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보는 김정은 시대의 북한 정치 ⑤ | 여풍당당 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

2020-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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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 수령의 심경을 대신해서 공개할 수 있는 인물은 매우 드물다. ‘김정은 위원장이 힘들어 할 것’이라는 말을 하려면 먼저 김정은의 심사를 정확히 파악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와 직접 대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심경 공개에 대해 북한 내에서 시비할 사람이 없어야 하며, 시비해도 물리칠 수 있을 만큼 김정은의 신임을 받아야 한다. 최선희가 바로 그렇게 할 수 있는 인물이다.

그는 2019년 6월 29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트위터를 통해 김정은과의 만남을 제의한 지 5시간 만에 “매우 흥미로운 제안”이라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트럼프에게 전하는 김정은의 입장이다. 자기가 김정은도 아니면서 만날 수 있다는 암시를 할 권위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최선희가 반응한 다음 날 김정은과 트럼프는 판문점에서 정상 회동을 했다.

"인물로 보는 김정은 시대의 북한 정치"를 연재하며

앞으로 인물이라는 창을 통해 북한 정치를 이해하는 글을 연재할 계획이다. 이번 호에는 네번째로 올해(2019년) 4월 북한 정치에 혜성처럼 나타난 북한 내각 총리 “김재룡"을 다룬다. 이를 통해 북한의 경제와 개혁의 앞날을 전망해 본다. 앞으로 이어질 <인물로 보는 김정은 시대의 북한 정치> 1부의 집필 계획은 다음과 같다.

  1. 북핵 협상 대표 김영철
  2. 김정은 시대의 2인자 최룡해
  3. 김정은의 최측근이자 백두혈통 김여정
  4. 혜성처럼 나타난 총리 김재룡
  5. 여풍당당 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
  6. 막후의 실력자 당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조용원


***


인물로 보는 김정은 시대의 북한 정치 ⑤ 
여풍당당 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

글쓴이_이대근 경향신문 논설고문



김정은의 마음을 말하는 최선희


“우리 국무위원장 동지께서 미국에서 하는 미국식 계산법에 대해서 대화하기 힘들어하시지 않는가. …… 앞으로 이런 기회가 다시 미국 측에 차려지겠는지 여기에 대해서는 저도 장담하기 힘듭니다.”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된 직후인 2019년 3월 1일 새벽, 최선희 북한 외무성1) 제1부상은 김정은 위원장의 심경을 전했다. 북한에서 수령의 심경을 대신해서 공개할 수 있는 인물은 매우 드물다. ‘김정은 위원장이 힘들어 할 것’이라는 말을 하려면 먼저 김정은의 심사를 정확히 파악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와 직접 대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심경 공개에 대해 북한 내에서 시비할 사람이 없어야 하며, 시비해도 물리칠 수 있을 만큼 김정은의 신임을 받아야 한다. 최선희가 바로 그렇게 할 수 있는 인물이다.


<사진 설명> 최선희 북한 외무성 제1부상. 출처_위키미디어


그는 2019년 6월 29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트위터를 통해 김정은과의 만남을 제의한 지 5시간 만에 “매우 흥미로운 제안”이라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트럼프에게 전하는 김정은의 입장이다. 자기가 김정은도 아니면서 만날 수 있다는 암시를 할 권위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최선희가 반응한 다음 날 김정은과 트럼프는 판문점에서 정상 회동을 했다.


<사진 설명> 트럼프 대통령은 2019년 6월 28일 트위터를 통해 김정은 위원장과의 판문점 즉석 만남을 제안했다. 출처_트위터 캡쳐 화면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북미 대화 단절 및 대립 상황이 지속되던 12월 트럼프가 김정은을 다시 “로켓 맨”이라고 조롱했다. 이번에도 최선희가 나섰다. “우리가 더욱더 기분 나쁜 것은 공화국의 최고 존엄에 대해 정중성을 잃고 감히 비유법을 망탕 쓴 것”이라며 “지금과 같은 위기일발의 시기에 의도적으로 또다시 대결 분위기를 증폭시키는 발언과 표현을 쓴다면 정말로 늙다리의 망령이 다시 시작된 것으로 진단해야 할 것”이라고 공격했다.


김정은이 2017년 말 핵 무력 완성을 선언한 뒤 비핵화를 공약하면서 시작된 북한 비핵화 협상, 북미 간 갈등과 대화의 무대에서 항상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이가 최선희다. 때로는 북한의 대변인으로, 때로는 협상가로, 때로는 공격수로. 비교적 젊은 55살(1964년생)의 여성인 그가 북한 외교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다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다. 그는 예외적 존재다. 그의 말과 행동은 곧 김정은의 말이자 행동이다. 그는 이제 북한 외교 사령탑이다. 그가 아니라면 누구이겠는가?



김정은 시대 초고속 승진, 외무성 사령탑으로

최선희는 46살 때인 2010년 10월 외무성 미국국 부국장이 되었다. 6년 뒤엔 국장으로 승진했다. 이런 승진 속도는 다른 외교관과 별 차이가 없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다르다. 국장 승진 후 2년도 안 된 2018년 2월 외무성 부상(차관급)이 되더니, 다시 1년 만에 제1부상(수석 차관에 해당)으로 승진했다. 김계관 외무성 고문은 부상에 임명된 지 15년 만에 제1부상이 됐다. 2005년 2월 국장이 된 리근은 현재 폴란드 대사로 나가 있지만, 여전히 국장급으로 추정된다. 15년째 국장이다.


최선희는 제1부상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최고 국가 정책 지도 기관인 국무위원회 14명의 위원 중 한 명이다. 다른 국무위원회 위원처럼 당 정치국 위원, 당 부위원장이 아니며 나이도 적고 직급도 낮다. 그런데도 자신의 상사인 외무상이자 당 정치위원인 리용호, 전 외무상이자 당 정치국 위원, 당 부위원장, 당 국제부장인 리수용과 나란히 같은 위원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국가 최고 엘리트 집단의 반열에 올랐음을 말해 준다.


개편된 국무위원회 위원 전원이 김정은과 함께 노동당 청사에서 기념 촬영한 2019년 4월 12일 사진(아래 사진)은 그 사실을 시각적으로 잘 드러낸다. 유일한 여성인 그가 앞 줄 맨 왼쪽에 자리한 모습이 뚜렷하다. 같은 해 6월 28일 김정은 국무위원장 추대 3주년 기념 보고 대회 때는 주석단에 등장, 그의 위상을 각인시켰다. 그러나 한 달 뒤 7월 27일 ‘전승절’(정전협정 체결일) 66주년 기념 음악회보다 그의 위상을 잘 보여 주는 장면은 없다. 맨 앞 줄 김정은이 앉은 자리에서 오른쪽 두 번째,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때까지 대미 협상을 주도했던 김영철 당 부위원장보다 한 자리 앞선 자리를 차지했다.


