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다시, 보건복지위원회로

어느 날 오랫동안 연락하지 않았던 선배에게 전화가 왔다. 20대 국회 정의당 비례대표 윤소하 당선인이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다른 상임위를 예상하고 보좌진을 꾸렸는데, 갑자기 보건복지위원회를 맡게 되었고 사람들에게 보건복지위원회 경험이 있는 나를 추천받았다고 한다. 함께 일하자는 제안이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었다. 일 년 반의 즐겁고 고통스러웠던 자유를 끝내야 할 때가 되었다.
마음을 먹었지만, 바로 수락하지는 않았다. 이미 꾸려진 보좌진 중에 국회 경력자가 한 명도 없었다. 의원실은 적은 숫자의 사람들이 최고의 기량을 발휘해야 한다. 그래서 경력자가 중시된다. 모두가 경력자일 필요는 없지만, 모두가 초보자인 건 문제가 될 수 있다. 나는 배수의 진을 쳤다. 제대로 일하고 싶다면 한 명의 자리를 더 만들어 달라고 했다. 대신 내가 아는 가장 일 잘하는 사람을 데려오겠다고 약속했다. 그가 홍기돈이다. 민주노동당 서울시의원 보좌관 출신에 서울시 노원구 기초의원 출마자(낙선)이기도 하고, 강기갑, 정진후 의원실을 거쳐 나중에 민주당 유은혜, 서동용, 최기상 의원실 보좌관으로 일하는 등 경력이 화려하다. 2012년 권영길 의원이 경남 도지사에 출마했을 때 선거를 도우러 함께 갔고, 정치발전소 보좌관 강좌의 인기 강사였으며 국회 보좌진 공부 모임 <의회정치의 미래 연구모임> 대표였다. 내가 뭔가를 도모할 때 마음 편하게 부탁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동료이기도 하다. 그해 ‘최순실 국정조사 특위’는 그가 없었다면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앞으로도 내가 이 세상에서 단 한 명과 같이 일할 수 있다면, 그건 두 말없이 홍기돈이다. (두 명과 같이 일할 수 있다면… 이건 고민 좀 해야겠다)
2016년 5월, 윤소하 의원의 결단으로(복으로) 나의 좋은 동료 홍기돈과 함께 국회로 돌아왔다. 국회를 떠난 지 1년 7개월 만이었다. 살면서 이렇게 오래 쉬어본 적이 없었다. 일하고 싶어 몸이 근질거렸다. 4년 임기 동안 해야 할 일의 목록이 머릿속에 자동으로 떠올랐다. ‘노동이 있는 복지국가’, ‘일하는 사람이 행복한 복지국가’ 우리의 새로운 비전이었다. 보건복지위원회에서 노동정책, 노동자의 삶을 말하기로 했다.
윤소하 의원은 임기 첫날, “지역과 중앙, 삶의 현장과 정치를 일치시키는 모습으로 살겠다”는 다짐을 SNS에 올렸다. 윤 의원은 지역과 노동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사람들의 삶에 천착하는 정치인이었다. 정치적 지향이 비슷한 의원을 만나는 건 보좌진에게 가장 큰 행운이다. 그밖에 다른 것은 맞춰 나갈 수 있다. 사실 윤소하 의원의 첫인상은 차갑고 날카로웠다. 잘못 봤다. 신이 윤의원을 만들 때 차갑고 날카로운 면은 실수로 빼먹었나 싶을 정도로 정반대의 성품을 가진 분이었다. 감성이 넘치는 분이 이성으로만 일하는 보좌관에게 바라는 점은 딱 하나 “밥 좀 같이 먹자”였다. 의원님과 밥을 먹으면 식사 시간이 길어져 나는 늘 내켜 하지 않았다. 이건 임기 끝까지 맞춰드리지 못했다.
