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말의 힘 | ② 은밀하고도 담대한 정치 기획 : 에이브러햄 링컨 <게티즈버그 연설>

2019-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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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의 게티즈버그 연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민중의, 민중에 의한, 민중을 위한 정부(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는 지상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내용 정도는 누구나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그 이상의 사실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은데, 이 연설을 둘러싼 이야기는 생각보다 더 흥미롭고 풍부하다.

정치적 말의 힘 ②
은밀하고도 담대한 정치 기획 : 에이브러햄 링컨 <게티즈버그 연설>

글쓴이 |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


1.

미국의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의 게티즈버그 연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민중의, 민중에 의한, 민중을 위한 정부(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는 지상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내용 정도는 누구나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그 이상의 사실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은데, 이 연설을 둘러싼 이야기는 생각보다 더 흥미롭고 풍부하다.1)


<사진 설명>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전사한 병사들의 시체. 티모시 H. 오설리번 기자가 찍었다. 츨처_위키피디아


2.

우선 왜 게티즈버그인가? 남북전쟁 당시 게티즈버그는 주민이 2천4백여 명밖에 되지 않던, 펜실베이니아 주의 작은 마을이었다. 그곳에서 남북전쟁 전체를 통틀어 가장 비극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1863년 7월 1일부터 7월 3일까지, 3일 동안의 전투에서 북부군은 승리를 거두며 전세를 역전시켰다. 하지만 양쪽 모두 피해가 너무 컸다. 사상자는 전사와 부상, 실종 및 포로 등을 합해 5만1천여 명에 달했다. 그 가운데 사망자만 거의 8천 명에 이르렀다.


전투가 끝났을 때 군대는 떠났지만 8천여 구의 시신과 5천여 필의 말 사체가 여기저기 흩어진 채 그대로 있었다. 매장하거나 소각해야 할 시신과 사체가 뜨거운 여름 날씨 아래 방치되어 주민들은 심한 악취로 극심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말의 사체는 곧 소각되었지만 사람의 시신은 그렇게 처리할 수 없었다. 급한 대로 가매장이 이루어졌지만, 최종적인 결정은 내려지지 않았다. 신원 확인을 포함해 거쳐야 할 절차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남부군 사망자와 신원 미상의 시신은 어떻게 할지, 유품 처리와 매장지 조성, 매장 방법, 엄청난 재원 마련은 또 어떻게 할지 등등 간단한 문제가 하나도 없었다.


7월 말, 펜실베이니아 주지사에게 도착한 보고서는 전투가 끝난 지 3주가 지난 시점의 참혹한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다. “팔과 다리 그리고 때로는 머리도 땅 위로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무엇보다도 돼지들이 땅속의 시체를 파내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고 있는 통에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다.” 더는 늦출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결국 데이비드 윌스라고 하는, 판사 출신의 존경받는 민간 지도자를 책임자로 임명해 기금 위원회를 만들어 매장과 장례를 준비하는 방안이 채택되었다. 이후 절차는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전체 필요한 기금은 주별로 할당되었다. 국방부가 매장을 위한 관을 제공하기로 했다. 펜실베이니아 주는 7헥타르의 매장지를 기증했다. 매장 사업자 선정을 위한 공개 입찰이 이루어졌고, 한 구당 1.59달러로 낙찰되었다. 그렇게 시작해 하루에 1백 구 정도의 시신을 처리한다면 그해 말 땅이 얼기 전에 매장을 끝낼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일은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특히 시신의 신원 확인 등의 문제로 속도가 나지 않아, 그 이듬해 봄까지 매장이 계속되었다. 예정된 ‘국립묘지 헌정식’도 제때 열리지 못했다. 애초 헌정식은 10월 23일에 치를 계획이었다. 기도, 음악, 추모사(Oration), 헌사, 장송곡, 축도의 순서로 이어지는 헌정식 가운데 가장 중요한 행사였던 추모사를 담당할 사람이 내정되고, 섭외를 위해 연락이 이루어진 날은 9월 23일이었다. 당시 가장 이름난 명연설가 에드워드 에버렛(Edward Everett)이 그 주인공이었다. 매사추세츠 주지사와 상원의원을 지낸 정치가이자 주영국 대사를 지낸 외교관, 하버드 대학 교수로서 그리스 고전을 전공한 대학자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추모사를 준비하려면 전투에 대한 고증을 꼼꼼히 해야 하므로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답했다. 그 때문에 헌정식은 애초 예정일보다 한 달 정도 늦춰진 1863년 11월 19일에 치러졌다. 전투가 끝난 지 네 달도 더 지난 시점이었다. 그때까지도 매장은 전체 시신의 3분의 1 정도밖에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처럼 3일 간의 전투가 남긴 비극적 상처가 채 수습되기도 전에 헌정식이 치러진 것이다.


3.

링컨이 헌정식에 초청을 받은 날은 10월 30일이었다. 연설자 에버렛에 비해 한 달도 더 지나서 섭외가 이루어진 것이며, 헌정식이 20일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이는 링컨이 헌정식 행사의 주인공이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다만 미합중국의 “행정부 수장으로서 이 행사의 의의를 명확히 하는 몇 마디 헌사를 남겨 주기를” 바라는 정중한 부탁을 받았을 뿐이다.


헌정식에 참여하기 위해 정부 관료를 포함, 1만5천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각지에서 몰려들다 보니 행사는 혼잡을 피할 수 없었다. 많은 이들이 예정된 도착 시간을 지키지 못했고, 전날 도착한 사람들 가운데 적지 않은 수가 숙박 시설이 부족해 앉은 채 밤을 보냈다. 링컨도 전날 출발했는데 기차 환승을 포함해 6시간이 걸렸다.