<사진 설명> 북한의 국무위원들. 첫줄의 왼쪽 끝이 최선희이다. 출처_노동신문


이런 최선희를 열렬히 만나고 싶어 한 남성이 있었다. 최선희를 만나기 위해 워싱턴에서 서울로 날아온 이 미국 남성은 최선희와 연락할 방법을 백방으로 찾았다. 만날 약속도 하지 못한 채 평양에서 가깝다는 이유로 무작정 서울로 달려온 스티븐 비건(Stephen E. Biegun) 미국 국무부 대북특별대표. 그는 2019년 12월 16일 “우리는 지금 여기 있고, 당신들은 우리와 접촉할 방법을 알고 있다”는 공개 발언을 통해 만남을 제의했다. 쌀쌀한 최선희는 가타부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트럼프가 2019년 말까지 북핵 문제에 관한 ‘새로운 셈법’을 제시하지 않으면 북한은 부득불 ‘새로운 길’로 가지 않을 수 없다며 김정은이 레드 라인을 설정한 시점이다. ‘크리스마스 선물’ 운운하며 도발 가능성을 시사한 때이기도 하다. 비건은, 미국과의 접촉을 끊고 대미 압박 강도를 높이는 북한에 대화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서울에 왔지만, 자신의 상대인 최선희의 그림자도 볼 수 없었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평양과 가까운 다른 도시 베이징으로 갔다. 19~20일 베이징 방문 중 고려항공 한 편이 평양에서 베이징에 도착했지만, 승객 가운데 동그랗고 통통한 얼굴을 한 50대 여성, 거만하면서도 자신만만한 표정의 최선희는 없었다.


두 사람이 만나 깊이 있는 대화를 할 기회는 이렇게 사라졌다. 김정은이 최선희를 신임하는 것만큼 트럼프도 비건을 신뢰한다. 비건은 베이징에 머무는 동안 미국 의회로부터 국무부 부장관 인준을 받았다. 트럼프 측근이자 국무부 2인자가 대북 특별 대표까지 겸임하며 직접 핵 협상에 나섰지만 북한은 일체 무시했다.



북미 회담 통역을 도맡아 하며 북핵 전문가로 성장

최선희는 매우 오랫동안 외부 세계에 통역사 정도로 알려졌다. 1994년 제네바 핵 합의 때 그가 통역을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이듬해 시작된 경수로 협상에서는 31살의 나이로 통역을 했다. 이어 1990년대 후반 한반도 평화 체제 구축을 위한 제네바 4자 회담, 2000년대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6자 회담 등 주요 대미 및 북핵 협상에서 통역을 도맡아 했다. 북핵 협상장에서 나이를 먹어 간 북핵 전문가라고 할 수 있다.


<사진 설명> 북핵 협상장에 선 북한 외무성 최선희 제1부상. 출처_미 국무부


아직도 그의 통역 내용을 둘러싸고 진위 논란이 계속되는 북미 회담이 있다. 조지 W. 부시 정부 시절인 2002년 10월 3, 4일 제임스 켈리(James Kelly) 미국 국무부 차관보가 방북했을 때였다. 당시 최선희는 38살이었다. 부시 네오콘 정부는 북한이 농축우라늄 핵 계획을 비밀리에 추진하고 있다는 증거를 잡고, 북한이 이를 폐기하지 않으면 제네바 핵 합의를 파기한다는 입장을 갖고 방북한 터였다. 켈리는 3일 김계관 부상을 만나 농축우라늄 핵 개발 계획을 비밀리에 추진한 것을 알고 있다며, 즉시 개발을 중단하고 폐기하라고 요구했다. 김계관은 그런 계획이 없다고 부인했다. 그런데 다음날 강석주 제1부상이 대신 나와, 미국이 판단하기에 농축우라늄 계획을 시인하는 발언을 했다. 켈리 일행은 놀랐다.


미 국무부 대변인은 10월 16일 “켈리 특사 방북 시에 지난 수년간 지속되어 온 북한 고농축우라늄 프로그램에 관한 증거를 제시했으며 북한 측은 이를 시인했다. 제네바 합의가 무효화된 것으로 간주한다”고 발표했다. 이에 북한 외무성은 10월 25일 반박 담화를 발표했다. “미국 켈리 특사는 아무런 근거 자료도 없이 우리가 핵무기 제조를 목적으로 우라늄 농축 계획을 추진하여 조미기본합의문을 위반하고 있다고 걸고 들었다. 우리는 미국 대통령 특사에게 미국의 가중되는 핵 도발 위협에 대처하여 우리가 자주권과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핵무기는 물론 그 보다 더 한 것도 가지게 되어 있다는 것을 명백히 말해 주었다.”


켈리 방북 때 미국 국무부 한국과장으로 동행했던 데이비드 스트라우브(David Straub)는 그 당시 켈리가 증거를 제시했던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다(경향신문 2006/06/07). 그럼에도 북한이 농축우라늄 계획을 시인했을까? 스트라우브는 말했다. “한국말을 어느 정도 할 줄 아는 내가 보기엔 당시 (미국 측) 통역에는 아무 하자가 없었다. 그(강석주)는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의 존재를 우리가 알아차리도록 시사했는데 켈리 차관보가 이를 재확인하자 ‘이런 것을 얼마든지 가질 수 있다. 이보다 더욱 강한 것도 있다’고 오히려 이를 인정했다. 그가 ‘미국이 우려하는 것은 담판으로 해결 가능하다’ ‘최고 지도자급 회담으로도 해결될 수 있겠지’ 등으로 부연한 것도 농축우라늄의 존재를 시사한 것이다”(연합뉴스 2009/11/18).


최선희가 통역한 강석주의 발언은 “was entitled to posses not only nuclear weapon but any type of weapon more powerful than that”이다. 북한이 발표한 대로 ‘핵무기는 물론 그것보다 더한 것도 가지게 되어 있다’였다. 핵무기를 이미 갖고 있다는 건지, 그럴 자격이 있다는 원칙적 언급만 한 것인지 애매하다. 제네바 합의를 깰 만큼 명확하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딱지 붙인 부시 정부는 강석주 발언을 근거로 제네바 합의를 파기, 제2차 북핵 위기를 불러왔다.



