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훈 정치적 말의 힘] 팬덤 정치, 무엇이 왜 문제인가

2022-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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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훈 정치적 말의 힘] 팬덤 정치, 무엇이 왜 문제인가


1.

정치학의 개념 중에는 실제 정치 현실에서 먼저 만들어져 사용되다가 사후에 학자들에 의해 이론화된 사례가 많다. 대표적으로 민주주의(dēmokratía)가 그렇다. 처음 이 말은 데모스(dêmos)로 불리는 보통의 일반 시민들도 크라토스(krátos), 즉 통치할 수 있다는 견해를 비난하려는 사람들이 조롱을 목적으로 만든 용어였다. 그런 말이 정치철학자들에 의해 군주정이나 귀족정과 구분되는 정치체제의 한 유형을 뜻하는 말로 발전한 것은 한참 지나서였다. 지금 논란이 되는 ‘팬덤 정치’라는 통속어는 어떨까? 의미 있는 정치 용어로 발전할 수 있을까? 그러려면 먼저 개념화가 필요하다.



2.

팬덤 정치란 정당의 공식적 가치나 이념보다는 정치 엘리트 개인의 ‘개성적 힘’에 의존하는 대중 정치를 가리킨다. 대개는 제도화된 정치과정 밖으로부터 지지자들이 ‘무(無)정형적인 집단적 열정’을 분출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체제 안으로 안착하기 어려운 ‘휘발성, 가변성’의 특징도 있다. 그 때문에 길지 않은 주기로 수혜자와 피해자가 교차되기도 한다. 한때 팬덤 정치의 수혜자였다가 지금은 ‘친명’ 팬덤의 공격을 받게 된 ‘친문’ 팬덤이 대표적인 예다.


정치가의 관점에서 팬덤 정치는 ‘사인화(私人化)된 권위자원’의 빠른 축적을 목적으로 하는 지지 동원정치다. 지지자의 관점에서는 익명의 대중적 열정을 통해 정치과정을 지배할 수 있다는, 일종의 ‘시민적 효능감’을 표출하는 행위다. 단순히 선호나 지지 성향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정당의 결정을 좌우하고 주도하려 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종류의 압력 정치(pressure politics)’라 할 수 있다.


팬덤 정치는 조건적이다. 팬덤 리더의 호소력과 영향력이 가장 중요하다. 그가 힘을 잃으면 팬덤의 동력은 빠르게 약화한다. 새로운 대상을 찾아 옮겨가기도 한다. 대통령 임기가 끝나가면서 친문 팬덤이 친명 팬덤으로 옮겨 간 것이 대표적인 예다. 정도는 약하지만, 친박 팬덤의 약화와 친윤 팬덤으로의 이동도 같은 현상이다. 이런 가변성은 팬덤 지지가 크게 세 유형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첫 번째 유형은 ‘추종형 팬덤’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팬덤 리더를 신뢰하고 따르려 한다는 점에서 이들은 충성형 팬덤이다. 두 번째 유형은 ‘편익 추구형 팬덤’이다. 이들은 팬덤 리더의 성공을 통해 지위나 관직을 얻고자 한다. 주로 정치 영역 안에 있는 내부자인 이들은 사실상 팬덤 정치를 기획하고 움직이는 ‘팬덤 활동가’다. 이들에게 팬덤 정치는 일종의 합리적 투자행위다. 팬덤 리더가 힘을 잃거나 바라는 편익을 기대할 수 없게 되면 새로운 팬덤을 찾아 가장 먼저 떠나는 이들이다.


흥미로운 것은 세 번째 유형이다. 이들은 팬덤 리더를 통해 정치 참여의 효용을 극대화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정치 효능감 추구형 팬덤’이다. 이들은 정치 영역 밖에서 활동하고, 지위나 편익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두 번째 편익 추구형 팬덤 활동가들과 구분된다. 팬덤 리더가 힘을 잃어도 팬덤을 옮겨가지 않는 첫 번째 유형의 추종형 내지 충성형 팬덤과도 다르다. 팬덤 리더가 영향력을 유지하는 한에서만 팬덤을 지속하기 때문이다. 이들 역시 상황이 바뀌면 정치 효능감을 얻고자 새로운 팬덤 리더를 찾는다. 단, 두 번째 유형의 편익 추구형 팬덤과는 달리 이동하는 데 시간이 걸리고 주저하며 옮겨간다는 점에는 차이가 있다.


