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정치발전소라는 실험

“선배, 괜히 자격증 딴다고 한식 조리사나 제빵 과정 같은 거 듣지 말아요.”
“그럼 뭐해?”
“선배가 하고 싶은 거 해요.”
“내가 하고 싶은 게 뭔데?”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후배의 웃음이 여운으로 남아있는데 다른 자리에서 선배가 또 묻는다.
“넌 뭐가 하고 싶니?” 이번에는 준비된 답변이 있었다.
“저는요, 시간이 나면 저랑 같은 시기에 농촌에 내려갔던 사람들 찾아가서 인터뷰하고 싶어요. 그때의 꿈을 얼마나 실현했는지,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는지, 지금은 어떤 꿈을 꾸고 있는지 그런 얘기 기록하고 싶어요. 저희가 농촌에 내려간 마지막 세대였거든요.”
“아니, 그런 거 말고. 너를 위해 뭘 하고 싶냐고?”
“저를 위해서요? 저를 위한 일이 따로 있나요?”
“니가 뭘 좋아했는지 찬찬히 생각해봐.”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좋아하는 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엔 사흘이 멀다 하고 산에 갔다. 북한산의 이 코스 저 코스를 오르며 ‘아, 나는 산을 좋아하는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또 많은 날 동네 도서관에 갔다. 구립도서관에 앉아 온종일 책을 읽으면서 ‘아, 나는 도서관을 좋아하는구나.’ 생각했다. 제주도에서 아이들과 한 달 동안 지냈다. 추운 겨울이었고 바닷가 마을의 바람은 거셌다. 우리는 차가 없었다. 느지막이 일어나 버스를 타고 오일장에 다녀오는 날이면‘아, 나는 느리고 게으른 삶을 좋아하는구나.’ 생각했다. 나는 여행을 좋아하고, 미술관과 박물관을 좋아하고, 강아지를 좋아하고, 자연을 느끼며 걷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마음에 조금 여유가 생기면서, 나에게 학교이자 안식처가 되었던 정치발전소에서 새로운 일을 도모해보기로 했다. 정치발전소는 2013년 2월, '유쾌한 정치 실험 공동체'를 모토로 설립되었다. 우리 사회가 더 나은 공동체가 되길 바라고, 이를 위해 좋은 정치와 좋은 시민이 필요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좋은 동료’이자 ‘좋은 친구’가 될 사람들이었다. 사실 정치발전소의 정체는 좀 불분명했다. 정치교육을 하는 기관이기도 했고, 정치 영역에서 일하고 싶은 이들의 네트워크 장이기도 했고, 회원들의 토론과 참여가 중요한 시민단체 같기도 했다. 회원 중에는 현직 정치인도 있었고, 예비 정치인과 정당 활동가도 있었고, 진로를 고민하는 청년들도 많았다. 좋은 정치에 대한 열망이 다양한 사람들을 모이게 했다. 지지하는 정당이 다른 사람들이 서로 예의를 갖춰 대화했다. 정치강좌의 수준은 매우 높았으며 이론과 현실이 별개의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플라톤을 공부하면서 한국 정치를 고민했다.
나는 정치발전소에 사회정책연구센터를 만들고 스스로 센터장이 되었다. 말이 좋아 센터장이지 혼자 만든 조직이었고, 월급도, 자원도, 정해진 업무도 없는 자리였다. 온전히 내가 책임져야 하는 조직이었다. 어쨌든, ‘센터의 장’이라는 직함을 처음 가져봤다. 이때 내가 운영했던 모임은 <복지국가와 정치: 주요 법안을 중심으로 본 복지국가 논쟁과 미래 가능성>, <사회적경제기본법 입법 과정 연구모임>, <르포 읽고 쓰기 모임>, <독일연구포럼>, 사회정책연구센터 연구위원 <월례세미나>, 회원모임 <정치적 책읽기 모임: 복지국가편>, <정치적 책읽기 모임: 불평등 편>, 정치발전소 강좌 <세상을 바꾸는 보좌관>과 보도자료와 질의문 작성을 중심으로 한 <보좌관 스쿨 심화과정> 등이다. 처음으로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었다.
