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민의 보좌관 일기]

4. 정치의 시작
농민의 마음 (2007. 4. 25. 작성)
몇 년 전, '초롱무' 농사를 지었다(초롱무는 여름에 재배하는 소형무인데 뿌리 모양이 종처럼 이쁘게 생겼다). 원래 채소류는 가격이 높게 나오지 않아 잘 심지 않는데 그 해는 가진 돈이 없어 최소한의 비용으로 지을 수 있는 작물을 택한 것이었다.
이름도 이쁜 초롱무를 심어놓고, 날마다 밭에 나갔다. 씨를 뿌린지 열흘쯤 지났나? 비가 온 다음 날, 밭에 나갔더니 싹이 터 있었다. 이천 평 정도 되는 밭에 작은 새싹들이 총총히 돋아있는 광경이 지금도 눈앞에 생생하다. 초롱무 새싹이 너무 이뻐서 눈물이 날 정도였다.
초롱무가 다 자라기까지 백일동안 몇 차례 솎아주고, 농약도 치고, 비료도 치고, 물도 주고, 밭에서 허리 한 번 펴지 못하고 일했다. 밭 주변 두렁이 아까워서 호박도 심었다. 동네 아줌마들은 어째 이렇게 무를 잘 키웠냐고, 때깔도 좋고, 참말 이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날마다 상상했다. 초롱무를 팔면 삼겹살도 사먹고, 밀린 빚도 조금 갚고, 연체된 공과금도 내고, 그래야지. 좀 손해를 보더라도 밭떼기(포전매매, 작물이 있는 밭 전체를 파는 것)로 넘길까? 그냥 작업하면 힘들긴 해도 수입이 더 될 텐데. 밭떼기로 사러 오면 흥정해 보고, 아니면 직접 작업해야지. 평당 삼천 원만 나와도….. 육백만 원!
드디어 수확하는 날이 되었다. 가격이 별로 좋지 않다는 이야기가 들렸지만, 평당 천 원만 나오면 손해는 아니라고 계산했다. 마침내 수확하는 날, 아줌마들 20명을 썼고, 5톤 트럭을 불렀고, 농민회 사람들도 와서 일을 거들었다. 아침, 점심 새참을 냈고, 저녁에는 일을 도와준 사람들과 식당에서 닭도리탕을 먹었다.
다음날.
우리 통장에는 36만 원이 입금되었다.
백일 동안 날마다 밭에 나가 살았는데, 모두 다 정말 잘 키웠다고 했는데, 바라만 봐도 뿌듯할 만큼 우리 초롱무는 모양도 이뻤는데, 퇴비값이며 농약값이며 아줌마들 인건비며 생산비만 해도 백만 원이 넘게 들어갔는데, 트럭을 부르는 값만 이십만 원이었는데, 그랬는데, 단돈 36만 원이었다.
텅 빈 밭에 나가 엉엉 울었다.
며칠 동안 밥도 안 넘어갔다.
그리고,
그 밭을 다시 갈아
또 씨를 뿌렸다.
부푼 꿈을 안고 시작했던 농사의 즐거움은 오래 가지 않았다. 농산물 가격은 언제나 생산비에 못 미쳤다. 풍년이 들면 마음은 풍요로웠지만, 가격이 하락했다. 날씨로 인해 흉년이 들면 가격은 둘째치고 내다 팔 농작물이 없었다. 어쩌다 가격이 오르면 정부는 가계안정조치라며 수입을 통해 농산물 가격을 인위적으로 하락시켰다.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가을걷이로 목돈이 들어와도 종자값, 농약값, 비료값, 소작료, 정책자금과 대출금 이자까지 밀린 대금을 정산하고 나면 생활비는커녕 다음 해 농사지을 자금도 남지 않았다. 다음 해 농사를 짓기 위해서 다시 빚을 내야 했다. 보릿고개는 옛날이야기 속 단어가 아니라 눈앞의 현실이었다.
부채가 늘자 더 열심히 일해서 갚을 생각에 농사 규모를 키웠다. 3천 평으로 시작했던 감자 농사는 해를 거듭하면서 3만 평까지 커졌다. 가족 노동이나 이웃 간 품앗이로 감당할 규모가 아니었다. 인력업체를 통해 사람을 구했다. 수십 명의 일용직 일꾼이 봉고차를 타고 왔다. 일당은 현금으로 지급해야 한다. 인력업체에 수수료도 내야 했다. 우리가 이용하던 업체의 반장은 ‘돼지엄마’라고 불렸는데 수수료 벌이로 아파트를 샀다고 했다. 농사 규모가 커지니 농기계로 해야 하는 일도 늘었다. 농기계 사용료는 하루에 몇 십만 원이었다. 역시 현금으로 내야했다. 모두 부채였다. 빚을 갚으려 농사 규모를 키웠지만, 이 때문에 빚은 더 늘었다. 빠져나올 길이 안 보였다. 읍내에서 ‘치킨집’만 해도 먹고 살 수 있을 것이라던 자신감은 흔적 없이 사라졌다. 쉬지 않고 열심히 일했을 뿐인데 남은 건 절망이었다.