윤소하 의원이 대표 발의한 첫 번째 법안은 어린이병원비 국가보장제를 위한 「국민건강보험법」 개정안이었다. 적어도 어린이의 병원비만큼은 국가가 책임지자는 것이다. 재정은 건강보험료 흑자분으로 충당하자고 했다. 2014년 기준으로 0∼15세 아동이 지출한 병원비(입원진료비, 외래진료비, 약값 총액)는 6조4천억 원이었다. 이 중 60.7%는 건강보험에서 부담하고, 나머지 39.3%는 환자가 냈다. 이를 본인 부담금이라고 부른다. 어린이 환자가 입원했을 때 내야 하는 본인부담금은 5,152억 원이었다. 5,152억 원. 큰 액수인 것 같지만(큰 액수 맞다), 건강보험이 쌓아놓고 있는 누적흑자 20조 원의 3%에 해당하는 금액에 불과하다. 쓰지 않고 쌓아놓은 돈에서 딱 3%만 사용하면 어린이부터 무상의료를 실현할 수 있다. 가계 지출을 줄이는 것은 검증된 저출산 대책이기도 하다. 복지국가의 비전을 현재 시점에서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정책이었다.
어린이병원비 국가보장제를 실현하기 위해 정의당과 66개 시민사회단체는 함께 전국적인 운동을 전개했다. 윤 의원은 정의당 국민건강복지부 본부장을 맡았다. 보건복지위원회 위원이었기에 상임위원 자격으로 정책을 추진해도 되지만, 일부러 정당 차원에서 조직을 꾸려 일을 했다. ‘어차피 같은 사람’이 아니다. 국회의원은 국민의 일반적 대리자면서 정당 활동가이기도 하다. 정당의 이름으로 시민사회단체를 만나고, 정당의 이름으로 정책을 발표하고, 정당의 이름으로 홍보물을 거는 것은, ‘우리 정당을 지지하면 이 정책을 실현하겠다’ 약속하는 행위이다. 앞선 글에서 17대 국회와 비교하여 20대 국회는 정당 주도성이 감소했다고 했지만, 어떻게든 정당을 중심으로 일하려고 노력했다. 어린이병원비 국가보장제를 정당 차원의 사업으로 진행한 것은 진보정당을 살리기 위한 고군분투였다.
마침내 건강보험보장성 강화 대책에 어린이병원비 상한제가 포함되었다. 15세 이하 어린이의 경우 기존 10∼20%에 이르렀던 본인부담율이 2017년 10월부터 5%로 확 낮아졌다. 20대 국회에서 제일 잘한 일이었다. 커다란 성과였지만, 우리는 멈추지 않았다. 추가로 ‘어린이병원비 100만 원 상한제’ 도입을 제안했다. 본인이 부담하는 의료비가 대폭 낮아지긴 했지만 비율이 아닌 금액으로 제한해야 제도의 실효성이 높아진다. 또, 건강보험 급여에 해당하지 않는 비급여 항목이 여전히 존재했다. 급여과 비급여를 모두 포함해서 정액 상한제를 도입해야 실질적 효과 있다. 입원비뿐만 아니라 외래진료비와 약제비도 포함했다. 이와 함께 연령도 15세에서 18세 이하로 높였다. 그렇게 전부 다 적용해도 소요비용은 약 4,020억 원 정도로 추산 되었다. 약 4,000억 원이면 18세 미만 모든 아동이 1년에 총 100만 원의 의료비만 부담하면 된다. 양육자의 고통을 줄일 수 있다. 복지국가나 무상의료 같은 말이 멀게 느껴진다면, 아무리 큰 병을 앓아도 일 년에 100만 원 이상 병원비를 내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생각해보자. 우리가 만들어 가려던 세상의 모습이다. 이렇게 차근차근 정책의 길만 걸었으면 좋으련만, 우리는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만다.
