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대통령 선거 기간에 문재인 후보는 자신이 대통령에 당선되면 새 정부는 문재인 정부가 아니라 더불어민주당 정부가 될 것임을 여러 차례 강조한 바 있다.
그러나 언제인가부터 대통령은 ‘민주당 정부’를 말하지 않기 시작했다. 어쩌다 한 번씩 있는 당의 큰 행사가 아니면 그로부터 민주당 정부라는 말을 들을 기회는 사라졌고, 정부에서든 언론에서든 ‘문재인 정부’라는 말이 더 자주 더 많이 언급되었다.
정당이 약한 민주주의 ②
한국
글쓴이_박지혜(정치평론가)
민주당 정부에서 문재인 정부로
지난 대통령 선거 기간에 문재인 후보는 자신이 대통령에 당선되면 새 정부는 문재인 정부가 아니라 더불어민주당 정부가 될 것임을 여러 차례 강조한 바 있다. 민주당 내에서 다른 예비 후보들과 치열한 경쟁을 거쳐 본선에 오르고, 당의 공식 후보라는 인정과 함께 당원들의 조직적・정책적 지원을 얻어 대통령 선거에 임했으니 이것은 당연한 주장처럼 보일는지 모른다. 하지만 민주화 이후 어떤 대통령도 정당정부에 대한 의지를 밝히거나 실천한 적이 없었기에 그의 공언(公言)은 우리 정치사에 한 획을 그을 만한 의미심장한 발언이었다. 게다가 전임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까지 당한 데는 자신이 속한 정당과의 협력은 무시한 채 주변 측근에만 의존한 탓도 컸기에 신임 대통령의 약속은 진정한 정치 변화를 바라는 시민들로부터 폭넓은 공감과 지지를 얻기도 했다.
그러나 언제인가부터 대통령은 ‘민주당 정부’를 말하지 않기 시작했다. 어쩌다 한 번씩 있는 당의 큰 행사가 아니면 그로부터 민주당 정부라는 말을 들을 기회는 사라졌고, 정부에서든 언론에서든 ‘문재인 정부’라는 말이 더 자주 더 많이 언급되었다. 그렇게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인사들은 특별한 설명도 없이 새 정부를 문재인 정부라고 불렀고, 그가 속한 정당의 누구도 이런 호칭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홉스(Thomas Hobbes)는 통치자의 최고 권력이 ‘이름 붙이는 힘’(power of naming)에서 나온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이름은 인식을 낳고, 인식은 실천을 낳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 박근혜 정부에 이어 그들 대통령의 전횡과 부패를 성토했던 이들이 스스로를 민주당 정부가 아닌 문재인 정부로 호명한 것도 그들 나름의 인식과 실천을 만들어 내고 있다. 새 정부의 통치에서 정당의 역할을 찾기는 그만큼 어려워졌고, 당이 비워 놓은 자리에는 개혁의 전권을 위임받은 듯한 대통령과 그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청와대 인사들이 위세를 떨치기 시작했다.
정당은 통치의 수단이다. 시민들의 의견을 수렴하며 지지를 모으고, 이견을 조정하며 정책을 결정하고, 다시 그 정책의 집행을 격려·감시하며 기대한 효과를 검토하는 데 유용한 수단이다. 물론 다른 수단도 있다. 사회의 다양한 의견을 확인하는 데는 언론이나 운동, 이익집단을 활용할 수 있고, 정책을 집행하는 일은 기본적으로 관료에 의존해야 하며, 이와 관련된 여러 정부 업무를 조정하기 위해서는 대통령 비서실 같은 별도의 보좌진도 필요하다. 그러나 정당을 통해 통치의 책임을 맡은 정치인들이 정당이 아닌 다른 수단에 의존할수록 정부 정책의 효과는 반감되고 사회적 갈등은 심화되기 마련이다.
문재인 정부의 거의 모든 정책이 그렇지만, 정당을 배제하거나 활용하지 못한 문제가 특히 두드러진 사례는 적폐 청산 정책과 최저임금 인상으로 보인다. 이들 사례를 하나하나 살펴보자.
적폐 청산: 여론과 검찰에 의존한 정치
문재인 정부 들어 정치권 안팎에서 가장 많이 회자된 단어는 ‘적폐 청산’이었다. “오랫동안 쌓인 폐단을 깨끗이 씻어 낸다.”는 이 말은 애초 박근혜 대통령이 세월호 사건에 대한 책임을 과거 정부로 돌리는 수사의 일환으로 활용하면서 언론 매체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박상훈 2017). 그랬던 것이 다시 대통령 자신에게 돌아와 그에 대한 탄핵 촉구 집회의 대표적인 구호 가운데 하나로 널리 사용되었다. 이후 대선 과정에서 민주당은 그 말을 받아 안아 “이명박·박근혜 9년 집권 적폐 청산”을 대표 공약으로 내걸었고, 선거에서 승리한 문재인 대통령 역시 “국민이 주인인 정부”라는 국정 목표를 실현하는 첫 번째 국정 과제로 “적폐의 철저하고 완전한 청산”을 제시했다.