사연 많은 이 행사를 위해 에버렛은 매우 충실하고도 긴 연설문을 준비했다. 그의 연설은 2시간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 많은 청중을 긴 시간 동안 집중시킬 만큼 명연설이었다. 언론들과 지식인들의 호평이 뒤따랐다. 링컨도 높이 평가했다. 반면 그의 뒤를 이어 연단에 오른 링컨의 연설은 3분도 되지 않았다. 글자 수에 대해서는 약간의 논란이 있는데, 링컨이 남긴 필사본도 여러 개이고 각자 조금씩 달랐으며, 현장에서 신문들이 속기사를 통해 받아 적어 지면에 실은 글자 수도 달랐기 때문이다.


나중에 링컨 스스로 연설문을 손 글씨로 적어 기록에 남겼는데, 그러면서 신문에 실렸던 녹취 본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때 모든 녹취 본에 들어 있는 “here(여기)”라는 단어 하나가 여러 번 중복되는 것을 깨닫고 그 가운데 하나를 지움으로써 272자가 되었다. 링컨이 연설하는 장면을 담은, 제대로 된 사진 한 장이 없는데, 당시 신문들이 카메라를 준비하는 동안 연설이 끝나 버렸기 때문이다. 아무튼 연설은 그렇게 끝이 났다. 평가는 어땠을까?


링컨과 공화당을 지지하던 신문들은 “향후 모든 정치 연설의 본보기가 될 정도로 명료한 생각을 표현했다.”며 매우 높이 평가했다. 실제로 1백 년 후 마틴 루터 킹 목사는 “I Have a Dream” 연설에서 “지금으로부터 1백 년 전, 한 위대한 미국인이자 우리가 서 있는 자리에 그림자를 남긴 한 사람이 노예 해방을 선언했다.”고 서두를 시작함으로써 예측은 현실이 되었다. 오바마도 2009년 대통령 취임사 제목을 정하면서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 가운데 “자유의 새로운 탄생”(a new birth of freedom)이라는 표현을 그대로 사용했고, 그 밖에도 많은 정치가들이 자신의 연설에서 링컨의 연설을 칭송하거나 인용해 왔다.


하지만 당시 링컨은 다르게 생각한 것 같다. 연설 직후 “(질이 안 좋은 쟁기가 그렇듯) 사람들 마음에 깊이 파고들지 못했다.”며 자책하기도 했다. 주 연설자 에버렛에게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링컨은 자신의 연설이 “실패작”이었던 반면 에버렛의 연설은 대단했다고 평가했다. 물론 에버렛은 링컨의 연설을 칭송했다. 그는 “당신께서 2분 만에 하신 것처럼, 나의 2시간 연설 또한 곧바로 핵심에 다가갔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고 말했다.


언론의 평가를 전체적으로 보면, 에버렛의 연설에 대해서는 대부분 칭찬 일색이었던 반면, 링컨의 연설은 의견이 갈렸다. 칭찬도 많았지만 비난하는 신문과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혹자는 “겨우 무례하지 않은 정도”였다고 말했고, 『시카고 타임스 등 당시 민주당에 우호적인 신문들은 더 노골적이었다. 예를 들어 “우리의 장교와 사병들이 게티즈버그에서 목숨을 바친 것은 이 헌법을 지키기 위함[인데] …… 그가 어찌하여 감히 그들의 무덤 위에 서서 그들이 그렇게 죽어 간 원인을 허위로 떠들어 대고 이 정부를 세웠던 정치인(헌법 제정자)들을 모욕할 수 있단 말인가?”와 같이 보도한, 시카고 타임스의 11월 23일 자가 대표적이다. “수호하기로 선서한 헌법을 위배”했다거나 교묘하게 “군중들의 정신을 소매치기”했다는 비난도 있었다. 헌법을 위배? 소매치기? 이게 무슨 뜻일까? 링컨의 짧은 연설문을 보면서 이야기해 보자.


“지금으로부터 네 번의 20년 하고도 7년 전(Four score and seven years ago) 우리의 선조들은 이 대륙에 새로운 나라를 탄생시켰다. 그 나라는 자유 속에서 잉태되었고(conceived in Liberty), 만인은 모두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명제에 헌신하고자(dedicated to the proposition the all men are created equal) 세워진 나라였다. (박수)


지금 우리는 거대한 내전에 휩싸여 있다. 그러면서 우리 선조들이 세운 나라, 즉 자유 속에서 잉태되고 만인은 모두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so conceived and so dedicated) 명제에 헌신하고자 세워진 어떤 한 나라가, 과연 이 지상에 오랫동안 존재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시험받게 되었다. 오늘 우리가 모인 이 자리는 남군과 북군 사이에 큰 싸움이 벌어졌던 곳이다. 이 자리에서 목숨을 바친 사람들이 헌신했던 바로 그런 나라가 살아남기를 염원하면서, 그들에게 마지막 안식처(the final resting place)가 될 수 있도록 싸움터의 땅 한 조각을 바치고자 우리는 여기에 왔다. 우리의 이 행위는 너무도 마땅하고 옳은 일이다. 그러나 좀 더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이 땅을 신성하고 고결하게 하는 자는 우리가 아니다. 우리가 가진 얼마 안 되는 힘을 여기에 어떻게 보태고 뺄 것인가의 문제와는 상관없이, 여기 목숨 바쳐 싸웠던 그 용감한 사람들, 그들이 전사자든 생존자든, 그들이 이미 이곳을 신성한 땅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박수)