“이에 재판관 전원의 일치된 의견으로 주문을 선고합니다.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2016헌나1. 대통령 박근혜 탄핵사건에 대한 선고)
2016년 5월 임기를 시작한 이래 2017년 3월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 되기까지 일련의 시간은 두 번 겪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정부가 추진했던 일 중에 ‘왜 이렇게 처리했지?’ 이상하다 싶은 일을 파헤쳐보면 민간인의 이름이 등장했다. 여기도? 여기도? 민간인이 국정에 이토록 깊이 개입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대통령은 왜 그에게 합법적인 직책을 주지 않았을까? 그 정도의 역할을 했다면 선출직 정치인이 될 수도 있었고, 핵심 참모진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왜 민간인 신분을 유지했을까? 왜 그림자 속에서 일했을까?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경제적 이득을 위해서는 공식적 직함이 없는 게 나았던 것일까? 대체 이들은 정치인을, 공직을 무엇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결과적으로 시민들은 대통령에게 위임한 권력을 회수한다. 국회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이 과정을 평화롭게 관리하는 것이었다. ‘국정농단’의 실체를 밝히는 것보다, 대통령을 탄핵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주권은 절대적이다. 시민들은 우리가 가진 절대적 권리를 통치자에게 위임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통치자에게 복종하기로 했다. 주권을 위임받은 통치자는 우리들의 자유와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위임받은 권력을 사용해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 주권을 위임한 목적이다. 만약 주권이 목적을 상실하거나 통치자가 목적에 위배되는 행위를 한다면 위임한 주권을 해지해야 한다. 통치는 정당성이 있을 때만 인정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당하게 위임한 주권’을 ‘정당하게 회수’하는 일은 고난도의 기예가 필요하다. 대통령 탄핵은 대통령이 마음에 안 든다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대통령이 주권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른 주권체인 입법부와 사법부의 결정이 있어야 한다. 평화로운 회수에 실패한다면 사회는 대혼란에 빠지게 된다. ‘정당한 통치 권력’이 사라지고 다른 ‘통치 권력’이 아직 등장하지 않은, 즉, 복종해야 할 권력이 사라진 ‘무정부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위기 상황에서 입법부의 역할은 더욱 중차대하다. 입법부는 행정부를 감시해야 할 일반적 책임과 권한이 있고, 대통령의 탄핵을 결정할 수 있는 특별한 책임과 권한이 있는 주권체다. 국회는 국정감사를 통해 국정 전반에 대한 의혹을 제기했으며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이라는 특정사안에 관하여 국정조사를 실시했다. 국정감사는 매해 상임위 별로 정기적으로 이뤄지며 국정조사는 재적의원 4분의 1 이상의 요구로 특별하게 진행한다. 국정조사는 통상 여야 간 합의에 따라 이뤄진다. 당시 국회는 10월 국정감사에 이어, 11월 17일 국정조사를 시작하고, 국회에서 통과한 법에 따라 11월 30일부터 특검 수사를 시작했다. 12월 3일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정의당, 무소속 의원이 함께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발의했다. 탄핵안은 12월 9일 본회의에서 재적의원 300명 중 299명이 표결에 참여한 가운데 찬성 234표, 반대 56표, 무효 7표, 기권 2표로 가결된다.
그다음은 사법부의 몫이었다. 헌법재판소는 다음 해 3월 10일 탄핵안을 인용한다. 6개월여의 권력 공백, 특히 대통령 탄핵안 가결 이후 3개월의 통치자 부재 상황에서 사회경제적으로 큰 혼란이 없었던 것은 우리 사회가 민주적으로 성숙했기 때문이다. 또한, 입법부가 모든 절차를 민주적으로 진행했기 때문이다. 이때 만약 보수정당이 동의하지 않았다면, 평화로운 주권 회수와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는 난망한 일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거리에 나와 촛불은 든 시민들이 분노했을 것이고, 사회적 혼란은 불가피했을 것이다. 보수정당이 민주주의 운동장 안에 있었기에 우리는 ‘성숙한 민주주의의 표상’이 될 수 있었다.
주권과 기본권은 항상 긴장 관계다. 공적 기관은 위임받은 주권을 활용해 강제적 복종을 요구하는데, 이 또한 기본권 앞에서는 멈춰야 한다. 사회에 따라 주권을 강조하기도 하고, 기본권을 더 중요하게 여기기도 한다. 우리가 나아가고자 하는 사회는 주권과 기본권이 충돌하는 게 아니라 중첩되는데, 그게 복지국가다. 앞으로의 국가는 전쟁이나 내전을 막아 평화를 유지하는 역할에 머무는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사회 안에서의 ‘평화’를 창출해야 한다. 국가의 의무의 범위가 넓어져야 한다. 기본권도 영역을 넓히고 있다. 개인의 자유를 넘어 사회적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요구가 점점 커지고 있다. 시민들의 다양한 이익과 요구를 통치에 반영하는 것이 주권의 순기능을 확대하고 기본권의 가치를 더 넓게 실현하는 길이다. 이를 우리는 다원적 사회라고 부른다.
