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글을 마치며 - 내가 꿈꿨던 정치, 꿈을 실현하는 정치

2026-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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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글을 마치며

내가 꿈꿨던 정치, 꿈을 실현하는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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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정치를 시작했을 때 선배들은 ‘눈밭을 걷는 심정’으로 일하라고 했다. 새하얀 눈밭에서는 앞서 걸어간 사람의 발자국을 보고 뒷사람들이 걷는다. 내가 걷는 걸음이 ‘길’이 된다는 건 여간 두려운 일이 아니었다. 한 걸음도 허투루 할 수 없다는 사명감으로 일했다. 그런데 걷다 보니 여긴 발자국 하나 없는 눈밭이 아니라 가시덤불 자갈밭이었다. 가시덤불을 헤치고 자갈에 치여 넘어지면서 피투성이가 된 손과 발로 한 걸음씩 꾸역꾸역 나아가야 했다. 내 발자국은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어느 순간 돌아보니 내가 있는 곳은 평화로운 숲이 아니라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였다. 우리가 있는 곳은 최전선이었고, 누가 쏘는지 알 수 없는 총알이 사방에서 쏟아졌다. 오로지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했다.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알 수 없는 전쟁이었다. 명령을 내린 사람과 책임지는 사람이 달랐고, 적군과 아군의 구분도 모호했다. 오늘의 동료가 내일은 총부리를 겨눴다. 아니, 애당초 정치에는 상대가 있을 뿐 ‘적군’은 없었다. 존재하지 않는 적과 목숨 걸고 싸우는 형국이었다. 이런 게 정치라면, 그건 너무 서글픈 일 아니냐고 묻고 싶었다. 그런데 물어볼 사람이 곁에 없었다. 나는 언제부터 혼자 걷고 있었던 것일까.


정치의 고비에도, 삶의 고비에도 좋은 선·후배와 동료들이 있었다. 우리가 만들고 싶은 세상에 대한 꿈을 나누었고, 정치를 통해 실현할 방안을 고민했다. 그 많던 동료들은 하나둘 사라졌다. 진보정당이 부침을 거듭하면서 거대한 희망은 조금씩 희미해져 갔고, 좋은 정치를 꿈꾸었던 많은 이들이 떠나갔다. 당적을 옮겨 다른 정당에서 새롭게 도전하는 이들이 늘었고, 정치를 영영 떠나는 이들은 더 많았다. 정치가 아닌 삶의 다른 경로를 찾아가는 이들을 보는 건 쓸쓸했지만 괜찮았다. 떠나는 이의 등 뒤에서 행복을 빌었다. 가장 아픈 건 당선되지 않을 출마를 거듭하다 좌절해버린 사람들을 마주하는 일이었다. ‘기회가 있을 것’이라는 응원은 내 귀에도 공허하게 들렸다. 


그리고, 세상을 떠난 이들도 있었다.


그날 아침, 의원실의 열린 문으로 다른 의원실 보좌관의 비명이 들렸다. 영문도 모른 채 불안감이 엄습하여 바로 뉴스를 켰다. 순간 얼어붙었다. 이건 분명 오보라고 생각했다. 덜덜 떨면서 말했다. 


“노회찬 대표님이, 돌아가셨대요.”


