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양극화 국회를 이끄나
1.
민주주의란 시민이 적법하게 선출한 정치가들에게만 통치를 허락하는 체제다. 혈통과 세습의 원리로 작동하는 군주정이나, 특권과 계급의 원리로 작동하는 귀족정과는 달리, 민주정에서는 누가 통치의 역할을 맡을지를 피치자인 시민이 결정한다. (미국의 독립선언서 초안을 썼던 토머스 제퍼슨이 말했듯) "피치자의 동의 여부(by the consent of the governed)"가 체제 운영의 기본 원리라는 것이다.
선출된 시민 대표가 기대만큼 통치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어떻게 할까? 그 책임을 시민은 어떻게 물을 수 있을까? 가장 강력한 처벌은 재선, 즉 다시 선출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정해진 임기를 기준으로 일을 계속하게 할지 아니면 파면시킬지를 결정할 ‘최종적 권한(the last say)’을 시민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한계는 있다. 특히나 우리처럼 대통령 단임제 국가의 경우 이 조치는 큰 효과가 없다. 선거 때마다 전체 의원의 절반, 그 가운데 초선의원의 4분의 3을 교체하는 우리 국회의 경우 역시 그 효과가 거의 없음을 충분히 보여준 바 있다. 의원직을 상실하고도 이들은 전직 국회의원이라는 이름으로 방송가와 법조계, 공기업 등 여러 분야에서 보통사람들이 가질 수 없는 기회를 향유한다.
이처럼 책임을 개인화해서 묻고 따지는 것만으로는, 시민이 기대했던 바를 실현하기에는 근본적인 어려움이 있다. 대통령과 의원 개인이 공직을 떠나든 아니든 계속해서 책임을 부과받는 대상이 필요한데, 그게 정당이다. 정당은 공직 후보자 즉 선출직 통치자가 될 자를 양성하는 역할을 한다. 그들을 책임 있게 공천해서 시민들에게 동의를 요청하는 일을 한다. 정당의 이 역할이 잘 이루어져야, 임기를 기준으로 한 주기적 선거는 책임 정치를 실현하는 강력한 제도적 기제가 될 수 있다. 현실은 어떨까? 안타깝게도 정당들은 그 역할을 못하고 있다.
정당의 저발전은 한국 민주주의 최대의 난점이다. 오히려 정당들은 자신들이 공천한 대통령 후보와 의원들에게 휘둘리거나, 그들이 개인적 야심을 자유롭게 추구하는 것을 뒷받침하는 역할 이상은 하지 못한다. 따라서 정당이 표방하는 가치나 이념에 맞게 선출된 대표들이 공익적 책임을 다하도록 강제할 의지도, 능력도 없다. 선출된 대통령과 의원 개인들은, ‘정당을 통한 책임 정치’가 아니라 ‘자신만을 위한 여론 정치’에 몰입하고 있다. 그 결과 정당정치뿐만 아니라 의회정치 또한 ‘비창조적 열정’ 내지 ‘불모의 흥분’을 쏟아내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한국의 정치 양극화는, 정당이 강해서도 아니고 이념이나 가치 지향성에 강해서 나타나는 현상도 아니다. 반대로 정당이 약해서 발생하는 현상이고, 정당이 선거 승리나 권력 투쟁에서 밀리지 않으려는 열정에 의해서만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심화되고 있는 것이 정치 양극화다. 정당이 책임 정치의 보루가 되지 않으면, 현실의 민주정치는 여론의 주목을 받고 팬덤 시민들의 지지를 동원하려는 무책임한 개인들의 사적 야심을 제어할 수 없게 된다.
2.
우리 국회에 대한 실망과 비판이 커지고 있다면 분명 신뢰받는 국회를 어렵게 만드는 의원들이 있을 것이다. “정당정치는 왜 나빠지고 있나”, “우리 국회에서 양극화 정치를 주도하는 의원들의 특징은 무엇인가”를 주제로 전, 현직 의원들과 의원실 보좌진, 정당 당직자들과의 비공식 인터뷰를 이어오면서 대다수가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다섯 유형의 의원들에 주목하게 된다.