통역해 주는 상사를 무시하는 위세

6자 회담에 참석했던 남한 측 관계자는 최선희의 통역 실력에 관해 “충실하게, 말을 놓치지 않고 하는 편”이라고 평가했다. 반면 북측 수석대표인 김계관 부상의 비유·속담은 매끄럽게 하지 못할 때도 있다고 한다(서울신문 2005/11/10). “미국은 지금 ‘쫓겨 가는 며느리의 심정’일 것입니다.” 제4차 6자 회담 2단계 회의 마지막 날인 2005년 9월 19일 베이징 댜오위타이(釣魚臺) 회담장에서 김계관 북한 수석대표가 미국에 한 말이다. 송민순 한국 수석대표는 “저 말을 어떻게 통역하지?”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고 한다. 고부간 갈등과 같은 한국 가족문화를 알 리 없는 크리스토퍼 힐 미국 수석대표는 말귀를 못 알아듣는 표정이었다. 비유를 즐기는 송 대표도 회담에서만은 통역하기 쉬운 말을 고른다. 하지만 북한 대표는 가끔 다른 나라 대표들이 알아듣기 힘든 말을 불쑥불쑥 쓴다고 한다(국민일보 2005/11/09).


협상단의 주요 일원이기도 했던 그는 상대편 통역 오류를 곧바로 지적하거나 북측 대표의 말을 자신의 의중대로 통역하기도 했다(한국일보 2018/05/28). 그는 통역 이상이었다. “6자 회담 수석대표인 김계관 제1부상의 발언을 제멋대로 의역했다” “상사인 리근 북미국장은 이코노미 석에 탔는데 최선희는 비즈니스 석에 탑승했다”는 일화가 떠돌기도 했다. 부국장일 때 직속 상관인 리근 국장을 대놓고 무시하는 장면도 있었다고 한다(조선일보 2019/07/02).


미국 측 통역을 맡았던 김동현 전 통역관은 최선희를 이렇게 기억했다. “거기는 강경파입니다. 소위 ‘하드라이너’(Hardliner)가 돼서, 당 지도부에 대한 충성심이, 남자와 여자가 거의 차이 없습니다. 여성으로서 부드러운 태도를 보인 적 없습니다. 안색도 매우 시리어스(진지)하고, 화낸 얼굴을 하기도 하고. 자기 임무인 통역을 하려고 집중을 하긴 했지만……”(통일뉴스 2019/09/25).


2011년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6자 회담에서는 최선희가 차석 대표로 참석했다. 그는 세련된 옷맵시와 당당한 태도는 물론 그의 옷과 액세서리가 세계적인 유명 브랜드라는 점에서도 주위의 시선을 끌었다. 통역이든 차석 대표든 오랜 북미 협상 역사에서 항상 최전선에 있었던 그의 경력은 이제 절정에 이르렀다.



평양외국어학원, 유학의 엘리트 코스 밟아

최선희는 외교관 및 외국어 전문가 양성을 위한 엘리트 교육기관인 평양외국어혁명학원(이하 평양학원)을 나왔다. 평양학원은 북한에서 선호하는 직업인 외교관, 무역 일꾼을 향한 출발지에 해당한다. 졸업하면 외국어 전문가 양성 기관인 평양외국어대학, 김일성종합대학 외문학부에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외교관 양성을 위한 4년제 대학으로는 평양 국제관계대학이 있다. 평양학원에는 당연히 인재가 몰린다. 노동당 부위원장 리수용, 외무상 리용호, 전 국가보위부 부부장 류경, 외무성 고문 김계관이 평양학원 출신이다. 평양학원, 평양외국대학 출신으로 한국에 와 있는 사람은 김현희(일본어과), 고영환(프랑스어과), 강명도(영어과), 김광진(독일어과)이 있다(태영호 2018, 489-490).


<사진 설명> 북한 외교 엘리트의 산실 평양외국어학원 전경. 출처_통일부


최선희가 평양학원에 입학할 때인 1960년대까지만 해도 북한 중등 교육 단계의 엘리트 양성 기지는 만경대혁명학원, 평양학원 두 곳뿐이었다. 만경대혁명학원처럼 평양학원에도 한국전쟁 고아들이 많이 입학했다. 1970년대 들어 더 이상 전쟁고아가 없게 되자 간부 자녀들이 줄지어 입학하기 시작했다. 이즈음 학교 이름에서도 ‘혁명’을 뺐다. 1970년대 대외 정책 방향을 제3세계 국가들과의 관계 강화로 돌리기 시작하면서 외국어 전문가 수요가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당 간부, 군 간부 양성 기관인 만경대혁명학원의 인기는 상대적으로 떨어졌다. 평양학원은 고등중학교 과정이다. 북한의 의무교육 체계는 유치원 1년, 소학교 4년, 고등중학교 6년간으로 되어 있다(태영호 2018, 485-486).


태영호는 평양학원에서 최선희를 처음 만났다. 건설 기사의 아들인 태영호가 1974년 7월 4년제인 창전인민학교(현재 소학교로 개칭)를 졸업할 때 부모는 태영호의 장래를 두고 논쟁했다. 아버지는 건설 기사 아니면 기계 공학 박사, 우주 비행사로 키워야 한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평양학원에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학자, 기술자는 전망이 없다. 앞으로는 정치 간부나 외교관을 해야 잘 살 수 있다. 간부 집 아이들은 다 외국어 학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아무렴 간부들이 나라의 미래를 더 잘 내다보지 당신이 더 잘 알겠는가? 어머니의 주장대로 태영호는 까다롭다는 입시를 거쳐 평양학원에 입학했다. 어머니는 “이제는 영어를 해야 잘 살 수 있다. 힘 있는 집 아이들은 다 영어 학부를 신청한다”며 러시아어를 배워야 한다는 아버지의 뜻을 꺾었다(태영호 2018, 481-482).



최영림 총리의 수양 딸

태영호가 평양학원에 입학할 때 함께 들어간 학생의 25%는 간부 자녀들이었다. 그가 선택한 영어 학부의 1학년은 3개 학급이었고, 특히 최고위층 자녀가 많았다. 태영호의 동급생 최선희도 그중 한 명이었다. 최선희는, 당시 김일성의 책임서기(비서)였고 나중에 총리가 되는 최영림의 딸이었다.


최선희의 출세는 그의 개인적 역량 없이 가능한 것이 아니었겠지만 김일성 책임서기, 총리, 당 정치국 위원이었던 최영림의 딸이라는 배경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다. 자식이 없던 최영림은 최선희를 입양해 키웠다. 최선희 친부모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해외 비밀 업무 수행 중 사망한 사람의 자녀라는 설도 있지만 확인되지는 않는다. 두 번에 걸쳐 김일성 책임서기를 할 정도로 김일성 집사 노릇을 한 최영림은 김정일, 김정은, 김여정 등 백두 혈통과 가까웠을 것이고 이 친밀성 역시 최선희의 정치적 성장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다른 동급생으로는 허담 외교부장의 딸 허영희, 김영남 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아들 김동호, 오진우 인민무력부장의 딸 오선화가 있다. 김일성 서기실장(비서실장) 리명제의 딸은 편입했다. 당내에서 세력이 막강했던 중앙당 조직지도부 부부장의 딸 석영희 정도는 간부 집 자녀 명단에 명함도 들이밀지 못할 정도였다(태영호 2018, 483-484).


