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말의 힘 | ③ 전쟁은 웃으면서 하는 거다 : 윈스턴 처칠 <피와 땀 그리고 눈물>

2019-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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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학은 가장 오래된 학문 가운데 하나다. 가장 오래되었다? 게다가 학문이다? 아마 이 대목을 의아하게 생각할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분명 수사학은 기법과 기술을 가르치는 학문이다. 수사학을 잘 배웠다면, 공적 영역에 나와서 연설하는 솜씨를 뽐내야 한다. 하지만 그 기법/기술/솜씨를 우습게 생각하면 안 된다.

수사학이란 주어진 상황과 주제를 이해하는 것에 바탕을 두되, 그에 맞도록 실제 연설을 효과적으로 운용, 조절하는 능력을 다룬다. 무엇을 말할 것인지(what to say)와 어떻게 말할 것인지(how to say)를, 연설의 상황과 연설을 듣는 청중의 기대에 맞게 결합하는 능력, 그것이 핵심이다.

정치적 말의 힘 ③
전쟁은 웃으면서 하는 거다 : 윈스턴 처칠 <피와 땀 그리고 눈물>

글쓴이 |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


1. 왜 수사학적 기법은 중요한가

수사학은 가장 오래된 학문 가운데 하나다. 가장 오래되었다? 게다가 학문이다? 아마 이 대목을 의아하게 생각할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분명 수사학은 기법과 기술을 가르치는 학문이다. 수사학을 잘 배웠다면, 공적 영역에 나와서 연설하는 솜씨를 뽐내야 한다. 하지만 그 기법/기술/솜씨를 우습게 생각하면 안 된다.


수사학이란 주어진 상황과 주제를 이해하는 것에 바탕을 두되, 그에 맞도록 실제 연설을 효과적으로 운용, 조절하는 능력을 다룬다. 무엇을 말할 것인지(what to say)와 어떻게 말할 것인지(how to say)를, 연설의 상황과 연설을 듣는 청중의 기대에 맞게 결합하는 능력, 그것이 핵심이다. 이를 위해 정치가는 연설 주제와 관련된 지식을 쌓는 데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수사학은 철학적 깊이와 윤리적 결단을 말로 실천하는 일이지, 단순한 ‘말 잘하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수사학이 철학인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수사학은 “거부할 수 없는 낱말의 매력”을 구현하는 기술이며, 그 자체로 인간을 타락시킬 수도 있고 또 인간을 완전하게 만들 수도 있는 위험한 능력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이유로 수사학 자체의 특별함에 대해 생각해 볼 것이 적지가 않다.



2. 그리스의 전통

수사학은 ‘설득의 능력’을 키우는 기술이고, 체계적인 지식이나 진리의 문제를 다루는 철학과 달리 ‘의견의 문제’를 다룬다. 의견은 기본적으로 개연성에 기초를 둔다. 과학적 분석과 객관적 입증보다는 일반적 개연성이 수사학에서는 더 중요하게 다뤄진다는 뜻이다. 이 점에서 논리학과도 구분된다. 논리학이 ‘엄격한 인과적 논증’을 다룬다면, 수사학은 낱말들을 가지고 청중들을 믿도록 설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진실보다는 ‘진실 같은 것’, 과학적이고 절대적인 판단보다는 주관적 공감과 동의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수사학에서는 더 중요하다. 근본적으로 수사학은 듣는 상대가 있고, 그 상대와 과학적 논증의 절차를 따지는 일이 아니라 주관적 믿음의 관계를 만들어 내는 것을 목표로 삼기 때문이다.


역설적이지만, 바로 이 점에서 수사학은 어떤 학문 분야보다도 상호적이고 또 도덕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 진실인 것과 진실인 것처럼 보이는 것 사이에는 불일치가 있을 수 있고, 말하는 사람 스스로 연설의 목적에 대한 헌신성을 갖고 있지 않다면 듣는 청중이 그에게서 신뢰와 권위감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공동체의 상황을 개선하고 동료 시민과 함께하는 정치적 과업에 대한 자각이 없는 정치가와는 수사학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할 수가 없다.


