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이 약하면 나라가 두 동강 난다. 미국이 그렇고 한국이 그렇다. 권력과 명예, 이익을 다투는 정치에서 분열과 갈등은 전혀 낯선 일이 아니다.
그러나 정치는 그런 갈등을 동원하고 조율하며, 공익을 모색하고 실행한다. 이것이 우리가 아는 민주적 통치의 모습이며, 여기서 중심 행위자는 정당이다.
"정당이 약한 민주주의"를 연재하며
정당이 약한 민주주의를 주제로 약 세 편의 글을 기고할 예정이다. 이번 호에는 그 첫 번째 글로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경우”를 싣는다. 이후 계획은 한국 사례를 비교하고, 마지막으로 강한 정당을 만드는 방법에 대한 제언을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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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이 약한 민주주의 ①
미국
글쓴이 ㅣ박지혜(정치평론가)
정당이 약하면 나라가 두 동강 난다. 미국이 그렇고 한국이 그렇다.
권력과 명예, 이익을 다투는 정치에서 분열과 갈등은 전혀 낯선 일이 아니다. 그러나 정치는 그런 갈등을 동원하고 조율하며, 공익을 모색하고 실행한다. 이것이 우리가 아는 민주적 통치의 모습이며, 여기서 중심 행위자는 정당이다.
정당은 민주주의에 필수적인 조직이다. 시민들의 서로 다른 이익과 요구를 표출하고, 그렇게 드러난 다양한 선호를 집적하고 조율해 정책 대안을 만든다. 또한 선거에서 승리해 정부를 인수하거나, 의회로 들어간 후에는 관료들을 통제하며 정책 집행을 독려・감시하고, 다시 선거를 통해 그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진다.
정당이 이런 역할을 잘 수행하려면, 그에 적합한 인적・물적・이념적 자원이 필요하다. 시민사회 결사체들에 뿌리내린 광범한 조직적 연계망, 당 활동의 체계적 분업화와 함께 원활한 이견 조정을 가능하게 하는 강력한 리더십과 당내 규율, 이들 모두를 아우르며 정당 자신과 사회 공동체의 나아갈 방향을 밝히는 아이디어 내지 이념 등이 그것이다.
정당이 이런 자원을 갖추지 못한 채 자기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다른 종류의 정치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당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운 개별 정치인들이 선거 컨설턴트, 여론조사 전문가, 행사 기획가, 메시지 관리자, 소수의 열성 지지자에 의존하며, 언론이 주목할 만한 구호(catchphrase)와 토막말(soundbite), 이벤트와 이미지를 창출하고 전파하는 데 주력함으로써, 여론을 자극하고 여론에 의존하는 ‘여론 동원 정치’가 그것이다. 이렇게 일시적이고 작위적이며 사인화된 정치는 이성보다는 감성, 대화보다는 대치, 타협보다는 공방의 이점을 향유하며, 사회 전체를 흑백 이분법의 진영 간 대결 구도로 몰아갈 가능성이 높다.
저열한 언사로 정치적 아웃사이더를 자임한 트럼프
지금 미국에서 나라를 둘로 가르는 정치의 주인공은 단연 트럼프(Donald Trump)다. 그는 부동산 개발업으로 큰돈을 벌었을 뿐 아니라 각종 미인 선발 대회 유치와 텔레비전 리얼리티쇼 진행으로 전국적인 명성을 쌓았다. 트럼프는 2012년 대선 캠페인 시기부터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당시 그는 몇 차례 공언한 바와 달리 대선 후보로 나서지는 않았지만, 오바마의 출생지를 문제 삼아 그의 대통령 자격을 부정하는 등 근거 없는 주장으로 언론과 대중의 관심을 끌어내곤 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었다. “극히 신뢰할 만한 정보원이 내 사무실로 전화해 버락 오바마의 출생증명서는 위조된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2012년 8월 6일, 트럼프의 트윗).

<사진설명> 2012년 대선 시기 트럼프의 트윗
“극히 신뢰할 만한 정보원이 내 사무실로 전화해 버락 오바마의 출생증명서는 위조된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상대적으로 정당이 강한 유럽 나라에서는 이런 종류의 인사가 주요 정당의 대표나 그에 준하는 후보로 선출되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그러나 미국은 정당에 대한 공헌과 관계없이 시민 누구나 당의 공직 후보 선출에 참여할 수 있는 예비선거 제도(primary system)를 두고 있다. 그 덕분에 공직 경험이나 정당 경력이 일천한 사람도 막대한 자금과 매체를 통한 명성, 소수 극렬 유권자들의 지지만 있으면 대선 후보 반열에 오를 수 있다. 트럼프가 그 전형이었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make America great again)”는 구호 아래 트럼프가 제시한 공약은 꽤나 급진적인 내용들로 채워졌다. 수백만 개 일자리 창출, 일자리 해외 이전 기업 처벌, 오바마 행정부의 건강보험법(Affordable Care Act, 이하 ACA) 폐지, 로비 활동 규제 대폭 강화, 석탄 산업 부활, 파리 기후변화 협약 탈퇴, 불공정 무역 국가 관세 부가, 불법 이민 방지를 위한 미국-멕시코 국경 장벽 건설, 무슬림 이민 금지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급진적인 것은 그 특유의 언술이었다.
트럼프는 선거운동을 통해 스스로를 정치적 아웃사이더로 자리매김하며 티파티(tea party)를 비롯한 보수적 유권자 다수의 지지를 얻는 데 성공했지만, 그 과정에서 상당한 논란과 비난을 초래하기도 했다. 그의 연설과 인터뷰, 특히 그가 애용하는 트위터를 통해 내뱉는 말들은 자극적이고 호전적이며 백인 우월주의나 성차별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미국-멕시코 국경의 불법 이민 문제를 다룰 때는 “멕시코가 사람들을 보낼 때, …… 그들은 마약을 가져오고, 범죄를 가져온다. 그들은 강간범들”이라고 말했다. 여성들에 대한 발언도 그에 못지않다. 공화당 경선 토론에서 사회자가 그에게 여성들을 “뚱뚱한 돼지, 개, 게으름뱅이, 역겨운 동물”로 부른 것에 대해 질문하자 여성 코미디언인 “로지 오도넬(Rosie O’Donnell)에 대해서만” 그렇게 말했다고 답하는가 하면, 같은 당 여성 후보 칼리 피오리나( Carly Fiorina)에 대해서는 “그녀의 얼굴을 보라, 누가 그녀에게 투표하겠는가?”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이와 같은 발언을 두고 공화당 인사들조차 깊은 우려를 표명했지만, 그를 지지하는 유권자들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그들은 트럼프의 전투적 태도와 함께 머리에 떠오른 말이면 무엇이든 내뱉는 모습을 정직과 용기의 상징으로 받아들이며 환호하는 경우가 많았다.