첫 번째는 선동가형이다. 그들은 어떤 사안에 있어 합리적 해결책이나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 아니라 공격과 야유의 소재로 동원하는 데 익숙하다. 싸움과 갈등을 부추기고 자신이 앞장서는 장면을 연출하는 데 유능하다. 그렇게 해야 지지자들로부터 환호와 찬사를 받을 수 있다고 여기며, 공익보다는 자신을 위한 정치를 해야 지지자도 얻고 영향력을 키워갈 수 있다고 믿는 유형이다.
두 번째 유형은 외견상 매우 적극적이고 전투적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무능력하고 무책임한 의원들이다. 상임위 전체회의에서는 카메라를 의식해서 행동하고 때로 언성을 높이지만, 카메라가 없는 소위원회에서는 논리적이면서도 성실하게 심의에 집중하지 못하는 의원들이 있다. 그들은 실력을 키우는 어려운 노력보다 인지도를 높이는 쉬운 선택이 자신에게 더 유익하다고 여기며 이를 딱하게 여기는 동료 의원들의 부정적 시선을 참고 견딘다. 그들은 언론에 많이 언급되고, SNS 구독자나 응원 댓글이 많은 것을 정치를 잘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다.
세 번째는 일종의 개인 독점형 의원 유형이다. 여론의 관심을 끌 이슈가 생기면 곧바로 나서고, 단독으로 주목받고자 하는 열정을 참지 못하는 의원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보좌진들에게 늘 신속 대응을 요구한다. 법안도, 기자회견도, SNS 업로드도 다른 의원이 나서기 전에 먼저 하고 싶어 한다. 그런 조바심이 자신을 압도하기 때문에 협동의 가치는 물론, 숙의나 성실한 준비의 중요성은 생각할 겨를이 없다. 혼자 빛나고 싶은 이 유형의 의원들 때문에 우리 국회가 숙의나 책임 있는 심의보다 나날이 속보 경쟁 체제로 바뀌고 있다.
네 번째는 도덕적으로 뻔뻔한 유형이다. 그들은 자신의 실수나 잘못임에도 논란을 이어가며 끝까지 사과나 인정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실을 인정하는 것을 패배로 여기는 특별한 사고방식의 소유자들이다. 그들은 팬덤 지지자들이 나서서 상대 당이나 언론의 비판에 맞서 대신 싸워 주고 후원금도 쉽게 걷히고 인지도도 더 올라가는 것을 경험한 뒤 부끄러움조차 갖지 않게 되었다. 염치없는 일이라도 팬덤 지지자들이 바라는 싸움을 계속한다면 성공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이들 역시 의회정치를 멍들게 한다.
다섯 번째는 가장 안타까운 유형으로, 그들은 팬덤 지지자들이 좋아하는 의원들, 이른바 ‘팬덤 인싸’에 들어가는 것을 동경하고 거기에 속하지 못해 안달하는 의원이다. 그들은 자신을 돌아볼 생각보다는 나는 왜 안 되는지에 연연하며 그 짜증을 보좌진에게 돌리는 사람들이다. 이런 의원일수록 보좌진 교체를 자주 한다. 의원실 구성원들을 함께 정치하는 팀이나 동료로 이해하지 못하고 수시로 임면을 반복하는 의원들 때문에 의원실 문화가 일종의 사설 연예인 기획사 사무실처럼 변하고 있다.
3.
이 다섯 유형의 의원들이 가진 공통점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반대자나 비판자를 만나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환호받는 자리만을 원할 뿐, 토론과 설득이 필요한 자리를 기피한다. 자료 검토나 법안 준비에 긴 시간을 보내는 것을 참지 못하고, 언론에 자신의 이름이 얼마나 자주 언급되는지에만 신경을 쓴다. SNS에 자신의 활동 모습을 올리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그들은 그 짧은 메시지나 자신의 얼굴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보좌진들에게 자주 화를 낸다.
