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보는 김정은 시대의 북한 정치│② 김정은 시대의 2인자 최룡해

2019-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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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역사를 통틀어 수령과 수령의 후계자를 제외하고 이렇게 당·정·군 고위직을 동시에 차지한 인물은 없었다. 

김일성 가계와 충신 가계 간 혈연적 관계와 다름없는 특수 관계야말로 최룡해라는 권력의 탄생을 가장 설득력 있게 이해시켜 주는 열쇠가 아닐 수 없다. 

"인물로 보는 김정은 시대의 북한 정치"를 연재하며

앞으로 인물이라는 창을 통해 북한 정치를 이해하는 글을 연재할 계획이다. 이번 호에는 두 번째로 “김정은 시대의 2인자 최룡해”를 다룬다. 앞으로 이어질 <인물로 보는 김정은 시대의 북한 정치> 1부의 집필 계획은 다음과 같다.

  1. 북핵 협상 대표 김영철
  2. 김정은 시대의 2인자 최룡해
  3. 김정은의 최측근백두혈통 김여정
  4. 혜성처럼 나타난 총리 김재룡
  5. 뚝심 있는 외무상 리용호
  6. 막후의 실력자 당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조용원


***


인물로 보는 김정은 시대의 북한 정치 ② 
김정은 시대의 2인자 최룡해

글쓴이 ㅣ이대근 경향신문 논설고문


“일성이는 학교 물 마셨다고 우쭐럽댑디다”

“우리 집은 몹시 가난했소. 뼈 빠지게 일을 해도 살림이 펴이는 적이 없었단 말이요. 제길할, 잘사는 놈의 것을 뺏아 와야 되겠다고 생각했지. 잘 사는 놈의 집에서 소를 풀어냈단 말이요. 처음에는 소를 몇이서 잡아먹었지요. 쇠고기를 지고 집에 돌아와서 어머니에게 고깃국을 끓여 드렸지요”(려정 1991,119).1)


그러나 소도둑질한 최득권은 곧 발각되었고, 중국 옌지(延吉) 감옥에 들어간다. 1907년 지린성(吉林省) 훈춘현(琿春縣)에서 태어난 그는 감옥에서 ‘독립 운동하는 사람’ ‘공산당을 하는 사람’을 알게 된다. “백성을 착취해서 잘사는 놈을 타도한다는 공산당이 내 맘에 들더란 말입니다”(려정 1991, 119). 그는 이들과 함께 탈옥한다. 17살인 1924년 항일운동을 시작한 그는 동만청년동맹에 가입한 뒤 자금을 모집하고 격문을 살포하다가 1926년 중국 경찰에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6년형으로 감형되었다. 1932년 7월 만기 출옥한 뒤 이름을 최현(崔賢)이라고 고쳤다. 그의 둘째 아들이 바로 김정은 시대 2인자로 부상한 최룡해다. 김정은 시대 최룡해의 역할과 위상은 최현과 김일성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최현이 김일성을 처음 만난 것은 1933년 9월 중국인 왕더타이(王徳泰)가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장으로 있는 부대에 합류할 때였다. 김일성보다 다섯 살 위였지만, 그의 밑에서 활동한 최현은 1937년 6월 4일에는 김일성과 함께 보천보 전투를 치르기도 했다. 최현은 김일성에게 사적으로 툭 터놓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공산당을 따라 산에 들어가서 일성이를 알게 되었는데 걔는 학교 물을 마셨다고 우쭐렁댑디다. 우쭐렁댈 만도 하지. 나 같은 것들은 낫을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데 일성이랑은 조선 글도 알고 넓적 글(한문으로 추정)도 좀 알았으니깐. …… 한번은 일성이가 된 감기에 걸려 꼼짝을 못하는 걸 내가 업어 주었지요. 그때는 일본 놈과 만주군이 추격해 올 때여서 정황이 위급했지요. 나는 일성이를 업구 냅다 뛰었단 말이요. 그때 내가 아니었다면 일성이는 적한테 붙들렸을 거요. 걔 엉치가 어찌나 무겁던지. 총소리가 뜸해지자 내가 소리쳤지, ‘야, 이 새끼야, 인제 좀 내려서 걸어라’ 했더니 ‘조금만 더 업어 줘 조금만 더’ 하더란 말이요. …… 정숙이를 일성이한테 붙여 준 것은 나야. 내가 힘을 썼길래 일성이 장가를 들었지, 일성이는 덧니가 험하게 나서 입을 다물지 못했는데 말이야, 조선에 돌아와서 앞니를 싹 뽑아 치우고 틀리를 해 넣었단 말이요”(려정 1991, 120).