민주적 정권교체 20여 년 만에 우리는 민주적으로 주권을 회수했다. 이제 주권과 기본권이 영역을 넓혀 조화를 이루는 사회로 한 단계 나아가길 바란다. 복지국가이자 다원적 사회가 될 것이다.

□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사건 경과
2016년 9월 전국경제인연합회가 거액 출연해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 이례적 신속 설립 2016년 10월 국정감사에서 최순실의 딸 정유라 부정입학 및 학사관리 비리, 독일에서 승마 관련 지원을 받는 배경에 대한 의혹 제기 2016년 10월 최순실 소유로 추정되는 태블릿PC에 청와대 기밀문서 등이 보관되어 있다는 언론 보도 2016년 10월 25일 박근혜 대통령 대국민사과, 최순실의 존재는 인정했으나 연설문의 표현 등 일부 자료에 대해 의견을 수렴한 것에 불과하다는 입장 발표 2016년 10월 27일 검찰 특별수사본부 구성, 국정농단 의혹사건 수사 착수 2016년 11월 17일 국회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 사건 규명을 위한 특별검사의 임명 등에 관한 법률⌟ 및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계획서 승인의 건’ 의결 2016년 11월 17일 국정조사특별위원회 구성 및 국정조사 개시 2016년 11월 30일 박영수 변호사 특별검사 임명, 특검 수사 개시 2016년 12월 3일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정의당, 무소속 의원 171명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 발의 2016년 12월 9일 국회 본회의에서 재적의원 300명 중 299명 표결 참여. 찬성 234표, 반대 56표, 무효 7표, 기권 2표 탄핵 가결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인용 |
어느 날 오랫동안 연락하지 않았던 선배에게 전화가 왔다. 20대 국회 정의당 비례대표 윤소하 당선인이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다른 상임위를 예상하고 보좌진을 꾸렸는데, 갑자기 보건복지위원회를 맡게 되었고 사람들에게 보건복지위원회 경험이 있는 나를 추천받았다고 한다. 함께 일하자는 제안이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었다. 일 년 반의 즐겁고 고통스러웠던 자유를 끝내야 할 때가 되었다.
마음을 먹었지만, 바로 수락하지는 않았다. 이미 꾸려진 보좌진 중에 국회 경력자가 한 명도 없었다. 의원실은 적은 숫자의 사람들이 최고의 기량을 발휘해야 한다. 그래서 경력자가 중시된다. 모두가 경력자일 필요는 없지만, 모두가 초보자인 건 문제가 될 수 있다. 나는 배수의 진을 쳤다. 제대로 일하고 싶다면 한 명의 자리를 더 만들어 달라고 했다. 대신 내가 아는 가장 일 잘하는 사람을 데려오겠다고 약속했다. 그가 홍기돈이다. 민주노동당 서울시의원 보좌관 출신에 서울시 노원구 기초의원 출마자(낙선)이기도 하고, 강기갑, 정진후 의원실을 거쳐 나중에 민주당 유은혜, 서동용, 최기상 의원실 보좌관으로 일하는 등 경력이 화려하다. 2012년 권영길 의원이 경남 도지사에 출마했을 때 선거를 도우러 함께 갔고, 정치발전소 보좌관 강좌의 인기 강사였으며 국회 보좌진 공부 모임 <의회정치의 미래 연구모임> 대표였다. 내가 뭔가를 도모할 때 마음 편하게 부탁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동료이기도 하다. 그해 ‘최순실 국정조사 특위’는 그가 없었다면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앞으로도 내가 이 세상에서 단 한 명과 같이 일할 수 있다면, 그건 두 말없이 홍기돈이다. (두 명과 같이 일할 수 있다면… 이건 고민 좀 해야겠다)
2016년 5월, 윤소하 의원의 결단으로(복으로) 나의 좋은 동료 홍기돈과 함께 국회로 돌아왔다. 국회를 떠난 지 1년 7개월 만이었다. 살면서 이렇게 오래 쉬어본 적이 없었다. 일하고 싶어 몸이 근질거렸다. 4년 임기 동안 해야 할 일의 목록이 머릿속에 자동으로 떠올랐다. ‘노동이 있는 복지국가’, ‘일하는 사람이 행복한 복지국가’ 우리의 새로운 비전이었다. 보건복지위원회에서 노동정책, 노동자의 삶을 말하기로 했다.