태영호, 최선희보다 10년 전쯤인 1960년대에 5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같은 평양학원 프랑스어과에 입학한 고영환도 10명의 동급생이 당시 외무상 박성철의 아들, 중앙병원장의 딸, 군 당 책임비서의 아들 등 “번쩍번쩍한 집안 출신”이었다고 기억한다(고영환 1992, 291).


고영환이 15살의 나이에 갑산파 숙청을 목격할 수 있었던 것도 위세 있는 이들의 자녀가 학원에 다녔기 때문이다. 김일성이 유일사상 체계 구축을 위해 1967년 박금철·리효순·김도만 일파를 숙청할 때 학원에 다니던 자녀들도 함께 불행을 겪었다. 수업 도중에 선생이 찾아와 ‘아무개 학생 나와’ 하고 데리고 나가면 그날부터 행방불명이 되었다. 그때 학원에서는 거의 3개월 동안 학생들이 사라져 갔다. 수업 도중에 학생이 불려 나가면 아이들은 선생님이 강의를 하는 중이라도 창밖을 내다보곤 하였다. 차창에 커튼을 친 새까만 차가 서 있는지를 보려는 것이었다. 이럴 때면 선생님들도 묵묵히 창밖을 내다보았다. 운동장에 새까만 승용차나 지프차가 서 있으면 불려 나간 학생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다(고영환 1992, 292-293).



병영 같은 학교생활

학생은 군대와 같은 규율 속에서 단체 생활을 했다. 13살의 고영환이 군대 규율을 지키고 속옷을 손수 빨래해 입는 것은 벅찬 일이었다. 하지만 ‘혁학(혁명학원의 약자)’이라고 쓰인 뱃지를 달고 시내에 나가면 모든 아이들이 다 부러워했다. 학원 식당에서는 버터, 초콜릿까지 간식으로 내줬다(고영환 1992, 292-293).


태영호의 증언.

“평양외국어학원에서 간부 집 자녀들을 보면서 의외의 충격을 받았다. 아버지 등(빽)을 믿고 공부를 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일반 주민의 아이들보다 더 열성적이었다. 집에서 어떤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특히 영어 공부를 열심히 했다”(태영호 2018, 484).


태영호가 열네 살이던 1976년 1월, 2학년일 때 뜻하지 않은 행운이 찾아왔다. 학원생 중에서 시험을 보고 ‘소년 유학생’을 선발하는 절차를 진행한 것이다. 시험을 치르고 신체검사까지 마친 태영호는 어느 날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저녁 긴급 학부형 회의가 있으니 아버지더러 참석해 달라는 말을 전해 들었다. 회의에 참석하고 밤늦게 귀가한 아버지는 집에 경사가 났으니 술상부터 차리라고 했다. 중앙당 간부가 학부형 회의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여기 모인 학부형의 자녀들이 당 중앙의 배려로 시리아와 중국으로 유학을 가게 됐다. 1월 하순에 출발할 예정이니 이제부터 아이들을 외국에 보낼 준비를 해야 한다. 양복부터 시작해 일체의 준비를 당이 담당하니 여러분들은 아이들의 사상적 준비만 잘하면 된다.” 김영남의 아들 김동호, 최영림의 딸 최선희, 허담의 딸 허영희도 선발됐다. 김정일이 후계자가 되는데 공을 세운 측근들에게 선심을 베풀기로 하고 측근의 자녀를 선택한 결과였다(태영호 2018, 416-417).



유학생 명단에 딸 끼워 넣은 김일성 집사

‘평민’ 출신으로 간부 자녀도 아닌 태영호가 최선희와 함께 유학 대열에 낄 수 있었던 이유가 있다. 김정일은 “간부 집 자녀들만 유학 가면 나쁜 여론이 돌 수 있으니 평민 자녀들도 적당히 넣는 것이 좋겠다”는 계획을 김일성에게 문건으로 보고하도록 했다. 김일성에게 올라가는 모든 보고를 챙기는 책임서기 최영림이 이 사실을 알고 자신의 딸도 유학생에 포함시켰다(태영호 2018, 417).


베이징 유학 중 마오쩌둥이 사망한 뒤 마오 격하 운동이 전개되자 사상적 오염을 우려한 북한은 1980년 2월 유학생 20명을 모두 귀국 조치했다. 태영호와 최선희도 귀국하자마자 평양 국제관계대학에 입학했다(태영호 2018, 434). 외교관 양성 대학은 국제관계대학을 포함, 평양외국어대학, 김일성 종합대학 외문학부 세 곳이다. 대학은 학원보다 규율이 더 강화된 병영 체제로 운영됐다. 학급은 소대였고, 학생 총책임자는 대대장, 학우 학생 책임자는 중대장, 그 밑에 부대대장, 참모장, 참모들이 임명되었다. 청소 검열도 대대위생 참모가 합격 여부를 결정했다(고영환 1992, 297).


대학은 외교 협상 방법도 가르쳤다. 협상 전 육체적 준비, 협상을 성공으로 이끄는 방법, 협상을 깨는 방법, 협상에서 고지를 선점하는 방법으로 구분해 구체적으로 교육했다. 예를 들면 중요한 협상을 나가기 전에는 3일 전부터 특이한 음식을 먹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심지어 물을 많이 마시는 것도 금기다. 협상 도중 화장실에 가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회의석상에서 먼저 일어서는 쪽이 패한 것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회담을 깨야 할 때는 상대방의 말꼬리를 물고 늘어져 흥분시키도록 했다(태영호 2018, 434).



외무성 직원이 되기 위한 치열한 경쟁

외무성 직원이 되려면 50 대 1의 경쟁률을 통과해야 한다. 공부만 잘한다고 외무성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출신 성분이 누가 더 뛰어난가, 빽이 얼마나 든든한가도 크게 작용한다. 그래서 외무성 성원 중에는 김정일 측근의 자녀들과 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부부장급 이상의 자녀들이나 사위가 많다. 또한 이런 까닭에 외무성 사람들은 국내 고위층의 동향이나 권력 문제에 대하여 듣는 것도 많고 아는 것도 많아진다(고영환 1992, 258).


