여섯 번의 상차림과 설거지도 농사일에 포함된다. 오늘도 누군가 물을 끓이고 식히고 얼리는 노동을 하고, 다른 누군가는 그 얼음물에 의지 해 노동을 한다. 그 노동이 세상을 지탱한다.


우리 집엔 연인원 상당수의 사람들이 다녀갔다. 산이나 강, 하다못해 냇물도 없는,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도 아닌(처음 살던 집 부엌 쪽창에서는 정면으로 무덤이 보였다) 기찻길 옆 평범한 농촌 마을의 특징이라곤 하나도 없는 오래된 농가 주택이고, 와봤자 놀러 가지도 못하고 힘든 농사일을 도와야 하는데 왜 그렇게들 찾아왔는지 모르겠다. 어떻게 사는지 걱정돼서 오는 지인도 있고, 막 사귀기 시작한 연인과 찾아오는 사람도 있고(헤어짐), 연인과 헤어지고 나서 나라 잃은 표정으로 오는 사람도 있고(다른 사람 만남), 결혼을 앞두고 이 결혼 해도 되는지 모르겠다며 오는 경우도 있고(결혼함), 결혼하고 나서 부부 싸움을 하고 못 살겠다며 오는 경우도 있었다(잘 삼). 특이하게는 시어머니와 싸우고 온 친구도 있었다. 내가 농촌에 살지 않았다면 이들은 어디로 누구를 찾아갔을까? 보통 이삼일 머물지만, 길게는 몇 달씩 있기도 했다. 순수하게 농활을 온 이들도 있고, 어떤 이들은 수행하듯 다녀갔다. 산티아고 순례길이 따로 없었다. 


이들의 밥상은 모두 내가 차려야 했다. 열댓 명 밥 차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큰 잔칫상도 여러 번 차렸다. 집들이도 했고, 아이의 백일과 돌도 챙겼다. 모두가 ‘우리 가족’을 알았다. 지역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 ‘인사’를 해야 했고, 잔치는 그럴싸한 핑계가 되었다. 커다란 들통에 갈비찜을 찌고, 산더미 같은 잡채를 만들고, 손바닥만 한 삼색 밀전병을 끝없이 부쳤다. 야심차게 준비한 무쌈 구절판은 인기가 없었다. 알고 보니 어떻게 먹어야 할지 모르셨다고 한다. 다음엔 드시기 쉽게 같은 재료로 양장피를 만들었는데 역시 인기가 없었다. 겨자소스를 낯설어하셨다. 잔칫날엔 우리 마을 어른들뿐 아니라 옆 동네는 물론, 거리가 꽤 먼 다른 면에서도 오셨다. 길가에 트럭이 줄을 섰다. 언제 준비하셨는지 꽹과리와 장구가 울렸다. 풍물패가 집 구석구석을 돌았다. 지신밟기라 했다. 복을 빌어주시니 감사하긴 한데 저는 기독교인입니다만, 말을 삼켰다. 아이를 업고 음식을 내고 인사를 했다.

우리 집에서 밥 먹은 사람들을 다 기억하지 못한다. 내가 밥을 많이 했다는 것만 기억한다. 게으른 기억력을 뚫고 뇌리에 남아있는 사람들이 있으니, 임신한 이들이다. 입덧을 하면 친정집에 갈 일이지, 왜 우리 집으로 오냐는 말이다. 내 밥을 먹으면 입덧이 가라앉을 것 같다는데, 이거야 원 내칠 수도 없고, 우리 집이 여고 앞 떡볶이집도 아니고 말이다. 말했듯 대단한 음식이 아니다. 내 요리 솜씨가 훌륭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멸치 넣고 국물 자작하게 끓인 김치찜, 막 따온 호박을 총총 썰어 넣은 부침개, 뚝뚝 썰어 고추장에 무친 오이, 심심하게 담근 깻잎장아찌, 민들레나 냉이 무침 같은 것들이다. 물이 좋고, 재료가 신선하니 그대로 내놔도 먹을 만했던 것 같다. 아니면, 보일러도 안 깔린 우리 집 차가운 마루가 좋았던가. 밥을 먹고 간 이들에게 바라는 건 없었다. 귀찮았던 적도 없다. 찾아와줘서 고마웠고, 함께 울고 웃어줘서 행복했다. 나를 ‘기댈 구석’으로 생각해 준 건 밥을 많이 먹었을 때 만큼 뱃속 든든한 일이다. 밥을 함께 먹어 ‘식구’라고 했다. 이들은 모두 식구였다. 가장 가난했고, 가장 부자였던 시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