팬덤 정치의 가변성은 편익 추구형 팬덤 활동가들과 정치 효능감 추구형 팬덤 지지자들에서 발원한다. 팬덤 현상이 절대적이고 맹목적인 지지의 양상으로 나타나다가도 상황이 바뀌면 유동성을 갖게 되는 것은 바로 이들의 존재 때문이다. 이것이 말해주는 바는 이렇다. 팬덤 리더와 팬덤 지지자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조건에서만 강한 팬덤은 작동한다. 상호 간의 조건이 만족되지 않으면 팬덤의 이동과 새 팬덤의 형성이 이어진다. 그렇기에 야심을 가진 정치인일수록 자신도 힘을 키워가다 보면 언젠가 팬덤이 옮겨오거나 만들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놓을 수가 없다. 그 때문에 팬덤 정치는 많은 이들의 우려나 비판에도 불구하고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3.


대중의 지지와 참여 없는 민주정치는 없다. 팬덤 없는 정치가는 승자가 될 수 없다. 대중의 지지와 팬덤은 정당의 지지 기반을 확대하는 데 기여할 수 있고, 선거 경쟁을 민주적으로 활성화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 하지만 군주정이 참주정으로 퇴행할 수 있고, 귀족정이 과두정으로 나빠질 수 있듯, 민주정 역시 대중 선동에 쉽게 휘둘릴 수 있다. 인간의 역사에는 이 같은 사례가 아주 많다.


야심을 가진 정치 엘리트가 팬덤의 동원에 성공하게 되면 그는 민주적 책임성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어한다. 그런 팬덤 리더의 야심을 지지자들이 수용할 때쯤이면, 합리적 경쟁 대신 혐오와 배제의 정치가 시작된다. 팬덤 리더에 비판적인 정치인들에 대한 팬덤 지지자들의 압력 동원이 ‘시민참여’, ‘국민주권’, ‘직접 정치’의 이름으로 극대화되는 것도 이때쯤이다. 팬덤 리더에 대한 지지 행동은 순식간에 다른 정치인에 대한 적대와 공격 행동으로 전환된다. 그리고 그 대상은 당 안팎을 가리지 않고 팬덤 리더에 반대하는 모든 이들로 확대된다.


민주주의는 ‘평등한 참여’의 원리로 작동한다. 누구의 의사도 평등하게 존중되어야 한다는 일인 일표의 원칙을 따른다. 이를 위해서는 참여의 범위(scope)를 확대하는 노력이 중요하다. 하지만 팬덤 정치는 참여의 강도(intensity)에 의존한다. 높은 지지 강도를 가진 소수의 지지자 집단이 과다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정치가 팬덤 정치다. 그런 점에서 팬덤 정치란 참여의 범위는 좁고, 참여의 강도는 강렬해지는 정치다.


팬덤 정치가 정당을 지배하면 당 밖의 열정적 소수자 집단(passionate minority)이 당을 지배하게 된다. 오래된 당원이나 대의원은 영향력을 강제로 축소당한다. 참여는 불평등해지고 대표는 왜곡된다. 이들 열정적 지지자 집단은 대개 비(非)가시적이다. 참여는 하되 누군지 특정되지 않는다. 오로지 대대적인 압력이 동원될 때만 그 실체와 위력을 볼 수 있다. 권력은 있지만 책임은 지지 않는, 신종 영향력 집단의 출현은 팬덤 정치의 또 다른 부작용이다. 공화정의 기초 원리는 ‘권력이 있는 곳에 책임’을 부과하는 데 있다. 권력의 비가시성(invisibility) 내지, 정치의 숨은 권력화는 필연적으로 전제정을 낳는다. 민주주의도 책임 있는 참여가 필요하다는 것을 팬덤 정치가 일깨워 준다.


시민에게는 자유를, 정치가에게는 책임을 부과하는 체제가 민주주의다. 팬덤 정치는 시민이 헌신하고 정치가는 자유로운 민주주의를 낳는다. ‘지못미(지켜주지 못해 미안해요) 현상’에서 보듯, 정치가의 실패를 지지자가 대신 미안해하는 ‘전도된 윤리론’을 낳는다. 팬덤 정치는 자유를 위협하고 권력자에 의존적인 심리를 키운다.