또한 외국 파견으로 외화를 손에 쥘 일도 있기 때문에 누구나 선망하는 부서에 속한다. 고영환이 겪은 사례. 배탈이 난 어느 날 군 소속의 ‘장령 전용 진료소’에서 치료를 받았다. 민간인은 이용할 수 없게 되어 있지만, 당 조직지도부 군 담당 부서에 있는 매형의 부탁이 있어 가능했다. 처음에는 마지못해 진찰을 하던 군 의사는 고영환이 외무성에서 일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태도를 갑자기 바꿨다. 정성껏 치료해 주면 무엇인가 생길 수 있다는 기대가 생긴 것이다. 소장인 인민군 대좌(대령)는 과잉 진료 끝에 외화 안경 상점에서 안경을 사 달라는 부탁을 했다. 고영환이 선물을 사 주자 “어찌나 좋아하던지 입이 함박만큼 벌어져 말도 못할 지경이었다”(고영환 1992, 85).


외무성 부상은 10여 명에 이른다. 산하 조직은 14개의 지역국, 영사·조약·국제기구를 담당하는 7개의 기능국, 대표단영접국·번역국·의례국 등 지원 역할을 하는 12개의 보장국 부서로 구성되어 있다(정보사령부 2004, 193). 남북 관계를 다루는 조국통일국도 있다. 본래 남북 관계는 당 통일전선부,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관할이지만, 미국 문제와 관련한 남북 문제인 경우에는 조국통일국이 맡는다. 1990년대 초 남한과의 비핵화 선언 채택 및 이행, 팀스피리트 합동군사훈련 중지 문제를 이 부서가 담당했다(태영호 2018, 51). 2007년 3월 영국 주재 북한 대사로 부임한 자성남도 조국통일국에 근무하면서 주한미군 상대 회담과 군축 문제를 다뤘다. 이 때문에 외무성이 대남 성명을 내는 경우가 종종 있다.


태영호는 국제관계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베이징 외국어대학 영문학부로 유학을 간 뒤 외무성에 유럽국 지도원으로 들어가 평양 본부 근무와 해외 파견을 번갈아 했다. 그와 달리 평양외국어대학을 졸업한 최선희는 해외 근무를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태영호가 외무성에 들어간 지 4년째인 1992년, 주중 이탈리아 대사 부부 방북 때 두 사람은 짝을 이뤄 통역을 했다. 태영호가 대사를 위해, 최선희가 부인을 위해 각각 통역을 맡은 것이다(태영호 2018, 32). 이후 1994년 지미 카터, 2009년 빌 클린턴 등 전 미국 대통령 방북 등 주요 행사는 거의 모두 최선희가 통역했다.



언제나 강경파인 최선희의 딱딱한 태도

최선희는 언제나 강경 발언을 하고 표정은 늘 굳어 있고 태도는 항상 딱딱하다. 김계관도 강경 발언을 하지만 항상 그렇지는 않았다. 그런 점에서 최선희는 다르다. 그의 유별난 강경 자세가 상황을 악화시킨 적이 있다. 마이크 펜스(Mike Pence) 미국 부통령이 2018년 5월 싱가포르 회담을 앞두고 “만약 김정은이 합의를 하지 않는다면 이번 사안은 리비아 모델이 끝난 것처럼 끝나고 말 것”이라고 협박성 발언을 한 바 있다. 그러자 최선희도 지지 않고 담화를 통해 “횡설수설하며 주제넘게 놀아 댔다” “무지몽매한 소리” “아둔한 얼뜨기”라며 욕설에 가까운 험악한 말들을 쏟아 냈다. 이에 다음 날 트럼프는 싱가포르 정상회담 일정을 취소했고, 놀란 김정은은 저자세로 회담 재개를 요청해야 했다.



최선희는 왜 대미 협상 때 측면 지원만 했나?

김정은의 비핵화 공약과 함께 시작된 공식 대미 협상은 외무성과 최선희가 이끌지 않았다. 김정은은 무슨 의도인지 대미 협상 문제를 외무성 대신 김영철 당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통전부장)에게 맡겼다. 본래 통전부의 상대는 남한의 국가정보원 혹은 통일부다. 그럼에도 김영철이 대미 협상은 물론 대외관계 전반을 주도하면서 외교정책 지휘권이 외무성에서 통전부로 넘어간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돌았다. 김정일 시대 외무성이 나선 북핵 협상이 모두 깨진 상황에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다’는 생각으로 대외 정책을 통전부에 맡긴 것이라는 해석도 제기됐다.


그러나 대외 정책 담당 기관을 옮겼다기보다는 관련 부서로 구성된 특별 협상 팀을 꾸리고, 그 팀을 김정은이 신임하는 김영철에 맡겼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할 것 같다. 대미 협상 실무진에 통전부 소속의 김성혜 통일책략실장뿐 아니라, 스페인 대사였던 김혁철 국무위원회 대미특별 대표, 박철 전 유엔 주재 참사관 등 외무성 출신이 포함됐다는 점이 그걸 뒷받침한다.


이렇게 김영철이 협상 팀을 이끄는 상황에서 최선희가 도발적 발언으로 정상회담 자체를 무산시킬 수 있는 언행을 하고, 그걸 김정은이 직접 수습해야 했음에도 최선희가 계속 큰소리를 치고 있다면, 그가 예외적 존재라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김영철과 최선희는 굿 캅, 배드 캅으로 역할을 분담했던 것은 아닐까? 두 사람 모두에게는 유연성, 온건파, 협상파 가운데 어떤 표현도 어울리지 않는다. 강경파. 두 사람의 성향을 정의할 수 있는 단어는 이것뿐이다. 김정은이 강경파 협상 팀을 전면에, 그보다 더 강경한 최선희를 측면에 배치, 미국을 압박해 가는 구도를 생각했을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이런 방식은 하노이 회담 결렬이 말해 주듯 실패했다. 김정은은 결렬 책임을 물어 김영철을 통전부장에서 해임하고, 대미 협상에서 물러나게 했으며, 실무자들도 처벌하거나 문책했다.


이렇게 김영철 팀은 해체됐지만, 2020년 초 현재 새로운 팀을 구성했는지, 구성했다면 김영철을 대신할 인물이 누구인지는 불분명하다. 비건의 상대역이었던 김혁철 대미특별대표를 김명길 순회대사로 교체한 것 말고는 모두 오리무중이다. 비건이 대북 특별 대표를 겸하면서 부장관으로 승진하자 북측 상대는 더욱 애매해졌다. 대북 특별 대표로서는 김명길이 상대이지만, 부장관으로서는 최선희가 상대이기 때문이다. 비건은 당연히 최선희를 자기 상대로 생각하지만 최선희도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외무성은 온건파, 군부는 강경파?