새 정부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서 밝힌 적폐 청산의 내용은 “국정 농단 보충 조사 및 재발 방지 대책 수립, 최순실 부정 축재 국내외 재산 환수 추진, 문화계 블랙리스트 관련 사실 관계 파악과 재발 방지” 등이었지만, 청산 대상은 정부가 처음 표명한 것에 국한되지 않았다. 시민사회 각계에서도 사회적 문제로 지목된 사안 또는 집단을 두고 언론 적폐, 노동 적폐, 재벌 적폐, 교육 적폐, 심지어 정보통신기술(ICT) 적폐까지 언급하며 ‘적폐 청산 열풍’이라 부를 만한 현상을 만들어 냈다. 정부와 여당 또한 각각 부처별 적폐 청산 테스크 포스(TF)와 적폐청산위원회를 구성해 사회 전반의 묵은 폐해를 해소하는 데 진력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드러냈고, 그런 활동은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기 대통령을 비롯한 고위 관료들의 위법행위에 대한 검찰 조사와 법원 판결에서 절정에 달했다.1)
이와 같은 적폐 청산 정책의 문제는 미국 사례와의 비교를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과 그 측근, 재벌 대기업이 공모한 부정부패와 정경 유착에 분노한 대중이 외친 적폐 청산은 지난 미국 대선 당시 트럼프 지지자들이 애용했던 ‘오물을 쓸어버려라’(Drain the Swamp/이하 DTS)는 구호와 매우 유사하다. 앞의 글 “정당이 약한 민주주의 ①: 미국”에서 밝혔듯이 DTS 역시 미국 사회에 만연한, 정치인들과 거대 이익집단 간의 유착 관계 해소를 촉구한 구호이기 때문이다.
양자의 유사성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두 구호의 의미가 정치인들에 의해 변용되는 방식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미국에서 DTS를 수용한 트럼프 대통령은 임기 초반 그 구호를 외친 지지자들의 요구에 따라 로비 활동 규제를 시도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남기지 못했다. 그 후 트럼프는 대중의 기억 속에 각인된 그 ‘오물’(swamp)을 과도한 정부 규제나 비대한 정부 규모를 일컫는 말로 사용하더니 곧 자신에 반대하는 정치인이나 관료, 언론을 공격하는 용어로 활용하며 자기 입장을 정당화하곤 했다.
한국에서도 탄핵 집회 당시 제기된 적폐의 의미는 사회 전반에 걸친 부정과 부패, 부조리로 폭넓게 해석할 만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물론 여기에는 탄핵 사태를 야기한 제도적 요인으로서 개발독재 시대 이래 변함없이 지속되어 온 무소불위의 대통령 권력과 그에 공생한 재벌 대기업 문제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적폐 청산은 공약 구성과 정책 집행 과정에서 그 범위와 방법이 점점 더 왜소화되어 주로 검찰 수사와 사법 판결을 통해 전임 정부의 대통령들과 고위 관료가 저지른 불법·비위 행위를 처벌하는 인적 청산에 그치고 말았다.
새 정부 적폐 청산 정책의 귀결이 전임 정부 인사들에 대한 사법 처리에 머물며 구원(舊怨)에 대한 해소로 비춰지면서 야당과 그 지지 세력의 반발도 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은 적폐 청산에 대한 비판에 굴하지 않으며 사회 원로들과의 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살아 움직이는 수사에 대해 정부가 통제할 수 없고 통제해서도 안 된다. … 국정 농단이나 사법 농단이 사실이라면 아주 심각한 반헌법적이자 헌법 파괴적인 것이기에 타협을 하기가 쉽지 않다”(2019/05/02).
대통령의 말에도 일리는 있다. 지난 정부의 고위 관료와 법관들이 단순한 부정부패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근본 원리를 훼손하는 중대 범죄를 저질렀다면, 마땅히 적법한 절차에 따라 처벌해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은 시민이 선출한 대표의 중요한 책무 가운데 하나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우려되는 검찰에 대한 자의적 통제도 자제하고 회피해야 할 일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지난 역사를 돌아보면 그의 접근은 사태의 일면만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민주화 이후 한국 정치는 정당이 서로 다른 시민의 선호에 부응하며 지지를 동원하는 정책 경쟁보다 상대 세력의 부정과 불법을 폭로하고 조사하고 처벌하며 자기 정당성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어 왔다. 대통령을 비롯한 집권 세력이 언론과 검찰을 동원해 전임 정부 인사들의 과오를 처리한 것 또한 그런 경우에 속한다. 김영삼 대통령의 민정계 숙정이 그랬고, 김대중 대통령의 안기부 비자금 수사가 그랬고, 노무현 대통령의 대북 송금 특검 수용이 그러했으며, 이명박 대통령의 노무현 전 대통령 비위 수사 지시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과정의 반복을 통해 사회로부터 절연된 대통령 권력은 점점 더 강화되어 왔고, 청와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언론과 검찰 권력 또한 그만큼 더 강화되었다. 그에 반해 시민 유권자의 지지를 모으는 정치의 방법으로 이들 권력의 삼각관계를 제어하고 견제할 수 있는 정당의 역할은 줄어들고 말았다.
행정부 수장인 대통령에게 권력이 집중된 조건에서 대통령과 그 측근은 한편으로 위법과 부패의 유혹에 항시적으로 노출되고, 다른 한편으로 언론이나 검찰 같은 ‘다른 수단’에 의한 통치에 의존하기 쉽다. 지금 대통령은 다를까? 그의 선의는 얼마나 믿을 만한 것일까? 차라리 지금부터라도 적폐 청산의 선악 이분법에 기반해 대통령이 주도하는 여론 정치, 검찰 정치가 아니라 그와 같은 대통령 권력, 검찰 권력을 제한하며 합의 가능한 사회적 목표를 두고 더 나은 대안으로 시민-유권자의 지지를 모으고자 경쟁하는 정당정치의 방법을 고민해 보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최저임금 인상: 정당 없는 노동 정책의 민낯
문재인 정부가 적폐 청산이라는 이름으로 구악 일소 또는 정적 제거에만 몰두한 것은 아니다. 새 정부 출범 즉시 대통령 직속 일자리 위원회를 구성하며 고용·노동문제 해결에 대한 의지를 밝혔고, 선거에서 공약한 대로 비정규직 정규직화와 최저임금 1만 원 실현에도 공을 들였다. 특히 2018년 시간당 7,530원으로 대폭 인상되는 최저임금과 관련해 대통령은 그 정책적 함의와 원활한 집행을 이렇게 강조하기도 했다.