고대 아테네에서 가장 비싼 연설 강사로 알려진, 대표적인 소피스트 프로타고라스가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정의한 것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프로타고라스는 인간의 감각은 주관적으로 다르고 진리는 상대적이기에, 말과 연설로써 공적인 결정을 이끌려 한다면 그만큼 헌신적으로 노력하고 탁월한 덕성을 위해 훈련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 강조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프로타고라스의 수사학 교육을 단순히 돈벌이의 수단으로 치부하는 것은 잘못이 아닐 수 없다.


수사학이 주관적인 감정의 이입을 다루고 있기에 문학의 발전에도 기여했다. 반대로 문학도 수사학의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고르기아스가 대표적이다. 그의 웅변술 내지 수사학은 문학적 즐거움을 구현한 것으로 유명하다. 시적 환상을 자유롭게 구사한 것으로도 평가받는다. 그렇기에 그는 사형 선고조차 막을 수 있는 ‘감정의 수사학자’이자, 이를 통해 마술적인 매력을 불러일으키는 웅변술의 대가로도 불리곤 했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어 고르기아스는 물론 수사학 자체에 대해 매우 혹독한 비판을 가했다.1)


플라톤에 따르면 수사학은 책략 내지 전략적 수완을 발휘하는 것에 불과하다. 진실을 저버리고 대중에 아첨하는 행위, 내지 청중에 아부하고 유혹하는 속임수라고 보기도 했다. 그래서 플라톤은 진정한 기예는 사고의 계발을 통해 이루어질 뿐 낱말을 이용해서 이루어지지 않으며, 낱말의 수사학적 조합은 권력의 남용만 가져온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선을 실현하고 불의와 악을 거부하는 것은 수사학이 아니라 철학이라고 보았기에, 호메로스의 신화에서 보듯 동물적 본능이나 충동과 같은 원시적 인간성은 물론 수사학적 기교를 철저하게 비판하면서, 철학자가 통치하는 ‘지식의 왕국’을 세워야 한다고 역설했다.


플라톤이 지향했던 ‘철학의 전제정’에 대한 수사학의 반격은 이소크라테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플라톤이 철학적 ‘지식’보다 열등한 것으로 비판했던 ‘의견’은 물론 의견에 기초를 둔 수사학의 가치를 옹호했다. 수사학을 속임수라고 본 플라톤과는 달리 수사학이야말로 인간의 덕성을 중시하고 인격 형성에서 철학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그렇기에 수사학에 교육적인 측면은 물론 미학적 기반을 제공하려는 노력을 꾸준히 했으며, 그것은 곧 대중에 대한 아첨이나 아부가 아니라 ‘정치적 아름다움’을 가져다준다고 여겼다. 그런 의미에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토니 모리슨이 “정치적이되 아름다워야 한다.”고 말한 것은2) 이소크라테스 수사학의 정수를 잘 표현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수사학을 체계화하고 분석적으로 논의한 최초의 학자는 아리스토텔레스였다. 그에 앞선 그리스 수사학자들의 논의는 다른 사람들의 저작을 통해 그 편린만을 볼 수 있었던 때였다. 그들에 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완성된 체계의 수사학을 독립된 저서로 남겼다.3) 그는 스승인 플라톤과 달리 수사학을 무시하지 않았으며, 더 나아가 당당한 학문의 반열에 올려놓는 작업을 했다. 의견을 ‘진리의 왜곡된 그림자’로 본 플라톤과는 달리, 의견이야말로 ‘진리의 진정한 형상’이라 정의한 것도 아리스토텔레스였다. 나아가 연설을 의미의 차원과 형태적 차원으로 나누고, 후자의 형태적 차원에 대한 가치를 적극적으로 부여하기도 했다.


<사진 설명>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의 풍부한 발전에 길을 터준 철학자이자 정치학자였다._위키피디아


수사학이란 “경우마다 설득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고찰하는 지식”으로서, 이는 다른 어떤 기예도 대신할 수 없다고 본 사람도 아리스토텔레스였다. 따라서 어휘와 낱말 선택의 순간에 윤리적 전제들과 함께 정치적 가치들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고, 그 위에서 쉽게 읽히고 정확히 발음될 수 있도록 하는, 이른바 표현 형태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은유와 운율, 목소리와 몸짓, 암기술(暗記術)을 수사학 요소의 하나로 평가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였다. 요컨대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후 수사학의 풍부한 발전에 길을 터준 철학자이자 정치학자라고 아니할 수가 없다.



