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민의 보좌관 일기] 2. 그대 이름은 여성농민

2025-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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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민의 보좌관 일기>

2. 그대 이름은 여성농민


언젠가 ‘언니들’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나에게 ‘언니들’은 고유명사다. 얼치기 농민이자 철부지 새댁이었던 시절, 나는 인생의 많은 것을 여성농민 언니들에게 배웠다. 여성농민들은 ‘모든 일에 능한 사람’이자 누구보다 지혜롭고 품이 넓은 사람들이었다. 돌아보면 언니들은 지금의 나보다 훨씬 어렸는데 삶에 대한 통찰력은 지금의 내가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깊었다.


언니들은 일가친척과 온 동네 사람들의 관혼상제를 두루 꿰고 있었고, 남의 집 경조사도 내 집 경조사와 다름없이 챙기니 이웃집 잔칫상에 수육을 올릴지 편육을 올릴지 참견하는 것도 자연스러웠다. 예고 없이 찾아가도 밥때가 되면 김이 펄펄 나는 새 밥을 지어 상을 차려줬고, 똑같이 예고 없이 우리 집에 아이들을 맡기고 일하러 갔다. 아니, 나도 일하러 가야 하는데... 혈연으로 맺어지지 않았으나 모두가 이모, 삼촌, 조카였다. 현관문을 잠그지 않았고, 새로 지은 집도 담을 쌓지 않았다. 언니들은 열린 대문 안과 밖 어디에나 있었다. 텃밭에서 논두렁까지 논과 밭 구석구석이 눈을 감아도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서울에서 열리는 농민집회를 준비할 때면 여성농민의 진가가 드러난다. 추수철이 지나고 겨울 초입에 열리는 농민집회는 보통 한두 달 전부터 준비한다. 사람들을 모으는 것이 제일 중요하고 큰일이지만, 그밖에도 준비할 것이 많았다. 농민들은 길목마다 현수막을 직접 걸었고, 전국 각지에서 한날 움직이니 관광버스 예약도 서둘러야 했다. 무엇보다 고령의 어르신들이 ‘모처럼의 서울 나들이’를 가시는 터라 식사에 신경을 많이 썼다. 추운 날 멥쌀밥은 체할 수도 있기에 찹쌀로 지은 밥을 준비했고, 찰밥에 잘 어울리는 반찬을 마련했다. 찰밥은 김과 김치만 있어도 맛있지만, 뜨끈한 국물과 고기도 빼놓지 않았다. 떡을 맞추고, 과일과 마실 거리까지 오며 가며 차 안에서 먹을 것도 준비했다. 언니들 손끝에서 수천 명의 먹을거리가 나왔다. 나는 매번 감탄하고 감동했다. 


그러면서도 먹을거리 준비는 왜 여성들의 몫인가 찜찜한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언니들은 조금의 의문도 없었다. ‘내 손’을 거친 음식을 맛있게 먹는 이들을 보며 보람차 했다. 농민집회를 위해 필요한 역할을 잘 해냈다는 자긍심이 더 컸다. 그런 언니들에게 ‘여성에게 전가된 가사노동은 문제’라는 잣대를 들이댈 수 없었다. 여성농민은 집안 살림부터 자녀교육, 마을 일까지 최고의 기획자이자 집행자였다. 진두지휘할 때는 천하를 호령하는 장군 같았고, 팔 걷어붙이고 일할 때는 발걸음 잰 연락병 같았다. 김장도 오백 포기, 천 포기를 하는 이들은 어린이날 행사에 김밥 삼백 줄 싸는 건 일도 아니라며 웃었다. 언니들의 영향으로 나의 여성주의는 조금 다르게 형성되었다. 나는 음식을 만들거나 나르는 일을 하기엔 서열이 낮았기에 대부분의 자리에서 설거지를 담당했다. 특히 당시에는 집에서 장례를 치르는 경우가 많았는데, 일회용품은 젓가락 정도만 사용했기에 설거지가 항상 산더미 같이 쌓였다. 살아생전 한 번 뵙지 못한 분의 상가에서도 고인의 명복을 빌며 설거지를 했다. 왜 남성들은 차려진 밥상을 받고, 여성은 설거지를 해야 하는지 의문을 품지 않았다. 왜 나 같은 막내는 수육 써는 일이나 부침개 부치는 일, 밥 푸는 일을 할 수 없는지 묻지 않았다. 왁자지껄한 상가집에서 나한테 맡겨진 일이 있었고, 나는 그 일을 하는데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평생 해야 할 설거지는 이때 다한 것 같다. 평등한 사회를 만들고 싶은 소망은 설거지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실현했다.


