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민의 보좌관 일기] 11. 노무현 대통령의 사과와 공권력의 의미

2025-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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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노무현 대통령의 사과와 공권력의 의미

 

죽음은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 신입생의 푸릇함이 남아있던 1991년 4월, 명지대 학생 강경대가 전경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해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우리는 모두 거리로 나갔다. 벌건 대낮 학교 앞 골목에서 경찰의 쇠파이프에 맞아 사람이 죽었는데, 강의실에 앉아있을 수는 없었다. 시위는 하루가 멀다고 계속되었다. 학교가 있던 화양리에서 동대문을 거쳐 종로까지 구호를 외치며 뛰어갔다. 고등학교 옆을 지날 때면 창문에서 학생들이 박수를 보냈다. 시민들의 응원도 뒤따랐다. 집결 장소에 도착해 서성이고 있으면 누군가 호루라기를 불었고, 신호에 따라 종로 일대 넓은 차도를 순식간에 막았다. 도로는 곧 집회 대열로 가득 찼다. 집회 장소는 자주 바뀌었다.

 

그날은 지하철을 탔던 것 같다. 충무로로 모이라고 했다. 대한극장이 있는 곳이다. 영화평론가 작은 아빠가 보내주신 시사회 초대장은 대부분 대한극장이었다. 스크린이 크고 객석이 넓어 이곳을 좋아했다. 무거운 마음이었지만, 오늘의 상영작도 궁금했다. 여느 때처럼 집회가 시작되었고, 겁많은 나는 대열 가운데에 있었다. 맨 앞과 뒤쪽은 집회에 모인 사람들을 지키는, 이른바 ‘사수대’가 있었다. 무장한 전경과 사수대, 그리고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서 있었다. 보통의 경우, 전경들이 해산을 시도해도 사수대가 시간을 벌어줬고, 그동안 참석자들은 안전하게 도망갈 수 있었다. 집회를 마칠 때쯤이면 경찰들이 ‘퇴로’를 터줬다. 경찰과 시위대 사이의 암묵적 규칙 같은 거였다. 이날은 달랐다.

 

집회 도중, 갑자기 큰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사람들의 표정에서 공포가 밀려왔다. 전경들의 진압이 시작된 것이다. 집회 대열 중간을 치고 들어왔다. 바로 내가 서 있는 곳이었다. 앞과 뒤는 이미 전경들에 의해 막혀 있었다. 도망갈 곳이 없었다. 막아줄 사수대도 없었다. 가둬놓고 잡아가는, 이른바 ‘토끼몰이’였다. 집회 대열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옆 골목으로 뛰었다. 빨리 빠져나가야 했다. 좁디좁은 골목으로 한꺼번에 많은 사람이 몰렸고, 골목 입구에서 벽돌 같은 것을 밟았다고 생각한 순간 사람들에 떠밀려 균형을 잃었다. 내 위로 사람들이 줄줄이 넘어졌다. 눈 깜짝할 새 벌어진 일이었다. 곤봉으로 사람을 때리는 소리와 비명이 뒤섞였다.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숨도 쉴 수 없었다. 살려달라는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 죽는구나 싶었을 때 누군가 내 양손 팔목을 잡았다. 그가 있는 힘껏 두 손을 당겨 빼내 주었다. 내가 지금 살아있는 것인지, 아닌지 모를 지경이었다. “뛰어!” 정신없이 뛰었다. 뒤를 돌아볼 수도 없었다. 맨발에서 피가 흘렀다.

 

학교로 돌아갔다. 뉴스가 나왔다. 사람이 죽었다. 내가 있었던 바로 그 자리였다. 이름은 김귀정, 여학생이었다. 내 이름이었을 수도 있었다. 먹은 것도 없는데 구토가 나왔다. 그날 골목에는 운동화가 수북이 쌓였다고 한다. 찾으러 가지 않았다. 충무로 근처도 가기 어려웠다. 대한극장에서 영화를 볼 수도 없었다. 스무 살에 마주한 죽음은 오랫동안 삶을 지배했다. 사는 게 고달파 마음이 흔들리는 날이면 그 여학생의 이름을 떠올렸다. 당신은 어떤 삶을 살고 싶었을까. 당신의 살고 싶었던 오늘은 어떤 날이었을까. 그러면 발자국 없는 눈밭을 걷는 심정이 되었다. ‘똑바로 걸어야지’ 다짐했다. 나의 청춘은 그렇게 흘러갔다.