“내년도 최저임금 인상 결정은 최저임금 1만 원 시대로 가는 청신호이며, 극심한 소득 불평등을 완화하고 소득 주도 성장을 통해 사람 중심의 국민 성장 시대를 여는 대전환점이 될 것이다. … 최저임금 1만 원의 성공 여부는 최저임금 인상을 감당하기 어려운 소상공인과 영세 중소기업들의 부담을 어떻게 해소시켜 주느냐에 달려 있다. 최저임금 인상을 감당하기 어려운 업종에 더 각별한 관심을 갖고 할 수 있는 정책 수단을 모두 동원해 주길 바란다”(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 발언, 2017/07/17).
최저임금 인상을 지켜보는 대통령의 기대는 컸고, 그 정책의 성공 조건에 대한 판단도 정확했다. 그러나 여기서도 정당 부재의 공백은 뚜렷하게 나타났다.
정치 활동가 김진엽은 2012년 대선 당시 군소 후보의 이색 공약에 불과했던 최저임금 1만 원이 집권 정당의 대표 정책으로 자리 잡는 과정을 조명하면서 민주당의 정치 역량 부족을 날카롭게 비판한 바 있다(김진엽 2019). 그에 따르면, 2015년 민주당 대표 경선 과정에서 이인영 후보는 최저임금 1만 원 공약을 내세우며 민주당 정책의 선명성을 강조한 데 반해 문재인 후보는 “중소기업, 영세 자영업자들이 급격한 인상을 버틸 수 없다.”는 근거로 최저임금 목표치를 7천 원대로 제시하며 “자영업자와 중소 상공인 지원책이 병행되어야 한다.”고 응수했다. 이후 민주당과 문재인 대표도 2016년도 최저임금 결정을 앞두고 비록 ‘장기적’이라는 단서를 붙이긴 했지만 1만 원 정책을 수용했고, 2017년 대선에 이르러서는 최종적으로 2020년까지 최저임금 1만 원을 공약으로 제시했다.
여기서 문제는 민주당이나 대통령이 계속 말을 바꾸고 입장을 변경했다는 것이 아니다. 당이든 대통령이든 경제 상황과 시민 요구의 변화에 따라 필요하면 언제나 정책과 공약을 수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2) 최저임금 정책에서 민주당과 문재인 대표가 범한 진짜 잘못은 그 정책의 당사자들이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음에도 그렇게 상충하는 이익들을 수용하고 조율하는 노력을 거의 기울이지 않았다는 데 있다. 바꿔 말해, 민주당은 늘 중산층과 서민의 정당임을 공인해 왔고 거기에는 당연히 최저임금의 잠재적 수혜자와 피해자가 포함됨에도 그들 집단의 요구와 바람을 직접 듣고 함께 대책을 모색하는 자기 역할을 방기해 왔다는 것이다.
정당 공백의 문제는 최저임금 인상 후에도 반복해서 나타났다. 2018년도 최저임금이 전년 대비 16.4%로 지난 10년 평균 인상률 6.3%의 두 배가 넘는 수준에서 결정되자 기본급을 최저임금 수준에 묶어 둔 채 상여금과 수당 등으로 임금을 맞춰 왔던 대다수 기업들은 큰 부담을 안게 되었다. 이에 재계는 최저임금 산입 범위 확대를 요구했고 노동계는 당연히 그런 제안에 반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저임금위원회에서 노사 합의에 이르지 못한 산입 범위 문제는 국회로 넘어갔고,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는 두 차례의 공청회만 거친 후 여야 이견 조율을 통해 재계에 우호적인 개정안을 가결했다. 결국 최저임금 대폭 인상을 주도했던 집권 민주당은 노동단체와 협의는커녕 그들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야당과의 합의를 통해 환노위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로써 재계의 불만은 어느 정도 잠재울 수 있었지만 양대 노총을 비롯한 노동계의 반발은 피할 수 없었고, 사회경제 현안에 대해 합의를 통한 해결을 추구하고자 했던 경제사회노동위원회 또한 유명무실해지고 말았다.
최저임금 인상의 효과를 두고 노동계와 소상공인이 대립하는 이른바 ‘을 간의 갈등’이 부각될 때도 정당의 역할은 아쉬웠다. 한편에서는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영세 자영업자와 소상공인들의 경영 상태가 최저임금 인상으로 더욱 악화되고 그로 인해 이들 부문에서 폐업이 증가하고 고용이 크게 감소했다는 주장이 제기된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최저임금의 고용 감소 효과가 보수 언론의 보도만큼 크지 않으며 경기 침체와 임대료 과다, 구조적인 자영업 과잉 문제가 더 심각하다고 주장했다. 어느 쪽 주장이 좀 더 현실에 부합할까?
양측의 주장은 통계청이 제공하는 집합 자료와 언론 매체가 선별한 사례들로 뒷받침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처럼 전문가와 기자들의 판단 근거가 미흡해 보인다면 정당이 나서는 것도 한 방법이다. 우리나라 정당은 각종 부문·직능 위원회뿐 아니라 선거구별로 지역 위원회도 두고 있다. 그들이 벌이는 활동은 지역구 현안과 지역 구민 의견을 파악하고 현안 해결에 조력하며 지지를 모으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 당과 대통령이 내세운 대표 정책이 사회적 논란에 휩싸일 때, 지역 위원회가 나서서 지역에 상주하는 소상공인, 자영업자, 노동자들을 상대로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손실과 혜택이 실제 어느 정도인지 조사하고, 지역 차원에서 그에 대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대책을 찾아볼 법도 했다.
