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민의 보좌관 일기>

1. 나는 농민이었다
나는 농민이었다. 학창 시절 농촌활동을 갔던 지역에서 1996년에서 2004년까지 8년 동안 농사를 지었다. 이십 대의 나는 열정적이었고 그만큼 겁이 없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동네에 들어가 빈집을 고쳐 살았다. 불 때던 아궁이를 입식 부엌으로 바꾸고, 방에 보일러를 깔고, 화장실과 목욕탕을 만들었다. 할머니가 혼자 사셨다는 집은 마당을 빙빙 돌아 원추리, 달래, 돌미나리, 돌나물, 머위와 어린순을 꺾어 먹는 가죽나무가 있었다. 울안에 꽤 넓은 텃밭도 있어 부추, 가지, 호박, 고추, 토마토를 길렀다. 저 혼자 자란 냉이, 명아주, 민들레, 쑥은 봄철 향긋한 반찬이 되었다. 문만 나서면 먹을 것이 지천이었다. 마당 한가운데 커다란 보리수나무가 있어 동이 트면 부지런한 작은 새들이 지저귀었다. 아침마다 새소리에 눈을 떴다. 알람 시계가 필요 없었다. 비 오는 날이면 개구리가 요란하게 울었고, 가끔 맹꽁이도 보탰다. 가을이면 방안까지 들어온 귀뚜라미를 내쫓아야 했다. 수선화, 작약, 수국, 금낭화, 패랭이꽃, 도라지꽃이 다투어 피던 화단은 정갈했다. 늙은 감나무엔 작은 땡감이 주렁주렁 열렸고, 탱자나무가 울타리를 대신했다. 대문이 없는 집이었다.
첫 농사는 엽채류(잎을 먹는 채소)였다. 90년대 중반 쌈밥집이 막 유행하기 시작한 때라 고정판로만 확보하면 유망할 것 같았다. 농업정책자금 대출을 받아 비닐하우스를 짓고, 수경재배 시설을 갖추었다. 상추가 주작목이었고, 당시에는 생소했던 케일, 치커리, 청경채, 겨자채, 엔다이브, 로메인, 크레송 등 다양한 종류의 서양 엽채류를 키웠다. 농약은 치지 않았다. 친환경으로 승부를 보려 했다. 농사는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잎채소들은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랐지만, 팔 곳이 없었다. 서울의 대형 마트나 백화점이 가장 좋은 판로인데 지방의 소규모 개인 농장은 독자적으로 배송하기 어려웠다. 배송비가 너무 많이 들기 때문이다. 유기농이 서울 근교에서 자리 잡게 된 것은 소비처가 가까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인근 도시의 중형 마트에 판매대를 확보하고 쌈밥 전문 식당에도 납품했지만, 소비량이 생산량을 따라가지 못했다. 시대를 지나치게 앞서갔다. 이때만 해도 친환경 수경재배 작물은 ‘강남 사람들’이나 먹는 특별한 고급 농작물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결국 일반 농산물을 판매하는 농산물공판장에 가져갔다. 이곳은 일종의 중간도매시장으로 도매상인들이 경매를 통해 가격을 매긴다. 무농약 수경재배 상추는 땅에서 농약을 치고 키운 일반 상추보다 생산비가 많이 들고 수확량도 적어 단가가 높아야 했지만, 가격은 같았다. 아니, 같기만 해도 괜찮았다. 농약을 안 쳤으니 간혹 벌레 먹은 잎이 나오기도 했는데 그런 날은 형편없는 가격을 받았다. 한 상자에 5,000원이 손해 보지 않은 최소 기준이라면 500원이 나온 적도 있었다. 이런 날은 발밑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새벽부터 밤중까지 일해봐야 손에 쥐는 게 없었다. 남의 집에서 품을 팔아 일당을 받는 게 더 나았다. 도무지 생산성이 맞지 않았다. 