윤소하 의원은 임기 첫날, “지역과 중앙, 삶의 현장과 정치를 일치시키는 모습으로 살겠다”는 다짐을 SNS에 올렸다. 윤 의원은 지역과 노동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사람들의 삶에 천착하는 정치인이었다. 정치적 지향이 비슷한 의원을 만나는 건 보좌진에게 가장 큰 행운이다. 그밖에 다른 것은 맞춰 나갈 수 있다. 사실 윤소하 의원의 첫인상은 차갑고 날카로웠다. 잘못 봤다. 신이 윤의원을 만들 때 차갑고 날카로운 면은 실수로 빼먹었나 싶을 정도로 정반대의 성품을 가진 분이었다. 감성이 넘치는 분이 이성으로만 일하는 보좌관에게 바라는 점은 딱 하나 “밥 좀 같이 먹자”였다. 의원님과 밥을 먹으면 식사 시간이 길어져 나는 늘 내켜 하지 않았다. 이건 임기 끝까지 맞춰드리지 못했다.
윤소하 의원이 대표 발의한 첫 번째 법안은 어린이병원비 국가보장제를 위한 「국민건강보험법」 개정안이었다. 적어도 어린이의 병원비만큼은 국가가 책임지자는 것이다. 재정은 건강보험료 흑자분으로 충당하자고 했다. 2014년 기준으로 0∼15세 아동이 지출한 병원비(입원진료비, 외래진료비, 약값 총액)는 6조4천억 원이었다. 이 중 60.7%는 건강보험에서 부담하고, 나머지 39.3%는 환자가 냈다. 이를 본인 부담금이라고 부른다. 어린이 환자가 입원했을 때 내야 하는 본인부담금은 5,152억 원이었다. 5,152억 원. 큰 액수인 것 같지만(큰 액수 맞다), 건강보험이 쌓아놓고 있는 누적흑자 20조 원의 3%에 해당하는 금액에 불과하다. 쓰지 않고 쌓아놓은 돈에서 딱 3%만 사용하면 어린이부터 무상의료를 실현할 수 있다. 가계 지출을 줄이는 것은 검증된 저출산 대책이기도 하다. 복지국가의 비전을 현재 시점에서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정책이었다.
어린이병원비 국가보장제를 실현하기 위해 정의당과 66개 시민사회단체는 함께 전국적인 운동을 전개했다. 윤 의원은 정의당 국민건강복지부 본부장을 맡았다. 보건복지위원회 위원이었기에 상임위원 자격으로 정책을 추진해도 되지만, 일부러 정당 차원에서 조직을 꾸려 일을 했다. ‘어차피 같은 사람’이 아니다. 국회의원은 국민의 일반적 대리자면서 정당 활동가이기도 하다. 정당의 이름으로 시민사회단체를 만나고, 정당의 이름으로 정책을 발표하고, 정당의 이름으로 홍보물을 거는 것은, ‘우리 정당을 지지하면 이 정책을 실현하겠다’ 약속하는 행위이다. 앞선 글에서 17대 국회와 비교하여 20대 국회는 정당 주도성이 감소했다고 했지만, 어떻게든 정당을 중심으로 일하려고 노력했다. 어린이병원비 국가보장제를 정당 차원의 사업으로 진행한 것은 진보정당을 살리기 위한 고군분투였다.