2004년 2월 16일, 우리나라 최초의 자유무역협정(FTA)인 한-칠레 자유무역협정이 국회에서 비준되었다. 농업을 포함하여 모든 산업을 자유화 대상으로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관세를 단계적으로 철폐한다고 했다. 자동차, 컴퓨터, 핸드폰 수출에 유리하고 농업은 절대적으로 불리한 협정이었다. 칠레가 포문을 열고 나면 미국이 기다리고 있었다. 농업은 정말 시대에 뒤떨어진 산업에 불과할까? 농촌은 이렇게 소멸해도 괜찮은 걸까? 농민이 사라진 나라에서는 새들도 지저귀지 않을 텐데.
농민들은 ‘FTA 반대’를 외쳤다. 국회의사당 앞 도로에 낟알을 뿌렸다. 전투경찰에 둘러싸여 구호를 외치면서 저 동그란 지붕 아래 농민 대표자가 한 사람만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국회 밖에서 분노하는 것 말고, 원통해서 눈물을 닦는 일 말고, 국회 안에서 우리의 의견을 말하고 싶었다. ‘그래, 정치를 하자. 우리의 대표를 국회로 보내자.’ 절망의 낭떠러지에서 부여잡은 희망이었다. 일하는 사람들의 정당을 표방한 민주노동당을 선택한 것은 자연스러운 경로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정당에 가입했다.
그해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은 원내 진출에 성공한다. 진보정당 최초로 10명의 국회의원이 당선되었고, 단 한 명만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농민 국회의원이 두 명이나 생겼다. 두루마기와 수염을 휘날리던 강기갑 의원과 제주 출신 현애자 의원이다. 현 의원을 배출한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에서 연락이 왔다. 현직 농민이자 여성인 보좌관이 필요하다고 했다. 정책을 다룰 수 있어야 하고, 서울에서 생활해야 한다는 조건도 있었다. 겨우내 애지중지 키운 애호박이 막 수확을 앞두고 있었다. 한나절의 고민 끝에 8년 농사를 접기로 했다. 논농사, 밭농사, 하우스 농사, 아스팔트 농사1)를 거쳐 이제 ‘국회 농사’를 지으러 간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정치에 첫발을 디뎠다.
1) '아스팔트 농사'는 아스팔트가 깔린 도로 위에서 벌이는 집회와 시위를 농사에 비유한 것임.
2004년 5월 30일, 17대 국회 등원 첫날 국회의사당 본청 앞 계단에 서서 정문으로 걸어 들어오는 민주노동당 국회의원들을 바라봤다. 사회운동을 하던 이들이 마침내 시민의 대표가 되었다. 노동자, 농민을 대변해줄 사람들이었다. 밖에서 바라볼 때 국회는 ‘투쟁의 대상’이었다. 이제 안에서 변화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의 정당, 우리의 정치, 우리의 미래, 밝은 내일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찬란한 시작이었다.

이때의 정치는 모든 게 선명했다. 민주노동당은 노동자, 농민을 위한 정당이었으며 사회적 약자들의 대리인이었다. 이전까지 정치 안에서 들리지 않았던 목소리를 대표했다.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국회의원을 보면 정당의 정체성을 알 수 있었다. 농민 출신 국회의원은 농민의 입장에서 정치 활동을 했고, 노동조합 출신 국회의원은 노동자 입장에서 정치 활동을 했다. 대중조직의 대표로서 자격을 갖춘 사람이 정당의 선출직 후보가 되었고, 정당에 대한 시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정치적 대표가 되었다. 정당의 정치적 지향과 소속 국회의원들의 정치 활동 내용이 일치했다. 정당의 비전은 당원들과 구체적으로 공유되었으며 정책은 시민들이 그 정당을 지지하는 이유가 되었다.
정당은 사회의 한 부분을 대표했고, 정치가들은 그 부분의 대표자였다. 정치를 통해 대표의 영역은 넓고 깊어졌다. 내가 선택한 나의 정당, 우리 의원들이 자랑스러웠다.
