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민의 보좌관 일기] 7. 정책정당의 길

2025-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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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정책정당의 길

이천 년 전 고전에 삶의 지혜가 있는 것처럼 과거의 경험에서 배울 것이 있다. 


2005년 민주노동당은 ‘파산법’을 들고 나왔다. 개인파산제는 변제능력을 상실한 개인의 사회적·경제적 재기를 위해 마련된 제도로 선진국에서는 활성화 되었지만,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까다로운 면책 조건 등으로 유명무실하게 운영되고 있었다. 2005년 2월, 노회찬 의원은 파산 절차를 간소화하고 비용을 축소해 파산 신청을 원활히 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개정안을 발의한다. 이 법안은 한 달 만에 전격적으로 통과되었다. 그런데 파산법 통과 이후에도 개별법에는 자격, 면허, 영업허가의 결격사유 등에 ‘파산선고를 받고 복권되지 아니한 자’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만약 파산이나 개인회생을 진행할 경우 자격·면허가 정지돼 해고되거나 직업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경제적 재기를 위해 제도를 만들었는데, 제도를 이용하면 경제활동을 멈춰야 하는 모순이 있었다.


민주노동당은 파산법 개정 후속 사업으로 파산자에 대한 불이익을 해소하는 일괄개정안 79개를 마련한다. 나는 이때 당이 너무 멋있었다. 척척박사들이 상주하고 있었다. 정책이면 정책, 사업이면 사업, 조직이면 조직, 뭐든 척척 진행되었다.(사실 ‘척척’은 아니었다. 회의 석상에서 곧잘 의결충돌이 발생했다. 다툼이 거듭될수록 각자 자신의 의견을 관철하기 위해 더 열심히 준비해왔다. 논리의 대결은 서로를 성장시켰다.) 많은 이들의 노고가 담겨있는, 무려 79개나 되는 법안을 누가 발의할 것인가? 지혜로운 솔로몬은 당 소속 의원들이 상임위별로 나눠서 발의하도록 했다. 법안은 해당 상임위 위원이 발의하는 게 가장 책임성이 높다. 논의되고 통과되는 과정에서 ‘발언권’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때 정해진 원칙은 이후에도 어느 정도 지켜졌다. 다른 상임위 법안을 발의하려면 해당 상임위 의원실과 사전 협의를 하도록 했다. 우리가 준비한 법안을 ‘넘겨준’ 경우도 있었다. 일종의 ‘상도의’와 비슷한데, 정당의 규율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파산자 관련 79개 일괄개정안 중 26개의 법안이 통과됐다. 우리 의원실은 10개 법안을 발의했고 7건을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의사, 치과의사, 한의사, 간호사, 조산사, 임상병리사, 방사선사, 물리치료사, 작업치료사, 치과기공사, 치과위생사, 의무기록사, 안경사, 응급구조사, 약사, 한약사, 사회복지사, 장애인 의지·보조기 기사 등이 파산 신청 이후에도 직업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1)2)의원실에 ‘감사하다’ 전화가 쏟아졌던 때이기도 하다. 다 포기할 뻔했는데 희망이 생겼다고, 열심히 살아보겠다고 했다. 이런 게 정치하는 보람이지 싶었다. 사실 농사짓던 시절 내가 바랐던 것이었다. 실패가 수렁이 되어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빠져나올 수 없을 때, 절망이 나를 덮쳐 마지막 숨을 앗아가지 않도록 사회가 널빤지 하나만 내밀어주길 바랐다. 입법은 희망을 만드는 일이었다.


이처럼 광범위한 직업군에 영향을 미친 법안은 민주노동당 경제민주화운동본부의 사업에서 비롯한 것이다.3)강기갑 의원은 당사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개별적인 접근으로 문제 해결은 어림도 없다”며 “전국적인 조직을 만들어 집단적으로” 행동하라고 말한다.4)정치적 힘은 조직에서 나온다. 개인의 의견은 민원에 머물지만, 개인이 모여 집단을 구성하면 사회적 의제가 된다. 


정당의 정책은 의견을 조직화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져야 한다. 정책 정당은 의견의 조직화를 잘하는 정당이다. 그런 점에서 민주노동당은 정책 정당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지금 널리 시행되고 있는 무상급식, 저상버스, 영유아 무상 예방접종과 같은 정책은 진보정당이 발굴한 것이었다. 해당 정책을 중심으로 중앙당과 국회의원, 지역조직과 지방의원, 당원이 유기적으로 움직였고, 관련 단체와 일상적으로 연대했다. 정책이 필요한 사람들이 눈앞에 있었고, 결과를 만들기 위해 함께 노력했다. 당내에서도, 정당 간에도 정책으로 경쟁하던 시기다. 