‘부정직한 힐러리’보다 훨씬 더 부정직했던 트럼프
2016년 여름 이후 본 선거에서도 그의 저열한 언사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총기 규제에 호의적인 힐러리 클린턴(Hillary Clinton)을 공격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 생각엔 그녀의 보디가드들도 모든 무기를 내려놓아야 한다. 그들이 무기를 버리고 나면 그녀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우리 한 번 지켜보자.” 선거 기간 내내 트럼프는 힐러리를 기득 체제의 수혜자로 묘사하며, 국무장관 재임 시 개인 이메일 사용 등과 관련한 그녀의 행태를 꼬집어 ‘부정직한 힐러리’(crooked Hillary)로 부르기를 즐겼다. 그러나 정직하지 않기로는 트럼프를 따라잡을 사람이 없었다.

<사진설명> 2016년 대선 시기 미 공화당 선거 광고의 한 장면, ‘부정직한 힐러리’(crooked Hillary)라는 슬로건이 강조되어 있다.
트럼프는 자신과 다른 견해나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을 담은 보도가 나오면, 그 기사를 두고 ‘가짜 뉴스’(fake news)라고 부정하기 일쑤였다. 투표일이 가까워 옴에도 힐러리보다 높은 지지율을 보여 주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오지 않자 선거 조작을 주장하기도 했다. 마지막 텔레비전 토론에서는 선거 결과 수용 여부에 대한 입장을 밝히지 않아 다음날 아침 신문 헤드라인이 그의 대선 불복에 관한 내용으로 채워졌다.
알다시피 최종 선거 결과는 트럼프의 승리였다. 일반 유권자 투표에서는 힐러리가 280만 표나 더 많은 지지를 얻었지만, 당선자를 결정하는 선거인단 투표에서는 트럼프가 304 대 227로 앞서 미국의 45대 대통령이 되었다. 선거 결과를 두고 트럼프는 수백만 표가 불법적인 방식으로 힐러리에게 갔다고 말했지만, 자기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를 내놓지는 못했다.
여론조사 일반의 예측과 다른 선거 결과를 두고, 투표일 직전에 터진 힐러리 이메일 스캔들에 대한 FBI의 재수사를 탓하는 이들도 있지만, 대다수 논평가들은 두 후보가 보여준 선거 전략의 차이가 결정적이었다고 평가한다. 선거 과정에서 줄곧 우위를 보인 힐러리는 기존 유권자 지지 분포를 유지하는 안전한 전략을 선택하며 여성과 소수 인종에서 많은 지지를 얻은 반면, 트럼프는 경제적 불안으로 고통 받고 있던 백인 남성 노동계급에 호소하며 기성 정치에 대한 그들의 분노를 효과적으로 활용했다는 것이다.
대통령 취임 이후 지난 2년여 동안 트럼프가 행한 거의 모든 결정과 발언, 행보는 갈등을 조정하며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분란을 확대하며 사태를 악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무슬림 입국 금지를 둘러싼 이민 정책, 성폭행 의혹을 받은 브렛 캐버노(Brett Kavanaugh)의 대법관 임명 강행이 그렇고, 미국 역사상 가장 부유하고 동질적인 인사들로 구성된 내각과 러시아의 미국 대선 관여 스캔들 조사 과정에서 밝혀진 그의 각종 탈법・불법행위가 그랬다. 기후변화 방지와 환경 보호를 위한 각종 규제를 철폐한 환경 정책과 불공정 무역 해소와 국내 일자리 창출을 위한 보복 관세 정책, 올해 초 예산안 승인을 둘러싸고 연방정부 업무 정지(shutdown)까지 갔던 남부 국경 지대 장벽 건설 역시 마찬가지였다.
더 흥미로운 것은 가난한 미국인들의 사회경제적 곤궁을 해결하는 데 일조한 건강보험법 폐지 시도와 미국식 ‘적폐 청산’으로 이해할 수 있는 반부패 정치 개혁이다. 이들 정책은 어떻게 진행되었고 왜 좌절되었을까? 차례로 살펴보자.
오마바 케어 폐지를 둘러싼 당내 분열과 트럼프의 ‘폭발’ 전략

<출처> www.marketwatch.com
트럼프는 취임과 동시에 일련의 행정 명령을 발표하며 과감하고 결단력 있는 대통령 이미지를 창출하고자 했다. 그 첫 번째 희생양은 전임 오바마 대통령의 최고 업적으로 평가받는 건강보험법, 일명 오바마케어(Obamacare)였다. 대통령 업무 개시 첫날 첫 업무로 그는 ACA의 ‘즉각적 폐지’를 위해 그 법률이 수반하는 ‘부당한 경제적・규제적 부담’을 제거하는 행정 명령을 선택했다. 실제로 트럼프 행정부의 초기 정책 목표는 그가 오래전부터 값비싼 정책 실패로 조롱했던 오바마케어 폐지에 맞춰졌다.
선거운동 당시 트럼프는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좀 더 저렴한 비용으로 더 많은 혜택을 받으며 누구도 건강보험을 상실하지 않는 자신의 법안으로 오바마케어를 대체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하원에서 미국건강보험법(American Health Care Act, 이하 AHCA)으로 불린 그 법안의 세부 사항은 공화당 내에서조차 논란의 여지가 컸다. 트럼프는 구체적인 자기 계획안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ACA하에서 수백만의 미국인들이 획득한 보험 혜택을 박탈하지 않는 동시에 보험 시장에 대한 정부 관여를 줄이는 실제 법안의 초안은 공화당 하원 의원들이 작성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새 행정부가 출범한 1월 후에도 세부 사항을 담은 대안을 준비하지 못했다. 따라서 트럼프가 약속한 ACA의 즉각 폐지는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2017년 3월 들어서야 공화당 하원 의원들이 작성한 법안이 공개되었는데, 주요 내용은 ACA의 건강보험 미가입 시 벌금 부과 조항(individual mandate) 폐지, 보험 가입에 따른 세금 공제 삭감, 연방 정부의 메디케이드 지원 축소, 향후 10년간 약 1조 달러 감세 등이었다. 이 법안에 대해 의회예산국(Congressional Budget Office, 이하 CBO)은 하원 공화당 법안이 ACA와 비교할 때 향후 10년간 3,370억 달러의 연방 재정 적자를 줄일 수 있지만, 같은 기간 보험 미가입자 수를 2천4백만 명 증가시킬 것이라고 추정했다.