그 뒤로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그때를 생각하면, 느린 화면으로 떠오르기도 하고 빨리 감기로 돌아가기도 한다. 지금도 그게 내 기억 같지 않다. 가장 아픈 사람들이, 가장 슬픈 사람들과 장례를 준비했다. 우리는 고통 속에서도 실무를 챙겨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매 순간 꺼이꺼이 터져 나오는 통곡을 꿀꺽 삼키고 조문객을 맞이하며 밥과 국을 날랐다. 노회찬 의원의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이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이상했다. 나는 노 대표님과 개인적으로 친밀한 사이가 아니었다. 의원회관 복도나 당사에서 마주쳐 인사를 드리면 번번이 ‘누구?’라는 눈빛을 보내셨다. 아니, 10년 넘게 보셨으면 이제 기억하실 만도.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런데 그 고통이 너무 깊었고 슬픔은 지나치게 오래갔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정치를 시작한 이래 나는 늘 그를 보았다. 진보정당의 시작에 그가 있었고, 내가 어렵고 힘들다 투덜거릴 때도, 드물게 기뻤을 때도, 우리가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 염려할 때도 그는 정치를 하고 있었다. 언제나 시선이 닿는 곳, 발걸음이 닿는 곳에 있었다. 그가 없는 진보정치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나의 고통과 슬픔은 진보정치인들이 함께 걸었던 길과 함께 추구했던 꿈, 진보정당에서 함께 일궈왔던 모든 것에 대한 것이었다. 우리는 우리 시대의 정치를 함께 했다. 그리고 그 시절이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늘 이십 대의 나를 만나면 “도망가라”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젊은 나는 나이 든 내 말을 안 듣겠지만 그래도 말해주고 싶었다. 조국과 민족과 민중과 혁명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말하자면 밤하늘의 별이나 오월의 꽃향기나 익어가는 앵두 같은 것들, 먼 나라의 오래된 유적과 그에 서려 있는 역사라던가, 부드럽고 다정한 사람들이 만드는 온화한 자장이라던가, 그때의 내가 알았더라면 좋았을 넓은 세상에 대해서 말이다. 이십 대에 ‘도망가지 못하고’ 사회운동을 했던 나는 농민운동 8년을 거쳐 삼사십대를 온전히 진보정당에서 보냈다. 진보정당에서 정치를 배웠고, 진보정당을 통해 더 나은 사회에 대한 꿈을 꾸었고, 진보정당 안에서 성장했다. 더없이 귀한 시간이었다. 노동자와 농민이 주축이 되는 정당을 만들고 싶었다. 사회적 약자의 삶을 우선하는 정치세력이 되고 싶었다. 우리가 더 많은 표를 획득하면 ‘스웨덴’ 같은 복지국가를 만들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10명의 국회의원으로 시작한 진보정당이 의회에서 존재의 필요성을 증명한다면, 강고한 계급적 지지를 바탕으로 20석 이상을 확보한 교섭단체가 될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수권정당의 가능성을 보여주리라 자신했다. 현실은 고통이라도 미래는 찬란했다.


두 차례의 분당에도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마지막 기회’가 있다고 생각했다. 데이비드 런시먼은 단 하나의 사건이 낙관론과 비관론 모두의 근원이 될 수 있으며 현재의 위기도 양면을 다 갖고 있다고 했다. 그는 민주국가는 실패하기 때문에 성공하고 성공하기 때문에 실패하는데, 이를 피할 방법은 없으며 누적적인 성공과 최종적인 실패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고 했다.1) 그의 말대로 비관적인 상황에서도 낙관의 근거를 찾았다. 실패 후에도 성공할 수 있다고 여겼고, ‘누적적’ 성공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았다. 데이비드 런시먼은 훌륭한 학자였지만, 한국의 진보정당에 불어닥친 위기의 파고는 거셌다. 정의당은 22대 국회에 이르러 원내진출에 실패했다. 이것이 진보정당의 ‘최종적 실패’가 아니길 바라며 나는 당을 나왔다. 지금은 새로운 정당에서 정치를 이어가고 있다. 진보정당에서 오래 활동한 신장식 전 정의당 사무총장이 국회의원이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정치에서 정당의 성패는 의석 유무가 아니라 현실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느냐 못 하느냐 여부에 달렸다. 나는 신장식 의원과 함께 실질적 문제를 해결하는 유효한 정치세력이 되기로 했다. 나의 선택은 ‘실용’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실행’에 더 가깝다. 우리가 있는 곳은 거대양당 사이가 아니다. 거대양당이 ‘비워놓은’ 정치의 공간이다. 한국 정치는 우측의 보수 영역으로 과다하리만큼 치우쳐 있다. 좁아져 버린 좌측의 영역을 넓혀 정치의 중심을 이동시키는 것은 한국 정치의 안정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누군가 해야 할 일이고, 우리는 그 누군가가 되기로 마음 먹었다.


정당은 본디 공동의 목표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집단이다. 다양한 정치세력이 미래 목표에 대한 안정적 의견을 조직하는 실력으로 겨루길, 그런 정치 활동을 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지길 바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국의 정당들은 위기에 놓여있다. 우리 사회의 불평등은 갈수록 심화하고 있으며 미래 전망은 어둡다. 정당이 자초한 정치의 위기 속에 내란 세력이 독버섯처럼 자라났다.


