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민의 보좌관 일기] 10. 지치지 말고, 멈추지 말고

2025-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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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지치지 말고, 멈추지 말고

보좌관으로 일하게 된 뒤 처음 맞닥뜨린 정치적 절망은 ‘쌍용자동차’ 사건이었다. 


2009년 8월, 전국금속노동조합 쌍용자동차지부 노동조합원들이 회사 측의 대규모 정리해고에 반대하며 공장을 점거하고 벌였던 77일간의 파업은 경찰의 대대적인 진압으로 종료되었다. 경찰이 진압 과정에서 대테러 장비인 테이저건을 사용하고, 헬기와 기중기를 동원하고, 1년 치 최루액의 95%를 살포하는 등 전쟁을 방불케 하는 작전을 펼쳐 큰 논란이 되었다.


그해 여름은 유독 무더웠다. 평택 쌍용자동차 공장 앞에 앉아 뜨거운 햇살을 등짝에 맞으며 도로 위로 뚝뚝 떨어지는 땀을 바라봤다. 고요했다. 멀리서부터 도로를 통제해 공장 주변으로 지나가는 차량이 한 대도 없었다. 하늘은 맑았고, 공기는 무거웠다. 공장 안에 들어갈 수도 없고, 공장 안 노동자들을 밖에 나오게 할 수도 없는, 정치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는 시간이었다. 비극적 사태 앞에서 정치가 멈춰버린 첫 경험이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경찰은 쌍용차 노동자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헬기 등 경찰장비가 파손됐다며 전국금속노동조합 쌍용자동차지부 외 103명에 대하여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2013년 1심에서 14억여 원, 2016년 2심에서 11억여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하루에 62만 원의 지연이자까지 붙어 손해배상액은 눈덩이같이 불어났다. 평생 일해온 직장에서 하루아침에 해고된 2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최후의 저항으로 택한 게 파업이었다. 그런데 이들에게 돌아온 것은 테러리스트 취급이었고, 경찰의 폭력적 진압이었고, 도무지 갚을 도리 없는 거액의 손해배상이었다. 애초에 왜 노동자들이 배상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소송이었다.


고통받던 노동자와 가족 서른 명이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언론에 ‘쌍용자동차’라는 제목이 나오면 기사를 바로 읽지 못했다. 기사를 읽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했다. 죽음의 책임이 정치에 있는 것 같은 죄책감에 시달렸다. 진보정당이 분당 된 직후였고, 의석이 절반으로 줄어든 때였다. 문제를 해결할 힘을 갖지 못한 것이 고통스러웠다. 우리에게 권력이 있었다면 달랐을까? 얼마나 큰 권력이 있어야 하는 걸까? 권력을 가졌다면 정말 해결할 수 있었을까? 이전에는 의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윤리적 입장이 정치적 판단의 기준이었다. 그런데 의지와 능력은 다른 말이다. 의지가 있더라도 실력 없는 의지는 영향력을 획득하지 못한다. 영향력이 없는 목소리는 무의미한 메아리에 불과하다. 우리가 대변하고자 하는 ‘투명인간’들의 목소리를 국회 안에서 울려 퍼지게 하려면 실력을 갖춰야 한다. 쌍용자동차 사태는 정치의 역할에 대해 깊은 고민을 남겼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2015년 12월, 해고자 복직, 쌍용차 정상화 방안 마련, 손해배상 가압류 취하, 유가족 지원대책 등에 대해 노사가 합의하면서 일단락되었다. 2016년 2월 22일, 복직자들은 다시 공장에 출근했다. (전원 복직까지는 이후로도 오래 걸려 2020년 5월에 이르러서야 마지막 복직자들이 출근했다.)


국회는 어떤 일을 했을까?