게다가 이 법안은 공화당 내 온건파와 보수파 양측 모두로부터 반대에 직면했다. 전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적정 비용의 건강보험을 상실하게 되는 상황을 우려한 반면, 후자는 ACA 조항의 너무 많은 부분들을 그대로 남겨두었다고 비판했다. 특히 보험 상실을 두려워하는 지역구 유권자들이 전국 각지의 타운홀 미팅에서 격앙된 반응을 보이자, 온건파의 우려는 더욱 증폭되었다. 결국 당내 두 분파 간의 이견 조율에 실패하면서 하원 공화당 지도부는 투표 없이 AHCA 안을 철회해야 했고, 이는 ACA 폐지와 대체를 핵심 선거 공약으로 제시했던 트럼프에게 큰 타격을 안겨 주었다.
그로부터 6주 후 하원 공화당은 AHCA의 일부 조항을 변경한 수정안을 민주당 하원 의원 전원의 반대 속에 가까스로 통과시켰다. 의회예산국은 이 법안에 대해서도 기존 ACA와 비교할 때 향후 10년간 1,190달러의 재정 적자를 줄일 수 있지만, 보험 미가입자 수가 2천3백만 명 늘어날 것으로 추산했다.
AHCA 수정안이 하원에서 통과된 직후 상원 공화당 의원들도 ACA를 대체할 자체 법안을 비밀리에 준비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건강보험 조정 법안’(Better Care Reconciliation Act, 이하 BCRA)에 대해서도 의회예산국은 재정 적자는 줄이겠지만 미가입자 수를 크게 늘리는데다 법안 시행 첫 해에 보험료도 오를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런 까닭에 BCRA도 AHCA를 괴롭혔던 것과 같은 문제에 직면했고, 자기 주(州) 시민들의 보험 상실을 막으려는 의원들과, ACA의 주요 조항을 가능한 한 더 많이 무력화시키려는 의원들 사이의 견해 차이는 좁혀지지 않았다. 상원 의회는 7월 마지막 한 주 동안 ACA의 주요 조항 삭제안, ACA를 폐기하는 대체안, 그리고 좀 더 온건한 수준의 대체안을 표결에 부쳤다. 표결 과정에서 트럼프 행정부가 공화당 상원 의원들에게 상당한 압력을 행사했음에도, 세 대안 모두 부결되고 말았다.
ACA 폐기와 대체에 실패한 트럼프 행정부와 공화당은 보험 혜택 축소 등의 다른 조처들을 통해 건강보험의 효용을 계속 약화시키는 방법으로 ACA를 허물어뜨리고자 했다. 트럼프는 이를 오바마케어가 ‘폭발’하도록 내버려두는 전략이라 불렀다. 여기에는 오바마케어 광고와 등록 지원비 삭감, 보험 등록 개방 기간 대폭 축소, 보험사가 중하층 시민을 위해 현금 지불 비용을 줄일 수 있게 해주는 비용 보조금 공유제 폐지, 보험 미가입 시 벌금 부과 조항 폐지 등이 포함됐다. 2017년 11월 의회예산국의 한 연구는 벌금 부과 조항 폐지만으로도 10년 후 미보험자 수가 1천3백만 명이 늘어나며 2027년까지 거의 매년 10%씩 보험료가 인상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오물을 쓸어버려라”, 미국식 적폐청산 정책의 허상

<사진 설명> “Drain The Swamp(오물을 쓸어버려라)”. 2016년 대선 캠페인 과정 중 미국 정가의 적폐를 청산하겠다는 트럼프의 선거 슬로건.
<출처> www.talkmedianews.com
2016년 선거 운동이 막바지로 치닫던 시기 트럼프는 새로운 구호 하나를 발견했다. “Drain the Swamp!”(이하 DTS), 말인즉 ‘늪을 비우라’, ‘오물을 쓸어버려라’는 뜻이다. 미국 정치의 맥락에서 해석하자면, 그간 수도 워싱턴을 물들여 왔던 정치인과 정부 관료의 부정과 부패를 일소하라는 의미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자주 회자되는 ‘적폐 청산’의 미국식 표현으로 이해해도 무방할 것이다. 트럼프 자신도 그럴 줄 몰랐다고 할 만큼 이 구호는 지지자들 사이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울려 퍼지는 DTS에 이렇게 부응했다. “우리 정부를 다시 정직하게 만들겠다. 나를 믿어 달라. 우선 워싱턴의 오물부터 쓸어버리겠다”(2016년 10월 19일, 트럼프의 트윗).
DTS를 위해 트럼프가 제시한 공약은 다섯 가지였다. 모두 소수의 기득 세력이나 거대 기업 집단을 대표하며 워싱턴 정계를 좌우하는 것으로 악명 높은 로비스트 활동에 대한 규제를 대폭 강화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첫째, 행정부 관료에 대해 퇴임 후 5년간 로비스트 활동을 금지하는 행정 명령을 발효하고 후임 정부가 이를 뒤엎지 못하도록 법제화하겠다.
둘째, 행정 명령을 통해 자기 행정부 관료들은 평생 외국 정부를 위한 로비 활동을 벌이지 못하도록 하겠다.
셋째, 연방의원과 그 보좌진에 대해서도 퇴직 후 5년간 로비 활동을 금지하는 입법을 의회에 요청하겠다.
넷째, 로비 개념을 확대해 전직 관료들이 컨설턴트나 조언가라는 이름으로 규제망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하겠다.
다섯째, 의회 입법을 통해 외국 정부나 인사가 고용한 로비스트들의 선거 자금 기부를 금지하겠다.
이들 중 현재까지 온전히 실현된 것은 두 번째 공약뿐이다. 물론 이 행정 명령조차도 강제 방안은 여전히 모호한 채로 남아 있는 실정이다. 첫 번째 공약은 자신이 근무했던 기관에 대한 로비 활동만 금지하는 것으로 희석되었고 법제화 기미도 찾아보기 어렵다. 나머지 공약 사항도 의회에서 일부 의원들이 유사 법안을 제출하기는 했지만, 백악관은 별다른 관심과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러는 동안 트럼프 행정부는 대통령 자신을 포함해 그가 공직에 임명했거나 그를 도왔던 주요 인사들이 ‘오물’로 몰리는 크고 작은 각종 추문에 휩싸였다.
