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말의 힘 | ⑤ 민주주의를 지켜야 한다 : 버락 오바마 <2017년 1월 10일 대통령 고별 연설>
2019-10-15
조회수 4922
버락 오바마, 늘 인종적 편견에 시달린 희생자이면서 동시에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누구인가”를 묻는 여론조사에서 자주 1위를 하는 전직 정치 지도자다. 현직일 때보다 퇴임 후 더욱 사랑받는 남자로도 유명하다. 왜 여전히 오바마인가.
청년의 모습으로 시작한 정치가의 길이었지만 대통령 임기 8년 동안 너무 늙어 버린 모습을 보면서, 정치가라는 직업이 정신적으로 얼마나 고된 일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이런 정치가가 있다면 지지자나 시민 역할도 잘해 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정치적 말의 힘 ⑤
민주주의를 지켜야 한다 : 버락 오바마 <2017년 1월 10일 대통령 고별 연설>
글쓴이_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
버락 오바마, 늘 인종적 편견에 시달린 희생자이면서 동시에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누구인가”를 묻는 여론조사에서 자주 1위를 하는 전직 정치 지도자다. 현직일 때보다 퇴임 후 더욱 사랑받는 남자로도 유명하다. 왜 여전히 오바마인가.
그는 아프리카 흑인 노예의 후손이다. 그가 흑인이라는 사실을 빼고, 왜 오바마인가를 말할 수는 없다. 일반적으로 흑인 노예제는 “현대 서구 문명이 안고 있는 가장 큰 원죄(original sin)”라고 불린다. 미국은 그 대표적인 나라다. 미국 자본주의 발전을 흑인 노예제 없이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은 우리 모두 잘 아는 사실이다. 지금도 여전히 흑인의 검은 신체는 백인 인종주의자들에게는 물론 공권력에 의해서도 함부로 파괴되곤 한다. 아프리카를 포함해 비서구 지역 전반에 드리웠던 식민주의와 인종주의의 상처를 그대로 안고 있는 “흑인 노예의 후손”이 오바마다. 그런 그가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었다.
그는 소수 인종의 민주적 성취를 상징한다. 지금 미국의 전체 시민 가운데 흑인 시민은 얼마나 될까? 강의 때마다 수강자들에게 물어보는데, 대개는 실제보다 많게 생각한다. 여러분은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는가? 실제로는 약 8분의 1이다. 12퍼센트 정도 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 미국에서, 게다가 흑인 시민에 대한 인종차별이 심한 곳에서 소수 인종 대표로서만이 아니라 다수 시민의 지지를 얻어 최고 통치자 자리에 오른 것이다. 민주주의가 아니고서는 이룰 수 없는, 놀라운 정치적 성취가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진보적 이상을 간직한 사람이다. 흑인 노예의 후손이고 민주적 성취를 상징한다는 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그의 진보적 이상이 가진 인간적 가치가 아닌가 한다. 그는 보수적인 정치가를 자극하거나 모욕하는 것으로 자신이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는 비이성적 진보파들과 달랐다. 잘 알다시피, 그는 2008년 제44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2012년 재선에 성공해 2016년까지 8년 동안 미국의 ‘최고 시민 사령관’ 역할을 했다. 그 기간 동안 그는 전 세계에서 가장 환영받는 정치인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의 행적과 말은 언론 기사와 방송, 뉴미디어를 타고 세계 시민에게 회자되었다. 무엇 때문일까? 인종과 종교 등 인간 사회를 불평등하게 만드는 수많은 차별에 항의하면서 좀 더 공정하고 자유로운 인간 사회가 되기를 바라는 세계 시민의 바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다원주의적 평등을 실천한 사람이다. 오바마는 누구와도 친구처럼 대화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달리 말하면 평등하게 상대하는 것의 가치, 달리 말해 민주주의가 필요로 하는 ‘시민적 정중함’(civility)의 가치를 실천할 줄 아는 정치가였다.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상대를 비난하거나 큰소리치는 것이 아니라, 전보다 더 나은 가능성을 찾고 꾸준히 과업을 확대해 가는 일의 미덕을 강조했다. 소득 불평등과 인종차별을 포함해 여러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면 “화내는 것에서 멈추지 말고 노동조합을 찾아가라. 노조원이 되어 보라. 노조 조직률이 높은 지역이 교육적 성취도 높고 범죄로부터도 덜 고통 받는다는 것을 그간의 통계 지표가 보여 주고 있다.”고 말한, 내가 아는 유일한 현직 대통령이었다. “누군가 굶는 아이가 있다면 설령 그 아이가 내 아이가 아닐지라도, 그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 내 마음이 가난해진다.”고 말했던 정치인이었다. 무슬림들이 부당하게 차별당할 때 그들의 회당을 조용히 방문했고, 히로시마 원폭 피해에 대해 미국의 책임을 말할 수 있는 용기도 발휘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좀 더 평화롭고 좀 더 정의롭고 좀 더 공정한 세상을 향해 좌절하지 말고 꾸준히 노력할 것을 요청했던 민주주의 지도자였다.