팬덤 정치는 롤러코스터 정치다. 절차적 합리성에 따른 안정된 변화가 아닌, 파격과 의외가 반복되는 불안정한 정치다. 팬덤 정치는 단순한 지지 행동에 그치지 않는다. 정치 집단들 사이의 혐오와 적대의 교환만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다. 더 큰 문제는 당원과 지지자들의 마음 상태를 분열과 미움의 상태로 이끈다는 데 있다. 정보나 지식, 판단은 음모론과 기획론에 쉽게 휘둘리며, 그로 인해 민주주의가 필요로 하는 신뢰와 협동의 시민 문화가 자라날 기반을 파괴한다.


팬덤 정치는 내용 없는 ‘정서적 급진주의’를 가져온다. 반(反)개혁이라는 말이 곧 공격의 표식이 되게 만든다. 그런 점에서 팬덤 정치는 참을 수 없는 적의를 갖게 하는 정치를 한편으로 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정치의 유사종교화’를 부추긴다. 팬덤 리더에게는 박해받는 선(善)의 구현자 내지 정치적 구원자의 이미지가 부여된다. 긴 시간의 협상과 조정을 필요로 하는 정당정치나 의회정치가 팬덤 리더의 개혁 의지 실현에 방해되는 기득권 집단들의 농간으로 규정될 때도 있다. 공식 절차와 제도화된 정치과정에 대한 존중도 팬덤 지지자들에게는 박약하다.


팬덤 정치는 당내 다원주의를 위협한다. 이견과 비판은 공격의 대상이 되고, 당내 갈등 구조는 팬덤 리더의 성이나 이름을 따라 친O-비O-반O 같은 저차원의 양상을 띤다. 다원적 요구나 목소리를 균형 있게 대표하는 정당 지도자 혹은 그런 지도자가 나올 수 있는 당내 환경이 파괴되고 나면 남는 것은 적나라한 승패뿐이다. 당직과 공직을 둘러싼 당내 경쟁은 사활적일 수밖에 없다. 정책 의제를 둘러싼 토론이나 정책이 중심이 된 세력연합은 나타날 수 없다. 결국 권력 투쟁과 그것을 위한 ‘룰 싸움’이 당을 압도한다. ‘승리가 곧 정의’가 된. 팬덤 리더는 있으나 정당 리더는 나올 수 없는 환경은 이렇게 만들어진다.


팬덤 정치가 낳는 언어의 저질화도 큰 문제다. 개혁을 포함해 많은 정치 언어들이 저급하게 희화화하는데도 그 틀 안에서는 문제의 심각성이 인식되지 않는다. 말은 흉기가 되고, 서로 침 뱉고 모욕하는 것이 정치의 일상이 된다. 거부감을 갖게 하는 시위 형태가 양산되고 이들과 더불어 유튜브 정치꾼들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든다. 그런데도 이 모든 것은 팬덤의 유불리를 기준으로 자신들에게는 과도하게 관용적이고, 상대에게는 과도하게 적대적일 뿐, 공정한 대응은 없다. 도덕적 감각의 상실을 뜻하는 ‘내로남불’ 정치를 동반하는 팬덤 현상은 보편적 사회정의나 규범을 허물어뜨리는 역할을 한다.



4.

팬덤 리더나 지지자들은 시민 직접 정치를 주장한다. 제도와 규정, 절차에 따르는 긴 논의와 결정 과정을 우회해, 자신들이 신뢰하는 팬덤 리더와 이를 지지하는 시민이 수직적으로 직접 연결되는 일원적(一元的) 정치를 원한다. 평등하게 대화하고 조정하고 심의하고 협상하고 합의하는 여야의 정당정치나 의회정치는 원칙 없는 타협이나 부정의한 거래로 비난당할 뿐이다.


팬덤 지지자들은 정치에 일상적으로 관심을 갖고, 정치에 관여하려는 열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노력한다. ‘일상의 정치화’, ‘정치의 일상화’는 그들의 구호다. ‘국민주권’과 ‘시민참여’는 그들의 민주적 신조다. 자신들과 의견을 달리 하는 정치가를 공격하고 모욕하면서도 그 때문에 도덕적 불편함 같은 것은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일은 반개혁적인 정치가를 응징하는 민주 시민으로서의 당연한 권리이자 의무로 생각한다.