3. 로마의 전통

로마 공화정을 이끌었던 철학자이자 정치가였던 키케로는 진정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을 계승한 후예였다. 그 역시 학문과 웅변, 지식과 언어는 수사학이 가져야 할 불가분의 두 측면이라 여겼다. 그러면서 레스(res, 사실/내용)과 베르바(verba, 말/표현)는 분리될 수 없다고 여겼다. ‘말의 저울’(pondus verbi)이란 멋진 표현을 자주 사용했고, 언어를 직업의 수단으로 삼는 정치가와 변론가는 다양한 분야의 지식과 기술을 익혀야 한다고 말했다. 논리학자가 가진 예리한 분석력, 철학자가 가진 심오한 사고력, 시인이 가진 언어 구사력, 법률가가 가진 암기력, 연극배우가 가진 우렁찬 목소리, 뛰어난 배우가 가진 표현력 등이 대표적이다. 키케로는 이런 다양한 분야의 탁월함을 모방하고 종합하려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이를 통해 그리스의 수사학 전통을 로마화한 것은 분명 키케로였다. 더 나아가 수사학을 인문학의 대표적인 과목으로 격상시키고, 수사학적 기법에 대해 정교한 논의를 발전시킨 것도 키케로였다.


<사진 설명> 키케로_위키미디어


로마의 수사학을 교육 프로그램으로 만든 사람은 퀸틸리아누스였다. 그는 수사학 학교의 교장으로 역임하면서 로마 수사학자 가운데 최고의 명성을 얻은 사람이었다. 체계적인 수사학 교재를 만들기 위해 교육 일선에서 은퇴한 사람이기도 했다. 교사들을 위한 수사학 교육 계획서를 발전시킨 사람은 단연 퀸틸리아누스였다. 그의 수사학 교육론이 남긴 가장 큰 기여는 도덕적 기초를 강조한 데 있다. 그래서 그는 화려하거나 희극적 요소를 과장되게 사용하는 것을 경계했다. 그보다는 말하는 사람의 에토스와 관련해 소박함이나 수수함을 중시했다.

에토스(ethos)
‘성격’이나 ‘관습’ 등을 의미하는 고대 그리스어로,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서 말하는 사람 고유의 성품을 뜻하는 수사학적 용어로 발전했다. 체형과 자세, 옷차림, 목소리, 단어선택, 시선 등에서 느껴지는 신뢰, 성실함, 카리스마 등이 에토스에 속하는데, 오늘날에는 민족이나 부족의 관습 내지 고유한 특징을 지칭하는 ethnic, ethnicity 등의 의미로 발전했다.


그렇지만 그는 파토스의 활용에 대해서도 누구보다도 그 가치를 인정하는 사람이었다. 말하는 사람이 가진 도덕적 신념 위에서 수사학적 기법이나 표현 기술이 발휘되고, 나아가 주제를 다룸에 있어서 능숙함과 청중을 움직이는 심리적 능력을 갖출 수 있도록 교육하려 노력한 것도 퀸틸리아누스였다. 따라서 그의 수사학은 “좋은 사람이 훌륭하게 말한다.”는 테제와 “말을 잘하는 것은 과학이다.”라는 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테제를 결합한 내용을 가졌다. 요컨대, 가르치고 감동을 주고 즐거움을 주는 것이 수사학의 3대 목적이지만 그와 동시에 윤리적 목적이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이야말로 퀸틸리아누스 수사학의 정수라 할 수 있겠다.

파토스(pathos)
청중의 감성에 호소하는 것을 뜻하는 그리스어로, ‘고통’ 혹은 ‘고통에 대한 공통의 경험’의 의미에 그 어원을 두고 있다. 영어 발음으로 ‘페이소스’라고 하기도 한다. 은유와 비유는 물론, 자신의 경험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 등의 방법으로 듣는 이에게 전달되는 총체적인 감정과 열정을 가리키는 것이기에, 이지적인 것을 뜻하는 로고스(logos)의 반대말이라 할 수 있다.