비상계엄 사태는 12월 3일에 발생했지만, 위험은 이전부터 감지되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은 국회를 존중하지 않았다. 그는 계엄 석 달 전인 2024년 9월에 열린 제22대 국회 개원식에 불참했는데, 대통령이 개원식에 불참한 것은 민주화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같은 해 예산안 시정연설에도 불참했다. 11년 만에 국무총리가 대독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조차 국정조사가 진행되기 직전, 자신에 대한 비판이 최고조였던 시점에서도 빠지지 않았던 자리다. 돌아보면, 윤 전 대통령이 취임 첫해인 2022년에 했던 예산안 시정연설은 18분 28초로 역대 최단 시간이었다. 국회가 의결한 법안에 대한 거부권 행사는 잘 알려진 바와 같다. 무려 25회에 걸쳐 재의요구를 했다. 건국 초기 불안정한 상황에서 45회 거부권을 행사한 이승만 대통령을 제외하고, 역대 최다였다. 그것도 단연 최고였다. 전 대통령들은 박정희 5회, 노태우 7회, 노무현 4회, 고건 권한대행 2회, 이명박 1회, 박근혜 2회에 그쳤고, 전두환, 김영삼, 김대중, 문재인 대통령 시절에는 한 번도 없었다. 재의요구권은 헌법상 대통령의 권한으로 명시되어 있지만. 그동안 매우 제한적으로 행사된 권한이었다. 야당이 단독으로 처리한 법안이 아니라 여야가 합의로 통과한 법안에도 거부권을 행사했다. 그는 여느 대통령과 달리 대통령에게 주어진 권한을 “최대한” 사용했다. 의회와는 ‘형식적’ 관계만 유지했을 뿐 공동통치 세력으로 여기지 않았다.


여당과는 어떠했나?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2022년 5월 이후 계엄 발생 시점까지 여당의 대표는 네 번 교체되었다. 비상대책위원장과 권한대행까지 포함하면 당의 대표 역할을 한 사람은 모두 11명이었다. 대통령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당대표도 내쳐졌다. 국민의힘이라는 정당이 정부를 운영한 것이 아니라 거꾸로 대통령이 정당을 통제했다. 무엇보다 ‘대화와 타협’이라는 정치의 원리를 외면했다. 야당을 만나지 않은 것은 물론, 여당 안에서도 ‘비윤계’는 배척했다. 대통령은 스스로 제왕이 되었다.


윤석열 전 대통령, 권력을 사적으로 유용한 배우자, 내란을 일으키거나 동조한 세력은 법적 처벌을 받을 것이다. 사법체계 안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와 별개로, 우리에게 남겨진 또 하나의 중차대한 과제는 ‘정치의 복원’이다. 암흑의 시대가 온 것은 악마의 등장 때문이 아니다. 악마는 암흑에서 태어났다. 정당 정치가 흔들리면서 친위쿠데타도 가능해진 것이다.


오늘날 모두가 느끼는 정당의 위기는 어느 한순간에 온 것이 아니었다. 정당의 토대가 허물어지면서 정당들은 단기적 성과에 집착하게 됐고, 눈앞의 승리를 위해 여론에 유동하면서 정치 활동의 목적은 희미해졌다. 조직 기반을 만들기 위한 노력은 뒷전으로 밀렸고, 정당은 관직 약탈자들의 손쉬운 먹잇감이 되었다. 경험은 낡은 것으로 취급되었고, 새로운 도전은 배척되었다. 어떤 이들은 지킬 것도 없는 텅 빈 방의 문고리를 붙잡고 놓지 않았고, 대들보가 주저앉고 있었지만 굳게 닫힌 방문은 열리지 않았다. 


위기의 원인을 짚는 것은 실패에 머무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불확실한 미래에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정치가 제 역할을 하기 위해 어디서부터 시작할 것인가 묻는다면 어떤 정당을 만들고 싶은가 되묻겠다. 당원의 참여를 통한 지지 기반 확대, 당내 육성 구조를 통한 유능한 선출직 대표의 배출, 정부를 책임 있게 이끌 대안 제시 등의 요소가 조화롭게 발전해야 좋은 정당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 좋은 정치의 시작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좋은 정당을 만드는 일이 되어야 한다. 


나는 아마 계속 정치의 길에 있을 것이다. 남은 정치는 젊은 날에 꾸었던 꿈을 실현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새로운 꿈은 새로운 세대의 몫이다. 모두의 건투를 빈다.


1) 데이비드 런시먼, <자만에 덫에 빠진 민주주의>, 후마니타스, p372-373




그동안 [박선민의 보좌관 일기]를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더 좋은 글과 고민으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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