마침내 건강보험보장성 강화 대책에 어린이병원비 상한제가 포함되었다. 15세 이하 어린이의 경우 기존 10∼20%에 이르렀던 본인부담율이 2017년 10월부터 5%로 확 낮아졌다. 20대 국회에서 제일 잘한 일이었다. 커다란 성과였지만, 우리는 멈추지 않았다. 추가로 ‘어린이병원비 100만 원 상한제’ 도입을 제안했다. 본인이 부담하는 의료비가 대폭 낮아지긴 했지만 비율이 아닌 금액으로 제한해야 제도의 실효성이 높아진다. 또, 건강보험 급여에 해당하지 않는 비급여 항목이 여전히 존재했다. 급여과 비급여를 모두 포함해서 정액 상한제를 도입해야 실질적 효과 있다. 입원비뿐만 아니라 외래진료비와 약제비도 포함했다. 이와 함께 연령도 15세에서 18세 이하로 높였다. 그렇게 전부 다 적용해도 소요비용은 약 4,020억 원 정도로 추산 되었다. 약 4,000억 원이면 18세 미만 모든 아동이 1년에 총 100만 원의 의료비만 부담하면 된다. 양육자의 고통을 줄일 수 있다. 복지국가나 무상의료 같은 말이 멀게 느껴진다면, 아무리 큰 병을 앓아도 일 년에 100만 원 이상 병원비를 내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생각해보자. 우리가 만들어 가려던 세상의 모습이다. 이렇게 차근차근 정책의 길만 걸었으면 좋으련만, 우리는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만다.
“이에 재판관 전원의 일치된 의견으로 주문을 선고합니다.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2016헌나1. 대통령 박근혜 탄핵사건에 대한 선고)
2016년 5월 임기를 시작한 이래 2017년 3월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 되기까지 일련의 시간은 두 번 겪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정부가 추진했던 일 중에 ‘왜 이렇게 처리했지?’ 이상하다 싶은 일을 파헤쳐보면 민간인의 이름이 등장했다. 여기도? 여기도? 민간인이 국정에 이토록 깊이 개입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대통령은 왜 그에게 합법적인 직책을 주지 않았을까? 그 정도의 역할을 했다면 선출직 정치인이 될 수도 있었고, 핵심 참모진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왜 민간인 신분을 유지했을까? 왜 그림자 속에서 일했을까?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경제적 이득을 위해서는 공식적 직함이 없는 게 나았던 것일까? 대체 이들은 정치인을, 공직을 무엇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결과적으로 시민들은 대통령에게 위임한 권력을 회수한다. 국회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이 과정을 평화롭게 관리하는 것이었다. ‘국정농단’의 실체를 밝히는 것보다, 대통령을 탄핵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주권은 절대적이다. 시민들은 우리가 가진 절대적 권리를 통치자에게 위임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통치자에게 복종하기로 했다. 주권을 위임받은 통치자는 우리들의 자유와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위임받은 권력을 사용해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 주권을 위임한 목적이다. 만약 주권이 목적을 상실하거나 통치자가 목적에 위배되는 행위를 한다면 위임한 주권을 해지해야 한다. 통치는 정당성이 있을 때만 인정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당하게 위임한 주권’을 ‘정당하게 회수’하는 일은 고난도의 기예가 필요하다. 대통령 탄핵은 대통령이 마음에 안 든다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대통령이 주권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른 주권체인 입법부와 사법부의 결정이 있어야 한다. 평화로운 회수에 실패한다면 사회는 대혼란에 빠지게 된다. ‘정당한 통치 권력’이 사라지고 다른 ‘통치 권력’이 아직 등장하지 않은, 즉, 복종해야 할 권력이 사라진 ‘무정부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위기 상황에서 입법부의 역할은 더욱 중차대하다. 입법부는 행정부를 감시해야 할 일반적 책임과 권한이 있고, 대통령의 탄핵을 결정할 수 있는 특별한 책임과 권한이 있는 주권체다. 국회는 국정감사를 통해 국정 전반에 대한 의혹을 제기했으며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이라는 특정사안에 관하여 국정조사를 실시했다. 국정감사는 매해 상임위 별로 정기적으로 이뤄지며 국정조사는 재적의원 4분의 1 이상의 요구로 특별하게 진행한다. 국정조사는 통상 여야 간 합의에 따라 이뤄진다. 당시 국회는 10월 국정감사에 이어, 11월 17일 국정조사를 시작하고, 국회에서 통과한 법에 따라 11월 30일부터 특검 수사를 시작했다. 12월 3일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정의당, 무소속 의원이 함께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발의했다. 탄핵안은 12월 9일 본회의에서 재적의원 300명 중 299명이 표결에 참여한 가운데 찬성 234표, 반대 56표, 무효 7표, 기권 2표로 가결된다.