“의사 일정 제45항 쌍용자동차 국가손해배상 사건 소취하 촉구 결의안을 상정합니다” 

심사보고와 투표가 진행되고, 마침내 투표가 끝났다. 국회의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투표 결과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재석 153인 중 찬성 106인, 반대 40인, 기권 7인으로서 쌍용자동차 국가손해배상 사건 소취하 촉구 결의안은 행정안전위원회의 수정안대로 가결되었음을 선포합니다” 

국회의장이 의사봉을 두들긴다. 2021년 8월 26일, <쌍용자동차 국가손해배상 사건 소취하 촉구 결의안(이하 쌍차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쌍용자동차 사건’에 대해 국회가 처음으로 의견을 표명했다.


참았던 숨을 크게 내쉬었다. 통과되는 순간까지 긴장했다. 본회의에 안건으로 상정되기까지도 쉽지 않았지만, 반대표가 많이 나와 부결될 염려도 있었고, 재석 인원 부족으로 표결이 아예 이뤄지지 못할 수도 있었다. 결의안은 보통 법안 표결을 모두 마친 뒤에 하는데 안건이 많아 시간이 늦어지면 자리를 뜨는 의원들이 늘어난다. 이날도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자리에 앉아있는 인원이 급속도로 줄어들고 있었다. 쌍차 결의안 표결 직전 상황을 보면 <사회서비스 지원 및 사회서비스원 설립․운영에 관한 법률안>에 투표한 의원은 187인, 그다음 안건인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탄소중립․녹색성장 기본법안>은 167인으로 줄더니 정식명칭은 매우 긴 ‘미국과 체결하는 협정 비준동의안’1) 투표 차례가 되자 160인으로 확 줄었다. 일반안건 의결은 재적의원 과반수 출석, 출석의원 과반수 찬성을 조건으로 하고 있어 150인 이상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10명만 더 자리를 뜨면 재석 인원 부족으로 표결 자체를 할 수가 없다. 아슬아슬하게도 153인 재석으로 표결에 들어갈 수 있었다. 반대 표결을 한 40명의 의원들에게도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이들이 있어 결의안이 통과될 수 있었다. ‘자리를 지키고 앉아 반대 입장을 표명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날 나의 진심이었다.


문재인 정부 출범 후 경찰청에 꾸려진 인권침해사건 진상조사위원회는 쌍용차 파업 진압 과정에 국가폭력이 있었음을 인정하고 소 취하를 권고했다. 민갑룡 전 경찰청장은 공권력 남용에 대해 고개 숙여 사과했다. 국가인권위원회도 2019년 12월 대법원에 “거액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하는 행위는 그 정당성이 상당히 결여됐다”는 의견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경찰은 손해배상 소송을 취하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2020년 21대 국회가 출범하자마자 국회의원 117명이 참여한 손해배상 소송 취하를 촉구하는 결의안을 발의했고, 1년여 만에 통과된 것이다(본회의 표결에서 찬성은 106인이었다. 결의안 공동발의자보다 적었다.). 쌍용자동차 파업 사태가 있었던 때로부터 시작하면 12년 만에 국회가 입장을 밝힌 것이다.


국회 결의안 하나가 비극과 고통을 없었던 일로 만들지는 못할 것이다. 그들의 삶을 2009년 이전으로 돌려놓지도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국회에서 입장을 표명하는 행위는 중요하다. 정치의 역할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보호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당신들의 고통을 안다고, 당신들을 위해 일하겠다고, 당신들이 걱정 없이 일상을 살아가도록 하겠다고, 당신들을 대표하여 당신들의 목소리를 전하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이것은 내가 정치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결의안이 통과되고 1년 3개월이 지난 2022년 11월, 대법원은 국가의 쌍용자동차 노조 등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 사건에서 노동조합과 조합원들의 배상책임을 인정했던 원심을 파기·환송했다(대법원 2022.11.30. 선고 2016다26662, 26679, 26686 판결). 저공 헬기 진압에 대한 노동자들의 저항이 ‘정당방위’에 해당한다고 본 것이다. 2025년 2월 1일, 15년 만에 소송이 종결됐다. 서울고법이 파기환송 취지에 따라 배상액을 1억6600여만 원으로 재산정한 것을 대법원이 원심 심리불속행 기각으로 확정했다. 마침내 끝났다. 5번의 재판 끝에 종결된 것이다.