최현은 1940년 1월 김일성 부대가 일본군의 추격을 벗어나기 위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겼을 때도, 해방 후 귀국할 때도 함께했다. 김일성의 생명을 구한 은인이었던 그는 김일성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가장 앞장서서 그를 보호했다. 연안파, 소련파가 김일성에 도전했다가 실패했던 이른바 1956년 ‘8월 종파 사건’ 때도, 김정일 후계자 결정 때도 그가 나섰다. 1956년 8월 당 중앙위원회 전원 회의에서 김일성에 공세를 펴던 ‘종파 분자들’을 권총을 빼들고 위협했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무식하고 거친’ 항일 빨치산들

최현은 성미가 급하고 거칠었다. 사실 항일 빨치산 출신들은 대부분 단순하고 무식하며 지기 싫어하는 야생마 같았다. 제대로 교육받을 기회가 없었던 데다 거친 환경에서 생사를 건 투쟁을 하느라 형성된 집단적 문화였다. “그들은 대개 무식하고 안하무인이며 모든 행동을 마음 내키는 대로 한다. 또한 작풍이 거칠고 야성적이며 심술이 많고 질투를 잘한다”(려정 1991, 101).


1953년 늦가을 제1집단군 정치부는 전군 문예 서클 경연 대회를 앞두고 류경수 사령관2)을 모시고 전사들이 만든 악기로 소형 교향악을 시연했다. 몇 곡이 연주된 뒤 류경수 사령관은 정치부 간부에게 호령했다.

“여보, 당신 어떻게 지도했길래 공연 중에 쉬는 놈이 있소?”

“사령관 동지, 본시 교향악이란 악사들이 자기 차례가 아닐 때는 연주를 안 하고, 자기 차례에만 연주하게 되어 있습니다.”

“허튼소리 마우. 이런 무규율한 물건을 가지고 어델 가서 연주하겠다는 거요. 연주 과정에 한 놈도 쉬지 못하게 하우.”

한국전쟁 직전 연대장이던 최현은 중앙정부에 소속된 한 제재 공장 지배인에게 목재를 요구했으나 사정이 어렵다며 거절당하자 모욕적인 언사를 퍼부었다. “개새끼, 일본 놈의 배급 쌀이나 타먹던 새끼 정말 못주겠니?” 이에 지배인이 항의하자 최현은 권총을 꺼내 두 발을 쏴 현장에서 죽여 버렸다(려정 1991, 103-105).


그러나 그게 항일 빨치산의 전부는 아니다. 그들은 의리 있고 솔직했으며 호쾌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최현이다.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최현은 매우 솔직하고 소탈한 사람이다. 그는 보는 대로 말하고, 생각나는 대로 표현하는 사나이”(고수석 2018, 55-56)라고 평했다. 군단 당 열성자 회의에서 그가 보고를 할 때였다. 그는 ‘혁명적 경각성을’이라고 쓰인 부분을 ‘혁명 적경 각성을’로 읽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다. 이런 일도 있었다. 그가 한 보고 대회에서 보고문을 읽던 중 잘 이해되지 않는 문장이 나오자 그냥 넘어가지 않고 옆 참모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여보, 이게 무슨 말이요? 써줄래면 똑똑히 써줄 게지”(려정 1991, 105).