그다음은 사법부의 몫이었다. 헌법재판소는 다음 해 3월 10일 탄핵안을 인용한다. 6개월여의 권력 공백, 특히 대통령 탄핵안 가결 이후 3개월의 통치자 부재 상황에서 사회경제적으로 큰 혼란이 없었던 것은 우리 사회가 민주적으로 성숙했기 때문이다. 또한, 입법부가 모든 절차를 민주적으로 진행했기 때문이다. 이때 만약 보수정당이 동의하지 않았다면, 평화로운 주권 회수와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는 난망한 일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거리에 나와 촛불은 든 시민들이 분노했을 것이고, 사회적 혼란은 불가피했을 것이다. 보수정당이 민주주의 운동장 안에 있었기에 우리는 ‘성숙한 민주주의의 표상’이 될 수 있었다.
주권과 기본권은 항상 긴장 관계다. 공적 기관은 위임받은 주권을 활용해 강제적 복종을 요구하는데, 이 또한 기본권 앞에서는 멈춰야 한다. 사회에 따라 주권을 강조하기도 하고, 기본권을 더 중요하게 여기기도 한다. 우리가 나아가고자 하는 사회는 주권과 기본권이 충돌하는 게 아니라 중첩되는데, 그게 복지국가다. 앞으로의 국가는 전쟁이나 내전을 막아 평화를 유지하는 역할에 머무는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사회 안에서의 ‘평화’를 창출해야 한다. 국가의 의무의 범위가 넓어져야 한다. 기본권도 영역을 넓히고 있다. 개인의 자유를 넘어 사회적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요구가 점점 커지고 있다. 시민들의 다양한 이익과 요구를 통치에 반영하는 것이 주권의 순기능을 확대하고 기본권의 가치를 더 넓게 실현하는 길이다. 이를 우리는 다원적 사회라고 부른다.
민주적 정권교체 20여 년 만에 우리는 민주적으로 주권을 회수했다. 이제 주권과 기본권이 영역을 넓혀 조화를 이루는 사회로 한 단계 나아가길 바란다. 복지국가이자 다원적 사회가 될 것이다.
□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사건 경과
2016년 9월 전국경제인연합회가 거액 출연해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 이례적 신속 설립
2016년 10월 국정감사에서 최순실의 딸 정유라 부정입학 및 학사관리 비리, 독일에서 승마 관련 지원을 받는 배경에 대한 의혹 제기
2016년 10월 최순실 소유로 추정되는 태블릿PC에 청와대 기밀문서 등이 보관되어 있다는 언론 보도
2016년 10월 25일 박근혜 대통령 대국민사과, 최순실의 존재는 인정했으나 연설문의 표현 등 일부 자료에 대해 의견을 수렴한 것에 불과하다는 입장 발표
2016년 10월 27일 검찰 특별수사본부 구성, 국정농단 의혹사건 수사 착수
2016년 11월 17일 국회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 사건 규명을 위한 특별검사의 임명 등에 관한 법률⌟ 및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계획서 승인의 건’ 의결
2016년 11월 17일 국정조사특별위원회 구성 및 국정조사 개시
2016년 11월 30일 박영수 변호사 특별검사 임명, 특검 수사 개시
2016년 12월 3일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정의당, 무소속 의원 171명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 발의
2016년 12월 9일 국회 본회의에서 재적의원 300명 중 299명 표결 참여. 찬성 234표, 반대 56표, 무효 7표, 기권 2표 탄핵 가결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