아테네 민주주의와 로마 공화정의 쇠퇴는 곧 수사학의 쇠퇴를 가져왔다. 이어진 제정의 수립이 가져온 가장 큰 변화는 수사학의 폐지에 있었다. 우리 역사에서도 권위주의 독재 시절에는 “말 잘하면 빨갱이다.”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그만큼 공화정이나 민주주의 체제가 아닌, 권위주의 체제의 가장 큰 특징은 말을 두려워한다는 데 있다.


로마 제정 시기 수사학 교육은 낭송법의 기교 정도로 협소화되었다. 수사학 연구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정치적 내용이 거세된 추상적 이론 정도로 축소된 내용을 가졌다. 우리의 삶을 위한 수사학 내지 인간다운 공동체를 위한 수사학은 사라졌고, 학교에서 가르치기 위한 형식으로만 남았다는 뜻이다. 그 뒤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거치며 공화정이 복원되자 수사학은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 그러면서 키케로와 퀸틸리아누스를 찾는 사람이 많아졌다. 퀸틸리아누스의 책, <수사학 강론>이 15세기에 발견되기 전까지는 키케로의 수사학이 오랫동안 사랑을 받았다.


<사진 설명> 퀸틸리아누스의 수사학 강론의 표지 그림(1720년 편집본)_위키미디어


4. 키케로가 말하는 연설의 5요소

키케로는 이상적 연설가란 연설의 내용을 정확히 표현할 수 있는 사람으로 정의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연설가는 다음의 다섯 가지를 준비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다소 현대적인 관점에서 재해석한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발견(inventio)이다. 연설의 주제나 내용에서 새로움이 없다면 연설의 기법도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먼저 다른 누가 아닌 자신만이 말할 수 있는 ‘내용의 특별함’을 생각해내고 정리해야 할 것이다.

둘째는 배치(dispositio)다. 내용과 주제 면에서 자신만이 발견한 것을 순서에 맞게 나열하는 것은 물론 중요성에 따라서 정확하게 배치하지 못하면 산만한 내용 전달을 피할 수가 없다.

셋째는 표현(elocutio)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 가운데 제3권은 이 주제를 다루고 있고, 그로부터 현대 수사학에 이르기까지 표현법에 대해서는 많은 발전이 이루어졌다. 직유(simile), 은유(metaphor), 환유(metonymy)는 물론, 인용과 질문, 대조(antithesis)와 도치(inversion), 반복(repetition)과 점진적 고조(climax), 반어법(irony)과 완곡법(circumlocution), 수사적 찬탄(exclamation)과 카타르시스 등이 주로 언급되는 표현의 구성 요소들이다.

넷째는 기억(memoria)이다. 오늘날에는 프롬프터나 인쇄물을 들고 읽기에 바쁜 연설가들이 많다. 하지만 어느 정도 기억에 넣어 두지 않는 한 잘 읽기도 힘들다. 단순 암기만으로 기억을 강제할 수는 없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내용을 장악하는 힘에 있다. 주제를 지배하는 정치가의 실력이야말로 기억과 암기를 이끄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다섯 번째는 연기(actio)다. 현실의 정치는 시민 ‘관객’과 정치인 ‘배우’가 연출하는 ‘극장’과 유사한 측면이 크다. 따라서 연설의 모든 요소를 준비했다 하더라도 마지막은 무대로 올라 그것을 구현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 좋은 목소리와 인상적인 표정을 갖도록 노력해야 하고, 언제 어디서든 자신의 인격성을 진실하게 나타낼 수 있도록 내면의 힘도 키워야 할 것이다. 대중적 존경을 불러일으키는 위엄은 물론 대중적 매력까지 겸비한 정치가는 타고나기도 하지만 연기를 통해 성장하고 만들어지는 면도 적지가 않다.



5. 처칠 연설이 가진 연극적 요소

윈스턴 처칠은 영국을 대표하는 정치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을 이끈 총리로 유명하다. 전쟁 후 노벨상을 받았다. 보통 정치가에게 부여되는 평화상이 아니라, 2차 대전 비망록을 쓴 작가로서 문학상을 받았다. 그 점에서 처칠은 정치가인 동시에 작가였다고 할 수 있고, 그러한 재능은 연설에서도 잘 나타났다.