이때 모임에 함께 했던 이들에게 지금도 감사하다. 독일연구포럼은 순수하게 참석자들의 회비로 독일의 다양한 분야 강사를 불러 세미나를 진행했는데, 평일 낮시간 모임을 위해 일주일에 한 번씩 휴가(?)를 내고 지방에서 올라온 참여자도 있었다. 르포 읽고 쓰기 모임에서는 자신이 써온 글에 대한 신랄한 평을 들어야 했다. 어찌나 정직하게 평을 해대는지 나도 가슴이 두근두근 할 정도였다. 모임 참여자 황금별이 자신의 경험을 담아 쓴 ‘백화점 주차도우미의 감정 노동’이 한국비정규노동센터가 주최한 <2015 비정규 노동 수기 공모전>에 당선되는 쾌거도 이루었다. 책 읽기 모임은 심지어 매주 토요일 오전에 했다. 일주일에 한 권씩 책을 읽어야 하는 부담감은 덤이었다. 모든 모임의 참여자들은 정답이 없는 문제를 푸는 수험생 같았다. 공부하고 토론하면서 보이지 않는 길을 찾으려 애썼다. 우리의 열의는 어디서 비롯된 것이었을까? 다시 그런 열정을 가질 수 있을까?
이게 ‘행복하게 잘 살았다.’라고 끝나는 이야기였다면 좋았을 텐데, 인생이 그렇게 쉽지는 않다. 나는 이때 농사짓던 시절 이후 경제적으로 가장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호기롭게 직장을 그만뒀지만, 나에게는 열두 척의 부채가 남아있었다. 매달 최저임금보다 많은 액수의 원금과 이자를 상환해야 했고, 아이 셋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가장이기도 했다. 그 당시 내가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경제학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다. 나의 실업은 비합리적 선택이었다. 도무지 계산이 나오지 않았다.
먹고 살아야 했다.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사회복무요원 강의 대타(정규 강사는 따로 있는데 비는 시간이 생기면 임시 강사를 불렀다)도 뛰고, 노동조합 대의원대회 녹취록 푸는 일(클로버노트가 있기 전이다)도 했다. 연구보고서도 몇 건 썼는데, 한 번은 연구 발주처 담당자에게 연락이 왔다. 최종학력을 기재해 달라는 것이다. 서류에 쓴 대로 학부 졸업이 맞다고 했더니 외국 학위도 써야 한다는 것이다.
“아니오, 외국 학교 다닌 적 없고요, 최종학력이 국내 대학 학부 졸업입니다.”
“아, 그러시군요…”
담당자의 당황하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난생처음 ‘학위’의 필요성을 느꼈다. 물론 보고서는 문제없이 통과되었다. 대한민국에서 학위란 무엇일까. 진보진영에서 단골로 부르는 한 교수님이 ‘전공’을 지적할 때 든 생각이다. 우리 의원실에서 냈던 국민연금 데이터 분석 보도자료를 마음에 들지 않아 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 교수님도 그중 한 분이었는데 공개적인 자리에서 우리 보도자료를 PPT로 띄워놓고 ‘전공도 하지 않은 사람’이 공공 정책을 다루는 건 문제라고 지적했다. 국민연금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은 국민연금 정책에 대해 말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 자료는 국민연금공단과 국민연금연구원으로 받은 ‘공식’ 데이터였다. 자료의 어떤 부분이, 무엇이 문제인지 말해줬다면 좋았을 것이다. 내용 자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비전공자라고 비난하면 토론을 통한 의견 접근은 난망한 일이 되고 만다. 정책을 다루는 보좌진 중에 해당 분야 ‘전공자’는 많지 않다. 애초에 전공자는 한 분야에서는 전문가이고, 다른 모든 분야에서는 비전문가라는 말 아닌가. 정치에서의 정책은 학위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학위를 가진 사람을 적제적소에 이용하는 사람이 만드는 것이다.