버티고 버티다 수경재배를 포기하고 오이를 심었다. 오이는 쉽게 팔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오이 농사를 가장 힘든 농사로 꼽는다. 비닐하우스 안의 좁은 통로를 오가며 순을 집어 올리고, 잎 사이 가려진 오이를 찾아 수확하고, 오이가 가득 담긴 무거운 상자를 나르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다. 오이 농사를 오래 지은 농민들은 목디스크와 허리통증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 첫 아이를 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지만, 눈에 보이는 농사일을 외면할 수 없었다. 대부분의 농작물이 그렇지만, 오이도 한 번 수확을 시작하면 쉴 수 없다. 수확할 시기를 놓쳐 오이에 노란빛이 돌면 그대로 버려야 했다. 몸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아이를 업고 일했다. 오이는 잎과 줄기에 작은 가시가 있다. 아무리 조심해도 갓난아기의 여린 살이 가시에 쓸려 피가 나기 일쑤였다. 밤마다 아파 우는 아기와 함께 울었다. 그렇게 키웠건만, 기대와 달리 오이는 가격이 낮았다. 비닐하우스에서 생산한 오이만 나올 때는 그나마 괜찮았지만, 밭에서 키운 노지 오이가 쏟아져 나올 때면 가격이 바닥을 쳤다. 비닐하우스에서 더 일찍, 더 많이 수확하려면 난방을 일찍 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유류비가 너무 많이 들었다. 오이는 얼마든지 팔 수 있었지만, 가격은 기대할 수 없었다.
좀 더 가격경쟁력이 있는 작물을 찾았다. 꽈리고추는 폭락은 없다고들 했다. 대신 한 여름에 수확을 해야 한다. 여름날 비닐하우스 내부 온도는 사우나와 비슷하다. 하우스에 들어가면 채 십 분도 되지 않아 속옷은 물론, 겉옷까지 모두 땀으로 흠뻑 젖는다. 일을 도와주러 왔던 지인들이 삼십여 분 만에 “태어나서 이렇게 힘든 일은 처음 해봤다”며 고개를 저었다. 뭐라고 소문이 낫는지 삶의 무게가 무거워진 사람들이 종종 우리 농장으로 찾아왔다. 일주일만 머물다 가도 정신이 바짝 차려진다고들 했다. 왜 우리 집에서 스스로 심리 치료를 받고 가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일손이 생겨서 좋았다. 꽈리고추는 작은 건 괜찮지만 너무 크면 가격이 뚝 떨어진다. 농가 입장에서 작은 건 무게가 안 나가니 손해다. 그러니 적당한 크기에 딱 맞춰 수확해야 한다. 여름 햇살은 농작물을 쑥쑥 키웠고, 한 두렁을 끝내고 돌아보면 또 자라있었다. 수확기가 시작되면 3〜4개월은 단 하루도 쉴 수가 없다. 새벽 4시부터 시작한 일은 밤 10시가 넘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가 되어야 끝났다. 수확 후엔 선별 작업도 해야 한다. 그날 수확한 꽈리고추를 마루 가득 쏟아놓고 하나 하나 살펴 벌레 먹은 작물을 골라내는 과정인데, 바늘구멍만 한 자국을 찾아야 한다. 그 안에 벌레가 있다. 농약을 적게 쳐서 벌레가 많았다. 상자 안에 한 마리만 있어도 공판장에 가는 동안 수십 개의 고추를 갉아 먹고, 그런 상자가 하나라도 나온 날은 또 전체 가격이 후려쳐진다. 그러니 농약을 많이 치지 않은 벌로 침침한 눈을 비비며 벌레를 골라내야 했다. 녹초가 된 몸으로 잠깐 눈을 감았다 뜨면 새벽 4시, 다시 일하러 나갈 시간이었다.
