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여의도 생활
5. 빈곤해서 빈곤 정책

갑작스레 시작된 여의도 생활을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하고 있을 줄, 그때는 정말 몰랐다. 국회의원 임기 4년 동안 나도 파견 근무를 한다고 생각했다.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시작이었다. 부처가 ‘업무보고’를 온다는데, 업무보고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뭘 해야 하는지 몰랐다. 국회의원에게 어떤 권한이 있고, 의원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누구도 설명해주지 않았고 알 수 있는 길도 없었다. 우리 곁엔 ‘국회 경험자’가 없었다. 정치가 중요하다고 했지만, 획득한 권력을 제대로 사용하는 방법은 배운 적이 없었다. 처음 하는 일이라 해서 ‘적응할 수 있는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투입된 날부터 일해야 했고, 나의 준비 여부와 상관없이 나는 ‘준비된 사람’이어야 했다.
처음 맡은 상임위원회는 보건복지위원회였다. 17대 국회의원 중 재산 순위 꼴찌는 농민 출신 강기갑 의원이었다. 여성농민 현애자 의원은 간발의 차로 끝에서 두 번째였다. 농민 의원 2명이 나란히 최하위였으니 농민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확실히 보여준 셈이다. 당선 이후 상임위원회를 결정하는데 농업을 담당하는 상임위는 일찌감치 강기갑 의원 몫이었다. 왜 남성에게 우선권이 주어지는지 지금도 이해할 수 없지만, 아무튼 그랬다. 현애자 의원은 보건복지위원회를 희망했다. 어렵게 살아온 사람이 어려운 사람 사정을 더 잘 알 수 있다는 이유였다. 재산 순위 최하위권 의원의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보건복지 분야의 여러 영역 중 ‘빈곤 정책’을 담당하게 됐다. 의원실 보좌진 중 가장 가난한 사람이 역시 농민 출신인 나였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상당히 이상한 기준이지만, 그때는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우리나라 빈곤 정책은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에서 시작한다. 제도를 알아야 문제점도 알 수 있다는 생각에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을 파고 들었다. 조문을 통째로 외웠고, 시행령, 시행규칙은 물론 사업안내지침까지 읽고 또 읽었으며 관련 논문과 연구보고서를 뒤졌다. 내가 열심히 일하는 만큼 가난한 이들의 삶이 나아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책임감만큼 두려움도 컸다. 밤이면 잠이 오지 않았고, 새벽이면 눈이 절로 떠졌다. 해야 할 일은 쌓여가는데 내 실력은 저만큼 뒤처져 있었다. 부지런한 꿈은 저 혼자 앞서갔다. 이때 나의 스승은 빈곤 단체들이었다. 글로 배운 것들이 이들을 만나면 현실이 되었다. 내 책상 위의 자료는 ‘사람의 삶’이었다.
기초생활보장제도 담당자가 되어 처음 만난 이름은 ‘최옥란’이다. 뇌성마비 1급 중증 여성장애인 최옥란은 2001년 기초생활수급비로 살아갈 수 없다면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시작한다. 당시 1인 가구 수급비는 생계급여와 주거급여를 더해 모두 28만6천 원이었다. 장애수당 4만 원까지 포함해 33만1천 원이 한 달 소득의 전부였다. 돈을 벌 수도 없었다. 노점상을 하다 수급자가 되었는데 다시 노점을 하면 수급에서 탈락하거나 그나마 받던 급여가 깎이기 때문이다. 생활을 보장하기에 턱없이 낮은 수급비 문제를 사회에 알렸던 그는 2002년 스스로 세상을 등진다. 그의 농성과 죽음을 계기로 ‘빈곤 철폐를 위한 사회연대(이하 빈곤사회연대)’1)가 만들어졌다.