세상은 우리가 여기에 모여 무슨 말을 했는가를 별로 주목하지도, 오래 기억하지도 않겠지만, 그 용감한 사람들이 여기서 감당한 일이 어떤 것이었던가는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박수) 그들이 싸워서 그토록 고결하게 전진시킨, 그러나 미완으로 남긴 일, 바로 그 일을 위해 헌신해야 하는 것은 이제 우리, 살아 있는 자들의 몫이다. (박수) 우리 앞에 남겨진 그 미완의 큰 과업을 완수하기 위해 지금 여기 이곳에 바쳐져야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그 명예롭게 죽어 간 이들로부터 더 큰 헌신의 힘을 얻어, 그들이 마지막 신명을 다 바쳐 지키고자 한 대의에 우리 자신을 바치고, (박수) 그들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겠다는 것과 함께, 신의 가호 아래 태어난 이 나라에 새로운 자유의 탄생이 있게 할 것이며, 민중의, 민중에 의한, 민중을 위한 정부가 이 지상에서 결코 사라지는 일은 없게 할 것임을 바로 이곳에서 굳게굳게 다짐한다(we here highly resolve). (매우 긴 박수)”


4.

속설이지만, 이 연설에는 에피소드 같은 신화가 붙어 있다. 이 짧은 연설은 링컨이 게티즈버그로 가는 기차 안에서 편지 봉투 뒷면의 여백에 끄적거리듯 적어 내려간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가 시간이 있을 때마다 할 말을 메모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게티즈버그로 가는 길에 떠오른 즉흥적인 생각을 메모해 연설했다는 이야기는 실제 사실과 거리가 멀다. 링컨은 수도 워싱턴의 백악관에서부터 매우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연설문을 준비했다. 게티즈버그에 도착한 뒤에도 다음 날 국립묘지 헌정식장으로 출발하기 직전까지 자신의 숙소에서 연설문을 계속 고치고 손봤다. 이 짧은 연설문을 통해 링컨은 자신의 정치관을 확고히 보여 주고자 했을 뿐 아니라,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긴장시킬 만한 일을 꾸몄다고도 할 수 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계속해서 밀리던 북부군이 겨우 승세를 얻었지만, 당시 상황은 여전히 나빴다. 징집에 반대하는 폭동도 일어났다. 전쟁을 멈추고 남부와 협상하자는 목소리도 커졌다. 곧 있을 대통령 선거에서 이겨 재임을 해야 했던 링컨으로서는 이 연설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짧은 연설 속에 그는 자신의 의도와 목적을 모두 담아야 했다. 링컨이 언제나 짧은 연설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셰익스피어의 문장을 다양하게 발췌해 몇 시간이라도 연설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높은 톤의 소리를 가진, 배우 같은 존재였다. 링컨은 마크 트웨인의 작품과 그 격을 함께할 수 있을 정도로 가장 미국적인 정치 산문의 전통을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 우리말로 그 느낌을 살려서 옮기기가 어려울 뿐이다.


그렇기에 지금껏 많은 이들이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을 언급하며, “구체적인 사실은 물론 지엽적인 문제나 주제를 하나도 언급하지 않았으면서도 죽은 자를 칭송하는(laud) 동시에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산 자를 이끄는(lead) 강력한 리더십을 보여 주었다.”고 평가해 왔다. 그런데 그가 그런 연설을 준비하면서 무슨 숨은 계획(hidden plan)을 가졌기에, 링컨을 비난하는 이들이 이 연설에 대해 헌법 정신을 위배했다고 공격했던 것일까? 청중들은 그 짧은 연설을 들으면서 다섯 번이나 박수로 호응하는 동안 무슨 정신을 소매치기 당하듯 빼앗기고 새로운 방향으로 교묘하게 이끌렸다는 것일까?


5.

첫 문장, 첫 단어로 돌아가 보자. 우선 “지금으로부터 네 번의 20년 하고도 7년 전”은 연방헌법이 만들어진 때(1787년)가 아니다. 미국 정치 연설의 전통은 헌법의 권위를 불러오는 형식을 갖는데, 링컨은 그 형식을 따르지 않았다. 대신 그는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한 1776년을 불러왔고, 이어서 1776년의 독립선언서 가운데 “만인은 모두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부분을 가져왔다. 그렇다면 만인의 평등에 기초해 미국이라는 나라가 탄생했음을 말한 것인데, 이 부분은 적어도 링컨의 정치 경력과 관련해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858년 이래 7차에 걸쳐 진행된 ‘링컨-더글러스 논쟁’(Lincoln-Douglas Debates)을 살펴보아야 한다.2) 당시 민주당 상원의원이었던 스티븐 더글러스는 ‘인민 주권’을 앞세워 노예제 허용 여부를 해당 주 주민들의 직접 투표로 결정하자고 주장했다. 링컨은 단호하게 반대했다. 링컨의 입장은 “미주리 주의 남부 경계인 북위 36도 30분 이북에는 노예주를 설치하지 않아야 한다.”는 내용의 미주리 타협(Missouri Compromise)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더글러스가 주장하는 대로 하면 미국에서 노예제는 북부로까지 확대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논쟁 과정에서 더글러스는 링컨을 노예제 폐지론자로 공격했다. 당시 분위기에서 노예제 폐지론자로 몰리는 것은 정치적으로 적잖은 타격이 되었다. 이때 링컨을 공격하기 위해 더글러스가 부각한 논점 가운데 하나는, “링컨은 미국독립선언을 백인뿐만 아니라 흑인에게도 적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런 공격은 효과를 발휘했다. 링컨의 휘그당(뒤에 공화당) 안에서도 링컨이 노예제 폐지론자에 가깝다며 더글러스를 지지하는 세력이 나올 정도였다.