논농사도 지었다. 남의 땅을 빌려 짓는 소작농 처지라 농사짓기 좋은 논은 차례가 돌아오지 않았다. 초보 농사꾼이 빌릴 수 있는 논은 물 빠짐이 안 좋거나 논의 형태가 반듯하지 않아 손이 많이 가는 논, 길에서 떨어져 있어서 물을 대거나 농약을 칠 때 불편한 논이었다. 빌린 논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이쪽 논에서 저쪽 논으로 이동하려면 차를 타고도 이삼십 분씩 가야 했다. 그래도 소작을 주면 감사했다. 논농사는 규모의 경제가 작동하여 다들 더 늘리고 싶어 하지 줄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좋은 논, 나쁜 논, 이사한 논, 가리지 않고 주는 대로 받았다. 논농사는 기계로 하는 일이 많은데, 소유한 기계가 없으니 남의 농기계를 빌려서 써야 했다. 주인의 농사일이 끝나고, 다른 사람들 농사일까지 다 끝나야 차례가 왔다. 언제나 마지막 순서였다. 농사는 때가 중요하다. 기계를 일찍 쓸 수 없어 심고 거두는 시기가 늦어졌고, 당연하게도 수확량에 차이가 났다. 아쉬웠다. ‘우리에게 땅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울 어머니 살아생전에 작은 땅이라도 있었으면‘ 한돌의 노래를 속으로 흥얼거렸다.
그래도 논농사는 손해는 안 봤다. 당시에는 ‘추곡 약정 수매제도’가 있어서 쌀 가격이 안정적이었다. 추곡 약정 수매제도는 가을에 정부가 쌀을 매입하던 추곡수매제도가 바뀐 것인데 모내기 전에 가을 수매에 대한 약정을 맺고 선도금을 미리 받는 제도다. 이중곡가제를 기본으로 하는 추곡수매제도보다는 못하지만, 농가에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이 제도 역시 2005년 폐지되었고, 정부가 정해진 양을 시장가로 매입하여 시장가로 방출하는 공공비축제도가 도입되었다. 농산물 생산자에게 중요한 것은 ‘가격안정’이다. 쌀에 대한 수매제도마저 폐지되면서 결국 모든 농산물 가격은 시장에 맡겨졌고, 쌀 가격은 날이 갈수록 떨어졌다. 2023년 4월 윤석열 전 대통령이 첫 번째로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한 법안이 바로 <양곡관리법> 개정안이다. 노란봉투법이나 간호법, 방송법이 아니라 쌀값 안정을 위한 법안이 거부권 행사의 시작이었다. 농민은 외면해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윤석열 정부에서 재의 요구된 법안 41건 중 6건이 농업 관련 법안이었다.
<박선민의 보좌관 일기>
나는 농민이었다. 학창 시절 농촌활동을 갔던 지역에서 1996년에서 2004년까지 8년 동안 농사를 지었다. 이십 대의 나는 열정적이었고 그만큼 겁이 없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동네에 들어가 빈집을 고쳐 살았다. 불 때던 아궁이를 입식 부엌으로 바꾸고, 방에 보일러를 깔고, 화장실과 목욕탕을 만들었다. 할머니가 혼자 사셨다는 집은 마당을 빙빙 돌아 원추리, 달래, 돌미나리, 돌나물, 머위와 어린순을 꺾어 먹는 가죽나무가 있었다. 울안에 꽤 넓은 텃밭도 있어 부추, 가지, 호박, 고추, 토마토를 길렀다. 저 혼자 자란 냉이, 명아주, 민들레, 쑥은 봄철 향긋한 반찬이 되었다. 문만 나서면 먹을 것이 지천이었다. 마당 한가운데 커다란 보리수나무가 있어 동이 트면 부지런한 작은 새들이 지저귀었다. 아침마다 새소리에 눈을 떴다. 알람 시계가 필요 없었다. 비 오는 날이면 개구리가 요란하게 울었고, 가끔 맹꽁이도 보탰다. 가을이면 방안까지 들어온 귀뚜라미를 내쫓아야 했다. 수선화, 작약, 수국, 금낭화, 패랭이꽃, 도라지꽃이 다투어 피던 화단은 정갈했다. 늙은 감나무엔 작은 땡감이 주렁주렁 열렸고, 탱자나무가 울타리를 대신했다. 대문이 없는 집이었다.