정치발전소의 훌륭한 점 중 하나는 ‘정치학자’와 ‘정치가’의 거리를 좁혔다는 것이다. 선생님들의 강의는 ‘내가 이 자리에서 이렇게 편하게 들어도 되는 걸까?’ 의문이 들 만큼 높은 수준이었다. 외국의 유명한 석학들은 시민을 상대로 열린 강의도 한다던데, 정치발전소가 그 역할을 하고 있구나 싶었다. 차근차근 배웠다면 좋았을 것을, 정치를 시작한 다음에 정치학을 접하게 된 나로서는 강의를 들을 때마다 매번 ‘이게 이런 거였어?’ ‘와, 이래서 이랬구나’ 무릎을 쳤다. 나의 모든 의문과 고민이 그대로 정치 고전에 있었다. (해답은 없었다.)
내가 부딪히고 좌절했던 현실 정치의 벽은 나만 유일하게 겪은 것이 아니었다! 소크라테스는 독약을 마시면서도 아테네라고 하는 정치공동체를 떠나지 않았다. 플라톤은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과두정의 폭정과 그 뒤를 이은 민주정의 횡포를 보고 현실 정치에 실망한 뒤 정치적 야망을 접고 고등교육기관 ‘아카데메이아’를 설립한다. 마키아벨리는 유배지에서 <군주론>를 썼지만, 등용되지 못한다. 정치철학자들이 고통 끝에 남긴 깊은 통찰은 정치사에 큰 획이 되었다. 우리가 지금 민주주의 시대에 살아가는 것은 오랜 세월에 걸쳐 많은 사람이 노력한 결과다. 우리도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정치를 잘하면 현재의 우리 삶이 나아지는 것은 물론, 앞으로 살아갈 미래도 좋아진다. 정치철학을 공부하고, 고전을 통해 정치의 오랜 고민과 기본원리를 익혀 정치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면 정치를 잘할 가능성이 커진다.
정치는 완전할 수 없다. 격렬한 투쟁과 냉혹한 권력다툼을 피해갈 수 없다. 승리를 향한 인정사정없는 경쟁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안에서 선한 요소가 있다. 그것을 긍정적으로 선용할 때 인간의 삶이 나아진다. 그러니 우리는 정치 없는 삶이나 문제없는 정치를 꿈꿀 것이 아니라 문제투성이 일지라도 정치 안에서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 한다. 정치에서는 그 어떤 문도 완전히 닫혀 있지 않다. 내가 정치발전소에서 배운 것들이다.
정치발전소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단체가 아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늘 운영비에 허덕였다. ‘급여’라기엔 너무 적은 상근자 활동비 지급도 어려웠던 적이 많다. 야심차게 벌렸던 서점과 정치사회 서적 구독서비스 ‘마키아벨리의 편지’는 수익으로 전환하지 못했다. 예전과 달리 비슷한 정치강좌를 하는 곳이 속속 생겨나면서 좋은 강의를 준비해도 수강생 숫자를 걱정해야 한다. 자본의 지원 없이 회원들의 회비만으로 운영하는 단체는 존속이 쉽지 않다. 게다가 정치가 나빠질수록 정치발전소와 같은 곳은 인기(?)가 없어진다. 그런데도 《사단법인 정치발전소》는 정치에 대한 반짝이는 시선을 잃지 않았다. 12년 동안 단체를 지속하고 있는 힘이기도 하다.
정치발전소는 정치라는 험난한 길에서 외롭고 지치고 고달파 내 앞에 놓인 과제를 다 외면하고 싶어질 때마다 정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정치가가 얼마나 멋진 존재인지, 정치를 통한 사회 변화를 꿈꾸는 게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알려주었다. 정치의 진지하고 유쾌한 친구, 정치발전소가 내 곁에 있어서 다행이었다. 내가 다시 힘을 낼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정치발전소 덕이다.
딱 1년 반 만에 매일 출근해서 일하고 퇴근하는 일상이 그리워졌다. 서강대교를 건너 국회의사당을 향할 때의 긴장감과 설렘이 마음에 일렁였다. 아, 내가 좋아하는 건 일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보람찬 일, 그건 정치였다.
