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민의 보좌관 일기] 17.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하는 일’ 사이에서

2026-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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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하는 일’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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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보건복지위원회 의원실에서 제일 오래 일했고(12년), 기획재정위원회, 행정안전위원회, 환경노동위원회(22대에 기후에너지환경노동위원회로 명칭 변경; 누가 기후와 에너지와 환경에 대한 설명 좀…)를 거쳐 현재 정무위원회 의원실에서 일하고 있다. 겸임 상임위로는 국회운영위원회, 여성위원회를 했고,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도 했다. (국회에는 3개의 겸임 상임위가 있다. 국회운영위, 여성위 외에 정보위원회가 있는데, 교섭단체가 아니면 못 들어간다. 한 번도 못 들어가 본 정보위원회를 해보는 게 소박한 꿈이다.)


보건복지위원회는 생활과 밀접한 의제가 많았다. 입법을 하거나 제도를 변경하거나 예산을 증액 또는 감액했을 때 영향을 받는 사람이 바로 보였다. 이해 관계자가 명확했고, 갈등 구도는 사안에 따라 달라졌다. 예컨대, 의사와 한의사와 간호사와 간호조무사와 물리치료사와 응급구조사의 이해관계는 서로 일치할 때도 있고, 교차하며 충돌할 때도 있다. 한의사의 의료기기 사용 확대는 의사가 반대했고, 간호사가 주도한 간호법 제정을 두고는 의사와 간호조무사가 반대했다. 간호조무사가 추진한 학력 규정 정비에 대해서는 간호사가 반대했고, 물리치료사가 추진한 물리치료사법에 대해서는 의사가 반대했다.


응급구조사의 업무 범위를 확대하려고 했을 때는 환자단체·소방청이 응급구조사와 입장을 같이 했고, 의사, 간호사, 임상병리사가 반대했다. 응급의학회의 반대는 조금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긴급한 응급 상황에서 무엇보다 ‘생명’을 살리는 일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데 동의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응급의료센터는 찬성 입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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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구조사는 응급환자에 대해 상담·구조·이송 업무를 담당하며, 현장에 있거나 이송 중이거나 의료기관 안에 있을 때 ‘업무 범위’ 내에서 ‘응급처치를 제공하는 응급 의료 종사자’로 분류된다. 당시 응급구조사의 업무 범위는 딱 14가지로 제한되어 있었다. 정맥로 확보는 할 수 있는데 정맥혈 채혈은 불가하고, 심정지 환자에게 에피네프린(아드레날린)과 같은 응급 약물도 쓸 수 없었다. 심전도 검사도 불가능했다. 분초를 다투는 상황에서 정작 생명을 살릴 수 있는 필수적 조치를 할 수 없었다. 죽어가는 환자를 두고 볼 수 없어 응급조치를 취해 환자를 살리고도 나중에 무면허 의료행위를 했다며 고소·고발을 당하는 일도 종종 발생했다. 


그래서 윤소하 의원은 응급구조사의 업무범위 확대를 위한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을 발의한다. 마음 같았으면 ‘생명을 살리는 모든 응급조치’를 가능하게 하고 싶었지만, 우리 법안은 ‘응급구조사 업무에 대한 교육·평가·질 관리 위원회 구성’과 ‘5년마다 업무 범위 조정’에 머물렀다. 법에서 업무 범위를 직접 명시하는 대신 의료계 합의를 통해 조정해 가자는 것이었고, 교육과 질 관리를 철저히 하여 기술 수준을 담보하도록 했다. 처음부터 ‘타협안’을 던졌는데도 반대는 극심했다. 그래서 택한 방법은, “모두 한 자리” 모아 토론을 하는 것이다. 찬반 단체를 다 불렀다. 토론회의 시작은 우리나라 응급의료체계 구축에 크게 이바지한 故 윤한덕 국립중앙의료원 중앙응급의료센터장을 애도하는 묵념이었다. 이날 공청회에 토론자로 참석하기로 했던 윤 센터장은 토론회 직전 유명을 달리했다.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도 이분에 대한 애도에는 한마음이었다. 