최현은 군사 지휘관으로는 능력의 한계가 있었고, 스스로도 그걸 인정했다. 옛날식 전투는 해도 현대전은 모른다는 고백을 스스럼없이 했다. 그가 인민무력부장이 된 건 당시 기준으로 늙어도 한 참 늙은 62세 때였다. 전임자 최용건은 48세, 김광협은 42세, 김창봉은 43세에 부장직을 맡았다(고수석 2018, 59).


<사진 설명> 1982년 4월 북한 <로동신문>에 실린 최현의 부고. 최룡해는 최현의 아들이다. 출처_ <로동신문>


김일성·김정일에 충직했던 최현

최현-김일성 관계뿐만 아니라, 최현-김정일 관계도 매우 끈끈했다. 최현이 김정일을 수령 후계자가 되도록 한 일등 공신이었으니 말할 것도 없다. 1960년대 후반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 김일성의 장남 김정일, 차남 김평일 사이에 후계자 권력 투쟁이 한창일 때는 김일성을 찾아가 김정일을 왜 후계자로 결정하지 않느냐고 따지기도 했다. 당시 최현은 권총을 차고 다니며 김평일 지지자를 협박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김일성은 훗날 최현이 김일·림춘추와 함께 ‘김정일 동무를 우리당과 국가의 수위에 추대하는 데서 선구자의 역할을 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김일성 1998, 276-282).


김정일은 전쟁 영화를 좋아하는 그에게 영사기를 선물, 집에서 영화를 볼 수 있게 해주는 등 극진히 대접했다. 최현도 최선을 다했다. 김정일이 21살 대학생 때인 1963년 8월, 백두산을 찾았다. 당시 아들 뻘인 김정일을 수행하던 56살의 최현이 김정일 그림자를 밟지 않기 위해 황급히 몸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피했다. 최현은 “장군님(김정일)의 그림자를 밟아서는 안 된다는 제 나름의 철칙을 그 언제나 지켜 가는 투사 동지였다.” 그가 김정일을 대하는 태도는 “수령님(김일성)을 모실 때의 정중한 자세와 몸가짐 그대로였다”(『노동신문』 2013/12/20).


<사진 설명> 최현을 영웅화한 북한의 선전영화 "혁명가". 출처_조선중앙TV


최현이 사망한 2년 뒤인 1984년에는 그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혁명가>가 나왔다. 북한에서 김일성 가계가 아닌 인물을 영웅시하는 건 매우 드문 일이다. 이후 최현은 김일성·김정일 2대 수령을 충직하게 모신 충신의 전형으로 자리 잡았다. 최현 사망 30주기를 하루 앞둔 2012년 4월 8일에도 『로동신문』은 4면 절반을 할애해 최현의 업적을 소개했다. ‘자기 수령에 대한 충실성이 몸에 배인 사람’이라는 취지였다.


2인자 위세를 누리던 장성택이 처형되고 김정일 사망 2주기를 앞둔 2013년 12월 북한은 다시 김일성·김정일에 충직했던 최현을 집중 조명했다. 김정은에게 지금 필요한 인물은 동상이몽, 양봉음위(陽奉陰違: 앞에서는 순종하는 체하고, 속으로는 딴 마음을 먹는 것)하는 반당·반혁명·종파 분자가 아니라, 김일성·김정일에게 죽을 때까지 헌신했던 최현 같은 존재임을 상기시킨 것이다. 그러면 ‘최현 같은 존재’는 누구인가? 최룡해는 자신이 아버지의 대를 이어 수령을 지키는 충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12월 17일 평양 체육관에서 열린 김정일 2주기 중앙추모대회 주석단에서 총정치국장 최룡해가 나섰다. “1950년대 준엄한 시련의 시기 반당 분자들을 가차 없이 쏴죽이겠다고 권총을 뽑아 들었던 항일 혁명 투사들처럼 최고 사령관 동지의 령도를 거세하려는 자들은 재 가루도 남지 않게 불태워 버리겠습니다”(『연합뉴스』 2013/12/17). ‘반역자 장성택’과 ‘충신 최현’을 대비하며 최룡해 자신의 존재를 부각하기에 이보다 좋은 시점은 없었다.