트럼프의 선거대책본부장으로 일하기도 했던 코리 루언다우스키(Corey Lewandowski)는 새 정부가 출범하기도 전에 로비 회사를 차리고 정책・정치 자문뿐만 아니라 대통령과 부통령, 행정부 고위 관료와의 면담 시간을 주선하는 것으로 전 세계 고객들을 유치했다. 트럼프의 오랜 지인 브라이언 발라드(Brian Ballard)는 대통령과의 관계를 가장 유익하게 활용한 인사로 알려지게 되었는데, 그의 고객 중 하나인 터키 정부는 그에게 매달 12만5천 달러를 지불했다고 한다. 골드만삭스 출신 재무장관 스티븐 므누신(Steven T. Mnuchin)은 항공 여행에 공군기를 사용해 연방 정부에 80만 달러의 비용을 치르게 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해외 신혼여행을 위해서도 공군기 사용을 요구했다가 취소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과 추문에 휘말린 다른 여러 인사들 중에서도 가장 큰 비난을 받은 인물은 환경청 장관 스콧 프루이트(Scott Pruitt)였다. 그는 자기 사무실의 도청 방지 전화와 생체 인식 자물쇠를 설치하는 데 각각 4만3천 달러와 5천7백 달러, 1등석 항공료로 10만 달러 이상의 부처 비용을 지출했다. 또한 환경청 직원들에게 세탁물을 찾아오라거나 트럼프 호텔 매트리스를 자기 숙소로 가져오라는 등의 허드렛일을 시키고, 심지어는 자기 부인의 일자리를 위해 보수파 단체나 기업과 접촉해 보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자신이 뽑은 보좌진의 보수를 크게 올려주며 그의 비용 지출 행태를 문제 삼은 직원은 좌천시키거나 전보시키는가 하면, 전직 로비스트 친구가 제안한 10만 달러짜리 모로코 순방을 환경청이 수용하게 하고, 억만장자 탄광 사업가가 마련해 준 대학 농구 관람 브이아이피(VIP) 좌석을 아들과 함께 사용하기도 했다.
물론 프루이트 스캔들도 최근 의회 청문회를 통해 드러난 트럼프의 비행만큼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분노를 불러일으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트럼프의 개인 변호사로 일했던 마이클 코언(Michael Cohen)의 증언에 따르면, 트럼프는 위키리크스의 힐러리 캠프 이메일 공개를 사전에 인지했고, 그의 주장과 달리 선거운동 기간에도 러시아와 협상을 계속 진행했으며, 성관계를 주장한 여성들에게 합의금으로 입막음 하려 했다. 청문회에서 드러난 것이 다가 아니다. 그 전에도 이해관계 충돌 방지를 위해 자신의 모든 개인 사업 관리를 자식들에게 넘기겠다고 공언했지만 여전히 격주로 사업 보고를 받으며, 일부 정부 기관들이 트럼프 소유의 고급 리조트와 호텔 등을 사용한 후 그 비용을 지불한 것으로 알려졌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의 사업 활동과 관련한 각종 의혹을 해소하기 위해 납세 내역을 공개하겠다는 약속도 여전히 지키지 않고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렇게 트럼프 자신과 그 주변 인사들의 추문이 드러날수록, 그를 비롯한 보수파 언론과 인사들이 말하는 ‘오물’의 의미도 점차 달라졌다는 것이다. 애초 부정부패를 야기하는 로비 활동에 초점을 두었던 이 말은, 어느 순간 과도한 정부 규제와 비대한 정부 규모로 바뀌더니, 최근에는 주로 트럼프와 그의 정책, 그의 행정부를 비판하는 언론인, 정치인, 관료를 상대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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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미국에는 딱 두 종류의 사람들만 있는 것처럼 보인다. 트럼프를 몹시 싫어하는 사람과 트럼프가 한 일들을 알고 싶어 하지도 믿고 싶어 하지도 않는 사람이 그들이다. 전임 대통령 오바마는 미국은 붉은 주(red states-공화당 우세 주)의 나라도 아니고 푸른 주(blue states-민주당 우세 주)의 나라도 아닌 합중국(united states)이라고 역설하며 관용과 대화, 협력과 통합의 정신을 실천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는 경제적 불안과 불평등에 고통 받으며 두려움 속에 하루하루를 보내는 많은 사람들을 자기 정당으로 조직하는 과제를 등한시했다. 경제 위기 극복과 건강보험법 제정을 통해 흑인 루스벨트 대통령이 되고자 했지만,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Roosevelt)의 성공을 뒷받침했던 민주당 조직과 노동조합까지 재건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미국보다 정당이 훨씬 더 약한 것으로 보이는 한국은 어떨까? 대규모 촛불 시위로 대통령을 탄핵하고 새로운 ‘민주 정부’를 출범시키며 한껏 기대에 부풀어 올랐던 한국은 미국과 다른 정치를 보여 주고 있을까? 다음 글에서는 이 문제를 다뤄 보겠다.
<끝>
주석
1) Bierman, Noah. “Trump Shifts Meaning of ‘Drain the Swamp’ from Ethics to Anything he Objects to.” LA Times (2018/02/09).
2) Duignan, Brian. “Donald Trump.” Britannica Online Encyclopedia. (검색일: 2019/04/04).
3) Friedersdorf, Conor. “Trump has Filled, not Drained, the Swamp.” Atlantic (2017/09/21).
4) Herndon, Astead W. “Trump Promised to ‘Drain the Swamp.’ So What’s Happening with his Cabinet?” Boston Globe (2018/04/17).
5) Meyer, Theodoric. “Has Trump Drained the Swamp in Washington?” Politico (2017/10/19).
박지혜ㅣ정치평론가
정치평론가. 대학원에서 정치학을 공부했다. 젊은 시절에는 문학에 관심이 더 많았지만, 작가들이 만든 허구보다 현실을 직접 관찰하고 분석하는 것이 사회를 더 잘 이해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10년 넘게 정치학을 공부하다 박사논문을 쓸 때쯤 문득 깨달았다. 진실을 드러내는 데는 사회과학보다 문학이 더 효과적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지난 시간이 아쉽기도 하지만, 지금은 정치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리더와 조직을 기대하며 정치 평론에 매진하고 있다.