이렇게 해서 링컨은 흑인 노예를 포함해 모두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고 믿는 사람이 되었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은 백인과 흑인이 평등하다고 말하는 것은 신의 뜻에 어긋난다고 생각했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헌법 정신에 배치된다는 사실이었다. 미국 헌법 1조 2절 3항에는, 하원의원의 수를 인구 대비로 정할 때 노예가 차지하는 인구의 가치를 일반인의 5분의 3으로 계산하라는 규정이 있었다. 미국 헌법이 노예제 위에 세워진 공식 통치 문서인 사실을 부정하기란 어려운 시절이었다. 1857년 3월 7일에 있었던 미국 연방 대법원의 판결은 이를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흔히 ‘드레드 스콧 대 샌드퍼드’(Dred Scott v. Sandford) 사건으로 알려진 이 소송에 대한 판결에서 연방 대법원은, 노예로 미합중국에 들어온 흑인과 그 후손은 그가 노예이든 노예가 아니든 미국 헌법 아래 보호되지 않으며, 미국 시민이 될 수 없기에 연방 법원에 제소할 권리가 없다고 판결했다. 또한 연방 정부가 미국 영토 내의 노예제도를 금지할 권리가 없으며, 정당한 법의 절차 없이 주인으로부터 노예를 빼앗을 수 없다고 판결했다. 지금 생각하면 경악할 일이지만, 당시는 그랬다.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는 링컨 지지자들의 노력은 계속되었지만, 이에 반발하는 세력도 만만치 않은 상황이었다.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에 노예제와 미국 헌법을 언급하는 내용은 없다. 다만 독립선언문의 내용 가운데 ‘평등한 만인’ 부분을 불러왔을 뿐이다. 그런데도 노예제의 존속을 바라는 사람들이나 민주당에 우호적인 이들에게 두려움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들은 노예제를 전제로 하는 헌법 정신과 더불어, 링컨 역시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헌법을 준수하겠다고 선서한 사실을 다시 강조하면서 깊은 의심의 반응을 보였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다른 데 있었다. 그것은 미국 헌법이나 노예제를 언급하지 않는 대신 채워 넣은 가치에 있었다. 이는 미국 헌법에 없었던 가치였고,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을 통해 새롭게 조명된 가치였다. 그게 무엇일까?


6.

링컨의 이 연설이 “2천5백 년 전 페리클레스의 장례 연설을 3백 자 이내로 줄여 말한 것”으로 유명하다는 이야기는 앞서(페리클레스의 연설을 다룬 전편에서) 언급한 바 있다. “도시국가를 세운 우리 선조들”과 그들이 물려준 “자유로운 도시국가”를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로 이어지는 페리클레스 연설의 서술 구조는 게티즈버그 연설에서 그대로 옮겨졌다. 이어지는 내용과 표현 양식도 계속해서 페리클레스를 떠올리게 한다.


도시국가의 자유가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 그것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의 용기와 헌신이 필요했는지를 페리클레스의 연설만큼 강조한 것은 없다. 이를 칭송하는 도시국가의 행사를 마땅한 일로 여긴 것도 페리클레스였다. 그 어떤 것보다도 고결한 것은 도시국가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전몰자들의 행동에 있다는 것, 우리 가운데 살아 있는 그 누구도 도시국가를 위해 죽은 자보다 더 명예로울 수 없다는 것, 우리가 어떻게 평가하든 상관없이 그들의 행동은 자신들이 묻힌 곳을 신성하게 만든다는 것 등 모두가 페리클레스 연설에서 표현된 내용이다. 몸은 늙어도 명예는 늙지 않으며, 죽음으로써 지킨 명예는 영원히 잊히지 않는 불멸의 가치를 갖는다는 대목도 기억할 것이다.


이런 표현 양식을 잘 보면 매우 중요한 특징이 있는데, 수사학에서는 이를 ‘그리스적 대조법(antithesis)’이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일견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는 단어나 구절을 한 문장 안에 배치하고 서로 대조시킴으로써, 말하고자 하는 바를 좀 더 선명하게 표현하는 수사학적 기법을 대조법이라 정의했다. 고대 그리스어는 한 가지만을 의미하는 말 즉, 대구(對句)가 없는 단어나 말은 없었는데, 이를 연설에 효과적으로 활용한 것이 대조법이라 할 수 있다. 참고로, 아리스토텔레스 이전에 대조법을 가장 잘 표현한 사람은 그리스 최고의 수사학자 고르기아스다. “두려워서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타협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라는 그의 표현은 너무나 유명하다.


고르기아스 이후 대조법의 장점을 가장 잘 구현한 사례가 바로 페리클레스의 연설이다. 링컨 역시 게티즈버그에서 이 대조법을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말과 행동, 삶과 죽음, 개인과 나라, 잉태와 사라짐, 바쳐진 목숨과 불멸의 죽음, 시험받게 된 존재와 영원한 안식, 처음과 마지막 등을 한 문장 안에서 대조시키는 표현이 그것이다. “세상은 우리가 여기에 모여 무슨 말을 했는가를 별로 주목하지도, 오래 기억하지도 않겠지만, 그 용감한 사람들이 여기서 감당한 일이 어떤 것이었던가는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라는 대목도 마찬가지다. 대조법을 통해, 전사자들의 용기를 효과적으로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they)과 우리(us), 그들이 이룬(have carried) 것과 남아 있는 사람이 완수해야 할 일(unfinished work)의 선명한 대조법 또한 청중들에게 회피할 수 없는 의무감을 갖게 했다. 마지막 부분도 페리클레스적이고 그리스적이다. 국가의 장례 행사 연설의 마지막에 살아남은 자들의 과업과 결의를 담는 것이 그리스 연설의 전통이었다. 링컨 역시 이를 따랐다. 단 ‘자유를 위해 목숨을 바친 그들’과 ‘살아 있는 우리’를 대조함으로써 이를 효과적으로 단순화했을 뿐이다. 또한 페리클레스가 긴 논의를 통해 “민주적 정체와 민주적 삶의 양식”을 지키는 일의 대의를 풍부한 내용으로 표현해 냈다면, 링컨은 “민중의, 민중에 의한, 민중을 위한 정부”라는, 정말 짧고 강렬한 표현을 동원해 연설을 종결지었다. 요컨대 미국 연방 헌법의 정신 대신, 링컨 연설을 채운 것은 페리클레스였는데 그의 연설이야말로 그리스 아테네의 민주주의에 대한 최고의 옹호론이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미국의 정치 전통에서 그리스와 민주주의를 불러온 것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7.