최현의 아들 최룡해의 이유 있는 2인자 부상

그로부터 5년여의 시간이 흐른 2019년 모든 것이 명백해졌다. 이미 당에서 실권을 행사하던 최룡해가 드디어 국가수반의 자리에까지 오름으로써 당·정·군에서 김정은을 제외하고 가장 높은 지위를 차지한 인물이 된 것이다. 최룡해의 69년 인생의 절정이었다. 국무위원회 부위원장이었던 그는 2019년 4월 11일 최고인민회의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다음 자리인 국무위원회 제1부위원장으로 승진했다. 국무위원회는 인민무력성, 국가보위성, 인민보안성, 국가체육지도위원회, 내각을 관할하는 최고 국가기관이다. 그는 이날 또 대외적으로 국가를 대표하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에도 선출되었다. 그는 당의 핵심 기구인 정치국 상무위원, 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과거 당 비서직), 전체 당 조직은 물론 당적 지도를 받는 모든 기관을 통제하는 조직지도부장을 맡아 왔다. 조선 인민군 차수로서 당직이자 군사 문제의 최고 결정 기관인 당 중앙군사위원도 겸직해 왔다.


북한 역사를 통틀어 수령과 수령의 후계자를 제외하고 이렇게 당·정·군 고위직을 동시에 차지한 인물은 없었다. 최룡해 이전까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으로 국가를 대외적으로 대표하는 국가수반은 김영남이었지만, 그는 실권 없는 상징적 인물이었다. 말하자면, 국가수반이면 당내 실권이 없고, 당내 실권이 있으면 국가수반이 되지 않는, 나름의 권력 견제 관례가 깨진 것이다. 수령 체제의 특성상 그가 김정은의 권력을 나눠 갖는 2인자는 될 수 없을지언정 김정은을 제외한 인물 가운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라는 의미에서 2인자라는 사실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의 부상은 역시 김일성·김정일과 최현·최룡해의 대를 이은 인연을 빼 놓고 설명하기가 어렵다. 어릴 때 김정일과 이웃해서 살았던 최룡해는 김정일을 형으로 부르며 따랐다고 한다. 김정은이 권력 공고화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있다면, 역시 뭐라 해도 검증된 충성심이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정은에게 최룡해 이외의 대안은 애초에 없었던 것인지 모른다. 김일성 가계와 충신 가계 간 혈연적 관계와 다름없는 특수 관계야말로 최룡해라는 권력의 탄생을 가장 설득력 있게 이해시켜 주는 열쇠가 아닐 수 없다.


북한 권력 엘리트는 김일성 가계, 항일 빨치산 가계, 고위층 가계, 신진 관료 등 네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오경섭·김갑식 2015, 143). 김일성 가계는 백두 혈통으로도 불리는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의 직계 가족을, 신진 관료는 연고 없이 자수성가한 인물을 말한다. 당연히 최고 권력은 백두 혈통에서만 나온다. 그게 김정은이 수령이 된 이유이다. 그 다음 지위를 차지하려면 항일 빨치산의 자식으로 태어나야 한다. 항일 빨치산 자식의 역할은 백두 혈통을 결사 옹위하는 것이며, 그런 역할이 인정되는 한 일정 권력을 분배받을 수 있다. 최룡해가 그런 경우다.