상임위에서 그들은 상대방 의원이나 증인들이 발언하는 중에 끼어들 때가 많다. 야유나 조롱조 언어가 입에 붙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튀어나올 때도 많다. 그들의 질의에는 치밀한 사실관계를 따지는 내용보다 ‘국가’나 ‘국민’, ‘민족’, ‘민주주의’, ‘시민’, ‘노동자’, ‘서민’ 같이 구호성 용어가 많이 등장한다.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자신의 의지대로 의정 활동을 하는 사람들과는 거리가 먼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첫째도 홍보, 둘째도 홍보, 셋째도 홍보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의정 활동을 잘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주목받지 못하거나 지지자들에게 잊히면 어쩌나 하는 데 있다.
법안 발의를 많이 하는 것도 이들 의원의 특징이다. 법안의 실효성과 중대성에 대한 신중한 고려는 거의 하지 않는다. 반대로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는 이슈가 제기될 때마다 이에 편승해 관련 법안을 빨리 내고 이를 홍보에 활용하고 싶은 열정은 늘 지나치다. 그렇기에 우리 국회에서는 법안 발의 실적이 좋은 것을 과시할수록 의회정치의 발전에 역행하는 의원일 가능성이 높다.
여론과 지지자들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이들 여러 유형의 의원들이 의회정치와 정당정치를 어렵게 만든다. 지금 우리 국회를 양극화로 이끄는 의원들은 합리적 토론을 이끌 수 없는 사람들이다. 협력을 통해 일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공격과 야유를 통해 될 일도 안 되게 만드는 유형의 사람들이다. 정치를 정치답지 못하게 만드는 이들 소수의 거친 목소리 때문에, 절대 다수의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의원들이 같은 존재로 경멸당하는 게 지금 우리 국회의 현실이다.
※이 글은 2023년도 연구 과제인 “정치 양극화와 국회(연구 책임자 박현석)”의 소주제인 “한국의 정치 양극화가 가진 유형적 특징”을 연구하기 위해 진행하고 있는 전, 현직 의원들과 의원실 보좌진, 정당 당직자들과의 비공식 인터뷰에 기초를 둔 것임을 밝혀둔다.
이 글은 국회미래연구원 홈페이지에 담긴 글입니다.
원본보기 : https://www.nafi.re.kr/new/think.do?mode=view&articleNo=5752&article.offset=0&articleLimit=10
누가 양극화 국회를 이끄나
1.
민주주의란 시민이 적법하게 선출한 정치가들에게만 통치를 허락하는 체제다. 혈통과 세습의 원리로 작동하는 군주정이나, 특권과 계급의 원리로 작동하는 귀족정과는 달리, 민주정에서는 누가 통치의 역할을 맡을지를 피치자인 시민이 결정한다. (미국의 독립선언서 초안을 썼던 토머스 제퍼슨이 말했듯) "피치자의 동의 여부(by the consent of the governed)"가 체제 운영의 기본 원리라는 것이다.
선출된 시민 대표가 기대만큼 통치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어떻게 할까? 그 책임을 시민은 어떻게 물을 수 있을까? 가장 강력한 처벌은 재선, 즉 다시 선출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정해진 임기를 기준으로 일을 계속하게 할지 아니면 파면시킬지를 결정할 ‘최종적 권한(the last say)’을 시민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한계는 있다. 특히나 우리처럼 대통령 단임제 국가의 경우 이 조치는 큰 효과가 없다. 선거 때마다 전체 의원의 절반, 그 가운데 초선의원의 4분의 3을 교체하는 우리 국회의 경우 역시 그 효과가 거의 없음을 충분히 보여준 바 있다. 의원직을 상실하고도 이들은 전직 국회의원이라는 이름으로 방송가와 법조계, 공기업 등 여러 분야에서 보통사람들이 가질 수 없는 기회를 향유한다.
이처럼 책임을 개인화해서 묻고 따지는 것만으로는, 시민이 기대했던 바를 실현하기에는 근본적인 어려움이 있다. 대통령과 의원 개인이 공직을 떠나든 아니든 계속해서 책임을 부과받는 대상이 필요한데, 그게 정당이다. 정당은 공직 후보자 즉 선출직 통치자가 될 자를 양성하는 역할을 한다. 그들을 책임 있게 공천해서 시민들에게 동의를 요청하는 일을 한다. 정당의 이 역할이 잘 이루어져야, 임기를 기준으로 한 주기적 선거는 책임 정치를 실현하는 강력한 제도적 기제가 될 수 있다. 현실은 어떨까? 안타깝게도 정당들은 그 역할을 못하고 있다.