[박선민의 보좌관 일기]
농민의 마음 (2007. 4. 25. 작성)
몇 년 전, '초롱무' 농사를 지었다(초롱무는 여름에 재배하는 소형무인데 뿌리 모양이 종처럼 이쁘게 생겼다). 원래 채소류는 가격이 높게 나오지 않아 잘 심지 않는데 그 해는 가진 돈이 없어 최소한의 비용으로 지을 수 있는 작물을 택한 것이었다.
이름도 이쁜 초롱무를 심어놓고, 날마다 밭에 나갔다. 씨를 뿌린지 열흘쯤 지났나? 비가 온 다음 날, 밭에 나갔더니 싹이 터 있었다. 이천 평 정도 되는 밭에 작은 새싹들이 총총히 돋아있는 광경이 지금도 눈앞에 생생하다. 초롱무 새싹이 너무 이뻐서 눈물이 날 정도였다.
초롱무가 다 자라기까지 백일동안 몇 차례 솎아주고, 농약도 치고, 비료도 치고, 물도 주고, 밭에서 허리 한 번 펴지 못하고 일했다. 밭 주변 두렁이 아까워서 호박도 심었다. 동네 아줌마들은 어째 이렇게 무를 잘 키웠냐고, 때깔도 좋고, 참말 이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날마다 상상했다. 초롱무를 팔면 삼겹살도 사먹고, 밀린 빚도 조금 갚고, 연체된 공과금도 내고, 그래야지. 좀 손해를 보더라도 밭떼기(포전매매, 작물이 있는 밭 전체를 파는 것)로 넘길까? 그냥 작업하면 힘들긴 해도 수입이 더 될 텐데. 밭떼기로 사러 오면 흥정해 보고, 아니면 직접 작업해야지. 평당 삼천 원만 나와도….. 육백만 원!
드디어 수확하는 날이 되었다. 가격이 별로 좋지 않다는 이야기가 들렸지만, 평당 천 원만 나오면 손해는 아니라고 계산했다. 마침내 수확하는 날, 아줌마들 20명을 썼고, 5톤 트럭을 불렀고, 농민회 사람들도 와서 일을 거들었다. 아침, 점심 새참을 냈고, 저녁에는 일을 도와준 사람들과 식당에서 닭도리탕을 먹었다.
다음날.
우리 통장에는 36만 원이 입금되었다.
백일 동안 날마다 밭에 나가 살았는데, 모두 다 정말 잘 키웠다고 했는데, 바라만 봐도 뿌듯할 만큼 우리 초롱무는 모양도 이뻤는데, 퇴비값이며 농약값이며 아줌마들 인건비며 생산비만 해도 백만 원이 넘게 들어갔는데, 트럭을 부르는 값만 이십만 원이었는데, 그랬는데, 단돈 36만 원이었다.
텅 빈 밭에 나가 엉엉 울었다.
며칠 동안 밥도 안 넘어갔다.
그리고,
그 밭을 다시 갈아
또 씨를 뿌렸다.
부푼 꿈을 안고 시작했던 농사의 즐거움은 오래 가지 않았다. 농산물 가격은 언제나 생산비에 못 미쳤다. 풍년이 들면 마음은 풍요로웠지만, 가격이 하락했다. 날씨로 인해 흉년이 들면 가격은 둘째치고 내다 팔 농작물이 없었다. 어쩌다 가격이 오르면 정부는 가계안정조치라며 수입을 통해 농산물 가격을 인위적으로 하락시켰다.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가을걷이로 목돈이 들어와도 종자값, 농약값, 비료값, 소작료, 정책자금과 대출금 이자까지 밀린 대금을 정산하고 나면 생활비는커녕 다음 해 농사지을 자금도 남지 않았다. 다음 해 농사를 짓기 위해서 다시 빚을 내야 했다. 보릿고개는 옛날이야기 속 단어가 아니라 눈앞의 현실이었다.
부채가 늘자 더 열심히 일해서 갚을 생각에 농사 규모를 키웠다. 3천 평으로 시작했던 감자 농사는 해를 거듭하면서 3만 평까지 커졌다. 가족 노동이나 이웃 간 품앗이로 감당할 규모가 아니었다. 인력업체를 통해 사람을 구했다. 수십 명의 일용직 일꾼이 봉고차를 타고 왔다. 일당은 현금으로 지급해야 한다. 인력업체에 수수료도 내야 했다. 우리가 이용하던 업체의 반장은 ‘돼지엄마’라고 불렸는데 수수료 벌이로 아파트를 샀다고 했다. 농사 규모가 커지니 농기계로 해야 하는 일도 늘었다. 농기계 사용료는 하루에 몇 십만 원이었다. 역시 현금으로 내야했다. 모두 부채였다. 빚을 갚으려 농사 규모를 키웠지만, 이 때문에 빚은 더 늘었다. 빠져나올 길이 안 보였다. 읍내에서 ‘치킨집’만 해도 먹고 살 수 있을 것이라던 자신감은 흔적 없이 사라졌다. 쉬지 않고 열심히 일했을 뿐인데 남은 건 절망이었다.