이를테면, 최저임금 인상이 현장에서 제대로 실현되고 있는지, 지역의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들은 최저임금 인상에 고용 축소로 대응하는지 아니면 다른 방안을 찾고 있는지, 최저임금 인상의 보완책으로 제시된 일자리 안정 자금이나 두루누리 사회보험은 필요한 사람들에게 공급되어 의도한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지 등을 확인하고, 문제가 드러날 때는 지역 위원회가 중앙당이나 지역사회와 함께 해결 방안을 모색해야 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지역 위원회든 직능 위원회든 중앙당이든 최저임금 인상을 옹호하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전문가들을 모아 토론회를 개최하는 경우는 있어도 현장의 이해 당사자들을 상대로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정리해 발표하는 사례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최저임금은 2019년 들어 그 인상폭이 10.9%(시간당 8,350원)로 감소했고, 2020년도에는 시간당 8,590원으로 2.9% 인상되는 데 그쳤다. 이렇게 임기 3년 내 최저임금 1만 원 달성이 사실상 불가능해지자 문재인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 대국민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된 것을 매우 안타깝고 송구스럽게 생각한다.”고 사과했다. 김상조 정책실장은 대통령 사과 후 브리핑에서 “이번 결정이 노정 관계의 신뢰를 다지는 장기적 노력에 장애가 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면서 노동계의 양해를 구하고자 했다. 정의당을 제외한 야당들은 예견된 실패에 대한 때늦은 인정을 꼬집으며 대통령이 여전히 ‘소득 주도 성장’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집권 민주당은 이에 대해 아무런 공식 논평을 내놓지 않았다.
보수적인 야당이 운 좋게 집권해 친노동 정책으로 다수 지지를 확보하기는 매우 어렵고도 드문 일이다. 물론 그런 사례가 전혀 없는 것 같지는 않다.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미국의 뉴딜 정책은 대공황의 경제난 속에서 공화당에 대한 심판으로 집권한 루스벨트 대통령과 민주당이 경제 위기 극복과 집권 연장을 위해 곤궁에 처한 노동자와 서민들에게 손을 내밀어 성공한 경우이다(Andersen 2014). 그들은 25%에 달하는 실업률에 대응해 대규모 공공사업을 벌였고 노동자들이 사용자에 대항해 임금과 노동조건을 개선할 수 있도록 노동조합 결성을 도왔다. 그 모든 일은 대통령의 열의와 전문가들의 아이디어만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정부의 조력이 가장 필요한 사람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 그 대가로 지지를 동원하고자 했던 민주당 조직과 노동조합이 없었다면, 그 이후 30여 년 동안 이어진 다수파 민주당의 시대는 없었을 것이다. 지금 한국의 민주당에게 그런 실천을 기대하기는 불가능한 것일까? 진보 정당을 표방하면서도 그 지지 기반이 고학력 중산층에 국한된 정의당은 또 어떨까?
***
적폐 청산을 둘러싼 갈등, 최저임금 인상을 둘러싼 갈등은 이후 고위공직자수사처와 비례대표제 법안의 패스트트랙 지정을 둘러싼 갈등으로 이어졌다. 대통령과 민주당은 검찰의 정치 권력화를 막고 독립성을 제고하는 개혁을 위해서는 공수처 신설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한다. 자유한국당을 제외한 야당들과 민주당은 국민들의 다양한 의견이 의회로 대표되기 위해서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말한다. 스스로 검찰에 의존한 정치를 펼쳐 왔던 대통령과 집권당이 또 다른 사법 기구를 만들어 검찰 개혁을 단행하겠다는 주장은 모순이 아닐 수 없다.3) 이미 5개의 정당이 각축을 벌임에도 어느 하나 책임 있는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조건에서 다당제를 보장하는 제도 변화로 정치 개혁을 실현하겠다는 주장도 어불성설이기는 마찬가지다.4)
적폐 청산에서 최저임금 1만 원으로, 공수처에서 비례대표제까지 어느 정당도 자기 대안을 말하며 책임 있게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한 채 우리 사회의 갈등과 대립은 점점 더 깊어져만 가고 있다. 정당이 약한 민주주의는 이렇게 끊임없이 스스로를 재생산하고 있다. <끝>
주석
1) 구체적으로 박근혜 정부 시기 국정원의 특활비 청와대 상납, 해수부의 세월호 특조위 활동 방해, 대법원장을 비롯한 사법부 고위 관료의 재판 관여, 이명박 정부 시기 국정원과 국군사이버사의 정치 개입, 다스 실소유주 의혹에 대한 수사와 사법 처리 등이 있다.
2) 물론 그런 정책 변화의 근거를 설명하고 동의를 구하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전제 하에서만 그렇다. 이것은 ‘참여’, ‘대표’와 함께 민주 정치의 핵심 요소로 불리는 ‘설명 책임성’(accountability)의 원리에 속한다.
3) 집권 민주당 내에서는 매우 드물게도 검찰 개혁 차원의 공수처 신설안에 대해 대통령과 다른 견해를 제시한 논의는 금태섭(2017) 참조.
4) 선거제도의 원리와 효과에 대한 검토를 바탕으로 한국에서 비례대표제 도입의 부작용을 우려하며 강한 정당 조직의 중요성을 강조한 논의는 박수형(2018) 참조.
참고문헌
● Andersen, Kristi. 2014. “Constructing a New Majority: The Depression, the New Deal, and the Democrats.” Marjorie Randon Hershey ed. Guide to U.S. Political Parties. CQ Press.
● 금태섭. 2017. “공수처가 정답일까.” <허핑턴포스트-한국판>(08/17).
● 김진엽. 2019. “‘최저임금 1만 원’ 어쩌다 역풍이 됐나?” <프레시안>(01/16).
● 박상훈. 2017. “‘적폐 청산’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동아일보』(09/05).
● 박수형. 2018. “비례대표제는 한국 정치를 구원할 수 있을까?” <프레시안>(12/21).