나는 농사를 짓기 전 전국적 규모의 농민단체에서 일했다. 당시 전국농민회총연맹은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과 사무실을 함께 썼다. 일하는 내내 별도의 여성농민 조직이 필요한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같은 단체 안에서 평등하게 일하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운 좋게도 이십 대가 되기까지 가정과 학교와 사회에서 직접적 차별을 겪어본 적 없었기에 든 생각이었다. 농촌에 살면서 나의 작은 세상이 깨졌다. 누구도 발언을 가로막지 않았지만, 어른들이 계시거나 남성이 다수인 회의에서 여성이 발언하는 것은 어려운 일었다. 용감한 언니들 몇몇은 의견을 냈지만, 다른 언니들은 그러지 못했다. 회의 참석도 아주 특별한 경우였다. 일단 같은 일정에 부부 모두 나오기가 어려웠다. 아이들이 어린 집은 한 사람이 밖에 있으면 다른 한 사람은 집에 있어야 했다. 집에 있는 ‘다른 한 사람’은 늘 여성이었다. 살아보고서야 별도의 여성농민 조직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밥을 누가 하느냐는 문제가 아니었다. 여성들끼리 모였을 때 언니들은 보석처럼 빛났다. 우리의 필요에 따라,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조직을 만들기로 했다. 그렇게 여성농민회를 만들었다.


90년대 후반 가부장제가 보편적 문화로 여겨졌던 평범한 농촌에서 여성농민들의 독립적 조직이 출범한 것이다. 신나는 일은 모두 그때부터였다. ‘밥때’가 되면 돌아가야 했던 언니들의 외출이 당당해졌다. 바깥 나들이를 탐탁지 않아 하던 남성들도 ‘여성농민회 간다’ 하면 싫은 내색을 못 했다. 운전을 못 하는 언니들은 이동에 남편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역시 두말없이 기사 노릇을 했다. 나 역시 이때 운전면허를 땄다. 농촌은 기본적으로 버스가 드문드문 다니고, 그나마도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기엔 연결편이 없는 경우가 많아 스스로 운전을 하지 않으면 외출 자체가 어렵다. 운전면허는 ‘자유’ 시민의 권리 획득과 비슷했다. 집(마을)에 갇혀 있다 비로소 자유로운 이동권을 획득한 것이다. 어쨌든, 남성들의 변화는 다소 극적이기도 했다. 스스로 밥을 차려 먹었고, 모임을 하는 동안 아이를 봐주기도 했다. 다시 말하지만, 가부장제가 지배적이던 농촌에서 벌어진 변화였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정확히는 나도 잘 모르겠다. 한두 사람이 아니라 ‘여럿’이기에 가능했던 것 아닐까 싶다. ‘새로운 문화’는 봄바람처럼 찾아왔다. 그들에게도 이전에는 생각해보지 못했던, ‘나의 배우자’이자 ‘자녀의 엄마’이자 ‘부모님의 며느리’라고만 여겼던 사람의 사회활동을 인정해 가는 시간이었으리라.


여성농민회는 소식지를 만들고, 서로의 생일을 챙기고, 아이들 소식도 나누고, 컴퓨터 교육도 하고, 노래 교실도 열고, 성교육 강의도 하고, 어린이날 행사도 하고, 또, 오만가지 일을 했다. 모든 일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운동’ 조직으로써의 역할이었다. 쓰고 보니 거창하게 들리는데, 사실 거창했다. 우리는 친목계도 아니었고, 부녀회도 아니었다. ‘만나니 좋았더라’에서 머무는 단체가 아니라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함께 노력하는 결사체였다. 물론 그렇다고 대단한 신념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상과 이념에 투철했던 것도 아니다. 그저 살아오면서 느낀 것들, 살면서 알게 된 것들, 이건 정말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회운동’의 동력이었다. 농업을 살리고, 농촌을 지키고, 농민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게 아이를 잘 키우고, 가족을 잘 건사하고, 마을 공동체를 화합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에, 다시 돌아봐도 내가 만난 최고로 멋진 여성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