1) 빈곤사회연대 홈페이지(단체소개), 2001년 12월 '민중생존권 쟁취와 최저생계비 현실화'를 요구하며 명동성당에서 농성투쟁을 진행한 최옥란 열사의 투쟁을 기점으로 기초생활보장제도를 중심으로 한 다양한 생활권의 문제를 제기하고자 '기초법 연석회의'가 구성되었습니다. 이후 노동의 불안정화, 민중의 빈곤화에 맞선 광범위한 도시빈민의 연대를 모색하기 위해 2004년 3월 30일 ‘빈곤해결을 위한 사회연대(준)’이 만들어졌으며, 2008년 4월 16일 이름을 ‘빈곤철폐를 위한 사회연대’로 바꾸어 反빈곤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나는 빛의 속도로 빈곤사회연대에 ‘의존적’ 인간이 되었다. 이들은 기초생활 수급자의 사례를 가장 많이 알고 있었고, 수급자가 되지 못한 사례도 가장 많이 알고 있었다. 수급자들을 대신하여 행정과 다퉜고, 그 덕에 행정서류와 절차도 잘 알았다. 수급자들에겐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나는 홍반장’ 같은 사람들이었고, 나에겐 연구자들보다 더 믿을 수 있는 정책 전문가들이었다. 법의 문제와 운영의 허점을 구분할 줄 알았고, 지금 당장 싸워서 해결할 수 있는 일과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의 차이를 알았다. 그뿐인가. “다들 빈곤하게 살면서 어떻게 빈곤을 철폐해요.” 활동가들을 놀리는 재미도 있었다. 정책을 다루면서 함께 논의할 당사자 단체가 있다는 것은 큰 행운이었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은 “생활이 어려운 사람에게 필요한 급여를 실시하여 이들의 최저생활을 보장하고 자활을 돕는 것을 목적”으로 1999년 9월에 제정되어 2000년부터 시행됐다. 1997년 IMF 외환위기로 한국 사회는 큰 혼란을 겪고 있었다. 기업들이 줄줄이 도산하면서 대규모 실업 사태가 발생했으며 가정이 파탄 나고, 거리 노숙인이 증가했다. 고통은 약자에게 더 컸다. 결식아동이 늘어나고, 아동학대, 노인 유기가 빈번해졌다. 빈곤은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니었다. 가족의 부양만으로 해결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의 기초생활을 권리로써 보장하는 기초생활보장제도가 도입된 것이다. 최저생계비 이하 소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초적 생활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했다. 아름다운 제도였다. 하지만, 취지와 달리 실질적인 사회안전망이 되지 못했다.
기초생활수급자가 되려면 ‘소득’과 ‘재산(을 소득으로 환산한 금액)’이 최저생계비 이하여야 하고(현재는 중위소득 기준), 부양의무자가 없거나, 있어도 부양 능력이 없어야 했다. ‘소득’은 실제 소득을 말하는 게 아니다. 실제 소득은 당연히 소득으로 산정되고, 실제 소득이 없더라도 만약 일을 한다면 얻게 될 예상액을 더해 소득으로 잡았다. 이 때문에 아동과 노인, 장애인이 아니라면 수급자가 되기 어려웠다. 수급자가 되더라도 급여를 다 받지 못했다. 예상 소득을 추정해 그만큼 급여에서 깎았다. ‘추정소득’이라 불렀는데, 이는 진짜 소득이 아니라 ‘허수’에 불과해 그만큼 급여가 줄어든다. 부양의무자 기준은 더 심각했다. 오랫동안 소식이 끊겼던 부모, 연락 한 번 하지 않았던 자녀, 모두 부양의무자였다. 실제 부양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부양의무자의 소득과 재산이 일정 수준이 넘으면 ‘부양의 의무’를 부과했다. 부양의무자 기준을 뚫고 어렵게 수급자가 되더라도 부양비를 받는 것으로 간주해 급여를 깎았다. 가족 관계가 이미 단절되었더라도 과거에 가족이었던 사람 모두가 가난해야만 자신이 수급자가 될 수 있었다.

2004년 11월, 수급자들의 염원을 모아 부양의무자 기준을 폐지하는 기초생활보장법 개정안을 발의한다. 재산의 소득환산액 기준을 완화하고, 차상위계층에 대한 지원을 명시했다. 이 법은 일명 ‘한풀이법’이라고 불렸다. 현장의 목소리를 그대로 담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발의한 개정안이 원안 그대로 통과되지 못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문제 제기가 사람들의 공감을 얻는다면 제도가 개선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정치의 힘을 순수하게 믿었다. 하지만, 논의는 오래도록 제자리에 머물렀다. 여야 간 정권이 바뀌어도 달라지지 않았다. 야당이 사각지대 해소를 요구하면 여당은 예산의 제약을 말했다. 두 의견은 영원히 평행선을 달릴 것만 같았다. 생계를 비관한 자살은 계속되었다.