외무성이 대외 정책과 협상을 주도하지 않은 점도 의외다. 김정일 시대 대외 정책은 외무성 관할이었다. 군사 문제라 해도 대외관계와 관련되어 있으면 외무성이 결정권을 행사했다(허문영 1997, 77). 황장엽은, 군이 외교 문제에 일언반구 의견을 제시할 수 없게 되어 있다고 단언했다(황장엽 1996, 70). 실제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북한의 대외관계 주요 현안이 군사 문제일 경우 외무성은 군과의 협의를 거쳐 정책을 결정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허문영 1997, 77).


김정일 시대에는 김정일이 해당 기관의 제의서를 받고 지시하는, 수직적 정책 결정 체계가 중심축을 이뤘지만, 수평적 협의 구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수평적 협의가 체계적이고 효율적이지 않았지만, 하나의 정책이 여러 부서와 관련될 경우 관련 부서와 협의체를 구성, 논의를 한 뒤 주관 부서가 최종 안을 마련했다. 대외 정책도 군사・경제와 관련된 부문은 외무성과 협의하는 것이 정상적이었다(허문영 1997, 78: 고영환 1992, 19-21).


총참모부나 해군사령부가 대외관계와 관련한 성명을 발표할 때도 반드시 외무성과 사전 협의를 거쳤다(태영호 2018, 361). 1999년 6월에 연평해전과 관련해 발표됐던 인민무력성 대변인 담화, 해군사령부 보도, 인민군 판문점대표부 담화 역시 외무성에서 만들어졌다고 북한 외교관 출신 탈북자들은 증언했다(연합뉴스 1999/08/05).


외무성과 최선희의 일관된 강경 태도 역시 외무성은 온건 협상파, 군부는 강경파라는 기존 관념과도 사뭇 다른 양상이다. 내부 정책 협의 과정에서 누가 강경파 역을 맡는지는 사안에 따라 다르겠지만, 일반적으로 그리고 전통적으로 외무성은 온건파, 군부는 강경파라는 이미지가 덧씌워진 것은 사실이다. ‘외무성 온건파, 군부 강경파 모델’은 북한 내에서도 통용되는 고정관념이기도 하다. 북미 관련 현안을 다룬 소설 총대가 좋은 예다. 비록 소설이지만 실제 사건을 다룬데다 북한 소설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기반한 전형성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참고가 될 만하다.


『총대』에서 인민군은 거의 모든 대외관계에서 가장 강경한 정책을 주장한다. 판문점 인민군대표부 대표를 지낸 박임수 대좌를 모델로 한 ‘봉명주’라는 인물은 핵 및 미사일 문제, 미군 유해 공동 발굴, 헬기 조종사 보비 헐 준위 사건에 관해 항상 강경 입장을 내세운다.


봉명주는 판문점 북미장성급 회담에서 조기 송환을 요구는 미국 측 대표에게도 “직승기 조종사는 조사가 완료되는데 따라 군법에 의해 처리될 것”(박윤 2003, 126)이라고 비타협적 태도를 고수했다. 실제로는 조사가 진행 중이라며 헐 준위의 송환을 미룬 사실을 과장한 것이다.


봉명주는 또 외무성 협상 자세에 불만을 표출한다. 그는 “동무네(외무성)가 외교 관례라는 데 너무 매달리는 걸 그리 좋게 보지 않소. 이 허례허식을, 말하자면 군대식으로 싹 쓸어버리자는 거요. 선군 외교 시대가 아닌가. 특히 적대 국가와의 외교에서는 우리식의 공격적인 외교 관례 방식을 세워야 하오”라며 비판한다(박윤 2003, 436). 그리고 다른 한 군 장령(장성)도 강석주를 모델로 한 문선규에게 ‘시간만 끌 게 아니라, 탁 차 버리고 말든가 한방 꽝 쏴 갈기자, 우리는 외교관의 처사에 불만 많다’는 등 외무성의 북핵 문제 접근 방식이 미온적임을 지적한다(정기종 1998, 10). 소설에서는 또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하기 직전, 오진우 인민무력부장과 최광 총참모장이 전쟁이 불가피할 것 같다며 “경애하는 최고사령관 동지, 명령만 내리십시오”라고 초강경책을 건의한다(정기종 1998, 72-73). 1993년 한미 팀스티리트 훈련 때는 최광 총참모장이 “적들에게 우리의 위력을 보여 줄 때가 되었다”며 증강된 군단급 훈련인 ‘섬광 작전’을 주장했다.



군부 내세워 압박하는 외무성의 양면 게임

‘외무성 온건파, 군부 강경파 모델’은 북한 내부뿐 아니라, 외부 세계가 북한을 보는 방식이기도 하다. 북한은 이런 외부의 인식을 협상에 적극 활용했다. 1997년, 1998년 4자 회담 때였다. 북측 대표들은, 중요한 사안은 군부가 결정하므로 협상 내용을 보고하고 지침을 받기 위해서는 군에 보고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이 과정이 쉽지 않다고 호소했다. 그들은 또 ‘사람 사는 사회에 의견이 같을 수만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내부 의견 조정의 어려움을 시사하기도 했다(이수혁 2005, 236).


북측은 6자 회담에서도 자주 군부를 내세워 양보할 수 없음을 강조했다. 2003년 8월 27일 제1차 6자 회담 기간 중 북측 수석대표인 김영일 부상은 “미국 측이 화답하지 못하면 어떻게 인민과 군대를 설득하겠는가”라고 했다. 2004년 6월 24일 제3차 6자 회담 중 가진 북미 양자 협의에서도 북측 수석대표인 김계관 부상도 같은 말을 했다. “북조선 내 유관 부처는 지난 1990년대부터 핵무기를 제조하여 실험하려 하고 있으며, 지금도 핵실험을 원하고 있다. 유관 부처의 힘이 외무성에 비해 막강하므로, 이를 중지시키기 위해서는 신속한 해결책을 모색할 필요가 있으며 이를 위해 미국이 적극적으로 기여해야 한다. 핵 폐기를 달가워하지 않는 관계 부처에 대해 협상 주무 부처로서 외무성의 입지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라도 미국이 대북 경제제재 해제 등 일정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이수혁 2005, 236-238).


황장엽은 그런 언급이 기만술이라고 강조했다.

“김정일은 미국과의 협상이 그들에게 불리하게 진행될 때에는 마치도 전쟁을 일으킬 것처럼 군사분계선에서 도발 사건을 인위적으로 조작하며, 외교부에 과업을 주어 마치 인민무력부가 반대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하여 인민무력부로 하여금 강경한 성명까지 발표하게도 한다. …… 북한 군부의 강경 성명은 전적으로 전쟁과 테러로 상대방을 위협하는 기만전술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황장엽 1996, 70).