“자, 이제 각자의 의견을 말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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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 청년의사 (2019.02.13)


반대 의견을 배제하지 않고 타협점을 찾기 위해 노력한 끝에 2019년 10월 31일,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통과되었다. 환자를 안전하게 이송하는 범위 내에서 업무 범위 재조정이 필요하다는 공감을 이끌어 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2025년 1월, 드디어 응급구조사의 업무 범위가 확대되었다. 1급 응급구조사는 ▲심정지 시 에피네프린 투여 ▲아나필락시스 쇼크 시 자동주입펜을 이용한 에피네프린 투여 ▲정맥로 확보 시 정맥혈 채혈 ▲심전도 측정 및 전송 ▲응급 분만 시 탯줄 결찰 및 절단(구급지도의사 실시간 지도 하에) 등을 수행할 수 있게 됐다. 1999년 14종으로 정해진 이래 처음으로 (겨우) 5가지 업무가 추가된 것이다. 대신, 응급구조사는 연간 4시간 받던 보수교육을 8시간 이상 이수해야 한다. 우리는 이런 정도의 타협을 이뤄내기 위해 임기 4년 내내 고군분투한다. 응급구조사에 대한 정책으로 보이지만, 근본적으로 한 사람의 생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말로 반대자를 설득할 수 없다. 그들도 ‘한 사람의 생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혹시라도 발생할 사고의 가능성을 들어 반대하기 때문이다. 주장의 정당성만으로는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하는 일’ 사이의 틈을 좁힐 수 없다. 정치는 언제나 그 사이에 있었다. 


국회의원 임기 4년은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다. 국정감사 4번이면 임기가 끝난다. 재선을 하고, 다선 의원이 되면 정치적 역할이 늘어난다. 정책에 사용하는 시간의 절대량이 임기와 정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또, 사회가 격변하거나 위기를 겪고 있을 때는 새로운 제도 도입이 활발하지만, 사회가 안정되고 제도가 안착한 후에는 주로 개선 과제를 다루게 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대체로 그 범위 안에 있다. 기존 제도의 한계가 명확하다 하더라도 ‘개혁’ 수준으로 다루려면 상당한 동력이 필요하다. 게다가 변화의 폭이 클수록 오래 논의해야 더 나은 결론에 이를 수 있다. 새로운 제안을 하거나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전력투구해도 임기 내에 결론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다음 국회에서 전혀 다른 의원이 성과를 챙기는 경우도 다반사다. 좋은 정책은 시간이 필요하고, 그 시간이 정치인의 시간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시간의 화살은 미래로만 흐른다.


상임위는 소관 기관에 따라 분위기가 미묘하게 다르다. 19대 국회에서 기획재정위원회 첫 전체회의에 들어갔을 때의 놀라움이 지금도 또렷하다. 국회의원, 배석한 보좌진, 공무원 등 상임위 회의장 안에 있는 모든 사람 중에 여성은 나와 야당 간사였던 김현미 의원님 딱 두 명이었다. (나중에 확인하니 기획재정부 과장 중에 여성이 한 명 있었다고 한다. 회의장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대한민국 재정을 다루는 기획재정위원회는 법제사법위원회와 더불어 국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상임위로 인식되었는데 그 자리에 여성은 없었다. 