<사진 설명> 최룡해. 출처_위키미디어


12년간 5백만 명의 청년동맹 최고 책임자 맡아

1950년생인 최룡해는 북한 엘리트의 산실 만경대혁명학원, 김일성종합대학을 나온 뒤 당의 외곽단체인 사회주의노동청년동맹에서 활동했다. 만 서른이 되던 1980년, 동맹의 국장이 된 그는 6년 뒤 36살의 젊은 나이에 동맹의 최고 자리인 중앙위원장에 선출되어 12년간 재직한다. 북한 역사에서 청년동맹 최고위직을 이렇게 장기간 맡은 이는 그 외에 없었다. 동맹은 김일성 사후인 1996년에는 김일성주의사회주의청년동맹으로, 김정일 사후인 2016년에는 김일성·김정일주의청년동맹으로 이름을 바꿨다. ‘수령의 존함을 모신’ 조직답게 당의 외곽단체이자 근로 단체로서 규모가 가장 크고 북한 내 위상도 가장 높다.


근로 단체는 청년동맹 외에 조선직업총동맹, 조선농업근로자동맹, 조선민주녀성동맹이 있다. 연령별, 직업별, 성별로 조직된 이 단체는 당과 대중을 연결하는 인전대(引傳帶: 동력을 전달하는 벨트, 즉 피댓줄)이자, 당의 방조자(幇助者: 지원자), 후비대(後備隊: 앞으로 일정한 조직의 대열을 보충하거나 사업을 계승하고 활동하게 될 집단)로 불린다. 당원이 아닌 인민은 모두 4개 단체 중 하나에 의무적으로 소속된다(정성임 2003, 13-14). 근로 단체는 흔히 복숭아로 비유된다. 복숭아씨는 수령이며, 씨를 싸고 있는 단단한 껍질은 당, 껍질을 둘러싸고 있는 살은 근로 단체다. 따라서 근로 단체들이 강화되어야 대중을 ‘당의 두리(둘레의 북한말)’에 튼튼히 묶어세울 수 있고, 당을 힘 있는 당으로 만들 수 있으며, 당과 인민의 최고 수뇌인 수령을 견결히 옹호할 수 있다는 것이다(정성임 2003, 35-36). 만 14~30세로 당원이 아닌 청년·학생·군인·직장인의 경우 무조건 청년동맹에 가입해야 한다. 각 도, 시, 군은 물론 개별 연합기업소, 공장에도 조직되어 있다. 5백만 명의 맹원을 자랑하는 청년동맹은 1990년대 체제 불안감이 고개를 들 때 위상이 제고되었다. 당, 군과 함께 당의 3대 핵심 기둥으로서 위기를 돌파하는 핵심 세력이 된 것이다. 동맹은 규모가 가장 큰 근로 단체인 만큼 당원도 가장 많이 배출한다. 그래서 청년동맹은 군중에서 핵심을 키워 당 대열을 보충하는 당의 후비대로 불린다. 청년동맹은 입당 보증은 물론, 군 입대, 상급학교 입학 추천, 표창 등을 통해 청년을 장악한다(정성임 2003, 62).


잘 나가던 최룡해는 1998년 청년동맹 비리 사건이 적발되면서 동맹 제1비서에서 해임돼 평양시 상하수도 관리소 비서로 좌천당했다. 그러나 2003년 당 총무부 부부장으로 재기하고, 2010년 당 근로 단체 비서로 승진하기까지 했다. 김정일 사망 이후에는 초고속으로 승진하며, 2인자 징후를 뚜렷이 보였다. 2012년 4월 당의 최고 결정 기관인 정치국 상무위원회의 위원, 군대를 지휘하고 군사 문제 결정권을 행사하는 당 중앙군사위원회의 부위원장, 조선인민군 차수, 조선인민군을 통제하는 총정치국장, 국방 등 국사 전반을 지도하는 국방위원회의 위원에 동시 선출 및 임명된 것이다. 눈에 띄는 점은 군 경력이 전무한 당 간부가 총정치국장을 맡은 것이다. 김정일 시대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다. 장기간에 걸친 군 통제를 통해 군을 신뢰하게 된 김정일은 군 통제를 맡는 총정치국장에 군 출신을 임명, ‘군에 의한 군 통제’를 했다, 반면 권력 안정을 최우선시 해야 할 집권 초기, 군을 충분히 신뢰할 수 없었던 김정은은 군 통제를 군 자체에 맡기기보다 군 밖, 즉 당 관료 출신에게 군 통제를 맡긴 것으로 해석된다.