지도자와 대중이 수직적으로 직접 연결되는 정치는 고대 직접 민주주의가 직면했던 최대의 어려움이었다. 고대 직접 민주주의는 여야의 정당이나 이익결사체들 사이는 물론 입법-행정-사법의 기능 사이의 수평적 상호작용이 없는, 일종의 ‘수직적 정치’를 특징으로 한다. 10일 정도에 한 번 열렸던 시민총회에서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었고, 공직에는 짧은 임기와 연임 불가라는 제한 조치가 있었기에 시민들이 번갈아 직접 정부를 운영할 수 있었다. 비록 전체 인구의 5% 안팎이 참여하는 시민총회였고, 그나마 5분이라도 발언할 기회는 참석한 시민의 1% 미만만 누릴 수 있었으며, 공직의 기능은 지극히 단순했지만 놀랍게도 그런 민주주의가 2백 년 가까이 지속되었다.


이 체제의 단점 가운데 하나는 시민 대중이 독단적인 주장에 휘둘릴 가능성이 높다는 것에 있었다. 당시의 용어로 말하면 데마고그(demagogue)와 참주(tyrant), 즉 대중 선동에 능한 지도자의 출현을 늘 두려워해야 했다. 그런 점에서 고대 직접 민주주의는 주기적으로 참주나 데마고그를 몰아내야 유지되는 민주주의였다. 오스트라시즘(도편추방제)으로 불리는, 지금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방식이지만, 인기 있는 정치가를 일정 기간 도시국가 밖으로 추방했다 불러들이는 일을 반복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현대 민주 공화정은 데마고그와 참주, 오늘날의 용어로 말하면 포퓰리스트의 출현을 막으려는 제도적 노력의 산물이었다. 공화정은 세습 대신 선출, 혈통 대신 시민 동의의 원리로 대표를 선발하는 정부 원리다. 이를 구현하기 위해 선출직 시민 대표들에게 공권력 집행을 맡기되, 그들이 가진 권력은 수평적으로 쪼개고 분립시켜서 상호 견제하게 했다. 시민 개개인에게는 그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기본권을 갖게 했고, 그들이 달리 가진 이익과 열정은 결사와 집단, 정당의 형태로 실현할 수 있게 했다. 이 모든 것을 헌법상의 확고한 권리로 공식화했고, 그 핵심은 다원주의에 있었다.


하지만 현대의 민주 공화정도 늘 실패의 가능성을 갖는다. 그 어떤 제도나 규범으로도 참주나 포퓰리스트를 완전히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마니 풀리테(mani pulite)는 '깨끗한 손'이라는 이탈리아어다. 1992년부터 시작된 검찰과 사법당국의 정치 부패 조사 작업을 뜻한다. 2년에 걸친 수사 기간 동안 담당 검사는 ‘국민적 영웅’이 되었고 그의 손에 이탈리아 정당정치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그 과정에서 성공한 팬덤 정치가가 베를루스코니다. 2016년 영국의 브렉시트와 미국의 트럼프 당선도 크게 보아 유사한 현상이다. 대중적 열광을 동반했고 그와 함께 소수 인종에 대한 공격과 반이민 정서의 동원 등 어느 모로 보나 민주주의 발전에 긍정적일 수 없는 부작용이 이어졌다.


물론 가장 고통스러운 경험은 비교할 수 없이 광범한 대중 참여를 동반했던 전체주의였다. 권위주의가 대중의 참여를 억제하고 정치에 대한 무관심을 조장한 체제였다면, 전체주의는 사회구성원을 대중운동의 형태로 동원하고 정치화했던 대규모 프로젝트였다. 전체주의의 억압적인 측면에만 주목하면 그 체제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갈등도 분열도 없는 완전한 국가, 같은 민족 안에서의 이상적인 복지체제를 꿈꿨다. 그런 미래에 대한 대중적 열광이 있었기에, 이 길에 방해가 된다고 여겨진 이질적 구성원들에게 대규모 폭력이 쉽게 허용되었다.



5.

일상과 정치의 건강한 분리 없이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로 사적 린치가 가능하다면 민주주의 이전에 인간 삶부터 견딜 수가 없게 된다. 과거 독일에서처럼 누군가 유대인 상점에 좌표를 찍으면 밤사이 법의 보호에서 벗어난 곳이 되어 상점 유리창을 깨도 되는 일이 재현될 수 있다. 처음에는 유대인이었지만 그 대상이 동성애자·집시·공산주의자로 쉽게 확대되었듯, 비슷한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