그리고, 2025년 8월 24일. 손해배상 청구를 제한하는 일명 ‘노란봉투법’, ‘노동조합 및 노사관계 조정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본회의를 통과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두 번이나 재의요구권을 행사하여 통과와 부결을 거듭했던 법이다. 노란봉투법은 새로운 미래를 열었다. 이제부터 노동조합과 노동자를 상대로 함부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 20년도 넘은 해묵은 과제였다.


2003년, 두산중공업 노동자 고 배달호씨가 손해배상에 대한 고통을 호소하며 스스로 몸에 불을 붙였다. 회사가 조합원 임금을 가압류 해 6개월 동안 임금을 받지 못한 상황이었다. 같은 해 10월 17일, 한진중공업 노동조합 김주익 위원장이 85호 크레인 위에서 목숨을 끊었다. 129일 동안 고공농성을 이어가던 중이었다. 한진중공업은 파업 이후 조합원 180명에게 150억 원대 손해배상 청구를 예고했고, 간부들은 가압류로 13만 원의 급여명세서를 받아야 했다. 비극은 멈추지 않고 2009년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에 대한 47억 원의 손해배상 소송으로 이어졌고, 살던 집까지 압류가 들어오는 고통을 견디지 못한 노동자와 가족들이 세상을 등졌다. 우리는 쟁의행위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 때문에 사람이 자살하는 유일한 나라였다. 


노란봉투법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다시 높아진 것은 2022년 여름이다. 대우조선해양 하청 노동자들이 조선업 하청노조 최초로 파업을 했다. 조선업 불황기에 조선업 하청 노동자들의 임금이 30%가 깎였다. 그들이 소속된 하청기업이 깎은 게 아니다. 하청업체에게 공사대금, 즉 기성금을 준 원청이 깎은 것이다. 노동자들은 불황기에 깎였던 임금을 조금만 올려달라고 요구했다. 하청업체 사장들은 본인들도 어떻게 할 수 없으니 원청에 가서 이야기하라고 했다. 그런데 원청인 대우조선해양2)은 교섭을 거부했다. 자기 직원이 아니라는 이유다. 하청노조는 사업장을 점거해 쟁의행위를 벌였다. 원청을 만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유최안 부지회장은 0.3평 남짓한 철제 케이지에 스스로 옥쇄한 채 농성을 했다. 51일 뒤 파업은 끝났다. 그 이후 파업에 참여한 하청 노동자 5명에게 470억 원 손해배상이 날아들었다. 쌍용차 47억 원이 대우조선해양 470억 원으로 10배가 되었다. 대체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이란 말인가? 이대로 살 수는 없지 않은가? 노동자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서린 노란봉투법 논의가 본격화되었다.


2025년 8월 24일.


불사조처럼 시련의 세월을 견뎌온 노란봉투법이 통과되었다. 국민의힘 의원들의 무제한 토론을 24시간 만에 종결하던 그날 아침, 그 순간에 파란 하늘을 바라봤다. 세상을 먼저 떠난 분들이 하늘에서 잠시 웃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2009년 8월의 나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거기가 끝이 아니라고. 16년이 걸렸지만, 마침내 이날이 왔다고. 그러니 정치가 해야 할 역할을 포기하지 말라고. 지치지 말고, 멈추지 말고, 지금 해야 할 일을 하라고.


1) 대한민국과 아메리카합중국 간의 상호방위조약 제4조에 의한 시설과 구역 및 대한민국에서의 합중국군대의 지위에 관한 협정 제5조에 대한 특별조치에 관한 대한민국과 미합중국 간의 협정 비준동의안 투표 의원(160인)

2) 대우조선해양은 2023년 한화오션이 인수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