박지혜ㅣ정치평론가
정치평론가. 대학원에서 정치학을 공부했다. 젊은 시절에는 문학에 관심이 더 많았지만, 작가들이 만든 허구보다 현실을 직접 관찰하고 분석하는 것이 사회를 더 잘 이해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10년 넘게 정치학을 공부하다 박사논문을 쓸 때쯤 문득 깨달았다. 진실을 드러내는 데는 사회과학보다 문학이 더 효과적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지난 시간이 아쉽기도 하지만, 지금은 정치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리더와 조직을 기대하며 정치 평론에 매진하고 있다.
지난 대통령 선거 기간에 문재인 후보는 자신이 대통령에 당선되면 새 정부는 문재인 정부가 아니라 더불어민주당 정부가 될 것임을 여러 차례 강조한 바 있다.
그러나 언제인가부터 대통령은 ‘민주당 정부’를 말하지 않기 시작했다. 어쩌다 한 번씩 있는 당의 큰 행사가 아니면 그로부터 민주당 정부라는 말을 들을 기회는 사라졌고, 정부에서든 언론에서든 ‘문재인 정부’라는 말이 더 자주 더 많이 언급되었다.
정당이 약한 민주주의 ②
한국
글쓴이_박지혜(정치평론가)
민주당 정부에서 문재인 정부로
지난 대통령 선거 기간에 문재인 후보는 자신이 대통령에 당선되면 새 정부는 문재인 정부가 아니라 더불어민주당 정부가 될 것임을 여러 차례 강조한 바 있다. 민주당 내에서 다른 예비 후보들과 치열한 경쟁을 거쳐 본선에 오르고, 당의 공식 후보라는 인정과 함께 당원들의 조직적・정책적 지원을 얻어 대통령 선거에 임했으니 이것은 당연한 주장처럼 보일는지 모른다. 하지만 민주화 이후 어떤 대통령도 정당정부에 대한 의지를 밝히거나 실천한 적이 없었기에 그의 공언(公言)은 우리 정치사에 한 획을 그을 만한 의미심장한 발언이었다. 게다가 전임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까지 당한 데는 자신이 속한 정당과의 협력은 무시한 채 주변 측근에만 의존한 탓도 컸기에 신임 대통령의 약속은 진정한 정치 변화를 바라는 시민들로부터 폭넓은 공감과 지지를 얻기도 했다.
그러나 언제인가부터 대통령은 ‘민주당 정부’를 말하지 않기 시작했다. 어쩌다 한 번씩 있는 당의 큰 행사가 아니면 그로부터 민주당 정부라는 말을 들을 기회는 사라졌고, 정부에서든 언론에서든 ‘문재인 정부’라는 말이 더 자주 더 많이 언급되었다. 그렇게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인사들은 특별한 설명도 없이 새 정부를 문재인 정부라고 불렀고, 그가 속한 정당의 누구도 이런 호칭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홉스(Thomas Hobbes)는 통치자의 최고 권력이 ‘이름 붙이는 힘’(power of naming)에서 나온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이름은 인식을 낳고, 인식은 실천을 낳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 박근혜 정부에 이어 그들 대통령의 전횡과 부패를 성토했던 이들이 스스로를 민주당 정부가 아닌 문재인 정부로 호명한 것도 그들 나름의 인식과 실천을 만들어 내고 있다. 새 정부의 통치에서 정당의 역할을 찾기는 그만큼 어려워졌고, 당이 비워 놓은 자리에는 개혁의 전권을 위임받은 듯한 대통령과 그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청와대 인사들이 위세를 떨치기 시작했다.
정당은 통치의 수단이다. 시민들의 의견을 수렴하며 지지를 모으고, 이견을 조정하며 정책을 결정하고, 다시 그 정책의 집행을 격려·감시하며 기대한 효과를 검토하는 데 유용한 수단이다. 물론 다른 수단도 있다. 사회의 다양한 의견을 확인하는 데는 언론이나 운동, 이익집단을 활용할 수 있고, 정책을 집행하는 일은 기본적으로 관료에 의존해야 하며, 이와 관련된 여러 정부 업무를 조정하기 위해서는 대통령 비서실 같은 별도의 보좌진도 필요하다. 그러나 정당을 통해 통치의 책임을 맡은 정치인들이 정당이 아닌 다른 수단에 의존할수록 정부 정책의 효과는 반감되고 사회적 갈등은 심화되기 마련이다.
문재인 정부의 거의 모든 정책이 그렇지만, 정당을 배제하거나 활용하지 못한 문제가 특히 두드러진 사례는 적폐 청산 정책과 최저임금 인상으로 보인다. 이들 사례를 하나하나 살펴보자.
적폐 청산: 여론과 검찰에 의존한 정치
문재인 정부 들어 정치권 안팎에서 가장 많이 회자된 단어는 ‘적폐 청산’이었다. “오랫동안 쌓인 폐단을 깨끗이 씻어 낸다.”는 이 말은 애초 박근혜 대통령이 세월호 사건에 대한 책임을 과거 정부로 돌리는 수사의 일환으로 활용하면서 언론 매체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박상훈 2017). 그랬던 것이 다시 대통령 자신에게 돌아와 그에 대한 탄핵 촉구 집회의 대표적인 구호 가운데 하나로 널리 사용되었다. 이후 대선 과정에서 민주당은 그 말을 받아 안아 “이명박·박근혜 9년 집권 적폐 청산”을 대표 공약으로 내걸었고, 선거에서 승리한 문재인 대통령 역시 “국민이 주인인 정부”라는 국정 목표를 실현하는 첫 번째 국정 과제로 “적폐의 철저하고 완전한 청산”을 제시했다.