 

또 한 번 죽음에 가까이 간 것은 보좌관 생활 1년 반이 지났을 무렵, 2005년 11월 여의도에 열린 ‘쌀협상 국회 비준 저지 전국농민대회’였다. 오랜만에 반가운 여성농민 언니들, 농민 형님들을 뵈었다. (이게 호칭이었다) 집회가 끝나갈 즈음, 해산하는 인파로 길이 너무 복잡해지기 전에 들어가겠다고 먼저 일어났다. 웃으며 인사를 주고 받았다. 만삭의 임산부였던 내가 아무 걱정 없이 참석할 만큼 평화로운 집회였다. 하지만, 여의도 광장의 평화는 끝까지 유지되지 못했다. 내가 자리를 뜬 직후 경찰들의 진압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다들 집에 돌아가려고 준비하던 중이었다.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던 언니들도 방패와 곤봉에 맞아 쓰러졌다. 천막에서 다친 사람들을 돌보던 사람에게도 폭력을 행사했다. 부상자가 속출했다. 농민 전용철, 홍덕철 씨가 사망했다.

 

<성명서> (...) 경찰의 방패에 찍히고, 몽둥이에 맞아 뼈가 부러지고, 머리가 터지고, 얼굴이 찢기는 등 농민들의 부상 정도가 도를 넘었다. 경찰의 방패에 찍혀 얼굴을 100바늘 꿰맨 농민이 있는가 하면, 경찰을 피하다 넘어진 농민들을 찍고 밟아 간과 신장에 내상을 입은 농민 등 그 처참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제 농민대회에서 경찰 추산 총 113명의 농민이 부상을 당했다. 이중에는 상당수의 중상자가 포함되어 있다. 아울러 무차별 진압 과정에서 56명의 농민이 강제 연행되었다. 경찰은 귀가하던 농민들의 차량을 강제로 세우고 농민을 연행하기도 했다. 대화를 통한 쌀 비준 문제 해결 및 농업 대책 마련의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여당이 이를 애써 무시하고 쌀 비준안 강행처리, 농민 시위 강경진압 등 강압적 태도로 나오고 있는데 대해 깊은 우려와 분노를 금할 수 없다. (...) 민주노동당은 사태의 평화적 해결과 농업의 생존을 위해 호소한다. 정부여당은 즉각 쌀 비준안 강행 처리 입장을 철회하고 3자 협상을 통한 근본적 농업 회생 대책 마련에 나서야 한다. (...) 농민은 절망적인 상태에 몰려 있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절망을 분노로 바꾸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사태의 합리적 해결 방안을 찾아 농업문제가 해결될 수 있도록 농민의 합리적 제안을 즉각 수용할 것을 다시 한번 촉구한다. (2005.11.16 일하는 사람들의 희망! 민주노동당)

 

보통 진압은 해산을 목적으로 한다. 그런데 이날은 집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를 타러 이동하기 시작한 뒤에 진압을 시작했다. 국회를 향하던 시위대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백번 양보해 해산을 목적으로 물리력을 행사했다 해도 그저 광장에서 밀어내면 됐다. 국회 쪽으로 접근하지 못하게 막기만 하면 됐다. 노인과 여성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폭력을 행사할 이유가 없었다. 나중에 조사를 진행한 국가인권위원회는 “방패를 옆으로 휘두르거나 들어 올려 수평으로 시위대를 가격하는 등 방패를 공격용으로 사용한 사례가 자주 나타나고 있다” “단순가담자나 저항을 포기하고 도주하거나 쓰러진 사람, 다친 농민들의 임시 응급처치 등을 위해 대기하고 있던 여성 및 노인들을 방패와 곤봉 등으로 가격한 행위가 인정된다”고 했다. 노무현 정부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권위주의 정부에서 발생한 일이 아니었다. 몹시 괴로웠다. ‘우리들이 꿈꾼’ 민주 정부에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강경대 열사 이후 또다시 경찰에 ‘맞아’ 사람이 죽었다.