정당이 약하면 나라가 두 동강 난다. 미국이 그렇고 한국이 그렇다. 권력과 명예, 이익을 다투는 정치에서 분열과 갈등은 전혀 낯선 일이 아니다.
그러나 정치는 그런 갈등을 동원하고 조율하며, 공익을 모색하고 실행한다. 이것이 우리가 아는 민주적 통치의 모습이며, 여기서 중심 행위자는 정당이다.
"정당이 약한 민주주의"를 연재하며
정당이 약한 민주주의를 주제로 약 세 편의 글을 기고할 예정이다. 이번 호에는 그 첫 번째 글로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경우”를 싣는다. 이후 계획은 한국 사례를 비교하고, 마지막으로 강한 정당을 만드는 방법에 대한 제언을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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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이 약한 민주주의 ①
미국
글쓴이 ㅣ박지혜(정치평론가)
정당이 약하면 나라가 두 동강 난다. 미국이 그렇고 한국이 그렇다.
권력과 명예, 이익을 다투는 정치에서 분열과 갈등은 전혀 낯선 일이 아니다. 그러나 정치는 그런 갈등을 동원하고 조율하며, 공익을 모색하고 실행한다. 이것이 우리가 아는 민주적 통치의 모습이며, 여기서 중심 행위자는 정당이다.
정당은 민주주의에 필수적인 조직이다. 시민들의 서로 다른 이익과 요구를 표출하고, 그렇게 드러난 다양한 선호를 집적하고 조율해 정책 대안을 만든다. 또한 선거에서 승리해 정부를 인수하거나, 의회로 들어간 후에는 관료들을 통제하며 정책 집행을 독려・감시하고, 다시 선거를 통해 그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진다.
정당이 이런 역할을 잘 수행하려면, 그에 적합한 인적・물적・이념적 자원이 필요하다. 시민사회 결사체들에 뿌리내린 광범한 조직적 연계망, 당 활동의 체계적 분업화와 함께 원활한 이견 조정을 가능하게 하는 강력한 리더십과 당내 규율, 이들 모두를 아우르며 정당 자신과 사회 공동체의 나아갈 방향을 밝히는 아이디어 내지 이념 등이 그것이다.
정당이 이런 자원을 갖추지 못한 채 자기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다른 종류의 정치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당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운 개별 정치인들이 선거 컨설턴트, 여론조사 전문가, 행사 기획가, 메시지 관리자, 소수의 열성 지지자에 의존하며, 언론이 주목할 만한 구호(catchphrase)와 토막말(soundbite), 이벤트와 이미지를 창출하고 전파하는 데 주력함으로써, 여론을 자극하고 여론에 의존하는 ‘여론 동원 정치’가 그것이다. 이렇게 일시적이고 작위적이며 사인화된 정치는 이성보다는 감성, 대화보다는 대치, 타협보다는 공방의 이점을 향유하며, 사회 전체를 흑백 이분법의 진영 간 대결 구도로 몰아갈 가능성이 높다.
저열한 언사로 정치적 아웃사이더를 자임한 트럼프
지금 미국에서 나라를 둘로 가르는 정치의 주인공은 단연 트럼프(Donald Trump)다. 그는 부동산 개발업으로 큰돈을 벌었을 뿐 아니라 각종 미인 선발 대회 유치와 텔레비전 리얼리티쇼 진행으로 전국적인 명성을 쌓았다. 트럼프는 2012년 대선 캠페인 시기부터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당시 그는 몇 차례 공언한 바와 달리 대선 후보로 나서지는 않았지만, 오바마의 출생지를 문제 삼아 그의 대통령 자격을 부정하는 등 근거 없는 주장으로 언론과 대중의 관심을 끌어내곤 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었다. “극히 신뢰할 만한 정보원이 내 사무실로 전화해 버락 오바마의 출생증명서는 위조된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2012년 8월 6일, 트럼프의 트윗).
<사진설명> 2012년 대선 시기 트럼프의 트윗
“극히 신뢰할 만한 정보원이 내 사무실로 전화해 버락 오바마의 출생증명서는 위조된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상대적으로 정당이 강한 유럽 나라에서는 이런 종류의 인사가 주요 정당의 대표나 그에 준하는 후보로 선출되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그러나 미국은 정당에 대한 공헌과 관계없이 시민 누구나 당의 공직 후보 선출에 참여할 수 있는 예비선거 제도(primary system)를 두고 있다. 그 덕분에 공직 경험이나 정당 경력이 일천한 사람도 막대한 자금과 매체를 통한 명성, 소수 극렬 유권자들의 지지만 있으면 대선 후보 반열에 오를 수 있다. 트럼프가 그 전형이었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make America great again)”는 구호 아래 트럼프가 제시한 공약은 꽤나 급진적인 내용들로 채워졌다. 수백만 개 일자리 창출, 일자리 해외 이전 기업 처벌, 오바마 행정부의 건강보험법(Affordable Care Act, 이하 ACA) 폐지, 로비 활동 규제 대폭 강화, 석탄 산업 부활, 파리 기후변화 협약 탈퇴, 불공정 무역 국가 관세 부가, 불법 이민 방지를 위한 미국-멕시코 국경 장벽 건설, 무슬림 이민 금지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급진적인 것은 그 특유의 언술이었다.
트럼프는 선거운동을 통해 스스로를 정치적 아웃사이더로 자리매김하며 티파티(tea party)를 비롯한 보수적 유권자 다수의 지지를 얻는 데 성공했지만, 그 과정에서 상당한 논란과 비난을 초래하기도 했다. 그의 연설과 인터뷰, 특히 그가 애용하는 트위터를 통해 내뱉는 말들은 자극적이고 호전적이며 백인 우월주의나 성차별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미국-멕시코 국경의 불법 이민 문제를 다룰 때는 “멕시코가 사람들을 보낼 때, …… 그들은 마약을 가져오고, 범죄를 가져온다. 그들은 강간범들”이라고 말했다. 여성들에 대한 발언도 그에 못지않다. 공화당 경선 토론에서 사회자가 그에게 여성들을 “뚱뚱한 돼지, 개, 게으름뱅이, 역겨운 동물”로 부른 것에 대해 질문하자 여성 코미디언인 “로지 오도넬(Rosie O’Donnell)에 대해서만” 그렇게 말했다고 답하는가 하면, 같은 당 여성 후보 칼리 피오리나( Carly Fiorina)에 대해서는 “그녀의 얼굴을 보라, 누가 그녀에게 투표하겠는가?”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이와 같은 발언을 두고 공화당 인사들조차 깊은 우려를 표명했지만, 그를 지지하는 유권자들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그들은 트럼프의 전투적 태도와 함께 머리에 떠오른 말이면 무엇이든 내뱉는 모습을 정직과 용기의 상징으로 받아들이며 환호하는 경우가 많았다.
