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훈의 정치적 말의 힘] 정치 없는 민주주의

2022-01-12
조회수 229

대선을 보면서 이것이 정치인가 하는 의구심을 말하는 이가 많다. 통치권이 세습이 아니라 선출의 원리로 결정되니, 민주주의인 것은 맞다. 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짧은 정의는 '불확실성의 제도화'다. 선거 결과가 확실하다면 민주주의가 아니다. 복수의 정당 후보가 경쟁하며 누가 승자가 될지 불확실하다는 점에서, 민주적 정치 과정의 기본 요건은 확고하다. 군부 쿠데타의 가능성 때문에 비상한 대비를 할 상황도 아니다. 좌파 혁명은 물론 우파 보수혁명을 두려워해야 할 일도 없다. 과정이 어떠하든, 대통령은 민주적으로 선출될 것이다. 민주주의는 확실히 민주주의다. 다만 지금 이것이 제대로 된 정치인가에 대해서는 공허한 느낌을 지울 수 없는 현실, 아마도 한국 민주주의의 문제 상황을 요약하면 그렇지 않을까 싶다.


민주주의는 정치에서 승부를 보는 체제다. 민주주의란 사회체제를 가리키는 것도 아니고 경제체제인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념도 아니다. Democratism이나 Democraticism이 아니라 Democracy가 민주주의다. 접미사 '–cracy'는 정부나 통치에 가까운 의미를 갖는다. 이념을 구현하는 게 민주주의가 아니라, 좋은 통치를 위한 정치의 역할에 기대를 거는 것이 민주주의다. 정치가 제 역할을 해야 민주주의의 가치는 살아난다. 어떤 민주주의에서도 시민 집단들 간의 이해관계와 열정은 갈등적이다. 정치는 갈등 속에서 일한다. 차이를 조정하며, 해결할 수 없는 요구 사이에서 공존과 타협을 이끈다. 그렇게 도달한 결정이라야 정치는 권위를 갖는다. 그래야 행정 관료제는 물론 경제 권력의 순응을 얻을 수 있다. 정치의 역할 없이 공동체의 통합을 이끌 수 있는 민주주의는 없다.


지금 우리 앞에 정치의 역할이 최소화된 민주주의가 있다. 민주주의가 정치의 제대로 된 역할 없이 운영되고 있다. 정치의 꽃은 정치가다. 민주주의의 꽃은 정당이다. 좋은 정치가를 길러 낼 수 없는 사회는 불행하다. 좋은 정당이 정치의 중심을 잡아 주지 못하면 민주주의도 함부로 운영될 수 있다. 정치도, 정당도, 국회도 모르는 인물들이 대통령으로 나오게 생겼다. 그들은 국민을 찾고, 민생을 말하며, 민심을 쫓는 '전체주의적 민주주의'를 추구한다. 각자의 신념과 차이가 인정되지도, 토론되지도 않는 민주주의다. 그 속에서 서로에 대한 말과 행동은 혐오감을 일으킬 정도로 사납다. 누가 대통령이 될지에 관심이 많은 시민일수록 무례하다. 현기증이 날 정도로 출렁이는 여론조사에 모두의 눈이 쏠려 있다. 정치는 없고 여론조사가 민주주의를 지배한다. 정당은 싸움밖에 할 줄 모른다. 그들은 한동안 외부 인사 영입 경쟁으로 유권자를 혼란에 빠뜨리더니, 갑자기 후보 중심으로 오그라들었다. 사회의 다양한 요구를 받아 안는 정치의 기능은 사라졌다. 그 자리를 분열과 실망을 배가시키는, 정치 아닌 정치가 들어섰다.


100개가 넘는 나라가 민주주의를 하고 있지만, 정치의 역할이 어떠냐에 따라 그들이 이룩한 사회적 성취는 극과 극이다. 정치의 좋은 역할 없이 좀 더 자유롭고 평등하고 건강하고 안전하고 평화로운 삶은 기대하기 어렵다. 정치는 중요하다. 과거 누군가는 '죽은 시인의 사회'를 말했지만, 지금은 '죽은 정치가의 사회'를 걱정해야 할 시대가 되었다. 정치 없는 민주주의는 누구에게도 유익함이 없다.


*이 글은 한국일보 칼럼 <아침을 열며>에 실린 글입니다.

원문은 아래 링크에서 볼 수 있습니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20111135300034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