기획재정부는 1948년 정부 수립 당시 재무부와 기획처를 모태로 한다. 2013년부터는 부총리 부처로 승격했다. 기획재정부는 재무부 1대 김도연 장관을 시작으로 2025년 이재명 정부의 구윤철 장관에 이르기까지 역사상 단 한 번도 여성이 장관인 적이 없었다. 여성 국무총리는 있다. 노무현 정부의 한명숙 총리다. 김대중 정부에서 신설된 여성부의 초대장관이기도 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장상씨를 후보자로 지명하면서 헌정 사상 최초로 여성 국무총리 탄생을 예고했지만, 중도에 낙마하면서 한 차례 좌절된 바 있다. 총리는 가능하지만, 부총리는 불가능한 것인가? 여성이 ‘더’ 잘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여성이 ‘더’ 못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성별의 벽이 있다면 ‘존재함’으로 벽을 없앨 수 있다. 도전의식이 생겼다.


나는 ‘성인지 예산제’에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 성인지예산제도는 예산이 여성과 남성에게 미칠 영향을 미리 분석하여 예산 편성에 반영·집행하는 제도다. 예산이 성차별을 개선하는 방향을 집행되었는지 평가해 다음연도 예산 편성에 반영한다. 17대 국회에서 종합부동산세 안을 합의하는 과정에서 심상정 의원이 제안해 도입을 이끌어냈다. 참고로, 생리 기간 중 수영장 요금을 할인해주는 제도를 도입한 것도 심상정 의원이다. 생활 수영인으로서 매달 강습비를 결제할 때마다 감사드린다. 


2006년 「국가재정법」에 성인지예산서, 성인지결산서 제출조항을 마련함에 따라 2010년도부터 성인지 예산서를 작성했다. 성인지예산을 제도화한 것은 우리나라가 처음이다. 2011년부터는 성인지 기금운용계획서도 작성하고 있다. 2018년에는 대상 사업을 직접목적 사업과 간접목적 사업으로 구분했다. 직접목적 사업은 성평등을 일차적 목적으로 하며, 여성만을 대상으로 하거나 여성에 대한 적극적 조치를 포함하고 있는 사업이다. 간접목적 사업은 사업의 고유목적이 있으며 간접적으로 성평등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사업이다. 2019년에는 ‘성평등추진 직접사업’을 별도로 구분한다. 관계부처 논의를 통해 선정하는데, 2020년 첫 대상사업은, 가정폭력, 성폭력, 성매매, 디지털 성폭력, 데이트폭력, 스토킹 등 여성폭력에 관한 사업이었다. 2025회계연도 성인지예산서·기금운용계획서는 35개 기관, 264개 사업을 대상으로 하며 총예산·기금 규모는 25조7462억 원(전체 예산 677.4조원 대비 3.8%)에 이른다.


우리나라의 성인지 예산제는 제도상으로는 완벽에 가깝다. 이렇게 훌륭한 제도를 도입한 지 20여 년이 흘렀으면 성평등한 나라가 되었어야 마땅하다. 과거보다 평등해졌지만, 그다지 평등해지지 않았다면, 그건 제도의 탓이 아니다. 제도는 스스로 사회를 바꾸지 못한다. 사실 국회와 사회적 갈등 사이에 골이 가장 깊은 의제가 성평등이다. (‘여성’ 또는 ‘젠더’ 의제라고 할 수도 있다. 엄격한 구분을 하자는 게 아니니 ‘성평등’ 의제라고 부르겠다) 정치인들이 가장 기피하는 의제가 차별금지법과 성평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평등 의제는 ‘합의 의제’가 되어야 한다. ‘성평등’이 이데올로기로 인식되는 순간 타협은 불가능해진다. 나의 이념과 가치를 상대에게 강요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모든 정치인이 여성주의자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대다수 정치인이 성평등을 중요한 문제로 다룰 수는 있다.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정책의제로써 다뤄야 가능한 일이다.

 

나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성평등이 사회의 지배이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여성주의가 새로운 사회로의 변화를 주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가치 있는 도전이다. 다만, 나는 우리가 지금껏 만든 제도를 잘 운영하면서 작은 변화를 만들어 가는 데 더 많은 관심이 있다. 내가 할 수 있은 역할을 여기까지라고 생각한다. 큰 변화를 이루는 것은 다음 세대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