 

국가인권위는 사망 원인이 경찰의 과잉진압에 의한 것이라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국무총리에 이어 대통령이 직접 대국민 사과를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국민 여러분께 머리 숙여 사죄드립니다” “인권위의 권고에 따라 정부는 책임자를 가려내어 응분의 책임을 지우고, 피해자들에 대해서는 적절한 절차를 거쳐 국가가 배상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다시 한번 다짐하고 교육을 강화하도록 할 것입니다”라며 고개를 깊이 숙여 사과했다.

 

대통령은 훌륭했다. 경찰이 인권위의 권고를 두말없이 수용한 것도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대통령 사과문에 쓰인 “쇠파이프를 마구 휘두르는 폭력시위가 없었다면 이런 불행한 결과는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 두 농민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 같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다시금 책임에 대해 논쟁하자는 것은 아니다. 오늘 말하고 싶은 것은, 노무현 대통령의 사과문에 나온 ‘공권력’에 대한 부분이다.

 

“공권력이 정도를 넘어 행사되거나 남용될 경우에는 국민들에게 미치는 피해가 매우 치명적이고 심각하기 때문에 공권력의 행사는 어떤 경우에도 냉정하고 침착하게 행사되도록 통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공권력의 책임은 특별히 무겁게 다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현대 민주주의 이전에는 강자가 곧 법이었다. 왕과 영주의 폭력에 복종하면 외부의 폭력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었다. 권력자의 폭력에 의탁해 사회를 유지하던 시대를 지나 사람들은 공적 권력을 통해 질서를 만들기로 한다. 우리는 개개인의 권리를 공적 권력에 위임하고, 위임받은 권한으로 개인의 자유를 제약해도 좋다고, 폭력을 공적으로 행사해도 괜찮다고 자발적으로 허용했다. 우리가 누리는 평화로운 일상은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게 아니라 자유를 박탈할 권리를 양도한 사회적 계약에 따라 강제되는 것이다. 홉스는 강력한 공권력으로 시민들을 복종시켜 평화를 관리하자는 ‘절대주권론’을 말했다. 좋은 질서를 강제적으로 만드는 게 평화를 유지하는 방법이라고 본 것이다. 홉스의 국가는 ‘절대적 복종’을 전제로 한다.

 

‘정부’란 무엇일까? 우리가 허용한 ‘정당한 폭력’이다. 단, 그 정부는 합법적이고 정당한 절차를 거쳐서 주권을 위임받은 정부여야 한다. 이러한 정부는 우리의 자유와 생명과 재산을 위협하는 사람을 제재하고 처벌하기 위해 공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 이로써 우리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 공정한 폭력, 정당한 폭력을 통해서 정의롭지 않은 인간의 행위를 견제할 수 있게 되었다. 막스 베버는 ‘국가란 일정한 영토 안에서 폭력을 정당하게 독점하고 있는 존재’라고 했다. 문제는 국가가 행사하는 폭력은 개인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하다는 점이다. 개인은 공권력 앞에 한없이 약하고 작은 존재다. 개인에게 공권력은 ‘거대한 폭력’이 되기 쉽다. 권력자의 부당한 공권력 사용에 대한 시민들의 저항이 ‘민주화’였다.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은 공권력 행사에 대한 하나의 기준을 제시했다. 민주주의에서 국가의 권력은 어떻게 행사되어야 하는가? 사용은 절제되어야 하고, 책임은 무거워야 한다. 그게 권위주의와 가장 큰 차이다. 우리는 공권력이 공포로 작동했던 군부독재 시대를 지나 공권력에 대한 민주적 통제가 가능한 시대로 나아왔다. 내가 겪은 죽음들은 권위주의 시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민주주의 시대의 아픈 상처다. 국가 만이 정당한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 현대 민주주의 기본 규범이다. 국가는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강제적 방법을 동원할 수 있다. 민주주의 시대 정부의 역할이다. 우리가 위임한 권력은 공적으로 정당하게 쓰여야 한다. 정치인의 사명이다.

 

공권력은 너무 약하면 사회가 무질서해지고, 지나치게 강하면 개인의 기본권이 침해당한다. 그러므로 언제나 적절하게 행사되어야 하며 남용해서는 안 된다. 죽음이 남긴 뼈아픈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