의원실은 정당의 정책을 ‘입법화’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17대 국회에서 우리 의원실이 발의한 의안은 법안 33건, 결의안 1건 등 총 34건이다. 크게 나누자면 세 영역으로 분류할 수 있다. 당론에 따른 법안, 관련 단체와 함께 만든 법안, 의원실에서 독자적으로 추진한 정책 등이다. ①당론에 따라 발의한 법안은 27건으로 약 80%에 달한다. 압도적이다. 의제별로 묶자면 파산자 결격사유 완화(10건), 무상의료(9건), 연금 개혁 및 기초연금(5건), 장기요양제도(3건) 도입 등이다. ②관련 단체와 의원실이 함께 준비해서 발의한 법안은 5건이다. 중앙당 정책위원회와 논의를 거쳤기에 이 역시 당론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있지만, 정당 주도성보다 단체 중심성이 강하여 별도로 분류했다. ③마지막으로 의원실이 자체적으로 준비해서 발의한 의안은 정책 1건, 지역 관련 1건 등 단 2건에 불과했다. 게을러서가 아니다(강조). ‘자체적’이라는 말은 사실 큰 의미가 없다. 정당의 정책이 곧 의원실의 정책이었기 때문이다. 핵심 의제와 현안에 대한 입장이 정당에서 나왔으며 당 차원에서 단기 과제와 중장기 과제를 구분하여 당력을 집중할 우선 입법과제를 정했다.5)


20대 국회는 이와 달랐다. 우리 의원실이 발의한 법안은 모두 130건이다. 17대 국회보다 3.8배 많다. 한 건도 허투루 만들지 않았다고 자신한다. 법안 통과를 위해서도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무게감은 현저히 가벼웠다. 중요하지 않은 법안이라서가 아니다. 이 법안들은 앞서와 같은 분류가 큰 의미가 없다. ‘정당의 정책’이라고 할 수 있는 법안이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 의원실이 ‘자체적’으로 만든 법안이다. 농업 분야 법안 5건 정도가 당론 발의라 볼 수 있지만, 농민위원회 활동가의 헌신에 기인한 것이었을 뿐 당 차원의 사업은커녕 당에서는 별다른 관심도 없었다. 정당과 의원실은 이원화되었다. 


관련 단체와 협력관계는 어땠을까? 더 밀접해졌다. 단체는 정당을 거치지 않고 곧장 의원실을 찾았다. 친분이 주된 동력이었다. 문제는 의원실과 단체의 관계는 유동적이라는 점이다. 더 이익이 되는 곳으로 언제든 이동해 간다. 정당과 단체의 관계는 다르다. 만약 어떤 이익단체가 특정 정당을 통해 정치적 이익을 실현하기로 결심한다면, 당원으로 가입하고, 당비를 내고, 자기 조직의 대표자를 선출직 정치인으로 당선시키려 하고, 이를 위해 정당을 키우는 일에 힘을 기울이게 될 것이다. 정당은 조직-집단과 관계를 통해 사회적 기반을 강화하고, 그들의 대표자에게 공직을 주고, 그들의 이익을 옹호하면서 스스로 정체성을 확립하게 된다. 의원실과 단체는 협력관계에 머물지만, 정당과 단체는 공동운명체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20대 국회에서도 열심히 일했지만, ‘정당’의 자리는 협소해졌다.


민주노동당의 무상의료 정책을 누가 담당했을까? 현애자 의원이다. 정당에서 일했던 사람도 잘 기억하지 못한다. 의원실이 아무리 열심히 했다 해도 ‘무상의료’는 ‘민주노동당’의 것이다. 억울할 것도 없다. 사회의 주된 변화를 제안하고 이끄는 것은 정당이다. 지금 무언가를 하고자 한다면 정당이 바로 그 일을 해야 한다. 기억에 남는 정책이 없는 정당은 정체성이 없는 정당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지금의 정치가 위기로 느껴진다면, 정당들이 정책을 통해 기반을 만드는 일을 소홀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1)  뉴시스, 사회복지사·의료인 등 파산자 자격 제한 폐지 2007.02.27

 2) 서울신문, 파산 의료인 면허정지 안 된다 2007.03.03

3)  레디앙, 경제민주화운동본부 주요활동 목록, 2008.02.26

4)  프레시안, 신용불량자들, "정부가 죄인 취급, 두 번 죽이고 있다", 2005.02.02

5)  한겨레, 빈곤층 카드빚 탕감·일자리 나누기 2004.0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