“선배, 괜히 자격증 딴다고 한식 조리사나 제빵 과정 같은 거 듣지 말아요.”
“그럼 뭐해?”
“선배가 하고 싶은 거 해요.”
“내가 하고 싶은 게 뭔데?”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후배의 웃음이 여운으로 남아있는데 다른 자리에서 선배가 또 묻는다.
“넌 뭐가 하고 싶니?” 이번에는 준비된 답변이 있었다.
“저는요, 시간이 나면 저랑 같은 시기에 농촌에 내려갔던 사람들 찾아가서 인터뷰하고 싶어요. 그때의 꿈을 얼마나 실현했는지,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는지, 지금은 어떤 꿈을 꾸고 있는지 그런 얘기 기록하고 싶어요. 저희가 농촌에 내려간 마지막 세대였거든요.”
“아니, 그런 거 말고. 너를 위해 뭘 하고 싶냐고?”
“저를 위해서요? 저를 위한 일이 따로 있나요?”
“니가 뭘 좋아했는지 찬찬히 생각해봐.”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좋아하는 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엔 사흘이 멀다 하고 산에 갔다. 북한산의 이 코스 저 코스를 오르며 ‘아, 나는 산을 좋아하는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또 많은 날 동네 도서관에 갔다. 구립도서관에 앉아 온종일 책을 읽으면서 ‘아, 나는 도서관을 좋아하는구나.’ 생각했다. 제주도에서 아이들과 한 달 동안 지냈다. 추운 겨울이었고 바닷가 마을의 바람은 거셌다. 우리는 차가 없었다. 느지막이 일어나 버스를 타고 오일장에 다녀오는 날이면‘아, 나는 느리고 게으른 삶을 좋아하는구나.’ 생각했다. 나는 여행을 좋아하고, 미술관과 박물관을 좋아하고, 강아지를 좋아하고, 자연을 느끼며 걷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마음에 조금 여유가 생기면서, 나에게 학교이자 안식처가 되었던 정치발전소에서 새로운 일을 도모해보기로 했다. 정치발전소는 2013년 2월, '유쾌한 정치 실험 공동체'를 모토로 설립되었다. 우리 사회가 더 나은 공동체가 되길 바라고, 이를 위해 좋은 정치와 좋은 시민이 필요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좋은 동료’이자 ‘좋은 친구’가 될 사람들이었다. 사실 정치발전소의 정체는 좀 불분명했다. 정치교육을 하는 기관이기도 했고, 정치 영역에서 일하고 싶은 이들의 네트워크 장이기도 했고, 회원들의 토론과 참여가 중요한 시민단체 같기도 했다. 회원 중에는 현직 정치인도 있었고, 예비 정치인과 정당 활동가도 있었고, 진로를 고민하는 청년들도 많았다. 좋은 정치에 대한 열망이 다양한 사람들을 모이게 했다. 지지하는 정당이 다른 사람들이 서로 예의를 갖춰 대화했다. 정치강좌의 수준은 매우 높았으며 이론과 현실이 별개의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플라톤을 공부하면서 한국 정치를 고민했다.
나는 정치발전소에 사회정책연구센터를 만들고 스스로 센터장이 되었다. 말이 좋아 센터장이지 혼자 만든 조직이었고, 월급도, 자원도, 정해진 업무도 없는 자리였다. 온전히 내가 책임져야 하는 조직이었다. 어쨌든, ‘센터의 장’이라는 직함을 처음 가져봤다. 이때 내가 운영했던 모임은 <복지국가와 정치: 주요 법안을 중심으로 본 복지국가 논쟁과 미래 가능성>, <사회적경제기본법 입법 과정 연구모임>, <르포 읽고 쓰기 모임>, <독일연구포럼>, 사회정책연구센터 연구위원 <월례세미나>, 회원모임 <정치적 책읽기 모임: 복지국가편>, <정치적 책읽기 모임: 불평등 편>, 정치발전소 강좌 <세상을 바꾸는 보좌관>과 보도자료와 질의문 작성을 중심으로 한 <보좌관 스쿨 심화과정> 등이다. 처음으로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었다.