<사진 설명> 윈스턴 처칠


처칠은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교육을 받았다. 아버지는 재무장관을 지낸 유명한 정치가였지만, 권력투쟁에서 밀려 그 이상의 경력을 쌓지 못했다. 처칠은 아버지의 정치적인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아 정적에게 타협과 유머와 기지를 발휘하고자 노력했고, 그것이야말로 처칠이 가진 가장 강력한 매력이었다.


아들이 군인이 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부친의 권유로 3수 끝에 샌드허스트(Sandhurst)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고 그 뒤 군인으로서 경력을 쌓았다. 졸업 후 기병 소위로 임관하여 보어 전쟁에 참전했다가 포로로 잡혀서 수용소 생활을 했는데, 수용소에서 겨우 탈출한 처칠은 로마 가톨릭교회 신부로 변장해 추격의 손길을 벗어난 것으로 유명하다.


처칠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해군 장관을 맡았으나, 작전 실패에 대한 문책으로 장관직을 사퇴했다. 이 때문에 깊은 우울증을 앓게 되었는데, 악귀 같은 우울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시골에서 수채화를 그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중령으로 복귀해 다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당시 그는 유머를 활용해 군인들의 사기를 높였다. 또한 병사들의 목욕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이는 전염병 예방과 피부병 치료를 위한 것인 동시에 정신적으로 긴 전쟁의 고통을 줄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때 병사들에게 그가 자주 했던 표현 가운데 유명한 것이 있다. 그것은 “겁먹지 말게. 전쟁은 웃으면서 하는 것이야.”였다. 이를 통해 처칠은 군인들의 정신적 고통과 스트레스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


보수당 의원으로 활동하다가 보수당이 자신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유당으로 당적을 바꾸기도 했으나, 결국 보수당으로 돌아갔다. 그 때문에 처칠은 자주 배신자로 낙인찍히곤 했고, 정계에서 퇴출당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전시 내각을 이끌기 위해 다시 정치에 복귀했다.


처칠이 전쟁에서는 승리했을지 몰라도 정치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종전 직후 치러진 총선에서 처칠은 패배했다. 그때가 1945년 7월이었는데, 그 때문에 총리 자격을 잃고 포츠담 회담 당시 중도 귀국해야 했다. 1955년에 정계 은퇴를 한 뒤, 1965년 1월 24일, 90세로 세상을 떠났다. 참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산 정치인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 연극 무대에 올라 서 있는 것 같은 처칠의 유쾌한 연설을 보자. 2차 대전 당시 영국 시민 모두 공포로 떨었던 순간이었지만, 그의 연설에서 두려움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윈스턴 처칠 

<1940년 5월 13일 전시 내각 취임 연설>

지난 금요일 저녁 나는 국왕 폐하로부터 임무를 부여받았다. 새로운 행정부를 구성하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의회와 국가의 분명한 바람이자 의지이기도 했는데, 새 행정부는 가능한 한 광범위하게 구상되어야 하며 지난 행정부를 지지한 정당은 물론 야당을 포함해 모든 정당을 포괄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미 이 임무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마쳤다. 전시 내각은 다섯 명으로 구성된다. 이들은 노동당과 자유당, 그리고 조국의 단결을 대표한다.

사태의 심각성과 긴급성 때문에 조각을 하루 만에 완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요직은 어제 인선했다. 오늘 나는 추가 명단을 국왕에게 제출할 것이다. 내일 안으로 주요 장관의 임명을 끝낼 예정이다. 그 밖의 다른 장관들의 임명은 시간이 더 걸릴 것이다. 의회가 다시 개회할 때는 모든 면에서 내각 구성이 완료될 것이라고 믿는다.

……

지금 우리는 역사상 최대 결전으로 돌입하는 그 입구에 와 있다. ... 나는 이 내각에 참여한 장관들에게 이야기했던 대로 의원 여러분께도 다시 말씀드리겠다: 나는 피와 땀, 눈물 그리고 수고밖에는 달리 드릴 것이 없다(“I have nothing to offer but blood, toil, tears, and sweat). 우리는 가장 심각한 시련을 앞두고 있다. 우리는 길고 긴 투쟁과 고통의 시간을 앞두고 있다. 여러분들은 묻는다, 당신의 정책은 무엇인가? 나는 답한다. 육상에서, 바다에서, 하늘에서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다. 신께서 주신 우리의 모든 힘과 능력을 총동원해, 어둡고 개탄스러운 인간의 범죄목록 어디를 훑어보더라도 유례가 없는 저 괴물과 같은 압제자를 상대로 전쟁을 수행하는 것, 이것이 나의 정책이다.