그렇다고 군부의 강경 입장이 언제나 협상용, 기만전술이라고 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군부는 자신의 역할을 강경파로 받아들이고 있다. 강경 입장이 대외 정책에 반영되든 안 되든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대로 내야 한다고 믿는다. 인민무력성은 1992년 국제화학무기 금지 조약 가입 문제를 두고 외무성과 이견을 보인 적이 있다. 외무성은 가입해야 한다는 제의서를 김정일에게 제출했으나 인민무력성은 가입 반대 논리로 김정일을 설득했다. 결국 이 문제로 외무성 부상인 최수헌이 1년간 강등당해야 했다(허문영 1997, 77). 4자 회담 때도 주한미군 철수를 우선 의제로 삼아야 한다는 인민무력성의 입장이 관철돼 외무성은 미군 철수를 줄기차게 주장해야 했고 회담은 성과 없이 종료됐다.



강경 외교를 주도한 외무성

외무성 역시 항상 온건파인 것은 아니다. 1차 북핵 위기가 발생했을 때 미국 언론은 영변 핵시설에 대한 외과 수술식 타격이 임박했다고 보도했다. 북한 내부에서도 기어이 전쟁이 일어나는구나 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외무성도 당황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상황이 전개됐다. 이때 중심을 잡고 나선 사람이 군축과장 리용호2)였다. 그는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 탈퇴와 준전시 상태를 선언, 전쟁 임박 상황으로 몰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평소 차분하고 온화한 그가 이와 같은 강경책을 주장한 것은 실력과 경험에 바탕을 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1차 북핵 위기는 그의 주장대로 전개되면서 북한 입장에서는 뜻대로 마무리되었다(태영호 2018, 78-79).


미국과 유럽이 북한인권 문제를 제기할 때도 외무성은 강경 입장을 건의했다. “만일 미국과 유럽이 연합해 인권 공세로 나온다면 핵실험과 같은 초강경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의 시선을 핵 문제로 집중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핵 위기를 고조시키면 미국은 어쩔 수 없이 선핵, 후 인권 방식으로 돌아설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핵으로 인권을 덮어 버리는 것입니다”(태영호 2018, 178).


외무성 내에서 강온으로 갈릴 때도 있다. 1차 핵 위기 때 최우진 부상은 남북회담을 이용해 한국과 비핵화 선언을 하면 한국의 지원을 받아 미국으로부터 핵 불사용 선언과 북미 수교를 이끌어 낼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강석주 제1부상은 정세를 긴장시켜 미국이 북한과 직접 회담에 나서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태영호 2018, 72).



외무성을 대하는 김정일과 김정은의 차이

김정일 시대에도 외무성은 필요에 따라 강경과 온건 입장을 오고갔지만, 대외 관계의 유일한 창구이자 외교정책의 입안자, 최종 책임자는 역시 외무성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김정일 시대의 오랜 원칙은 김정은 시대에 흔들리고 있다.


2014년 영국의 <채널4>가 북한을 자극하는 내용으로 북핵 문제를 다룬 드라마 “Opposite Number”를 제작한다는 보도가 나온 적이 있다. 그러자 국방위원회 정책국이 먼저 나서서 적대 행위라고 비난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이어 김영철 정찰총국장이 평양 주재 영국 대리 대사를 불러 드라마 제작을 중단하지 않으면 보복하겠다고 위협했다. 외무성이 아닌 군부가 타국 외교관을 직접 만나 테러를 가하겠다고 한 것이다. 영국은 공식 외교 통로를 통해 항의했다. 북한 외무성 간부들은 “(정찰총국장의 행위에) 너무 어이가 없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2013년부터는 군부가 외무성이 해야 할 일까지 가로채 가며 국방위원회 명의로 발표하곤 했다. 정찰총국은 미국 정치인이 북한을 비판하거나 한미 합동 군사훈련이 벌어질 때면 성명이나 담화를 남발했다. 외무성과 사전 협의를 하지도 않았다. 2013년 당중앙위원회가 경제와 핵 병진 발전 노선을 채택한 이후 부서 간 불통 현상은 더욱 심해졌다(태영호 2018, 360-364).



최선희와 함께 부상한 외무성

그게 전조였을까? 김영철은 정찰총국장에서 통전부장으로 자리를 옮기더니 대외 협상 지휘자가 되었다. 외무성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측면 지원 역할로 제한하는 것이 과도적 조치인지, 김정은의 새로운 통치 방식인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비핵화 협상, 대외 관계 개선에 체제의 미래를 걸고 있는 김정은이 외무성 역할을 축소할 가능성은 낮다. 아니, 그 반대다. 최선희의 부상이 외무성의 위상을 끌어올린 결과인지, 김정은이 외무성의 중요성을 인식한 결과 최선희가 뜬 것인지 선후 관계를 알 수 없지만, 최선희와 함께 외무성의 지위는 전례 없이 높아졌다. 국무위원회에 최선희·리용호 등 외무성의 투톱이 올라가 있고, 당 정치국 위원에 전 외무상 리수용과 현 외무상 리용호가 동시에 진입했다. 어떤 부서도 이런 지위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사진 설명> 최선희 북한 외무성 제1부상과 리용호 외무상. 출처_위키피디아


최선희는 제2의 강석주가 될까?

최선희가 앞으로 어디까지 올라갈지 예단할 수 없지만, 강석주 사례를 참고할 수는 있다. 최선희의 미래를 강석주의 과거에서 찾아보자. 강석주는 1990년대 초 북미 대화가 추진되자 김정일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으면서 외무성을 완전히 장악했다. 외무성이 강석주의 외무성으로 재편된 것이다. 김정일은 외무성 당 비서의 권한인 간부 인사권을 강석주에게 넘겨주었다. 강석주는 외무성 당 생활에도 개입했다. 다른 부서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때문에 외무성 당 위원회가 오히려 강석주의 눈치를 살피는 상황이 벌어졌다(태영호 2018, 266).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려면 당 위원회의 역할을 이해해야 한다.


1992년 9월 국제원자력기구(IAEA) 정기 이사회가 빈에서 열렸을 때 남측 대표가 북측 대표인 외무성 참사 오창림에게 비공식 면담을 요청했다. 강석주는 김정일에게 승인 여부를 올렸지만 답이 제때 내려오지 않자 우선 면담을 허락했다. 면담 결과는 김정일에게 보고됐고, 김정일은 허락 없이 행동했다며 강석주를 문책했다. 당 조직 지도부와 국제부 40여 명이 외무성에 들이닥쳐 검열 작업을 했다. 강석주는 직무 정지를 당하고 과거 그의 모든 업무를 조사받았다. 이어 외무성 강당에서 외무성 당원 전원이 참석한 가운데 검열 총화(비판 집회)가 열렸다. 당원들은 어떻게 장군님의 지시를 그렇게 허술하게 집행할 수 있느냐면서 눈물을 흘리며 강석주와 오창림을 비판했다. 평소 강석주에게 앙심을 품은 일부 국장들은 그의 출당까지 제기했다(태영호 2018, 76).