빈곤 정책을 담당하게 된 후 수많은 죽음을 만났다. 2010년 10월, 건설 일용직으로 일하던 50대 남성이 자신의 소득으로 수급에서 탈락할 위기에 놓이자 장애인 아들의 수급권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012년 8월, 거제시청 화단에서 80대 할머니가 세상을 등졌다. 무직이던 사위가 직장을 얻게 되면서 수급에서 탈락했기 때문이다. 2013년 9월, 딸의 취업으로 수급에서 탈락한 50대 아버지가 세상을 등졌다. 아버지는 신부전증을 앓고 있었고, 의료급여를 받지 못하면 매달 100만 원의 병원비를 부담해야 했다. 자식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 극단적 선택을 한 것이다.
그리고, 사회에 큰 충격을 안긴 ‘세 모녀 사건’이 발생한다. 2014년 2월 26일, 서울 송파구 석촌동의 단독주택 반지하 방에서 어머니와 30대 두 딸이 숨졌다. 방안에는 현금 70만 원과 함께 ‘주인 아주머니께... 죄송합니다.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라는 메모가 남겨져 있었다. 식당에서 일하던 어머니는 다치면서 일을 못 하게 되었고, 지병이 있던 큰딸은 병원비 부담에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 만화가가 되고 싶었던 둘째 딸은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가족 병원비와 생활비로 신용불량자가 되었다. 500원 지출까지 가계부를 살뜰히 썼던 이들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남긴 말은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였다. 키우던 고양이도 함께 떠났다.
2014년은 슬픈 해였다. 불과 일주일 뒤, 3월 2일에는 30대 여성이 네 살 아들과 함께 아파트 화단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옷 주머니에 있던 내지 못한 세금고지서에는 ’미안하다‘고 적혀있었다. 3월 3일에는 40대 아버지가 장애 2급의 십 대 딸과 네 살 아들과 함께 세상을 등졌다. 3월 5일에는 일용직 노동자 윤모씨가 승용차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그는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일을 할 수 없었고, 월세가 밀리자 기초생활수급 신청을 했지만, 오래전 헤어져 연락이 끊긴 아버지가 살아계신 것으로 확인되어 수급자가 되지 못했다.
진심으로 부양의무자 기준을 폐지하고 싶었다. 가난 때문에 세상을 떠나는 사연을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국가의 역할은 국민을 보호하는 것 아니었나. 정치의 역할은 시민의 삶을 지키는 것 아니었나. 경제적 실패가 실존에 위협이 되지 않도록, 감당할 수 없는 사회적 위험으로부터 삶을 지켜갈 수 있도록, 세상 어디에도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이 포기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제도를 마련하고 싶었다. 당사자들과 시민사회단체와 함께 정말 열심히 노력했다.
기초생활보장제도는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느리고 더디게 개선되었다. 부양의무자 제도는 교육급여의 경우 2015년, 주거급여는 2018년에 폐지됐고, 생계급여는 2021년부터 원칙적으로 적용하지 않고 있지만, 일정한 소득과 재산을 초과하면 안 된다는 기준이 있어 ’전면 폐지‘된 것은 아니다. 2025년 현재, 의료급여는 중증장애인 가구를 제외하고 아직 남아있다. 계속되는 노력으로 단단한 널빤지에 구멍을 뚫었지만 쓸만한 가구가 되기엔 아직 멀었다. 우리는 과거보다 ’잘 사는 나라‘가 되었지만, 사회구성원 모두가 잘살게 된 것은 아니다. 양극화 지표는 나빠졌다. 고소득층과 저소득층 간 소득 격차가 지속적으로 벌어지고 있으며, 자산 불평등도 심화되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빈곤은 이제 ’인기 있는‘ 주제가 아니다. 가난한 이들의 삶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불평등을 개선하는 지난한 노동에 정치적 이상을 거는 이들도 사라지고 있다.
불평등은 민주주의의 기반을 약하게 만든다. 불평등은 극단주의 세력이 활개를 칠 수 있는 양분이 된다. 정치가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일을 소홀히 한다면, 극단주의 세력과 대중영합주의자들은 독버섯처럼 자라날 것이고, 이로 인해 정치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다면, 가난하고 약한 이들의 삶은 더 어려워질 것이다. 이것은 우리들의 삶의 문제이자 민주주의에 관한 문제다.