여러분들은 질문할 것이다, 우리의 목표는 무엇인가. 나는 한마디로 답할 수 있다. 승리다. 승리,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어떤 폭력을 무릅쓰고라도 승리다. 거기에 이르는 길이 아무리 길고 험해도 승리다. 승리 없이는 생존도 없기에 오직 승리뿐이다.

기필코 승리를 싸워서 얻자. 그것 없이는 대영제국의 생존도, 대영제국이 버티어온 모든 것들의 생존도, 인류가 그 목표를 향하여 전진하도록 만드는 시대의 욕구와 심장의 고동도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가득 찬 희망을 안고서 나의 임무를 인수하는 바이다. 나는 우리의 소명이 결코 실패할 수 없다고 확신한다. 나는 이 시점, 이 대목에서 여러분들의 도움을 요구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렇게 호소하는 바다.


이 연설이 있은 지 얼마 후인 1940년 6월 4일 처칠 수상은 영국 의회에서 다시 연설했다. 당시는 프랑스의 운명이 암울한 상황으로 떨어진 때였다. 처칠은 붕괴 직전인 우방 프랑스의 군사 상황을 전하면서 영국만은 끝까지 싸울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 연설 가운데 가장 유명한 대목만 보자.


“유럽의 많은 부분과 수많은 명문 국가들(old and famous states)이 게슈타포의 손아귀와 가증스러운 나치의 강권 기구 손에 넘어가더라도 우리는 포기하지도 좌절하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는 끝까지 해낼 것이다. 우리는 프랑스에서 싸우고 바다에서, 대양에서 싸울 것이다. 우리는 가일층의 자신감과 역량을 발휘해 하늘에서 싸워 우리의 섬을 지켜낼 것이며,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해안에서도 상륙 지점에서도 싸울 것이다.

우리는 들판에서, 거리에서 싸울 것이다. 우리는 언덕에서 싸울 것이다. 우리는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어 본 적은 없지만, 이 섬이나 섬 대부분이 강점당하고 굶주림에 직면하더라도 대영제국은 영국 함대의 보호 속에서 무장 투쟁을 계속할 것이다.”


며칠 뒤인 1940년 6월 18일 처칠은 다시 의회에 나섰다. 독일 기갑군단의 전격전 전술로 프랑스의 붕괴가 확실해지고 영국이 홀로 독일과 맞서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 상황에서 그는 “과거와 현재가 싸우도록 내 버려두면, 미래를 잃게 될 것이다(if we open a quarrel between the past and the present, we shall find that we have lost the future).”라며 항전의 의지를 재차 다짐했다. 끝으로 영국이 미래의 역사를 갖게 된다면(독일에 의해 영국이 패망하지 않는다면), 지금의 이 최악의 위기는 거꾸로 “최고의 시절(The Finest Hour)”로 기억될 것이라며, 낙관적 의지를 잃지 않게 했다.


“영국의 전투가 이제 시작되려 하고 있다. 이 전투에 기독교 문명의 생존이 달려있다. 우리 영국인의 생활과 우리 체제와 우리 제국의 영속성이 이 전투에 걸려 있다. 적의 모든 파괴력이 곧 우리한테 쏟아질 것이다. 히틀러는 이 섬에서 우리를 파멸시키든지 이 전쟁에서 자신이 패배하든지 결정날 것임을 잘 알고 있다. 우리가 그와 맞설 수 있다면 유럽 전체는 자유를 찾게 될 것이고, 이 세상의 삶은 밝은 햇살이 비치는 저 높고 넓은 곳을 향해 전진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패배한다면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는, 그간 우리가 애정을 쏟아부은 모든 것들과 함께, 새로운 암흑시대의 심연 속으로 가라앉을 것이다. 이 암흑시대는 악용된 과학의 힘 때문에 더 괴이하고 더 오래 갈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의 의무에 우리 자신을 한 덩어리로 단단히 묶으며 다짐한다. 만약 대영제국과 영연방이 앞으로 천 년 동안 계속된다면 사람들은 ‘그때가 최상의 시절이었네.’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1940년 8월 20일 처칠 수상은 다시 하원에서 연설했다. 그때는 영국 공군이 독일 공군을 맞이해 도버 해협과 영국 상공에서 공중전을 벌이던 때였다.