그는 정치학의 교범 같은 사람이다. 민주주의는 시민이 주권의 최종적 행사자인 정치체제를 뜻한다. 그런데 그런 시민 주권은 좋은 정치가 없이는 실천될 수 없다. 시민은 모든 일을 스스로 할 수 없으며 또 그러고자 할 만큼 어리숙한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공동체를 이끄는 다양한 과업을, 정부라고 불리는 수많은 공적 기구와 제도를 통해 실천하고자 했다. 그렇다고 그런 기구와 제도를 ‘영혼 없는 시스템’이나 ‘냉혹한 법치’로만 운용되지 않게 했다. 그들은 그런 기구와 제도를 이끌 자신들의 대표를 직접 선출했는데, 그들이 바로 정치가이다. 민주주의와 시민 주권의 성패는 바로 여기에 달려 있다. 다시 말해, 시민이 자신들의 대표로서 좋은 정치가를 선발해 그로 하여금 공동체를 잘 운영하게 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서 민주주의는 승부가 난다. 그 일이 정치가 오바마에게 맡겨졌을 때, 그는 자신을 지지하는 시민들이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최고의 연설가로서 자신의 소명을 다하려 노력했다.
그는 말을 가치 있게 만든 정치인이다. 말과 연설을 정치적 흉기가 아니라 시민적 힘으로 승화시킨 사람이다. 그는 가난한 약자들을 대표하는 정치가가 민주주의의 언어 혹은 ‘정치적 이성’을 갖춘 말을 통해 어떻게 성장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었다. 그래서 나는 정치라는 인간 활동이 (권력 다툼과 음모, 간계와 같은 어둡고 부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동시에 그 속에서 변화와 개선을 만들어 갈 수 있다고 믿기에) 아름다울 수도 있다는 점을 이야기하면서 늘 추상적인 이론 책보다는 그의 연설을 사례로 들곤 한다. 이를 통해 민주정치가 가진 놀라운 가능성을 말할 수도 있었고, 이어서 정치철학과 이론을 어렵지 않게 설명할 수 있었다. 정말로 오바마는 “민주정치가 무엇인지를 말해 주는, 좋은 교과서의 역할을 한 정치가”라고 할 수 있다. 흑인을 포함해 인간 사회의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변화는 가능하다’는 희망을 갖게 하고, ‘민주주의는 당신의 참여와 역할을 필요로 한다.’는 부름(소명)을 끊임없이 말해 준 정치가였다.
대통령 퇴임 후 그의 인생이 어떻게 변할지는 누구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 그도 물론 인간적 한계를 가진 존재다. 현직에 있을 때 누구보다 골프를 많이 쳤고, 농구를 하다가 15바늘을 꿰맨 대통령이기도 했다. 스마트폰을 너무 많이 잡고 있다고 영부인인 미셸에게 늘 야단맞았던 그런 사람이었다. 주어진 휴가는 모두 즐겼고, 가족을 국가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것 아니냐는 비난도 받았다. 미국 내 진보파들로부터는 월가와 군산복합체 개혁을 포함해 해야 할 일을 소홀히 했다고 비판받았다. 현직에 있는 동안 한반도 평화 진작에 소극적이었던 것 역시 우리로서는 좋게 평가할 수가 없다. 영국의 토니 블레어나 힐러리 클린턴처럼 퇴임한 대통령으로서 고액 강연료나 받는 ‘민주적 신념을 버린 사익 추구자’가 될 수도 있다.
인간 삶의 변덕스러운 운명을 우리가 어찌 알까마는, 적어도 지금까지는 배워야 할 면이 많은 정치가의 모델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청년의 모습으로 시작한 정치가의 길이었지만 대통령 임기 8년 동안 너무 늙어 버린 모습을 보면서, 정치가라는 직업이 정신적으로 얼마나 고된 일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그렇기에 오바마가 자신의 정치적 경력 가운데 최고의 위치를 마무리하는 고별 연설에서 보여 준 모습은 인상적이다. 이런 정치가가 있다면 지지자나 시민 역할도 잘해 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50분에 걸친 긴 연설이지만 인내심을 갖고 살펴보자.