새 정부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서 밝힌 적폐 청산의 내용은 “국정 농단 보충 조사 및 재발 방지 대책 수립, 최순실 부정 축재 국내외 재산 환수 추진, 문화계 블랙리스트 관련 사실 관계 파악과 재발 방지” 등이었지만, 청산 대상은 정부가 처음 표명한 것에 국한되지 않았다. 시민사회 각계에서도 사회적 문제로 지목된 사안 또는 집단을 두고 언론 적폐, 노동 적폐, 재벌 적폐, 교육 적폐, 심지어 정보통신기술(ICT) 적폐까지 언급하며 ‘적폐 청산 열풍’이라 부를 만한 현상을 만들어 냈다. 정부와 여당 또한 각각 부처별 적폐 청산 테스크 포스(TF)와 적폐청산위원회를 구성해 사회 전반의 묵은 폐해를 해소하는 데 진력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드러냈고, 그런 활동은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기 대통령을 비롯한 고위 관료들의 위법행위에 대한 검찰 조사와 법원 판결에서 절정에 달했다.1)
이와 같은 적폐 청산 정책의 문제는 미국 사례와의 비교를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과 그 측근, 재벌 대기업이 공모한 부정부패와 정경 유착에 분노한 대중이 외친 적폐 청산은 지난 미국 대선 당시 트럼프 지지자들이 애용했던 ‘오물을 쓸어버려라’(Drain the Swamp/이하 DTS)는 구호와 매우 유사하다. 앞의 글 “정당이 약한 민주주의 ①: 미국”에서 밝혔듯이 DTS 역시 미국 사회에 만연한, 정치인들과 거대 이익집단 간의 유착 관계 해소를 촉구한 구호이기 때문이다.
양자의 유사성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두 구호의 의미가 정치인들에 의해 변용되는 방식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미국에서 DTS를 수용한 트럼프 대통령은 임기 초반 그 구호를 외친 지지자들의 요구에 따라 로비 활동 규제를 시도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남기지 못했다. 그 후 트럼프는 대중의 기억 속에 각인된 그 ‘오물’(swamp)을 과도한 정부 규제나 비대한 정부 규모를 일컫는 말로 사용하더니 곧 자신에 반대하는 정치인이나 관료, 언론을 공격하는 용어로 활용하며 자기 입장을 정당화하곤 했다.
한국에서도 탄핵 집회 당시 제기된 적폐의 의미는 사회 전반에 걸친 부정과 부패, 부조리로 폭넓게 해석할 만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물론 여기에는 탄핵 사태를 야기한 제도적 요인으로서 개발독재 시대 이래 변함없이 지속되어 온 무소불위의 대통령 권력과 그에 공생한 재벌 대기업 문제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적폐 청산은 공약 구성과 정책 집행 과정에서 그 범위와 방법이 점점 더 왜소화되어 주로 검찰 수사와 사법 판결을 통해 전임 정부의 대통령들과 고위 관료가 저지른 불법·비위 행위를 처벌하는 인적 청산에 그치고 말았다.
새 정부 적폐 청산 정책의 귀결이 전임 정부 인사들에 대한 사법 처리에 머물며 구원(舊怨)에 대한 해소로 비춰지면서 야당과 그 지지 세력의 반발도 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은 적폐 청산에 대한 비판에 굴하지 않으며 사회 원로들과의 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의 말에도 일리는 있다. 지난 정부의 고위 관료와 법관들이 단순한 부정부패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근본 원리를 훼손하는 중대 범죄를 저질렀다면, 마땅히 적법한 절차에 따라 처벌해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은 시민이 선출한 대표의 중요한 책무 가운데 하나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우려되는 검찰에 대한 자의적 통제도 자제하고 회피해야 할 일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지난 역사를 돌아보면 그의 접근은 사태의 일면만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민주화 이후 한국 정치는 정당이 서로 다른 시민의 선호에 부응하며 지지를 동원하는 정책 경쟁보다 상대 세력의 부정과 불법을 폭로하고 조사하고 처벌하며 자기 정당성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어 왔다. 대통령을 비롯한 집권 세력이 언론과 검찰을 동원해 전임 정부 인사들의 과오를 처리한 것 또한 그런 경우에 속한다. 김영삼 대통령의 민정계 숙정이 그랬고, 김대중 대통령의 안기부 비자금 수사가 그랬고, 노무현 대통령의 대북 송금 특검 수용이 그러했으며, 이명박 대통령의 노무현 전 대통령 비위 수사 지시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과정의 반복을 통해 사회로부터 절연된 대통령 권력은 점점 더 강화되어 왔고, 청와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언론과 검찰 권력 또한 그만큼 더 강화되었다. 그에 반해 시민 유권자의 지지를 모으는 정치의 방법으로 이들 권력의 삼각관계를 제어하고 견제할 수 있는 정당의 역할은 줄어들고 말았다.
행정부 수장인 대통령에게 권력이 집중된 조건에서 대통령과 그 측근은 한편으로 위법과 부패의 유혹에 항시적으로 노출되고, 다른 한편으로 언론이나 검찰 같은 ‘다른 수단’에 의한 통치에 의존하기 쉽다. 지금 대통령은 다를까? 그의 선의는 얼마나 믿을 만한 것일까? 차라리 지금부터라도 적폐 청산의 선악 이분법에 기반해 대통령이 주도하는 여론 정치, 검찰 정치가 아니라 그와 같은 대통령 권력, 검찰 권력을 제한하며 합의 가능한 사회적 목표를 두고 더 나은 대안으로 시민-유권자의 지지를 모으고자 경쟁하는 정당정치의 방법을 고민해 보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최저임금 인상: 정당 없는 노동 정책의 민낯
문재인 정부가 적폐 청산이라는 이름으로 구악 일소 또는 정적 제거에만 몰두한 것은 아니다. 새 정부 출범 즉시 대통령 직속 일자리 위원회를 구성하며 고용·노동문제 해결에 대한 의지를 밝혔고, 선거에서 공약한 대로 비정규직 정규직화와 최저임금 1만 원 실현에도 공을 들였다. 특히 2018년 시간당 7,530원으로 대폭 인상되는 최저임금과 관련해 대통령은 그 정책적 함의와 원활한 집행을 이렇게 강조하기도 했다.