장성택과 최룡해의 엇갈린 운명

장성택과 최룡해는 여러 측면에서 비교된다. 김정일 시대, 김정은 시대 각각 2인자 위상을 차지했던 두 사람 모두 두 번의 좌절을 맛본 경험이 있다. 최룡해는 청년동맹 비리 사건 때에 이어 2015년 11월 초 함경도 협동 농장으로 내려가 3개월간 혁명화 교육을 받은 바 있다. 혁명화는 인민들과 함께 노동을 하며 인민들로부터 혁명 정신을 배운다는 취지지만, 간부를 징계하는 방식으로 활용되고 있다. 장성택 역시 김정일 시대에 두 차례 혁명화 조치를 당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다시 신임을 얻어 복귀했다.


그러나 김정은 시대 들어 운명이 엇갈렸다. 장성택은 처형되고 최룡해는 승승장구한 것이다. 최룡해의 업무는 상당 기간 김정일 시대 2인자 장성택의 업무와 겹쳐졌다. 최룡해가 청년동맹 위원장 혹은 제1비서일 때 장성택은 당에서 청년 단체를 지도하는 부서의 책임을 맡았다. 그 때문에 남쪽에서는 그가 장성택의 측근으로 알려지기도 했지만, 장성택 처형으로 사실과 거리가 있다는 점이 밝혀졌다.


최룡해와 경쟁한 황병서의 갑작스러운 퇴진

최룡해는 한동안 황병서와도 당내 지위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2인자 경쟁을 하는 듯 보였다. 오랫동안 당 조직 지도부에서 군을 담당했던 당료 출신 황병서는 김정은 시대 들어서 눈에 띄게 부상했다. 김정일 사망 전인 2010년 9월 최룡해가 대장 계급을 받을 때 황병서는 중장(별 두 개) 계급을 받았다. 북한에서는 군 지휘관이 아니어도 당에서 군사 문제를 다루거나 군대와 관련한 당 기관의 일원일 경우 상응하는 군 계급을 상징적으로 부여한다. 최룡해가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당 중앙위원에 선출됐을 때 황병서는 고위직이라고 할 수 없는 당중앙위원회 후보 위원에 선출되었다.


<사진 설명> 2018년 9월 9일 북한 정권수립 70주년 기념 열병식에서 주석단에 나란히 선 김정은(사진 중앙)과 최룡해(오른쪽 첫번째). 출처_조선중앙TV


그러나 황병서는 중장 진급 7개월 만인 2011년 4월 상장(별 셋)계급으로 승진한 데 이어 김정일 사후에는 당뇨 악화로 최룡해가 정치국장직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게 되자 급부상하기 시작했다(정성장 2015, 2). 2014년 3월 당 조직지도부의 군사 담당 제1부부장이 된 것이 첫 신호였다. 군사 담당이란, 전군의 간부 인사와 검열을 총괄하는 주요 직책이다. 같은 해 4월에는 대장으로 승진했고, 승진 직후 최룡해를 대신해 총정치국장이 되면서 차수 계급도 최룡해와 동시에 달았다. 같은 해 9월에는 최룡해가 맡았던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직도 물려받았다. 그러더니 다음 해인 2015년 2월 드디어 당 최고 권력 기구인 당 중앙위 정치국 상무위원에 선출됐다. 김정은,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함께 3인 상무위원 중 1인이 된 것이다. 김영남이 상징적 인물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황병서는 김정은 다음 자리, 즉 수령이 아닌 인물이 오를 수 있는 최고위직에 오른 셈이다. 최룡해를 앞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는 2018년 2월 갑자기 해임됐다. 국가정보원은 2월 5일 국회 정보위원회에, 황병서가 해임된 뒤 고급 당 학교에서 사상 교육을 받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보고했다. 당연히 정치국 상무위원과 국가직에서도 해임됐을 것으로 판단된다.