이때 모임에 함께 했던 이들에게 지금도 감사하다. 독일연구포럼은 순수하게 참석자들의 회비로 독일의 다양한 분야 강사를 불러 세미나를 진행했는데, 평일 낮시간 모임을 위해 일주일에 한 번씩 휴가(?)를 내고 지방에서 올라온 참여자도 있었다. 르포 읽고 쓰기 모임에서는 자신이 써온 글에 대한 신랄한 평을 들어야 했다. 어찌나 정직하게 평을 해대는지 나도 가슴이 두근두근 할 정도였다. 모임 참여자 황금별이 자신의 경험을 담아 쓴 ‘백화점 주차도우미의 감정 노동’이 한국비정규노동센터가 주최한 <2015 비정규 노동 수기 공모전>에 당선되는 쾌거도 이루었다. 책 읽기 모임은 심지어 매주 토요일 오전에 했다. 일주일에 한 권씩 책을 읽어야 하는 부담감은 덤이었다. 모든 모임의 참여자들은 정답이 없는 문제를 푸는 수험생 같았다. 공부하고 토론하면서 보이지 않는 길을 찾으려 애썼다. 우리의 열의는 어디서 비롯된 것이었을까? 다시 그런 열정을 가질 수 있을까?
이게 ‘행복하게 잘 살았다.’라고 끝나는 이야기였다면 좋았을 텐데, 인생이 그렇게 쉽지는 않다. 나는 이때 농사짓던 시절 이후 경제적으로 가장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호기롭게 직장을 그만뒀지만, 나에게는 열두 척의 부채가 남아있었다. 매달 최저임금보다 많은 액수의 원금과 이자를 상환해야 했고, 아이 셋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가장이기도 했다. 그 당시 내가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경제학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다. 나의 실업은 비합리적 선택이었다. 도무지 계산이 나오지 않았다.
먹고 살아야 했다.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사회복무요원 강의 대타(정규 강사는 따로 있는데 비는 시간이 생기면 임시 강사를 불렀다)도 뛰고, 노동조합 대의원대회 녹취록 푸는 일(클로버노트가 있기 전이다)도 했다. 연구보고서도 몇 건 썼는데, 한 번은 연구 발주처 담당자에게 연락이 왔다. 최종학력을 기재해 달라는 것이다. 서류에 쓴 대로 학부 졸업이 맞다고 했더니 외국 학위도 써야 한다는 것이다.
“아니오, 외국 학교 다닌 적 없고요, 최종학력이 국내 대학 학부 졸업입니다.”
“아, 그러시군요…”
담당자의 당황하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난생처음 ‘학위’의 필요성을 느꼈다. 물론 보고서는 문제없이 통과되었다. 대한민국에서 학위란 무엇일까. 진보진영에서 단골로 부르는 한 교수님이 ‘전공’을 지적할 때 든 생각이다. 우리 의원실에서 냈던 국민연금 데이터 분석 보도자료를 마음에 들지 않아 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 교수님도 그중 한 분이었는데 공개적인 자리에서 우리 보도자료를 PPT로 띄워놓고 ‘전공도 하지 않은 사람’이 공공 정책을 다루는 건 문제라고 지적했다. 국민연금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은 국민연금 정책에 대해 말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 자료는 국민연금공단과 국민연금연구원으로 받은 ‘공식’ 데이터였다. 자료의 어떤 부분이, 무엇이 문제인지 말해줬다면 좋았을 것이다. 내용 자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비전공자라고 비난하면 토론을 통한 의견 접근은 난망한 일이 되고 만다. 정책을 다루는 보좌진 중에 해당 분야 ‘전공자’는 많지 않다. 애초에 전공자는 한 분야에서는 전문가이고, 다른 모든 분야에서는 비전문가라는 말 아닌가. 정치에서의 정책은 학위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학위를 가진 사람을 적제적소에 이용하는 사람이 만드는 것이다.