최저임금 인상을 지켜보는 대통령의 기대는 컸고, 그 정책의 성공 조건에 대한 판단도 정확했다. 그러나 여기서도 정당 부재의 공백은 뚜렷하게 나타났다.
정치 활동가 김진엽은 2012년 대선 당시 군소 후보의 이색 공약에 불과했던 최저임금 1만 원이 집권 정당의 대표 정책으로 자리 잡는 과정을 조명하면서 민주당의 정치 역량 부족을 날카롭게 비판한 바 있다(김진엽 2019). 그에 따르면, 2015년 민주당 대표 경선 과정에서 이인영 후보는 최저임금 1만 원 공약을 내세우며 민주당 정책의 선명성을 강조한 데 반해 문재인 후보는 “중소기업, 영세 자영업자들이 급격한 인상을 버틸 수 없다.”는 근거로 최저임금 목표치를 7천 원대로 제시하며 “자영업자와 중소 상공인 지원책이 병행되어야 한다.”고 응수했다. 이후 민주당과 문재인 대표도 2016년도 최저임금 결정을 앞두고 비록 ‘장기적’이라는 단서를 붙이긴 했지만 1만 원 정책을 수용했고, 2017년 대선에 이르러서는 최종적으로 2020년까지 최저임금 1만 원을 공약으로 제시했다.
여기서 문제는 민주당이나 대통령이 계속 말을 바꾸고 입장을 변경했다는 것이 아니다. 당이든 대통령이든 경제 상황과 시민 요구의 변화에 따라 필요하면 언제나 정책과 공약을 수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2) 최저임금 정책에서 민주당과 문재인 대표가 범한 진짜 잘못은 그 정책의 당사자들이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음에도 그렇게 상충하는 이익들을 수용하고 조율하는 노력을 거의 기울이지 않았다는 데 있다. 바꿔 말해, 민주당은 늘 중산층과 서민의 정당임을 공인해 왔고 거기에는 당연히 최저임금의 잠재적 수혜자와 피해자가 포함됨에도 그들 집단의 요구와 바람을 직접 듣고 함께 대책을 모색하는 자기 역할을 방기해 왔다는 것이다.
정당 공백의 문제는 최저임금 인상 후에도 반복해서 나타났다. 2018년도 최저임금이 전년 대비 16.4%로 지난 10년 평균 인상률 6.3%의 두 배가 넘는 수준에서 결정되자 기본급을 최저임금 수준에 묶어 둔 채 상여금과 수당 등으로 임금을 맞춰 왔던 대다수 기업들은 큰 부담을 안게 되었다. 이에 재계는 최저임금 산입 범위 확대를 요구했고 노동계는 당연히 그런 제안에 반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저임금위원회에서 노사 합의에 이르지 못한 산입 범위 문제는 국회로 넘어갔고,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는 두 차례의 공청회만 거친 후 여야 이견 조율을 통해 재계에 우호적인 개정안을 가결했다. 결국 최저임금 대폭 인상을 주도했던 집권 민주당은 노동단체와 협의는커녕 그들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야당과의 합의를 통해 환노위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로써 재계의 불만은 어느 정도 잠재울 수 있었지만 양대 노총을 비롯한 노동계의 반발은 피할 수 없었고, 사회경제 현안에 대해 합의를 통한 해결을 추구하고자 했던 경제사회노동위원회 또한 유명무실해지고 말았다.
최저임금 인상의 효과를 두고 노동계와 소상공인이 대립하는 이른바 ‘을 간의 갈등’이 부각될 때도 정당의 역할은 아쉬웠다. 한편에서는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영세 자영업자와 소상공인들의 경영 상태가 최저임금 인상으로 더욱 악화되고 그로 인해 이들 부문에서 폐업이 증가하고 고용이 크게 감소했다는 주장이 제기된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최저임금의 고용 감소 효과가 보수 언론의 보도만큼 크지 않으며 경기 침체와 임대료 과다, 구조적인 자영업 과잉 문제가 더 심각하다고 주장했다. 어느 쪽 주장이 좀 더 현실에 부합할까?
양측의 주장은 통계청이 제공하는 집합 자료와 언론 매체가 선별한 사례들로 뒷받침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처럼 전문가와 기자들의 판단 근거가 미흡해 보인다면 정당이 나서는 것도 한 방법이다. 우리나라 정당은 각종 부문·직능 위원회뿐 아니라 선거구별로 지역 위원회도 두고 있다. 그들이 벌이는 활동은 지역구 현안과 지역 구민 의견을 파악하고 현안 해결에 조력하며 지지를 모으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 당과 대통령이 내세운 대표 정책이 사회적 논란에 휩싸일 때, 지역 위원회가 나서서 지역에 상주하는 소상공인, 자영업자, 노동자들을 상대로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손실과 혜택이 실제 어느 정도인지 조사하고, 지역 차원에서 그에 대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대책을 찾아볼 법도 했다.