***
안녕, 시카고! (박수갈채) 고향을 찾기 좋은 때다. (박수갈채) 모두들 고맙다. (박수갈채) 고맙다. (박수갈채) 고맙다. (박수갈채) 고맙다. 고맙다. 고맙다. (박수갈채) 고향에 오니 기분이 좋다. 고맙다. (박수갈채) 그런데 지금 우리는 TV 생중계 중이다. 이제 내 역할을 시작할 차례다. (박수갈채) 이렇게 아무도 따라 주지 않으면 사람들이 나를 ‘레임덕’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웃음) 자, 모두 자리에 앉아 주길 바란다.
이 짧은 서두만으로도 열기를 느낄 수 있다. 연설은 2만 명이 모일 수 있을 만큼, 미국에서 가장 큰 실내 집회장인, ‘일리노이 매코믹 플레이스’에서 야간에 열렸다. 입장권은 무료였으나 일찍이 표는 동이 났다. 그 때문에 암표가 온라인에서 1백만 원 이상으로 거래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나의 동료 시민 여러분, 미셸과 나는 지난 몇 주간 우리가 받은 모든 축복의 인사에 너무 큰 감동을 받았다. 하지만 오늘 밤은 내가 감사할 차례다. 우리가 의견을 같이 했든 그렇지 못했든 간에 미국 시민 여러분과의 대화는, 거실이든 학교든 농장이든 공장 바닥이든 식당이든 먼 군사 전초기지이든, 어디서든 이루어진 대화는 나를 정직하게 만들고 영감을 갖게 했으며 내가 계속 전진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리고 매일 여러분은 나를 가르쳤다. 여러분은 나를 더 나은 대통령으로,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었다.
20대 초반에 시카고에 처음 왔을 때 나는 내가 누구인가를 알아내고자 노력했다. 아직도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찾고 있지만 말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멀지 않은 곳의 폐쇄된 제철소 그늘에서 교회 단체와 함께 일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곳에서 투쟁하면서 상실에 직면한 노동자들의 조용한 위엄과 신앙의 힘을 목격했다. (청중들 “4년 더!”를 외침.) 그럴 수 없다. (웃음) 바로 이곳에서 나는 보통 사람들이 참여하고 연대하고 함께 요구할 때만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을 배웠다. 여러분의 대통령으로서 이미 8년을 보냈지만, 나는 아직도 그 사실을 믿는다.
“여러분이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었다.”라는 부분은 연설자에 대한 권위와 신뢰를 강조하는 에토스를, 파토스 즉, 청중과의 유대를 통해 강화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파토스로부터 끌어낸 에토스’라고나 할까. 혹은 고전적인 수사학의 여러 요소를 ‘서로가 공유하는 이야기 구조(narrative)’로 더 강하게 집약하는 효과를 갖게 하는, ‘오바마만의 스타일’이다. 연극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Who I am”, 이 부분을 활용한 점도 특별하다. 즉 나는 늘 내가 누구인가를 찾고자 노력했고, 당신들이야말로 내가 누구인가를 더 깊이 자각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결국 나도 더 나은 나를 만드는 부르심/소명을 받았고, 당신들도 그런 부르심을 받은 선택받은 사람이라는, 흑인 교회의 전형적인 설교에서 모티브를 따왔다고 하겠다.
이것이 나만의 믿음은 아니다. 그것은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우리 미국인들의 이상 즉, 스스로 통치한다는, 그 대담한 실천에 기초를 두고 있다. 우리 모두가 평등하게 창조되었고, 창조주에 의해 생명과 자유, 행복 추구라는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받았다는 확신이 있다. 이러한 권리는 자명하지만 한번도 저절로 실현된 적은 없다. 우리 시민들은 민주주의의 도구를 이용해 더 완벽한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 얼마나 급진적인 생각인가. 건국의 시조들이 우리에게 준 위대한 선물이다. 우리의 땀과 노력과 상상력으로 각자가 자신만의 꿈을 좇을 수 있는 자유와 공동의 이익, 더 큰 공공선을 성취하기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한다.