북한에서 2인자는 항상 부침을 겪었다. 장성택·황병서가 그랬다. 수령의 절대 권력을 털끝만큼도 손대서는 안 되는 2인자. 2인자는 언제 닥칠지 모르는 위기의 그림자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불안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최룡해는 예외일까? 김일성·김정일·김정은과 최현·최룡해의 대를 이은, 특별한 관계는 그를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 줄 것인가? <끝>


주석

1) 연안파 려정(呂政)은 김일성 만주파로부터 숙청을 당해 중국으로 탈출한 망명객이다. 려정은 가명이다. 1925년 평안남도 진포에서 태어난 그는 일제 말기인 1945년 5월 일제의 징병을 피해 만주 펑톈(奉天)으로 넘어갔다. 그 곳에서 조선독립동맹·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조선의용군으로 활약했다. 처음에는 일본군 패잔병과 싸웠으며, 일제 패망 후에는 국공 내전에 참전했다가 1950년 4월 평양으로 돌아와 조선인민군에 편입되었다. 연대 당 위원장으로 한국전쟁에 참전, 많은 무공훈장을 받았고 사단 정치위원까지 지냈다. 그러나 1956년 이른바 ‘8월 종파 사건’ 이후 김일성 만주파가 대대적으로 전개한 숙청에 그도 희생양이 되었다. 군대 내 반종파 투쟁 때 연안파인 그는 특별한 이유 없이 반당 분자로 몰려 1959년 수감됐다. 1969년 10년 만기를 채우고 출옥한 그는 밤중에 산을 타고 북·중 접경 지역까지 이르는, 목숨을 건 탈출 행로 끝에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망명했다. 북한 내 경험과 자신의 기록, 당시 그가 북한 간부와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해 1991년 서울에서 『붉게 물든 대동강』(동아일보사, 1991)을 발간했다.

2) 김일성 만주파 빨치산 출신인 그는 어릴 때 너무 가난해 정식 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다. 조선인민군 창건 때는 전차 부대를 창설했다. 그의 전차 부대는 한국전쟁 때 최초로 서울에 입성한 것으로 유명하다. 북한은 이 같이 한국전쟁 때의 공적을 기려, 그의 부대에 ‘근위 서울류경수제105탱크사단’이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이 탱크 사단은 아직도 같은 이름을 쓰고 있다.


참고문헌

● 『로동신문』(2013/12/20).

● 고수석. 2018. 『북한을 움직인 30인』, 늘품플러스.

● 김일성. 1997. 『세기와 더불어 4』. 조선로동당출판사.

● 김일성. 1998. 『세기와 더불어 8』. 조선로동당출판사.

● 려정. 1991. 『붉게 물든 대동강』. 동아일보사.

● 박형중. 2014. “김정은 시대 북한의 정치와 경제의 동학: 장성택 숙청의 구조적 배경.” 『한국과 국제정치』 제30권 제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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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근 ㅣ경향신문 논설고문

1984년 경향신문사에 들어간 뒤 정치부 기자, 국제부장, 정치 국제 에디터, 논설위원, 편집국장, 논설 주간을 거쳐 현재 논설 고문으로 일하고 있다. 국내 정치, 외교 안보 분야를 주로 담당했다. 경향신문에 <이대근 칼럼>을 쓴다. 2000년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북한 선군 정치를 주제로 한 “조선 인민군의 정치적 역할과 한계”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북한대학원 대학교 겸임 교수. 저서는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위하여 : 이대근 기자의 정치 읽기(2009), 『북한 군부는 왜 쿠데타를 하지 않나』(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