돌아보면 미국이라는 나라를 만든 일명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 즉 독립 혁명을 이끌고 연방헌법 제정을 주도했던 이들의 이상은 민주주의가 아니었다. 그들은 로마 공화정과 같은 혼합 정부(mixed government)나 스파르타처럼 잘 조직된 국가를 염두에 두고 미합중국을 만들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귀족적 공화정에 가까웠고, 그들에게 아테네와 같은 민주정의 전통을 잇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럴 생각이 단순히 부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민주정이 아니어야 한다는 것이야말로 그들이 공유한 판단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민주정은 선동에 취약한 체제였다. 폭정으로 이끌릴 위험이 큰 정치체제였다.


정신적으로도 미국의 건국자들은 로마 공화정의 전통을 신봉한 사람들이었다. 조지 워싱턴이 대표적이다. 그는 공화정의 부름을 받고 헌신한 뒤 다시 자신의 생업으로 돌아간 로마인 킨키나투스(Cincinnatus)에 빗대어 ‘현대의 킨키나투스’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미국의 건국자들이 중시했던 공화주의는 로마 건축 양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공공건물은 물론 집을 설계할 때도 로마식 정원이 유행했다. 조지 워싱턴 역시 상속받은 자신의 저택을 로마식 정원으로 설계했다. 이처럼 미국의 건국자들이 만들고자 한 정부는 민주정이 아니라 현대적 공화정이었다.


물론 오늘날 미국을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중요한 것은 처음부터 민주주의는 아니었다는 사실과, 민주주의의 가치가 새롭게 들어와 공화정과 결합되는 데는 긴 과정이 필요했다는 점이다. 어쩌면 연방 정부 수립 이후의 미국 정치사란, 길게 보면 공화정의 틀 안에서 민주주의를 수용하는 문제를 둘러싼 오랜 갈등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리고 민주주의가 미국 정치의 중심 영역으로 들어오는 데 있어서 핵심 이슈는 남부와 노예제 문제로 나타났다. 링컨과 그의 게티즈버그 연설은 바로 그 긴 전환 과정에서 분명한 위치 하나를 차지하는바, 우리가 관심을 가질 부분은 바로 여기에 있다.


1792년을 전후해 토머스 제퍼슨과 제임스 매디슨을 중심으로 민주공화당(Democratic Republican Party)이 만들어졌고, 그 잔류 세력이 1830년대 앤드류 잭슨 대통령이 중심이 된 민주당을 만들었지만, 이들에게서 민주주의가 의미하는 바는 모호하고 혼란스러웠다. 민주공화당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고, 제퍼슨은 연방 정부의 중앙집권화에 반대하는 공화파의 리더로 불렸다. 앤드류 잭슨은 참정권 확대를 추진한 동시에 흑인 노예 농장주의 주인이었고 원주민 축출에 앞장섰다. 노예제가 정치 문제로 등장한 것은 1840년대 말이었으며, 이것이 남부 문제로 이어진 것은 1850년대 초를 지나면서였다. 이 시기 이전까지 미국 정치는 주의 권리 내지 연방 대통령의 권한을 둘러싼 다툼이 거의 전부였을 뿐, 민주주의나 민주정이 차지하는 독립적 의미나 위치는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이때 등장한 것이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이다. 그는 미국 정치의 전통 안에 부재했던 아테네 민주정을 불러왔고, 이를 새로운 정치 전통으로 만들려 했다. 이 기초 위에서 노예제 폐지와 흑인 노예의 정치적 평등의 이슈를 제기하기 시작함으로써 미국 정치를 새로운 국면으로 이끌었다. 즉 이제 링컨에게 미합중국은 공화정이되, 동시에 민주공화정이어야 하며, 이 민주공화정에 흑인 노예도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이슈를 열어젖힌 것이다.


8.

19세기의 미국 정치에서 민주주의의 이슈가 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주목받고 유행하게 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적인 문화와 스타일을 되살리려는 새로운 고전주의였다. 낭만적 헬레니즘이라고 불린, 이런 문화 부흥 운동의 성과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게티즈버그 국립묘지(Gettysburg National Cemetery)였다. ‘세미터리’(Cemetery)란 그리스어 ‘코이메테리온’에서 온 말로, ‘잠드는 곳’ 내지 ‘영원한 안식처’라는 뜻의 어원을 갖는다. 앞서 링컨이 연설에서 말한 ‘마지막 안식처’(the final resting place)가 바로 세미터리의 어원이다.


과거 그리스 아테네는 에피타피오스(epitaphios)라고 불리던 국장 연설(國葬 演說)의 전통이 있었다. 즉 도시국가를 수호하다가 전쟁에서 사망한 병사들을 위해 국장을 치르고, 정치 연설을 함께 듣는 일이 중요 행사였다. 국외의 전장에서 사망한 병사들도 시신을 현장에서 화장한 뒤, 유품과 유골을 수습해 가져와 출신 지역별로 분리해 매장하면서 같은 의식을 가졌다. 이처럼 죽은 병사들을 위해 최후의 안식처를 만드는 일이 19세기 미국에서 새롭게 주목을 받았고, 당시에는 이를 ‘전원 묘지 조성 운동’(rural cemetery movement)이라 불렀다.