2장 여의도 생활
갑작스레 시작된 여의도 생활을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하고 있을 줄, 그때는 정말 몰랐다. 국회의원 임기 4년 동안 나도 파견 근무를 한다고 생각했다.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시작이었다. 부처가 ‘업무보고’를 온다는데, 업무보고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뭘 해야 하는지 몰랐다. 국회의원에게 어떤 권한이 있고, 의원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누구도 설명해주지 않았고 알 수 있는 길도 없었다. 우리 곁엔 ‘국회 경험자’가 없었다. 정치가 중요하다고 했지만, 획득한 권력을 제대로 사용하는 방법은 배운 적이 없었다. 처음 하는 일이라 해서 ‘적응할 수 있는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투입된 날부터 일해야 했고, 나의 준비 여부와 상관없이 나는 ‘준비된 사람’이어야 했다.
처음 맡은 상임위원회는 보건복지위원회였다. 17대 국회의원 중 재산 순위 꼴찌는 농민 출신 강기갑 의원이었다. 여성농민 현애자 의원은 간발의 차로 끝에서 두 번째였다. 농민 의원 2명이 나란히 최하위였으니 농민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확실히 보여준 셈이다. 당선 이후 상임위원회를 결정하는데 농업을 담당하는 상임위는 일찌감치 강기갑 의원 몫이었다. 왜 남성에게 우선권이 주어지는지 지금도 이해할 수 없지만, 아무튼 그랬다. 현애자 의원은 보건복지위원회를 희망했다. 어렵게 살아온 사람이 어려운 사람 사정을 더 잘 알 수 있다는 이유였다. 재산 순위 최하위권 의원의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보건복지 분야의 여러 영역 중 ‘빈곤 정책’을 담당하게 됐다. 의원실 보좌진 중 가장 가난한 사람이 역시 농민 출신인 나였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상당히 이상한 기준이지만, 그때는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우리나라 빈곤 정책은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에서 시작한다. 제도를 알아야 문제점도 알 수 있다는 생각에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을 파고 들었다. 조문을 통째로 외웠고, 시행령, 시행규칙은 물론 사업안내지침까지 읽고 또 읽었으며 관련 논문과 연구보고서를 뒤졌다. 내가 열심히 일하는 만큼 가난한 이들의 삶이 나아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책임감만큼 두려움도 컸다. 밤이면 잠이 오지 않았고, 새벽이면 눈이 절로 떠졌다. 해야 할 일은 쌓여가는데 내 실력은 저만큼 뒤처져 있었다. 부지런한 꿈은 저 혼자 앞서갔다. 이때 나의 스승은 빈곤 단체들이었다. 글로 배운 것들이 이들을 만나면 현실이 되었다. 내 책상 위의 자료는 ‘사람의 삶’이었다.
기초생활보장제도 담당자가 되어 처음 만난 이름은 ‘최옥란’이다. 뇌성마비 1급 중증 여성장애인 최옥란은 2001년 기초생활수급비로 살아갈 수 없다면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시작한다. 당시 1인 가구 수급비는 생계급여와 주거급여를 더해 모두 28만6천 원이었다. 장애수당 4만 원까지 포함해 33만1천 원이 한 달 소득의 전부였다. 돈을 벌 수도 없었다. 노점상을 하다 수급자가 되었는데 다시 노점을 하면 수급에서 탈락하거나 그나마 받던 급여가 깎이기 때문이다. 생활을 보장하기에 턱없이 낮은 수급비 문제를 사회에 알렸던 그는 2002년 스스로 세상을 등진다. 그의 농성과 죽음을 계기로 ‘빈곤 철폐를 위한 사회연대(이하 빈곤사회연대)’1)가 만들어졌다.