정당의 저발전은 한국 민주주의 최대의 난점이다. 오히려 정당들은 자신들이 공천한 대통령 후보와 의원들에게 휘둘리거나, 그들이 개인적 야심을 자유롭게 추구하는 것을 뒷받침하는 역할 이상은 하지 못한다. 따라서 정당이 표방하는 가치나 이념에 맞게 선출된 대표들이 공익적 책임을 다하도록 강제할 의지도, 능력도 없다. 선출된 대통령과 의원 개인들은, ‘정당을 통한 책임 정치’가 아니라 ‘자신만을 위한 여론 정치’에 몰입하고 있다. 그 결과 정당정치뿐만 아니라 의회정치 또한 ‘비창조적 열정’ 내지 ‘불모의 흥분’을 쏟아내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한국의 정치 양극화는, 정당이 강해서도 아니고 이념이나 가치 지향성에 강해서 나타나는 현상도 아니다. 반대로 정당이 약해서 발생하는 현상이고, 정당이 선거 승리나 권력 투쟁에서 밀리지 않으려는 열정에 의해서만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심화되고 있는 것이 정치 양극화다. 정당이 책임 정치의 보루가 되지 않으면, 현실의 민주정치는 여론의 주목을 받고 팬덤 시민들의 지지를 동원하려는 무책임한 개인들의 사적 야심을 제어할 수 없게 된다.
2.
우리 국회에 대한 실망과 비판이 커지고 있다면 분명 신뢰받는 국회를 어렵게 만드는 의원들이 있을 것이다. “정당정치는 왜 나빠지고 있나”, “우리 국회에서 양극화 정치를 주도하는 의원들의 특징은 무엇인가”를 주제로 전, 현직 의원들과 의원실 보좌진, 정당 당직자들과의 비공식 인터뷰를 이어오면서 대다수가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다섯 유형의 의원들에 주목하게 된다.
첫 번째는 선동가형이다. 그들은 어떤 사안에 있어 합리적 해결책이나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 아니라 공격과 야유의 소재로 동원하는 데 익숙하다. 싸움과 갈등을 부추기고 자신이 앞장서는 장면을 연출하는 데 유능하다. 그렇게 해야 지지자들로부터 환호와 찬사를 받을 수 있다고 여기며, 공익보다는 자신을 위한 정치를 해야 지지자도 얻고 영향력을 키워갈 수 있다고 믿는 유형이다.
두 번째 유형은 외견상 매우 적극적이고 전투적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무능력하고 무책임한 의원들이다. 상임위 전체회의에서는 카메라를 의식해서 행동하고 때로 언성을 높이지만, 카메라가 없는 소위원회에서는 논리적이면서도 성실하게 심의에 집중하지 못하는 의원들이 있다. 그들은 실력을 키우는 어려운 노력보다 인지도를 높이는 쉬운 선택이 자신에게 더 유익하다고 여기며 이를 딱하게 여기는 동료 의원들의 부정적 시선을 참고 견딘다. 그들은 언론에 많이 언급되고, SNS 구독자나 응원 댓글이 많은 것을 정치를 잘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다.
세 번째는 일종의 개인 독점형 의원 유형이다. 여론의 관심을 끌 이슈가 생기면 곧바로 나서고, 단독으로 주목받고자 하는 열정을 참지 못하는 의원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보좌진들에게 늘 신속 대응을 요구한다. 법안도, 기자회견도, SNS 업로드도 다른 의원이 나서기 전에 먼저 하고 싶어 한다. 그런 조바심이 자신을 압도하기 때문에 협동의 가치는 물론, 숙의나 성실한 준비의 중요성은 생각할 겨를이 없다. 혼자 빛나고 싶은 이 유형의 의원들 때문에 우리 국회가 숙의나 책임 있는 심의보다 나날이 속보 경쟁 체제로 바뀌고 있다.