“우리의 섬과 우리의 제국, 그리고 전 세계 모든 가정은 영국의 공군 용사들에게 감사를 보낸다. 그들은 불리한 조건에서도 굽히지 않고, 지속적인 도전과 생명의 위협에도 지치지 않고서 지금 그들의 무용과 헌신으로써 이 세계 전쟁의 흐름을 바꾸고 있다. 인류의 전쟁사에서 이렇게 많은 이들이, 이렇게 많은 빚을, 이렇게 적은 사람들에게 진 적은 일찍이 없었다(Never in the field of human conflict was so much owed by so many to so few).”


이상에서 보듯, 처칠은 독일에 의해 영국의 운명이 암흑 속으로 떨어진 그 순간에서도 수사학의 가르침에 충실한 연설을 했다. 적어도 공포심이나 절박함, 조바심이 느껴지는 연설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의 연설에는 언제나처럼 문학적인 표현과 연극적 요소가 두드러졌다. 마치 이 모든 상황은 진짜 현실이 아니라 영화 속 혹은 상상 속에서 벌어지는 일인 것처럼, 곧 올 반전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우리가 결국에 가서 승리를 거머쥔다면, 그 뒤 오늘의 고난은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 상상해보게 한다.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 알겠지만, 나중에 돌아보면 지금이 좋았던 때라고 기억되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러니 좌절할 것도 없고, 도망치고 싶어질 일도 아니다.


이 정도면 “겁먹을 필요 없어. 전쟁도 정치도 웃으면서 하는 거야.”라는 그의 말이 결코 빈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을까? 전쟁 중에도 낮잠을 즐긴 처칠. “나에게 정오의 낮잠은 균형감과 에너지의 원천”이자 오히려 “낮잠을 자지 않는 사람이 뭔가 부자연스러운 삶을 살고 있는 것”이라 응수한 사람. 생각해보면 참으로 특별한 면모를 가진 정치 지도자가 아닐 수 없다. “정치가라는 직업은 암도 피해갈 정도로 의지가 강한 사람들이 맡는 일”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는데, 처칠이야말로 그런 정치가가 아닐 수 없다.


우리 정치인들도 제발 여유와 유머, 웃음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전쟁통에도 그래야 하는 게 정치다. 별것도 아닌 일에 상대 정파와 증오와 적대를 교환하는 정치라면, 무슨 희망이 있을까. 어둡고 비열한 표정만 보이는 정치인을 지켜보며, 어떤 시민이 밝은 미래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끝>


주석

1.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고르기아스 / 프로타고라스 - 소피스트들과 나눈 대화』 (도서출판숲 2014)

2. 박상훈 『정치의 발견』, (후마니타스, 2015) 6장 참조. 토니 모리슨은 흑인 여성의 관점에서 인종 차별과 노예제 문제가 가진 비극성을 “시적인 함축과 도덕적인 아름다움”의 힘으로 표현해 낸 것으로 평가받는 미국의 대표적인 작가다. 비판적이지만 상업적 성공도 누렸던 드문 작가이기도 했던 그는 얼마 전인 2019년 8월 5일에 세상을 떠났다.

3.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천병희 옮김, 『수사학 / 시학』, (도서출판숲 2017)


박상훈 | 정치발전소 학교장

정치학을 전공한 정치학자이다. 정치의 현장 가까이에서 읽고 쓰고 말하는 일을 한다. 실천으로서의 정치와 학문으로서의 정치학이 엄격하게 분리되기보다는 어느 정도 중첩되기를 바란다. 그것이 정치학의 본래 모습이자 애초의 이상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정치가의 존재를 시야에서 놓치지 않을 때 정치학적 논의 역시 훨씬 더 풍부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뿐만 아니라 다른 누구보다도 시민의 적법한 대표라 할 수 있는 정치가들이야말로 정치학의 개념과 이론을 선용할 수 있는 존재가 되길 바란다. 그래야 민주정치의 여러 규범과 가치가 시민들의 삶의 양식 속으로 더 깊이 파고들어 지속 가능한 전통으로 안착할 수 있으리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