첫 농사는 엽채류(잎을 먹는 채소)였다. 90년대 중반 쌈밥집이 막 유행하기 시작한 때라 고정판로만 확보하면 유망할 것 같았다. 농업정책자금 대출을 받아 비닐하우스를 짓고, 수경재배 시설을 갖추었다. 상추가 주작목이었고, 당시에는 생소했던 케일, 치커리, 청경채, 겨자채, 엔다이브, 로메인, 크레송 등 다양한 종류의 서양 엽채류를 키웠다. 농약은 치지 않았다. 친환경으로 승부를 보려 했다. 농사는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잎채소들은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랐지만, 팔 곳이 없었다. 서울의 대형 마트나 백화점이 가장 좋은 판로인데 지방의 소규모 개인 농장은 독자적으로 배송하기 어려웠다. 배송비가 너무 많이 들기 때문이다. 유기농이 서울 근교에서 자리 잡게 된 것은 소비처가 가까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인근 도시의 중형 마트에 판매대를 확보하고 쌈밥 전문 식당에도 납품했지만, 소비량이 생산량을 따라가지 못했다. 시대를 지나치게 앞서갔다. 이때만 해도 친환경 수경재배 작물은 ‘강남 사람들’이나 먹는 특별한 고급 농작물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결국 일반 농산물을 판매하는 농산물공판장에 가져갔다. 이곳은 일종의 중간도매시장으로 도매상인들이 경매를 통해 가격을 매긴다. 무농약 수경재배 상추는 땅에서 농약을 치고 키운 일반 상추보다 생산비가 많이 들고 수확량도 적어 단가가 높아야 했지만, 가격은 같았다. 아니, 같기만 해도 괜찮았다. 농약을 안 쳤으니 간혹 벌레 먹은 잎이 나오기도 했는데 그런 날은 형편없는 가격을 받았다. 한 상자에 5,000원이 손해 보지 않은 최소 기준이라면 500원이 나온 적도 있었다. 이런 날은 발밑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새벽부터 밤중까지 일해봐야 손에 쥐는 게 없었다. 남의 집에서 품을 팔아 일당을 받는 게 더 나았다. 도무지 생산성이 맞지 않았다. 버티고 버티다 수경재배를 포기하고 오이를 심었다. 오이는 쉽게 팔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오이 농사를 가장 힘든 농사로 꼽는다. 비닐하우스 안의 좁은 통로를 오가며 순을 집어 올리고, 잎 사이 가려진 오이를 찾아 수확하고, 오이가 가득 담긴 무거운 상자를 나르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다. 오이 농사를 오래 지은 농민들은 목디스크와 허리통증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 첫 아이를 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지만, 눈에 보이는 농사일을 외면할 수 없었다. 대부분의 농작물이 그렇지만, 오이도 한 번 수확을 시작하면 쉴 수 없다. 수확할 시기를 놓쳐 오이에 노란빛이 돌면 그대로 버려야 했다. 몸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아이를 업고 일했다. 오이는 잎과 줄기에 작은 가시가 있다. 아무리 조심해도 갓난아기의 여린 살이 가시에 쓸려 피가 나기 일쑤였다. 밤마다 아파 우는 아기와 함께 울었다. 그렇게 키웠건만, 기대와 달리 오이는 가격이 낮았다. 비닐하우스에서 생산한 오이만 나올 때는 그나마 괜찮았지만, 밭에서 키운 노지 오이가 쏟아져 나올 때면 가격이 바닥을 쳤다. 비닐하우스에서 더 일찍, 더 많이 수확하려면 난방을 일찍 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유류비가 너무 많이 들었다. 오이는 얼마든지 팔 수 있었지만, 가격은 기대할 수 없었다.