이 운동이 구현하고자 한 것은, 과거 로마식 성당에서 볼 수 있듯이 지하 납골당이나 향이 피워진 어둡고 음침한 공간과 대비되는 죽음의 이미지였다. 즉, 양초 향이 끔찍한 공포를 느끼게 할 뿐 누구의 모습도 알아볼 수 없는, 어둡고 폐쇄된 죽음의 공간을 벗어나고자 한 것이다. 대신 고결한 영혼이 깃든, 탁 트인 공원에 산책하기 좋을 만큼 수목이 둘러싼 공간을 마련해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 교감하는 안식처를 만들고자 했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적인 문화와 전통을 복원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제 1863년 11월 19일의 게티즈버그로 돌아가 보자. 주 연설자 에버렛은 그리스 고전주의자로서 국립묘지 조성 운동에 가장 알맞은 연설자였다. 그가 2시간에 걸쳐 그리스 고전주의의 느낌이 충만한 연설을 했는데, 바로 그 토대 위에서 링컨이 연설을 했다.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한마디도 넣지 않았지만, 페리클레스가 칭송했던 아테네 정치체제의 가치를, 매우 현대적인 문체로 유감없이 표현했다. 이 점에서 링컨은 고전주의자가 아니라 현대주의자였다. 현대 미국의 정치 연설과 산문의 기원을 이룰 표현 양식을 정립한 사람이 되었다.


<사진설명> 게티즈버그 국립묘지. 출처_위키피디아


동시에 미국의 건국자들이 갖지 못했고 종래 미국 헌법에는 빠져 있던 민주주의의 전통을 성공적으로 결합하는, 공식 행위를 하는 데 성공했다. 노예 해방이나 민주적 개혁에 두려움을 가졌던 사람들은 예민하게 이를 포착했다. 그래서 링컨의 연설에 대해 “스스로 수호하기로 맹세한 문서(헌법)”를 배신했다고 비난하고 나선 것이다. 오늘날에도 윌무어 캔들(Willmoore Kendall) 같은 보수적인 인사들은 게티즈버그 연설을 통해 링컨이 “평등주의적 전제주의”를 꾀했고 “명백하게 과격한 사회 개혁을 지향”했다고 비난한다. 그런데 그의 비난 가운데 역설적이게도 사태의 핵심을 꿰뚫은 중요한 발견도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에이브러햄 링컨과 남북 전쟁 이후 헌법을 개정한 사람들은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원칙에 대한 깜짝 놀랄 만한 해석을 통해 새로운 국가 설립의 조항(민주주의와 노예제 폐지)을 만들려 시도했다.”


결론적으로, 당시 게티즈버그 연설을 들은 청중들은, 개헌을 한 것도 아닌데 “링컨이 바꿔 놓은 새로운 헌법을 가지고” 그곳을 떠나게 되었다. 이로써 게티즈버그 연설은 민주주의를 “새로운 국가 설립의 조항”의 하나로 추가하려 했던 링컨의 ‘은밀하고도 담대한’ 계획을 담은 공식 문서가 되었다.


9.

페리클레스와 마찬가지로 링컨은, 살아남은 자의 언어로써 죽은 자의 명예를 영원하게 한다는 민주주의 국가의 장례 전통을 완벽하게 수행했다. 참혹한 전장의 상처와 남은 자의 슬픔에도 불구하고 의식은 마땅히 치러져야 했다. 그 자리에서 링컨은 죽은 자가 명예를 얻음으로써 산 자가 위로받을 수 있도록, 자신의 언어를 정제하고 가다듬어 한 단어 한 단어 힘주어 표현했다.


고대 아테네에서 페리클레스 연설이 그랬던 것처럼, 현대의 모든 정치 연설이 모방하고자 하는 문체의 스타일은 게티즈버그 연설에서 비롯되었다. ‘이 땅에서 자신의 목숨을 바친 사람들’과 ‘이 땅에서 사라지지 않을 민주주의 정부’를 대비시키는 그리스적인 수사학의 전통에 따라, 그의 연설에서도 대조법이 차지하는 역할은 컸다. 그리스적인 대조법은 또 다른 의미에서 민주적인 가치를 갖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대비되는 반의어 짝이 없는 정치 언어를 쓰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정치적 이성을 갖추지 못한 정치가들은 이런 대조법을 쓰지 못한다. 이런 대조법을 이해하지 못하고 한 방향의 주장과 정책만을 말하는 정치가는 사회와 공동체를 통합하는 데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정치적 경쟁자를 자신과 대조되지 않는, 즉 공존할 수 없는 존재로 정의하면서, 자신을 부각시키고자 하기 때문이다. 국외의 적이 아닌 한, 동료 시민과 여야는 공존하는 존재이고 서로를 통해 서로가 좋아지는 존재, 서로의 발전을 통해 마주 보며 성장하는 대상으로 정의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적 대조법이 갖는 민주적 가치는 거기에 있고, 그래야 민주정치 안에서 갈등적인 문제를 개선해 갈 수 있다.


당시 미국 정치에서 흑인과 남부, 노예제가 그런 이슈였다. 링컨도 게티즈버그 연설 이전까지 이 이슈를 정면으로 다루지 못했다. 60만 명 이상이 희생된 내전에서 북부와 남부는 서로를 용서할 수 없는 적으로 규정하고 공격했어도, 당시로써는 이상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총칼로 수행된 내전을 말로써 마무리하는 것은 정치가 해야 할 최고의 책임 있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재선에 도전하면서 링컨이 하려 했던 일은 바로 그것이었다.