정견이 다른 것 때문에 누군가가 너무 미워지면 팬덤을 넘어 전체주의적 심성을 갖게 될 수 있다. 누군가를 향해 빨갱이, 종북, 적폐 세력, 토착왜구, 반개혁세력, 친일파로 낙인찍고 싶어지면 민주주의자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다른 사람을 자극해 자신이 싫어하는 대상에 더 많은 공격이 가해지길 바라는 마음을 갖게 되면 그때부터는 정치를 내전(civil war)으로 만들 수 있음을 걱정해야 한다. 우리는 모두 불완전하다. 언제든 오류나 실수의 가능성을 안고 사는 존재다. 그런 자각 위에서 이견으로부터 배우고 이견과 협력할 수 있는 시민성이 커져야 민주주의가 산다. 이견을 가진 시민은 배제해야 할 악이나 적이 아니다. 생각이 다를 뿐인 동료 시민이다. 차이와 다름 속에서 서로 공통의 관점을 조금씩 늘려 가려 노력해야 우리 서로는 같은 미래를 공동으로 일궈가는 협업자가 될 수 있다.


말이 저급한 자들을 승자로 만드는 팬덤 정치로는 미래를 만들 수 없다. 무례한 정치 언어 사용자들이 위세를 떨치면 민주주의도 정치도 품격을 잃고 만다. 팬덤 정치는 권력자를 위한 정치다. 시민을 일방적 추종자로 만들어 이용하려는 심리를 키운다. 사람들을 공격자나 파괴자로 만드는 정치가 팬덤 정치다. 일이 그렇게 돌아가면 정치만이 아니라 세상을 온통 어둡고 우울한 곳으로 만든다.


팬덤 정치는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하지 못한다. 여야가 공익을 두고 합리적으로 경쟁할 수 없는 정치를 가져온다. 서로 등지고 자신의 지지자를 향해 상대를 일러바치고 아첨하는 정치를 낳는다. 이런 정치는 민주주의가 필요로 하는 정치의 기능을 없애고, 오늘도 내일도 또 모레도 트집 잡고 시비할 거리를 찾아 서로 모욕하는 정치다. 그런 팬덤 정치는 ‘천민민주주의’를 낳는다. 돈벌이 그 자체가 목적인 천민자본주의(pariah capitalism)처럼 추종과 인기 그 자체가 목적인 정치를 낳는다. 오만한 정치, 질리게 하는 정치를 가져온다.


팬덤 정치는 민주주의가 필요로 하는 다원주의를 위협한다. 의견의 다원적 표출을 어렵게 한다. 대통령인 사람, 대통령이 될 사람을 중심으로 한 사인화된 정치를 키운다. 정당 내에서도 여러 의견이 공존하면서 토론하는 다원주의가 없다면 죽은 정당이다. 권력에 맹종하면 공안 정당에 가까워진다. 매력도 실력도 책임감도 다정함도 핏기도 온기도 없는 정당을 팬덤 정치가 만든다.


팬덤 정치가 대중적 열광과 함께 역사와 국가에 대한 신성화를 추구하는 단계가 되면 정말로 위험해진다. 엄숙주의와 역사주의로 자신의 외관을 두르는 사람은 선동가일 가능성이 높다. 세상을 걸고 도박하는 정치가에게 기회를 줄 수도 있다. 역사, 민족, 국가, 국민, 개혁, 청산, 대개조 등을 쉽게 연호하는 정치가는 늘 경계해야 한다. 모든 것을 걸자고 말하는 정치는 극단주의를 키운다.


팬덤 정치는 모욕을 감수하라는 억지 정치다. 시민을 극단적으로 분열시켜 놓고, 인간관계를 증오와 혐오로 갈라놓고 뒤에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는 정치다. 팬덤 정치는 서로가 다르게 옳기 위한 정치가 아니라, 자신들만 옳기 위한 정치다. 그건 정치가 아니라 독단이다. 독단은 정치의 적이다.


우리에게 정치가 필요한 것은 보통 시민의 삶의 조건을 살피고 그들이 지역사회 안에서 생산과 돌봄, 은퇴 후의 삶을 계획할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다. 우리에게는 그런 정치가 필요하다. 정치는 권력자를 위한 것도 국가를 위한 것도 아니다. 구성원들의 삶이 좀 더 협동적인 방향으로 개선될 때 정치의 가치가 빛난다. 정치가의 표정은 공공재다. 시민을 웃게 할 수 없는 정치, 사회를 밝게 만들 수 없는 정치는 정치가 아니다.


정치가 이 세상을 밝고 다정한 곳으로 만들어야 할 소명을 버리면 우리들의 삶은 위험해진다. 팬덤 정치는 우리를 웃게 만들 수 없는 정치다. 우리에게는 그런 정치가 필요하지 않다. 결국, 팬덤 정치는 정치가 아니다.



국회미래연구원 기고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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