좀 더 가격경쟁력이 있는 작물을 찾았다. 꽈리고추는 폭락은 없다고들 했다. 대신 한 여름에 수확을 해야 한다. 여름날 비닐하우스 내부 온도는 사우나와 비슷하다. 하우스에 들어가면 채 십 분도 되지 않아 속옷은 물론, 겉옷까지 모두 땀으로 흠뻑 젖는다. 일을 도와주러 왔던 지인들이 삼십여 분 만에 “태어나서 이렇게 힘든 일은 처음 해봤다”며 고개를 저었다. 뭐라고 소문이 낫는지 삶의 무게가 무거워진 사람들이 종종 우리 농장으로 찾아왔다. 일주일만 머물다 가도 정신이 바짝 차려진다고들 했다. 왜 우리 집에서 스스로 심리 치료를 받고 가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일손이 생겨서 좋았다. 꽈리고추는 작은 건 괜찮지만 너무 크면 가격이 뚝 떨어진다. 농가 입장에서 작은 건 무게가 안 나가니 손해다. 그러니 적당한 크기에 딱 맞춰 수확해야 한다. 여름 햇살은 농작물을 쑥쑥 키웠고, 한 두렁을 끝내고 돌아보면 또 자라있었다. 수확기가 시작되면 3〜4개월은 단 하루도 쉴 수가 없다. 새벽 4시부터 시작한 일은 밤 10시가 넘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가 되어야 끝났다. 수확 후엔 선별 작업도 해야 한다. 그날 수확한 꽈리고추를 마루 가득 쏟아놓고 하나 하나 살펴 벌레 먹은 작물을 골라내는 과정인데, 바늘구멍만 한 자국을 찾아야 한다. 그 안에 벌레가 있다. 농약을 적게 쳐서 벌레가 많았다. 상자 안에 한 마리만 있어도 공판장에 가는 동안 수십 개의 고추를 갉아 먹고, 그런 상자가 하나라도 나온 날은 또 전체 가격이 후려쳐진다. 그러니 농약을 많이 치지 않은 벌로 침침한 눈을 비비며 벌레를 골라내야 했다. 녹초가 된 몸으로 잠깐 눈을 감았다 뜨면 새벽 4시, 다시 일하러 나갈 시간이었다.
논농사도 지었다. 남의 땅을 빌려 짓는 소작농 처지라 농사짓기 좋은 논은 차례가 돌아오지 않았다. 초보 농사꾼이 빌릴 수 있는 논은 물 빠짐이 안 좋거나 논의 형태가 반듯하지 않아 손이 많이 가는 논, 길에서 떨어져 있어서 물을 대거나 농약을 칠 때 불편한 논이었다. 빌린 논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이쪽 논에서 저쪽 논으로 이동하려면 차를 타고도 이삼십 분씩 가야 했다. 그래도 소작을 주면 감사했다. 논농사는 규모의 경제가 작동하여 다들 더 늘리고 싶어 하지 줄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좋은 논, 나쁜 논, 이사한 논, 가리지 않고 주는 대로 받았다. 논농사는 기계로 하는 일이 많은데, 소유한 기계가 없으니 남의 농기계를 빌려서 써야 했다. 주인의 농사일이 끝나고, 다른 사람들 농사일까지 다 끝나야 차례가 왔다. 언제나 마지막 순서였다. 농사는 때가 중요하다. 기계를 일찍 쓸 수 없어 심고 거두는 시기가 늦어졌고, 당연하게도 수확량에 차이가 났다. 아쉬웠다. ‘우리에게 땅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울 어머니 살아생전에 작은 땅이라도 있었으면‘ 한돌의 노래를 속으로 흥얼거렸다.
그래도 논농사는 손해는 안 봤다. 당시에는 ‘추곡 약정 수매제도’가 있어서 쌀 가격이 안정적이었다. 추곡 약정 수매제도는 가을에 정부가 쌀을 매입하던 추곡수매제도가 바뀐 것인데 모내기 전에 가을 수매에 대한 약정을 맺고 선도금을 미리 받는 제도다. 이중곡가제를 기본으로 하는 추곡수매제도보다는 못하지만, 농가에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이 제도 역시 2005년 폐지되었고, 정부가 정해진 양을 시장가로 매입하여 시장가로 방출하는 공공비축제도가 도입되었다. 농산물 생산자에게 중요한 것은 ‘가격안정’이다. 쌀에 대한 수매제도마저 폐지되면서 결국 모든 농산물 가격은 시장에 맡겨졌고, 쌀 가격은 날이 갈수록 떨어졌다. 2023년 4월 윤석열 전 대통령이 첫 번째로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한 법안이 바로 <양곡관리법> 개정안이다. 노란봉투법이나 간호법, 방송법이 아니라 쌀값 안정을 위한 법안이 거부권 행사의 시작이었다. 농민은 외면해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윤석열 정부에서 재의 요구된 법안 41건 중 6건이 농업 관련 법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