흑인 노예제라고 하는, 미국의 공화정 나아가 미국 민주정의 원죄(original sin)를 정치적으로 다루는 일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었다. 게티즈버그 연설을 마친 뒤 링컨은 이듬해 말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그리고 북부의 승리로 남북 전쟁이 매듭지어지는 시점이었던 1865년 4월 3일에 대통령 재임 연설을 했다. 이제 더 이상 흑인 노예제와 남부 문제는 피할 수 없는 주제가 되었는데, 그때 링컨은 어떤 연설을 했을까?


“동료 시민 여러분, 두 번째 대통령직 취임 선서를 하는 이 자리 역시, 첫 취임식 때와 마찬가지로 긴 연설을 할 상황은 아니다. 그때는 우리가 과연 어떤 길을 추구해야 하는지 다소 자세하게 밝힐 필요는 있었다. 그로부터 4년의 임기를 만료한 지금, 이 나라의 모든 관심과 에너지는 (남북전쟁이라고 하는) 거대한 다툼의 문제에 여전히 집중되고 있다. 그렇지만 관련된 모든 쟁점과 이후 상황에 대해서는 이미 수많은 공식 발표가 있었기에, 새삼 꺼내 놓을 새로운 사실은 없다. 모든 것은 전쟁이 어떻게 마무리될 것인지에 달려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나 자신은 물론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현재 상황은 대체로 우리에게 만족스럽고 고무적이다. 미래는 매우 희망적이다. 다만 감히 예측을 분명히 내놓기가 어려울 뿐이다.


4년 전만 해도 모든 관심은 임박한 내전에 쏠려 있었다. 모두가 전쟁의 발발을 두려워했다. 모두가 전쟁만은 피하고자 했다. 그때 바로 이 자리에서 나는 전쟁 없이 미 연방을 구하는 데 모든 것을 헌신하겠다는 취임사를 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이 도시의 한편에는 반란을 도모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전쟁이 아닌 방법으로 연방을 해체하고 그 재산을 나누고자 했다. 전쟁에 반대하기는 양쪽이 다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한쪽은 연방을 그대로 유지하느니 차라리 전쟁에 나서고자 했다. 다른 한쪽은 연방을 없애기보다는 전쟁이라도 감수하려 했다. 전쟁은 그렇게 해서 일어났다.


이 나라 인구의 8분의 1은 흑인 노예다. 그들은 이 나라 모든 지역에 퍼져 있는 것이 아니라 남부 지역에 몰려 있다. 노예 소유는 특수하면서도 강력한 이해관계를 이루고 있다. 그런 이해관계야말로 전쟁 원인의 일부라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전쟁을 일으켜서라도 연방을 깨뜨리고 그 이해관계를 강화하고 영속화하고 또 확장하려는 것이 바로 반란자들의 목표였다. 반면 정부는 그런 이해관계가 다른 지역으로 확대되지 못하도록 제한하자는 것 이상을 요구한 바가 없다. 그렇게 해서 발발한 이 전쟁이 이처럼 대규모로, 이토록 오래 계속되리라고는 어느 쪽도 예상하지 못했다. 어느 쪽도 전쟁을 초래한 원인이 전쟁을 통해 제거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도 아니었다. 양측 모두 자신이 쉽게 승리할 것으로 기대했다. 이처럼 근원적으로 경악스러운 결과가 초래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남부와 북부 양측 모두는 같은 성경을 읽고 같은 신에게 기도하면서 상대방을 응징하는 데 신의 가호가 있기를 간청하고 있다. 남이 흘린 땀으로 빵을 얻는 자들이 감히 정의로운 신의 도움을 청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심판받지 않고자 한다면 상대 또한 심판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남북 어느 쪽의 기도도 신의 응답을 받을 수 없고, 지금까지 어느 쪽도 신의 충분한 응답을 받지 못했다. 전능한 신은 그 자신의 목적을 갖고 계신다.


‘사람을 죄짓게 하는 이 세상은 참으로 불행하여라. 이 세상에 죄악의 유혹은 있게 마련이나 남을 죄짓게 하는 자는 참으로 불행하도다.’


미국의 노예제도가 바로 그 같은 세상의 죄 가운데 하나이다. 신의 뜻대로 그것이 이 세상에 있게 마련인 죄의 하나라고 한다면, 그러나 신이 정한 시간 동안 지속된 그 죄를 이제 신께서 그만 거두고자 하신다면, 그래서 그 죄를 지은 자들로 인한 재앙을 징벌하고자 신께서 이 끔찍한 전쟁을 치르게 하신 것이라면, 우리가 이 전쟁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살아 계신 신을 믿는 자들이 언제나 그분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 신성한 뜻, 그것이 아니고 다른 어떤 것이겠는가?


이 거대한 재난적 전쟁이 하루빨리 끝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열심히 기도하자. 그러나 품삯 한 푼 주지 않고 노예의 땀으로 모은 250년의 재산이 모두 탕진될 때까지, 3천 년 전의 말씀에서 이르듯 채찍으로 남의 피를 흘리게 한 자가 스스로 칼에 맞아 그 피 한 방울 한 방울을 되갚게 되는 날까지 이 전쟁을 지속하게 하는 것이 신의 뜻이라면, 우리는 그저 ‘신의 심판은 참되고 옳지 않은 것이 없도다.’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누구에게도 원한을 갖지 말고, 모든 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신께서 우리로 하여금 보게 하신 그 정의로움에 대한 굳은 확신을 가지고, 지금 우리에게 맡겨진 일을 끝내기 위해 노력하자. 이 나라의 상처를 꿰매기 위해 노력하자. 나아가 이 싸움의 부담을 짊어져야 하는 사람과 그의 미망인과 고아가 된 그의 아이를 돌보고 우리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나라와 함께 정의롭고 영원한 평화를 이루는 데 도움이 될 일을 다 하기 위해 노력하자.”