‘부정직한 힐러리’보다 훨씬 더 부정직했던 트럼프
2016년 여름 이후 본 선거에서도 그의 저열한 언사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총기 규제에 호의적인 힐러리 클린턴(Hillary Clinton)을 공격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 생각엔 그녀의 보디가드들도 모든 무기를 내려놓아야 한다. 그들이 무기를 버리고 나면 그녀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우리 한 번 지켜보자.” 선거 기간 내내 트럼프는 힐러리를 기득 체제의 수혜자로 묘사하며, 국무장관 재임 시 개인 이메일 사용 등과 관련한 그녀의 행태를 꼬집어 ‘부정직한 힐러리’(crooked Hillary)로 부르기를 즐겼다. 그러나 정직하지 않기로는 트럼프를 따라잡을 사람이 없었다.
<사진설명> 2016년 대선 시기 미 공화당 선거 광고의 한 장면, ‘부정직한 힐러리’(crooked Hillary)라는 슬로건이 강조되어 있다.
트럼프는 자신과 다른 견해나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을 담은 보도가 나오면, 그 기사를 두고 ‘가짜 뉴스’(fake news)라고 부정하기 일쑤였다. 투표일이 가까워 옴에도 힐러리보다 높은 지지율을 보여 주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오지 않자 선거 조작을 주장하기도 했다. 마지막 텔레비전 토론에서는 선거 결과 수용 여부에 대한 입장을 밝히지 않아 다음날 아침 신문 헤드라인이 그의 대선 불복에 관한 내용으로 채워졌다.
알다시피 최종 선거 결과는 트럼프의 승리였다. 일반 유권자 투표에서는 힐러리가 280만 표나 더 많은 지지를 얻었지만, 당선자를 결정하는 선거인단 투표에서는 트럼프가 304 대 227로 앞서 미국의 45대 대통령이 되었다. 선거 결과를 두고 트럼프는 수백만 표가 불법적인 방식으로 힐러리에게 갔다고 말했지만, 자기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를 내놓지는 못했다.
여론조사 일반의 예측과 다른 선거 결과를 두고, 투표일 직전에 터진 힐러리 이메일 스캔들에 대한 FBI의 재수사를 탓하는 이들도 있지만, 대다수 논평가들은 두 후보가 보여준 선거 전략의 차이가 결정적이었다고 평가한다. 선거 과정에서 줄곧 우위를 보인 힐러리는 기존 유권자 지지 분포를 유지하는 안전한 전략을 선택하며 여성과 소수 인종에서 많은 지지를 얻은 반면, 트럼프는 경제적 불안으로 고통 받고 있던 백인 남성 노동계급에 호소하며 기성 정치에 대한 그들의 분노를 효과적으로 활용했다는 것이다.
대통령 취임 이후 지난 2년여 동안 트럼프가 행한 거의 모든 결정과 발언, 행보는 갈등을 조정하며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분란을 확대하며 사태를 악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무슬림 입국 금지를 둘러싼 이민 정책, 성폭행 의혹을 받은 브렛 캐버노(Brett Kavanaugh)의 대법관 임명 강행이 그렇고, 미국 역사상 가장 부유하고 동질적인 인사들로 구성된 내각과 러시아의 미국 대선 관여 스캔들 조사 과정에서 밝혀진 그의 각종 탈법・불법행위가 그랬다. 기후변화 방지와 환경 보호를 위한 각종 규제를 철폐한 환경 정책과 불공정 무역 해소와 국내 일자리 창출을 위한 보복 관세 정책, 올해 초 예산안 승인을 둘러싸고 연방정부 업무 정지(shutdown)까지 갔던 남부 국경 지대 장벽 건설 역시 마찬가지였다.
더 흥미로운 것은 가난한 미국인들의 사회경제적 곤궁을 해결하는 데 일조한 건강보험법 폐지 시도와 미국식 ‘적폐 청산’으로 이해할 수 있는 반부패 정치 개혁이다. 이들 정책은 어떻게 진행되었고 왜 좌절되었을까? 차례로 살펴보자.
오마바 케어 폐지를 둘러싼 당내 분열과 트럼프의 ‘폭발’ 전략
<출처> www.marketwatch.com
트럼프는 취임과 동시에 일련의 행정 명령을 발표하며 과감하고 결단력 있는 대통령 이미지를 창출하고자 했다. 그 첫 번째 희생양은 전임 오바마 대통령의 최고 업적으로 평가받는 건강보험법, 일명 오바마케어(Obamacare)였다. 대통령 업무 개시 첫날 첫 업무로 그는 ACA의 ‘즉각적 폐지’를 위해 그 법률이 수반하는 ‘부당한 경제적・규제적 부담’을 제거하는 행정 명령을 선택했다. 실제로 트럼프 행정부의 초기 정책 목표는 그가 오래전부터 값비싼 정책 실패로 조롱했던 오바마케어 폐지에 맞춰졌다.
선거운동 당시 트럼프는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좀 더 저렴한 비용으로 더 많은 혜택을 받으며 누구도 건강보험을 상실하지 않는 자신의 법안으로 오바마케어를 대체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하원에서 미국건강보험법(American Health Care Act, 이하 AHCA)으로 불린 그 법안의 세부 사항은 공화당 내에서조차 논란의 여지가 컸다. 트럼프는 구체적인 자기 계획안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ACA하에서 수백만의 미국인들이 획득한 보험 혜택을 박탈하지 않는 동시에 보험 시장에 대한 정부 관여를 줄이는 실제 법안의 초안은 공화당 하원 의원들이 작성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새 행정부가 출범한 1월 후에도 세부 사항을 담은 대안을 준비하지 못했다. 따라서 트럼프가 약속한 ACA의 즉각 폐지는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2017년 3월 들어서야 공화당 하원 의원들이 작성한 법안이 공개되었는데, 주요 내용은 ACA의 건강보험 미가입 시 벌금 부과 조항(individual mandate) 폐지, 보험 가입에 따른 세금 공제 삭감, 연방 정부의 메디케이드 지원 축소, 향후 10년간 약 1조 달러 감세 등이었다. 이 법안에 대해 의회예산국(Congressional Budget Office, 이하 CBO)은 하원 공화당 법안이 ACA와 비교할 때 향후 10년간 3,370억 달러의 연방 재정 적자를 줄일 수 있지만, 같은 기간 보험 미가입자 수를 2천4백만 명 증가시킬 것이라고 추정했다.