이 총화에서 강석주는 농장 혁명화, 오창림은 평성 시로 가족과 함께 추방하는 조치가 내려졌다. 이때부터 강석주는 농장에서 돼지우리의 똥을 치워야 했다. 하지만 그는 반성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김정일에게 올린 뒤 한 달 만에 복귀할 수 있었다(태영호 2018, 77). 2000년 12월에는 외교 활동에서 김일성 시대 지침을 따랐지만, 김정일의 방침과는 어긋나는 일이 생겼다. 김정일이 심하게 질책했다. 강석주는 자신이 소속된 외무성 1국 당 세포 생활 총화에서 자아비판을 해야 했다. “나는 장군님의 원대한 대외 전략을 대표단에게 제대로 숙지시키지 못했다. 미국 강경 보수파가 정권을 잡기 전에 유럽과 관계를 빨리 설정해야 한다는 장군님의 전략을 대표단에 온전히 전달하지 못한 과오가 크다”(태영호 2018, 164-165).


북한에서는 모든 지역, 모든 부문, 모든 작업 단위의 최고 결정 기관은 해당 기관의 행정 책임자인 기관장이 아니라 해당 기관의 당 위원회다. 외무성도 마찬가지다. 외무성이 아니라 외무성 당 위원회가 최고 결정 기관이다. 당 위원회가 열리지 않는 기간에는 일상적으로 당 업무를 담당하는 비서가 해당 기관의 최고 권력자가 된다. 당 위원회, 혹은 비서가 외무성의 인사, 업무 평가, 생활 태도 감시 등 모든 권한을 행사한다.


외무성도 예외 없이 조직 전체를 포괄하는 당 위원회가 있으며, 국별로도 당 조직과 비서가 따로 있다. 보통 국장은 행정 책임자가 되고, 부국장은 당 조직 책임자가 된다. 특정 국의 당원 수가 30명 미만이면 부국장은 세포 비서가 되고, 30명 이상이면 부문 당 비서가 된다. 태영호는 유럽국 부국장일 때 부문 당 비서를 겸직했다. 당원이 30명이 넘는 경우 산하에 최소 규모의 당 조직인 세포위원회가 구성된다. 유럽국에는 3개의 세포위원회를 두었다. 세포위원회 당 세포 비서가 1명씩 있다. 부문 당 비서는 세포 비서의 상급자가 된다(태영호 2018, 258). 당원인 외무성 직원은 모두 주별, 월별 분기별 당 생활 총화를 해야 한다. 이 가운데 처벌 수위가 가장 높은 것이 외무성 당원 1천여 명이 강당에 모여 당 조직 지도부 외무성 담당 부부장이 주재하는 분기별 당 생활 총화다(태영호 2018, 304).


이 같은 조직의 특성상 행정을 맡는 외무성 간부는 인사권을 행사하는 당 비서, 당 위원회의 눈치를 보며 생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강석주가 인사권을 행사하고, 당 위원회가 오히려 강석주의 눈치를 본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행정 간부가 당 비서를 쫓아낼 권력을 행사한다는 것은 전례 없는 일이다.



최선희가 강석주로부터 배워야 할 것

최선희도 강석주와 같은 권력을 가질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강석주로부터 배워야 할 게 있다. 강석주는 자기 권력이 하늘을 찌르자 당 생활에까지 개입했다. 토요일은 하루 종일 당원들이 모여 총화와 학습을 하는 ‘당 생활의 날’이고, 그런 만큼 당 비서가 주인공인 ‘당 비서의 날’이다. 그런데 김정일 방침을 전달하는 시간에 간부를 수시로 불러들였다. 북한에서 김정일 방침 전달은 신성한 성경 봉독 시간과 같다. 당 조직 지도부는 이걸 문제 삼았다. 그러나 강석주는 ‘장군님께 보고하기 위한 것인데 장군님을 기다리게 해야 한다는 건가’라고 역공했고 이 때문에 오히려 당 조직 지도부가 궁지에 몰렸다. 중앙당 조직 지도부 본부 당 책임 비서 리제강은 반격 기회를 노렸다. 자신의 심복 안태광을 외무성 당 비서로 보내 강석주-안태광 이중 권력 상태로 만들어 놓고 강석주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강석주는 2010년 9월 내각 부총리로 임명되면서 외무성을 떠나야 했다. 좌천성 승진이었다. 이후 외무성은 안태광 앞에서 벌벌 기는 처지가 됐다(태영호 2018, 266-269).


강석주는 부총리에 이어 당 부위원장을 지내다 2016년 식도암으로 사망했다. 최선희는 권력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권력의 위험성도 감지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끝>


주석

1) 극심한 경제난의 악조건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힘을 믿고 자기 단위의 살림살이를 자체로 꾸려 나가는 자력갱생과 간고 분투의 정신을 말한다.

2) 가부장적 통치자가 부를 중앙집권적 통제 아래 두거나 사유화한 채 자의적으로 배분하는 경제체제를 말한다.


참고문헌

● 박윤. 2003. 『총대』. 평양. 문학예술출판사.

● 이수혁. 2005. 『전환적 사건』. 중앙북스.

● 정기종. 1998. 『력사의 대하』. 평양. 문학예술종합출판사.

● 태영호. 2018. 『태영호 증언- 3층 서기실의 암호』. 기파랑.

● 허문영. 1997. 『북한외교정책 결정구조와 과정』. 민족통일연구원.

● 황장엽. 2003. 『북한의 진실과 허위』. 시대정신.


이대근 ㅣ경향신문 논설고문

1984년 경향신문사에 들어간 뒤 정치부 기자, 국제부장, 정치 국제 에디터, 논설위원, 편집국장, 논설 주간을 거쳐 현재 논설 고문으로 일하고 있다. 국내 정치, 외교 안보 분야를 주로 담당했다. 경향신문에 <이대근 칼럼>을 쓴다. 2000년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북한 선군 정치를 주제로 한 “조선 인민군의 정치적 역할과 한계”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북한대학원 대학교 겸임 교수. 저서는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위하여 : 이대근 기자의 정치 읽기(2009), 『북한 군부는 왜 쿠데타를 하지 않나』(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