10.

미국의 건국을 가져온 ‘독립 혁명’과 ‘헌법 혁명’에도 불구하고 당시 흑인 노예는 온전한 인간이 아니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링컨의 연설에 대해 “죄악이 대물림된 미국 역사를 정화하는 연설”이라고 평가했다. 혹은 “미래를 영원히 변화시켜 줄 새로운 과거를 제공함으로써 혁명 그 자체를 혁명”했다는 평가도 있었다.


물론 링컨의 연설이 담고 있는 혁명적 의미에도 불구하고 내전의 상처와 노예제의 폐해가 이내 해결된 것이 아님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다. 군사적으로 내전은 끝났을지 몰라도 정치적 내전 상황은 오래 지속되었다. 게티즈버그 연설 이듬해에는 노예제 폐지를 위한 헌법 개정 노력이 이어졌다. ‘수정 헌법 13조’가 대표적이다. 수정 헌법 13조 제1항은 이렇다. “어떠한 노예제도나 강제 노역도, 해당자가 정식으로 기소되어 판결로서 확정된 형벌이 아닌 이상, 미합중국과 그 사법권이 관할하는 영역 내에서 존재할 수 없다.” 제2항은 이렇다. “의회는 적절한 입법을 통하여 본 조를 강제할 권한을 가진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매우 불충분하고 불완전한 헌법 수정이 아닐 수 없다. 그 정도의 수정을 하는 데도 엄청난 갈등과 논쟁이 동반되었다.3)


아무튼 재임 연설이 있은 뒤 10일 후인 4월 14일, 링컨은 남부 출신 배우의 총에 맞았고 그 이튿날 사망했다. 암살이라는 폭력적인 방법으로 죽음을 맞은 링컨의 시신은 국립묘지의 한 귀퉁이에서 “최후의 안식처”를 찾는 운명이 되었다. 이 비극적인 사건으로 인해 링컨의 정치 연설이 더 유명해지고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고 누군가 말한다면 틀린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그가 평탄하게 삶을 마감했더라면, 정치적으로 실수를 하거나 오명을 얻는 상황에 부딪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가정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사진 설명> 링컨 초상, 출처_위키피디아


사실 게티즈버그 연설 직전에 링컨은 이미 아들을 내전에서 잃었다. 우울증이 그를 심하게 괴롭혔다. 젊은 시절 자신이 유일하게 사랑했던 여인이 죽은 뒤 앓게 된, 그로서는 ‘영원히 헤어 나올 수 없는’ 우울증이었다. 영부인이 되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링컨을 선택했던 링컨 부인(메리 토드 링컨Mary Todd Lincoln)의 히스테리로 말미암아 또 다른 고통이 그의 삶을 짓눌렀다. 링컨을 향해 “당신은 최고 권력을 가졌는데, 왜 내 소중한 아이를 전쟁터에 내보내 죽게 만들어 내 가슴을 찢어 놓는가.”라며 소리쳤던 그녀 역시 링컨이 죽은 뒤 정신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어쩌면 그 어떤 위대한 정치가라 할지라도, 정치를 하는 한 겪을 수밖에 없는 정신적 내전으로부터 헤어 나오기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어디에선가 버락 오바마(Barack Obama)는 링컨에 대한 추모사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우리가 링컨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가 인간의 위대함과 동시에 한계를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한 적도 있다. “그도 회의적이었을 때가 있었다. 실패한 적도 있었다. 좌절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의지와 연설의 힘을 통해 그는 한 나라를 움직였고 민중을 자유롭게 했다.”


인간이기에 누구나 부족하지만 그래서 별 볼 일 없다가 아니라, 바로 그렇기에 정치가로서 해야 할 과업을 완수하고자 하면서 운명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더 위대한 일이 아닌가 한다.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과 재임 연설은, 경력의 정점처럼 보였던 그 순간이 곧 안티클라이막스의 시작일 수도 있다는, 정치가의 슬픈 운명을 대표하는 정치 연설의 한 사례로 우리에게 남아 있다. <끝>


주석

1. 게티즈버그 연설을 전후한 상황에 대해서는, 게리 윌스 지음, 권혁 옮김, 『링컨의 연설(돋을세움 2012). 참조.

2. 미국 민주주의의 역사에서 노예제가 갖는 결정적 의미에 대해서는 스티븐 레비츠키, 대니얼 지블랫 지음, 박세연 옮김,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어크로스 2018) 참조할 것.

3.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2012년에 만든 영화 <링컨>은 바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게티즈버그 연설 이후 약 1년 반의 기간에 있었던 일이 이 영화의 중심 주제라는 뜻이다. 이를 통해 수정 헌법 13조를 위해 링컨과 그의 팀들이 협잡과 매수, 폭력과 기만조차 마다하지 않았던 당시 상황을 잘 그려냈다.


박상훈 | 정치발전소 학교장

정치학을 전공한 정치학자이다. 정치의 현장 가까이에서 읽고 쓰고 말하는 일을 한다. 실천으로서의 정치와 학문으로서의 정치학이 엄격하게 분리되기보다는 어느 정도 중첩되기를 바란다. 그것이 정치학의 본래 모습이자 애초의 이상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정치가의 존재를 시야에서 놓치지 않을 때 정치학적 논의 역시 훨씬 더 풍부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뿐만 아니라 다른 누구보다도 시민의 적법한 대표라 할 수 있는 정치가들이야말로 정치학의 개념과 이론을 선용할 수 있는 존재가 되길 바란다. 그래야 민주정치의 여러 규범과 가치가 시민들의 삶의 양식 속으로 더 깊이 파고들어 지속 가능한 전통으로 안착할 수 있으리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