2004년 2월 16일, 우리나라 최초의 자유무역협정(FTA)인 한-칠레 자유무역협정이 국회에서 비준되었다. 농업을 포함하여 모든 산업을 자유화 대상으로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관세를 단계적으로 철폐한다고 했다. 자동차, 컴퓨터, 핸드폰 수출에 유리하고 농업은 절대적으로 불리한 협정이었다. 칠레가 포문을 열고 나면 미국이 기다리고 있었다. 농업은 정말 시대에 뒤떨어진 산업에 불과할까? 농촌은 이렇게 소멸해도 괜찮은 걸까? 농민이 사라진 나라에서는 새들도 지저귀지 않을 텐데.
농민들은 ‘FTA 반대’를 외쳤다. 국회의사당 앞 도로에 낟알을 뿌렸다. 전투경찰에 둘러싸여 구호를 외치면서 저 동그란 지붕 아래 농민 대표자가 한 사람만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국회 밖에서 분노하는 것 말고, 원통해서 눈물을 닦는 일 말고, 국회 안에서 우리의 의견을 말하고 싶었다. ‘그래, 정치를 하자. 우리의 대표를 국회로 보내자.’ 절망의 낭떠러지에서 부여잡은 희망이었다. 일하는 사람들의 정당을 표방한 민주노동당을 선택한 것은 자연스러운 경로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정당에 가입했다.
그해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은 원내 진출에 성공한다. 진보정당 최초로 10명의 국회의원이 당선되었고, 단 한 명만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농민 국회의원이 두 명이나 생겼다. 두루마기와 수염을 휘날리던 강기갑 의원과 제주 출신 현애자 의원이다. 현 의원을 배출한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에서 연락이 왔다. 현직 농민이자 여성인 보좌관이 필요하다고 했다. 정책을 다룰 수 있어야 하고, 서울에서 생활해야 한다는 조건도 있었다. 겨우내 애지중지 키운 애호박이 막 수확을 앞두고 있었다. 한나절의 고민 끝에 8년 농사를 접기로 했다. 논농사, 밭농사, 하우스 농사, 아스팔트 농사1)를 거쳐 이제 ‘국회 농사’를 지으러 간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정치에 첫발을 디뎠다.
1) '아스팔트 농사'는 아스팔트가 깔린 도로 위에서 벌이는 집회와 시위를 농사에 비유한 것임.
2004년 5월 30일, 17대 국회 등원 첫날 국회의사당 본청 앞 계단에 서서 정문으로 걸어 들어오는 민주노동당 국회의원들을 바라봤다. 사회운동을 하던 이들이 마침내 시민의 대표가 되었다. 노동자, 농민을 대변해줄 사람들이었다. 밖에서 바라볼 때 국회는 ‘투쟁의 대상’이었다. 이제 안에서 변화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의 정당, 우리의 정치, 우리의 미래, 밝은 내일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찬란한 시작이었다.
이때의 정치는 모든 게 선명했다. 민주노동당은 노동자, 농민을 위한 정당이었으며 사회적 약자들의 대리인이었다. 이전까지 정치 안에서 들리지 않았던 목소리를 대표했다.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국회의원을 보면 정당의 정체성을 알 수 있었다. 농민 출신 국회의원은 농민의 입장에서 정치 활동을 했고, 노동조합 출신 국회의원은 노동자 입장에서 정치 활동을 했다. 대중조직의 대표로서 자격을 갖춘 사람이 정당의 선출직 후보가 되었고, 정당에 대한 시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정치적 대표가 되었다. 정당의 정치적 지향과 소속 국회의원들의 정치 활동 내용이 일치했다. 정당의 비전은 당원들과 구체적으로 공유되었으며 정책은 시민들이 그 정당을 지지하는 이유가 되었다.
정당은 사회의 한 부분을 대표했고, 정치가들은 그 부분의 대표자였다. 정치를 통해 대표의 영역은 넓고 깊어졌다. 내가 선택한 나의 정당, 우리 의원들이 자랑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