1) 빈곤사회연대 홈페이지(단체소개), 2001년 12월 '민중생존권 쟁취와 최저생계비 현실화'를 요구하며 명동성당에서 농성투쟁을 진행한 최옥란 열사의 투쟁을 기점으로 기초생활보장제도를 중심으로 한 다양한 생활권의 문제를 제기하고자 '기초법 연석회의'가 구성되었습니다. 이후 노동의 불안정화, 민중의 빈곤화에 맞선 광범위한 도시빈민의 연대를 모색하기 위해 2004년 3월 30일 ‘빈곤해결을 위한 사회연대(준)’이 만들어졌으며, 2008년 4월 16일 이름을 ‘빈곤철폐를 위한 사회연대’로 바꾸어 反빈곤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나는 빛의 속도로 빈곤사회연대에 ‘의존적’ 인간이 되었다. 이들은 기초생활 수급자의 사례를 가장 많이 알고 있었고, 수급자가 되지 못한 사례도 가장 많이 알고 있었다. 수급자들을 대신하여 행정과 다퉜고, 그 덕에 행정서류와 절차도 잘 알았다. 수급자들에겐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나는 홍반장’ 같은 사람들이었고, 나에겐 연구자들보다 더 믿을 수 있는 정책 전문가들이었다. 법의 문제와 운영의 허점을 구분할 줄 알았고, 지금 당장 싸워서 해결할 수 있는 일과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의 차이를 알았다. 그뿐인가. “다들 빈곤하게 살면서 어떻게 빈곤을 철폐해요.” 활동가들을 놀리는 재미도 있었다. 정책을 다루면서 함께 논의할 당사자 단체가 있다는 것은 큰 행운이었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은 “생활이 어려운 사람에게 필요한 급여를 실시하여 이들의 최저생활을 보장하고 자활을 돕는 것을 목적”으로 1999년 9월에 제정되어 2000년부터 시행됐다. 1997년 IMF 외환위기로 한국 사회는 큰 혼란을 겪고 있었다. 기업들이 줄줄이 도산하면서 대규모 실업 사태가 발생했으며 가정이 파탄 나고, 거리 노숙인이 증가했다. 고통은 약자에게 더 컸다. 결식아동이 늘어나고, 아동학대, 노인 유기가 빈번해졌다. 빈곤은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니었다. 가족의 부양만으로 해결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의 기초생활을 권리로써 보장하는 기초생활보장제도가 도입된 것이다. 최저생계비 이하 소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초적 생활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했다. 아름다운 제도였다. 하지만, 취지와 달리 실질적인 사회안전망이 되지 못했다.
기초생활수급자가 되려면 ‘소득’과 ‘재산(을 소득으로 환산한 금액)’이 최저생계비 이하여야 하고(현재는 중위소득 기준), 부양의무자가 없거나, 있어도 부양 능력이 없어야 했다. ‘소득’은 실제 소득을 말하는 게 아니다. 실제 소득은 당연히 소득으로 산정되고, 실제 소득이 없더라도 만약 일을 한다면 얻게 될 예상액을 더해 소득으로 잡았다. 이 때문에 아동과 노인, 장애인이 아니라면 수급자가 되기 어려웠다. 수급자가 되더라도 급여를 다 받지 못했다. 예상 소득을 추정해 그만큼 급여에서 깎았다. ‘추정소득’이라 불렀는데, 이는 진짜 소득이 아니라 ‘허수’에 불과해 그만큼 급여가 줄어든다. 부양의무자 기준은 더 심각했다. 오랫동안 소식이 끊겼던 부모, 연락 한 번 하지 않았던 자녀, 모두 부양의무자였다. 실제 부양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부양의무자의 소득과 재산이 일정 수준이 넘으면 ‘부양의 의무’를 부과했다. 부양의무자 기준을 뚫고 어렵게 수급자가 되더라도 부양비를 받는 것으로 간주해 급여를 깎았다. 가족 관계가 이미 단절되었더라도 과거에 가족이었던 사람 모두가 가난해야만 자신이 수급자가 될 수 있었다.
2004년 11월, 수급자들의 염원을 모아 부양의무자 기준을 폐지하는 기초생활보장법 개정안을 발의한다. 재산의 소득환산액 기준을 완화하고, 차상위계층에 대한 지원을 명시했다. 이 법은 일명 ‘한풀이법’이라고 불렸다. 현장의 목소리를 그대로 담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발의한 개정안이 원안 그대로 통과되지 못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문제 제기가 사람들의 공감을 얻는다면 제도가 개선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정치의 힘을 순수하게 믿었다. 하지만, 논의는 오래도록 제자리에 머물렀다. 여야 간 정권이 바뀌어도 달라지지 않았다. 야당이 사각지대 해소를 요구하면 여당은 예산의 제약을 말했다. 두 의견은 영원히 평행선을 달릴 것만 같았다. 생계를 비관한 자살은 계속되었다.