게다가 이 법안은 공화당 내 온건파와 보수파 양측 모두로부터 반대에 직면했다. 전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적정 비용의 건강보험을 상실하게 되는 상황을 우려한 반면, 후자는 ACA 조항의 너무 많은 부분들을 그대로 남겨두었다고 비판했다. 특히 보험 상실을 두려워하는 지역구 유권자들이 전국 각지의 타운홀 미팅에서 격앙된 반응을 보이자, 온건파의 우려는 더욱 증폭되었다. 결국 당내 두 분파 간의 이견 조율에 실패하면서 하원 공화당 지도부는 투표 없이 AHCA 안을 철회해야 했고, 이는 ACA 폐지와 대체를 핵심 선거 공약으로 제시했던 트럼프에게 큰 타격을 안겨 주었다.
그로부터 6주 후 하원 공화당은 AHCA의 일부 조항을 변경한 수정안을 민주당 하원 의원 전원의 반대 속에 가까스로 통과시켰다. 의회예산국은 이 법안에 대해서도 기존 ACA와 비교할 때 향후 10년간 1,190달러의 재정 적자를 줄일 수 있지만, 보험 미가입자 수가 2천3백만 명 늘어날 것으로 추산했다.
AHCA 수정안이 하원에서 통과된 직후 상원 공화당 의원들도 ACA를 대체할 자체 법안을 비밀리에 준비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건강보험 조정 법안’(Better Care Reconciliation Act, 이하 BCRA)에 대해서도 의회예산국은 재정 적자는 줄이겠지만 미가입자 수를 크게 늘리는데다 법안 시행 첫 해에 보험료도 오를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런 까닭에 BCRA도 AHCA를 괴롭혔던 것과 같은 문제에 직면했고, 자기 주(州) 시민들의 보험 상실을 막으려는 의원들과, ACA의 주요 조항을 가능한 한 더 많이 무력화시키려는 의원들 사이의 견해 차이는 좁혀지지 않았다. 상원 의회는 7월 마지막 한 주 동안 ACA의 주요 조항 삭제안, ACA를 폐기하는 대체안, 그리고 좀 더 온건한 수준의 대체안을 표결에 부쳤다. 표결 과정에서 트럼프 행정부가 공화당 상원 의원들에게 상당한 압력을 행사했음에도, 세 대안 모두 부결되고 말았다.
ACA 폐기와 대체에 실패한 트럼프 행정부와 공화당은 보험 혜택 축소 등의 다른 조처들을 통해 건강보험의 효용을 계속 약화시키는 방법으로 ACA를 허물어뜨리고자 했다. 트럼프는 이를 오바마케어가 ‘폭발’하도록 내버려두는 전략이라 불렀다. 여기에는 오바마케어 광고와 등록 지원비 삭감, 보험 등록 개방 기간 대폭 축소, 보험사가 중하층 시민을 위해 현금 지불 비용을 줄일 수 있게 해주는 비용 보조금 공유제 폐지, 보험 미가입 시 벌금 부과 조항 폐지 등이 포함됐다. 2017년 11월 의회예산국의 한 연구는 벌금 부과 조항 폐지만으로도 10년 후 미보험자 수가 1천3백만 명이 늘어나며 2027년까지 거의 매년 10%씩 보험료가 인상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오물을 쓸어버려라”, 미국식 적폐청산 정책의 허상
<사진 설명> “Drain The Swamp(오물을 쓸어버려라)”. 2016년 대선 캠페인 과정 중 미국 정가의 적폐를 청산하겠다는 트럼프의 선거 슬로건.
<출처> www.talkmedianews.com
2016년 선거 운동이 막바지로 치닫던 시기 트럼프는 새로운 구호 하나를 발견했다. “Drain the Swamp!”(이하 DTS), 말인즉 ‘늪을 비우라’, ‘오물을 쓸어버려라’는 뜻이다. 미국 정치의 맥락에서 해석하자면, 그간 수도 워싱턴을 물들여 왔던 정치인과 정부 관료의 부정과 부패를 일소하라는 의미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자주 회자되는 ‘적폐 청산’의 미국식 표현으로 이해해도 무방할 것이다. 트럼프 자신도 그럴 줄 몰랐다고 할 만큼 이 구호는 지지자들 사이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울려 퍼지는 DTS에 이렇게 부응했다. “우리 정부를 다시 정직하게 만들겠다. 나를 믿어 달라. 우선 워싱턴의 오물부터 쓸어버리겠다”(2016년 10월 19일, 트럼프의 트윗).
DTS를 위해 트럼프가 제시한 공약은 다섯 가지였다. 모두 소수의 기득 세력이나 거대 기업 집단을 대표하며 워싱턴 정계를 좌우하는 것으로 악명 높은 로비스트 활동에 대한 규제를 대폭 강화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첫째, 행정부 관료에 대해 퇴임 후 5년간 로비스트 활동을 금지하는 행정 명령을 발효하고 후임 정부가 이를 뒤엎지 못하도록 법제화하겠다.
둘째, 행정 명령을 통해 자기 행정부 관료들은 평생 외국 정부를 위한 로비 활동을 벌이지 못하도록 하겠다.
셋째, 연방의원과 그 보좌진에 대해서도 퇴직 후 5년간 로비 활동을 금지하는 입법을 의회에 요청하겠다.
넷째, 로비 개념을 확대해 전직 관료들이 컨설턴트나 조언가라는 이름으로 규제망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하겠다.
다섯째, 의회 입법을 통해 외국 정부나 인사가 고용한 로비스트들의 선거 자금 기부를 금지하겠다.
이들 중 현재까지 온전히 실현된 것은 두 번째 공약뿐이다. 물론 이 행정 명령조차도 강제 방안은 여전히 모호한 채로 남아 있는 실정이다. 첫 번째 공약은 자신이 근무했던 기관에 대한 로비 활동만 금지하는 것으로 희석되었고 법제화 기미도 찾아보기 어렵다. 나머지 공약 사항도 의회에서 일부 의원들이 유사 법안을 제출하기는 했지만, 백악관은 별다른 관심과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러는 동안 트럼프 행정부는 대통령 자신을 포함해 그가 공직에 임명했거나 그를 도왔던 주요 인사들이 ‘오물’로 몰리는 크고 작은 각종 추문에 휩싸였다.