네 번째는 도덕적으로 뻔뻔한 유형이다. 그들은 자신의 실수나 잘못임에도 논란을 이어가며 끝까지 사과나 인정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실을 인정하는 것을 패배로 여기는 특별한 사고방식의 소유자들이다. 그들은 팬덤 지지자들이 나서서 상대 당이나 언론의 비판에 맞서 대신 싸워 주고 후원금도 쉽게 걷히고 인지도도 더 올라가는 것을 경험한 뒤 부끄러움조차 갖지 않게 되었다. 염치없는 일이라도 팬덤 지지자들이 바라는 싸움을 계속한다면 성공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이들 역시 의회정치를 멍들게 한다.
다섯 번째는 가장 안타까운 유형으로, 그들은 팬덤 지지자들이 좋아하는 의원들, 이른바 ‘팬덤 인싸’에 들어가는 것을 동경하고 거기에 속하지 못해 안달하는 의원이다. 그들은 자신을 돌아볼 생각보다는 나는 왜 안 되는지에 연연하며 그 짜증을 보좌진에게 돌리는 사람들이다. 이런 의원일수록 보좌진 교체를 자주 한다. 의원실 구성원들을 함께 정치하는 팀이나 동료로 이해하지 못하고 수시로 임면을 반복하는 의원들 때문에 의원실 문화가 일종의 사설 연예인 기획사 사무실처럼 변하고 있다.
3.
이 다섯 유형의 의원들이 가진 공통점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반대자나 비판자를 만나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환호받는 자리만을 원할 뿐, 토론과 설득이 필요한 자리를 기피한다. 자료 검토나 법안 준비에 긴 시간을 보내는 것을 참지 못하고, 언론에 자신의 이름이 얼마나 자주 언급되는지에만 신경을 쓴다. SNS에 자신의 활동 모습을 올리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그들은 그 짧은 메시지나 자신의 얼굴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보좌진들에게 자주 화를 낸다.
상임위에서 그들은 상대방 의원이나 증인들이 발언하는 중에 끼어들 때가 많다. 야유나 조롱조 언어가 입에 붙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튀어나올 때도 많다. 그들의 질의에는 치밀한 사실관계를 따지는 내용보다 ‘국가’나 ‘국민’, ‘민족’, ‘민주주의’, ‘시민’, ‘노동자’, ‘서민’ 같이 구호성 용어가 많이 등장한다.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자신의 의지대로 의정 활동을 하는 사람들과는 거리가 먼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첫째도 홍보, 둘째도 홍보, 셋째도 홍보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의정 활동을 잘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주목받지 못하거나 지지자들에게 잊히면 어쩌나 하는 데 있다.
법안 발의를 많이 하는 것도 이들 의원의 특징이다. 법안의 실효성과 중대성에 대한 신중한 고려는 거의 하지 않는다. 반대로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는 이슈가 제기될 때마다 이에 편승해 관련 법안을 빨리 내고 이를 홍보에 활용하고 싶은 열정은 늘 지나치다. 그렇기에 우리 국회에서는 법안 발의 실적이 좋은 것을 과시할수록 의회정치의 발전에 역행하는 의원일 가능성이 높다.
여론과 지지자들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이들 여러 유형의 의원들이 의회정치와 정당정치를 어렵게 만든다. 지금 우리 국회를 양극화로 이끄는 의원들은 합리적 토론을 이끌 수 없는 사람들이다. 협력을 통해 일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공격과 야유를 통해 될 일도 안 되게 만드는 유형의 사람들이다. 정치를 정치답지 못하게 만드는 이들 소수의 거친 목소리 때문에, 절대 다수의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의원들이 같은 존재로 경멸당하는 게 지금 우리 국회의 현실이다.
※이 글은 2023년도 연구 과제인 “정치 양극화와 국회(연구 책임자 박현석)”의 소주제인 “한국의 정치 양극화가 가진 유형적 특징”을 연구하기 위해 진행하고 있는 전, 현직 의원들과 의원실 보좌진, 정당 당직자들과의 비공식 인터뷰에 기초를 둔 것임을 밝혀둔다.
이 글은 국회미래연구원 홈페이지에 담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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