정치발전소의 훌륭한 점 중 하나는 ‘정치학자’와 ‘정치가’의 거리를 좁혔다는 것이다. 선생님들의 강의는 ‘내가 이 자리에서 이렇게 편하게 들어도 되는 걸까?’ 의문이 들 만큼 높은 수준이었다. 외국의 유명한 석학들은 시민을 상대로 열린 강의도 한다던데, 정치발전소가 그 역할을 하고 있구나 싶었다. 차근차근 배웠다면 좋았을 것을, 정치를 시작한 다음에 정치학을 접하게 된 나로서는 강의를 들을 때마다 매번 ‘이게 이런 거였어?’ ‘와, 이래서 이랬구나’ 무릎을 쳤다. 나의 모든 의문과 고민이 그대로 정치 고전에 있었다. (해답은 없었다.)
내가 부딪히고 좌절했던 현실 정치의 벽은 나만 유일하게 겪은 것이 아니었다! 소크라테스는 독약을 마시면서도 아테네라고 하는 정치공동체를 떠나지 않았다. 플라톤은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과두정의 폭정과 그 뒤를 이은 민주정의 횡포를 보고 현실 정치에 실망한 뒤 정치적 야망을 접고 고등교육기관 ‘아카데메이아’를 설립한다. 마키아벨리는 유배지에서 <군주론>를 썼지만, 등용되지 못한다. 정치철학자들이 고통 끝에 남긴 깊은 통찰은 정치사에 큰 획이 되었다. 우리가 지금 민주주의 시대에 살아가는 것은 오랜 세월에 걸쳐 많은 사람이 노력한 결과다. 우리도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정치를 잘하면 현재의 우리 삶이 나아지는 것은 물론, 앞으로 살아갈 미래도 좋아진다. 정치철학을 공부하고, 고전을 통해 정치의 오랜 고민과 기본원리를 익혀 정치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면 정치를 잘할 가능성이 커진다.
정치는 완전할 수 없다. 격렬한 투쟁과 냉혹한 권력다툼을 피해갈 수 없다. 승리를 향한 인정사정없는 경쟁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안에서 선한 요소가 있다. 그것을 긍정적으로 선용할 때 인간의 삶이 나아진다. 그러니 우리는 정치 없는 삶이나 문제없는 정치를 꿈꿀 것이 아니라 문제투성이 일지라도 정치 안에서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 한다. 정치에서는 그 어떤 문도 완전히 닫혀 있지 않다. 내가 정치발전소에서 배운 것들이다.
정치발전소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단체가 아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늘 운영비에 허덕였다. ‘급여’라기엔 너무 적은 상근자 활동비 지급도 어려웠던 적이 많다. 야심차게 벌렸던 서점과 정치사회 서적 구독서비스 ‘마키아벨리의 편지’는 수익으로 전환하지 못했다. 예전과 달리 비슷한 정치강좌를 하는 곳이 속속 생겨나면서 좋은 강의를 준비해도 수강생 숫자를 걱정해야 한다. 자본의 지원 없이 회원들의 회비만으로 운영하는 단체는 존속이 쉽지 않다. 게다가 정치가 나빠질수록 정치발전소와 같은 곳은 인기(?)가 없어진다. 그런데도 《사단법인 정치발전소》는 정치에 대한 반짝이는 시선을 잃지 않았다. 12년 동안 단체를 지속하고 있는 힘이기도 하다.
정치발전소는 정치라는 험난한 길에서 외롭고 지치고 고달파 내 앞에 놓인 과제를 다 외면하고 싶어질 때마다 정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정치가가 얼마나 멋진 존재인지, 정치를 통한 사회 변화를 꿈꾸는 게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알려주었다. 정치의 진지하고 유쾌한 친구, 정치발전소가 내 곁에 있어서 다행이었다. 내가 다시 힘을 낼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정치발전소 덕이다.
딱 1년 반 만에 매일 출근해서 일하고 퇴근하는 일상이 그리워졌다. 서강대교를 건너 국회의사당을 향할 때의 긴장감과 설렘이 마음에 일렁였다. 아, 내가 좋아하는 건 일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보람찬 일, 그건 정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