트럼프의 선거대책본부장으로 일하기도 했던 코리 루언다우스키(Corey Lewandowski)는 새 정부가 출범하기도 전에 로비 회사를 차리고 정책・정치 자문뿐만 아니라 대통령과 부통령, 행정부 고위 관료와의 면담 시간을 주선하는 것으로 전 세계 고객들을 유치했다. 트럼프의 오랜 지인 브라이언 발라드(Brian Ballard)는 대통령과의 관계를 가장 유익하게 활용한 인사로 알려지게 되었는데, 그의 고객 중 하나인 터키 정부는 그에게 매달 12만5천 달러를 지불했다고 한다. 골드만삭스 출신 재무장관 스티븐 므누신(Steven T. Mnuchin)은 항공 여행에 공군기를 사용해 연방 정부에 80만 달러의 비용을 치르게 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해외 신혼여행을 위해서도 공군기 사용을 요구했다가 취소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과 추문에 휘말린 다른 여러 인사들 중에서도 가장 큰 비난을 받은 인물은 환경청 장관 스콧 프루이트(Scott Pruitt)였다. 그는 자기 사무실의 도청 방지 전화와 생체 인식 자물쇠를 설치하는 데 각각 4만3천 달러와 5천7백 달러, 1등석 항공료로 10만 달러 이상의 부처 비용을 지출했다. 또한 환경청 직원들에게 세탁물을 찾아오라거나 트럼프 호텔 매트리스를 자기 숙소로 가져오라는 등의 허드렛일을 시키고, 심지어는 자기 부인의 일자리를 위해 보수파 단체나 기업과 접촉해 보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자신이 뽑은 보좌진의 보수를 크게 올려주며 그의 비용 지출 행태를 문제 삼은 직원은 좌천시키거나 전보시키는가 하면, 전직 로비스트 친구가 제안한 10만 달러짜리 모로코 순방을 환경청이 수용하게 하고, 억만장자 탄광 사업가가 마련해 준 대학 농구 관람 브이아이피(VIP) 좌석을 아들과 함께 사용하기도 했다.
물론 프루이트 스캔들도 최근 의회 청문회를 통해 드러난 트럼프의 비행만큼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분노를 불러일으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트럼프의 개인 변호사로 일했던 마이클 코언(Michael Cohen)의 증언에 따르면, 트럼프는 위키리크스의 힐러리 캠프 이메일 공개를 사전에 인지했고, 그의 주장과 달리 선거운동 기간에도 러시아와 협상을 계속 진행했으며, 성관계를 주장한 여성들에게 합의금으로 입막음 하려 했다. 청문회에서 드러난 것이 다가 아니다. 그 전에도 이해관계 충돌 방지를 위해 자신의 모든 개인 사업 관리를 자식들에게 넘기겠다고 공언했지만 여전히 격주로 사업 보고를 받으며, 일부 정부 기관들이 트럼프 소유의 고급 리조트와 호텔 등을 사용한 후 그 비용을 지불한 것으로 알려졌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의 사업 활동과 관련한 각종 의혹을 해소하기 위해 납세 내역을 공개하겠다는 약속도 여전히 지키지 않고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렇게 트럼프 자신과 그 주변 인사들의 추문이 드러날수록, 그를 비롯한 보수파 언론과 인사들이 말하는 ‘오물’의 의미도 점차 달라졌다는 것이다. 애초 부정부패를 야기하는 로비 활동에 초점을 두었던 이 말은, 어느 순간 과도한 정부 규제와 비대한 정부 규모로 바뀌더니, 최근에는 주로 트럼프와 그의 정책, 그의 행정부를 비판하는 언론인, 정치인, 관료를 상대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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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미국에는 딱 두 종류의 사람들만 있는 것처럼 보인다. 트럼프를 몹시 싫어하는 사람과 트럼프가 한 일들을 알고 싶어 하지도 믿고 싶어 하지도 않는 사람이 그들이다. 전임 대통령 오바마는 미국은 붉은 주(red states-공화당 우세 주)의 나라도 아니고 푸른 주(blue states-민주당 우세 주)의 나라도 아닌 합중국(united states)이라고 역설하며 관용과 대화, 협력과 통합의 정신을 실천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는 경제적 불안과 불평등에 고통 받으며 두려움 속에 하루하루를 보내는 많은 사람들을 자기 정당으로 조직하는 과제를 등한시했다. 경제 위기 극복과 건강보험법 제정을 통해 흑인 루스벨트 대통령이 되고자 했지만,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Roosevelt)의 성공을 뒷받침했던 민주당 조직과 노동조합까지 재건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미국보다 정당이 훨씬 더 약한 것으로 보이는 한국은 어떨까? 대규모 촛불 시위로 대통령을 탄핵하고 새로운 ‘민주 정부’를 출범시키며 한껏 기대에 부풀어 올랐던 한국은 미국과 다른 정치를 보여 주고 있을까? 다음 글에서는 이 문제를 다뤄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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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Bierman, Noah. “Trump Shifts Meaning of ‘Drain the Swamp’ from Ethics to Anything he Objects to.” LA Times (2018/02/09).
2) Duignan, Brian. “Donald Trump.” Britannica Online Encyclopedia. (검색일: 2019/04/04).
3) Friedersdorf, Conor. “Trump has Filled, not Drained, the Swamp.” Atlantic (2017/09/21).
4) Herndon, Astead W. “Trump Promised to ‘Drain the Swamp.’ So What’s Happening with his Cabinet?” Boston Globe (2018/04/17).
5) Meyer, Theodoric. “Has Trump Drained the Swamp in Washington?” Politico (2017/10/19).
박지혜ㅣ정치평론가
정치평론가. 대학원에서 정치학을 공부했다. 젊은 시절에는 문학에 관심이 더 많았지만, 작가들이 만든 허구보다 현실을 직접 관찰하고 분석하는 것이 사회를 더 잘 이해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10년 넘게 정치학을 공부하다 박사논문을 쓸 때쯤 문득 깨달았다. 진실을 드러내는 데는 사회과학보다 문학이 더 효과적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지난 시간이 아쉽기도 하지만, 지금은 정치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리더와 조직을 기대하며 정치 평론에 매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