이를테면, 최저임금 인상이 현장에서 제대로 실현되고 있는지, 지역의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들은 최저임금 인상에 고용 축소로 대응하는지 아니면 다른 방안을 찾고 있는지, 최저임금 인상의 보완책으로 제시된 일자리 안정 자금이나 두루누리 사회보험은 필요한 사람들에게 공급되어 의도한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지 등을 확인하고, 문제가 드러날 때는 지역 위원회가 중앙당이나 지역사회와 함께 해결 방안을 모색해야 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지역 위원회든 직능 위원회든 중앙당이든 최저임금 인상을 옹호하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전문가들을 모아 토론회를 개최하는 경우는 있어도 현장의 이해 당사자들을 상대로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정리해 발표하는 사례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최저임금은 2019년 들어 그 인상폭이 10.9%(시간당 8,350원)로 감소했고, 2020년도에는 시간당 8,590원으로 2.9% 인상되는 데 그쳤다. 이렇게 임기 3년 내 최저임금 1만 원 달성이 사실상 불가능해지자 문재인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 대국민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된 것을 매우 안타깝고 송구스럽게 생각한다.”고 사과했다. 김상조 정책실장은 대통령 사과 후 브리핑에서 “이번 결정이 노정 관계의 신뢰를 다지는 장기적 노력에 장애가 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면서 노동계의 양해를 구하고자 했다. 정의당을 제외한 야당들은 예견된 실패에 대한 때늦은 인정을 꼬집으며 대통령이 여전히 ‘소득 주도 성장’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집권 민주당은 이에 대해 아무런 공식 논평을 내놓지 않았다.
보수적인 야당이 운 좋게 집권해 친노동 정책으로 다수 지지를 확보하기는 매우 어렵고도 드문 일이다. 물론 그런 사례가 전혀 없는 것 같지는 않다.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미국의 뉴딜 정책은 대공황의 경제난 속에서 공화당에 대한 심판으로 집권한 루스벨트 대통령과 민주당이 경제 위기 극복과 집권 연장을 위해 곤궁에 처한 노동자와 서민들에게 손을 내밀어 성공한 경우이다(Andersen 2014). 그들은 25%에 달하는 실업률에 대응해 대규모 공공사업을 벌였고 노동자들이 사용자에 대항해 임금과 노동조건을 개선할 수 있도록 노동조합 결성을 도왔다. 그 모든 일은 대통령의 열의와 전문가들의 아이디어만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정부의 조력이 가장 필요한 사람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 그 대가로 지지를 동원하고자 했던 민주당 조직과 노동조합이 없었다면, 그 이후 30여 년 동안 이어진 다수파 민주당의 시대는 없었을 것이다. 지금 한국의 민주당에게 그런 실천을 기대하기는 불가능한 것일까? 진보 정당을 표방하면서도 그 지지 기반이 고학력 중산층에 국한된 정의당은 또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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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폐 청산을 둘러싼 갈등, 최저임금 인상을 둘러싼 갈등은 이후 고위공직자수사처와 비례대표제 법안의 패스트트랙 지정을 둘러싼 갈등으로 이어졌다. 대통령과 민주당은 검찰의 정치 권력화를 막고 독립성을 제고하는 개혁을 위해서는 공수처 신설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한다. 자유한국당을 제외한 야당들과 민주당은 국민들의 다양한 의견이 의회로 대표되기 위해서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말한다. 스스로 검찰에 의존한 정치를 펼쳐 왔던 대통령과 집권당이 또 다른 사법 기구를 만들어 검찰 개혁을 단행하겠다는 주장은 모순이 아닐 수 없다.3) 이미 5개의 정당이 각축을 벌임에도 어느 하나 책임 있는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조건에서 다당제를 보장하는 제도 변화로 정치 개혁을 실현하겠다는 주장도 어불성설이기는 마찬가지다.4)
적폐 청산에서 최저임금 1만 원으로, 공수처에서 비례대표제까지 어느 정당도 자기 대안을 말하며 책임 있게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한 채 우리 사회의 갈등과 대립은 점점 더 깊어져만 가고 있다. 정당이 약한 민주주의는 이렇게 끊임없이 스스로를 재생산하고 있다. <끝>
주석
1) 구체적으로 박근혜 정부 시기 국정원의 특활비 청와대 상납, 해수부의 세월호 특조위 활동 방해, 대법원장을 비롯한 사법부 고위 관료의 재판 관여, 이명박 정부 시기 국정원과 국군사이버사의 정치 개입, 다스 실소유주 의혹에 대한 수사와 사법 처리 등이 있다.
2) 물론 그런 정책 변화의 근거를 설명하고 동의를 구하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전제 하에서만 그렇다. 이것은 ‘참여’, ‘대표’와 함께 민주 정치의 핵심 요소로 불리는 ‘설명 책임성’(accountability)의 원리에 속한다.
3) 집권 민주당 내에서는 매우 드물게도 검찰 개혁 차원의 공수처 신설안에 대해 대통령과 다른 견해를 제시한 논의는 금태섭(2017) 참조.
4) 선거제도의 원리와 효과에 대한 검토를 바탕으로 한국에서 비례대표제 도입의 부작용을 우려하며 강한 정당 조직의 중요성을 강조한 논의는 박수형(2018) 참조.
참고문헌
● Andersen, Kristi. 2014. “Constructing a New Majority: The Depression, the New Deal, and the Democrats.” Marjorie Randon Hershey ed. Guide to U.S. Political Parties. CQ Press.
● 금태섭. 2017. “공수처가 정답일까.” <허핑턴포스트-한국판>(08/17).
● 김진엽. 2019. “‘최저임금 1만 원’ 어쩌다 역풍이 됐나?” <프레시안>(01/16).
● 박상훈. 2017. “‘적폐 청산’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동아일보』(09/05).
● 박수형. 2018. “비례대표제는 한국 정치를 구원할 수 있을까?” <프레시안>(12/21).
박지혜ㅣ정치평론가
정치평론가. 대학원에서 정치학을 공부했다. 젊은 시절에는 문학에 관심이 더 많았지만, 작가들이 만든 허구보다 현실을 직접 관찰하고 분석하는 것이 사회를 더 잘 이해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10년 넘게 정치학을 공부하다 박사논문을 쓸 때쯤 문득 깨달았다. 진실을 드러내는 데는 사회과학보다 문학이 더 효과적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지난 시간이 아쉽기도 하지만, 지금은 정치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리더와 조직을 기대하며 정치 평론에 매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