빈곤 정책을 담당하게 된 후 수많은 죽음을 만났다. 2010년 10월, 건설 일용직으로 일하던 50대 남성이 자신의 소득으로 수급에서 탈락할 위기에 놓이자 장애인 아들의 수급권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012년 8월, 거제시청 화단에서 80대 할머니가 세상을 등졌다. 무직이던 사위가 직장을 얻게 되면서 수급에서 탈락했기 때문이다. 2013년 9월, 딸의 취업으로 수급에서 탈락한 50대 아버지가 세상을 등졌다. 아버지는 신부전증을 앓고 있었고, 의료급여를 받지 못하면 매달 100만 원의 병원비를 부담해야 했다. 자식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 극단적 선택을 한 것이다.
그리고, 사회에 큰 충격을 안긴 ‘세 모녀 사건’이 발생한다. 2014년 2월 26일, 서울 송파구 석촌동의 단독주택 반지하 방에서 어머니와 30대 두 딸이 숨졌다. 방안에는 현금 70만 원과 함께 ‘주인 아주머니께... 죄송합니다.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라는 메모가 남겨져 있었다. 식당에서 일하던 어머니는 다치면서 일을 못 하게 되었고, 지병이 있던 큰딸은 병원비 부담에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 만화가가 되고 싶었던 둘째 딸은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가족 병원비와 생활비로 신용불량자가 되었다. 500원 지출까지 가계부를 살뜰히 썼던 이들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남긴 말은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였다. 키우던 고양이도 함께 떠났다.
2014년은 슬픈 해였다. 불과 일주일 뒤, 3월 2일에는 30대 여성이 네 살 아들과 함께 아파트 화단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옷 주머니에 있던 내지 못한 세금고지서에는 ’미안하다‘고 적혀있었다. 3월 3일에는 40대 아버지가 장애 2급의 십 대 딸과 네 살 아들과 함께 세상을 등졌다. 3월 5일에는 일용직 노동자 윤모씨가 승용차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그는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일을 할 수 없었고, 월세가 밀리자 기초생활수급 신청을 했지만, 오래전 헤어져 연락이 끊긴 아버지가 살아계신 것으로 확인되어 수급자가 되지 못했다.
진심으로 부양의무자 기준을 폐지하고 싶었다. 가난 때문에 세상을 떠나는 사연을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국가의 역할은 국민을 보호하는 것 아니었나. 정치의 역할은 시민의 삶을 지키는 것 아니었나. 경제적 실패가 실존에 위협이 되지 않도록, 감당할 수 없는 사회적 위험으로부터 삶을 지켜갈 수 있도록, 세상 어디에도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이 포기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제도를 마련하고 싶었다. 당사자들과 시민사회단체와 함께 정말 열심히 노력했다.
기초생활보장제도는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느리고 더디게 개선되었다. 부양의무자 제도는 교육급여의 경우 2015년, 주거급여는 2018년에 폐지됐고, 생계급여는 2021년부터 원칙적으로 적용하지 않고 있지만, 일정한 소득과 재산을 초과하면 안 된다는 기준이 있어 ’전면 폐지‘된 것은 아니다. 2025년 현재, 의료급여는 중증장애인 가구를 제외하고 아직 남아있다. 계속되는 노력으로 단단한 널빤지에 구멍을 뚫었지만 쓸만한 가구가 되기엔 아직 멀었다. 우리는 과거보다 ’잘 사는 나라‘가 되었지만, 사회구성원 모두가 잘살게 된 것은 아니다. 양극화 지표는 나빠졌다. 고소득층과 저소득층 간 소득 격차가 지속적으로 벌어지고 있으며, 자산 불평등도 심화되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빈곤은 이제 ’인기 있는‘ 주제가 아니다. 가난한 이들의 삶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불평등을 개선하는 지난한 노동에 정치적 이상을 거는 이들도 사라지고 있다.
불평등은 민주주의의 기반을 약하게 만든다. 불평등은 극단주의 세력이 활개를 칠 수 있는 양분이 된다. 정치가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일을 소홀히 한다면, 극단주의 세력과 대중영합주의자들은 독버섯처럼 자라날 것이고, 이로 인해 정치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다면, 가난하고 약한 이들의 삶은 더 어려워질 것이다. 이것은 우리들의 삶의 문제이자 민주주의에 관한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