240년 동안 시민의 권리에 대한 새로운 요청이 새로운 세대에게 새로운 임무와 목표를 부여해 왔다. 그것은 애국자들이 폭정에 대항해 공화정을 선택하도록 이끌었다. 개척자들을 서부로 향하게 했고, 노예들이 철도를 타고 자유를 찾을 용기를 갖도록 인도했다. 이민자와 난민이 대양과 리오그란데 강(미국 남부와 멕시코 사이를 흐르는 강)을 가로질러 오도록 이끌었다. 여성이 투표용지를 향해 손을 뻗게 했다. 노동자들이 조직을 결성하도록 힘을 주었다. 군대가 오마하 해변과 이오지마,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목숨을 바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셀마(Selma, 흑인 인권 운동의 상징)에서 스톤월(Stonewall, 동성애 인권의 상징)까지 남성과 여성들이 그들의 목숨을 던질 각오를 하게 했던 이유였다. (박수갈채)
우리가 미국을 특별하다고 말할 때 우리가 의미하는 바는 이것이다. 우리 시민들이 처음부터 완벽한 존재였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변화의 힘을 보여 줬고 우리를 뒤따르는 사람들에게 더 나은 삶을 살도록 했다. 물론 우리의 전진은 평탄치 않았다. 민주주의의 역사는 항상 어려웠다. 논쟁의 여지가 있었다. 때로는 피를 흘렸다. 앞으로 두 걸음 나아가는 동안 우리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느낌을 자주 받는다. 그러나 긴 시간을 돌이켜보면 미국은 앞으로 나아갔다. 일부가 아닌 모두를 껴안겠다는 건국의 이념을 지속적으로 확대해 갔다. (박수갈채)
자치와 민주주의, 시민적 평등에 대한 아름다운 해석이 있는 부분이다. 자유와 공동의 이익을 결합할 수 있는 민주주의의 도구들을 노예와 여성, 이주민, 노동자, 동성애자 등이 활용할 수 있게 한 것이야말로 미국이 자랑하는 전통이라는 해석도 가치가 있다. 수많은 소수로 이루어진 다수(a majority of minorities), 이를 향한 미국인의 꿈, 모두를 껴안는 끊임없는 전진과 변화 등 민주주의에 대한 진보적 해석을 귀에 거슬리지 않게 표현하는 것이야말로 그의 큰 능력이 아닐 수 없다. 그의 말에서 나는 인간미 있는 진보를 느낀다.
만약 8년 전에 내가, 극심한 경기 침체에서 미국을 구해 내겠다고 말했다면, 자동차 산업을 재생시키고 역사상 가장 많은 일자리를 창출할 것이라고 말했다면, 그리고 쿠바 국민에게 새로운 시대를 열어 주겠다고 말했다면,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이란의 핵무기 프로그램을 중단시키겠다고 말했다면, 9·11의 주모자들을 찾아내 제거하겠다고 말했다면, 양성 모두 평등한 혼인의 권리를 얻을 것이고 2천만 시민들이 건강보험의 권리를 갖게 해주겠다고 말했다면, 이 모든 것을 그때 여러분에게 말했더라면 여러분은 목표가 너무 높게 설정되었다고 반대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해낸 일이다. 여러분이 한 일이다. 여러분이 그 변화, 그 자체였다. 여러분이 사람들의 소망에 응답한 것이었다. 여러분 덕분에 거의 모든 분야에서 미국은 우리가 시작했을 때보다 더 훌륭하고 더 건강해졌다.
소망과 부르심 그리고 응답이라고 하는 기독교적 정의론을 효과적으로 활용한 부분이다. 오바마 연설이 전형적인 수사학과 다른 점은 흑인 교회의 설교 언어를 적절할 때 효과적으로 결합하는 그의 연설 기법에 있다. 그는 시카고의 유니언처치에서 제레미아 라이트 목사의 설교를 들으며 흑인 교회의 설교 양식의 강점을 유심히 관찰하고 받아들였음에 틀림없다. 실제로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에 보면 흑인 교회의 찬송가 속에서 그는 노예 출신 흑인들의 피를 타고 흐르는 종교적 믿음과, 슬픔을 딛고 솟아오르는 긍정적 힘에 진정으로 감동받는 대목이 나온다. 그 경험을 통해 오바마는 비로소 기독인이 되었다.
(새로운 미국 대통령이 취임하는) 10일 후면 세계는 민주주의의 분수령이 될 한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도널드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을 인정할 수 없다는 청중들의 외침이 시작됨.) 그건 안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자유로이 선출된 한 대통령이 다음 대통령에게 평화적으로 권력을 이양하는 것. 부시 대통령이 나를 위해 그랬던 것처럼 나는 대통령 당선인 트럼프에게 최선을 다해 가능한 한 가장 친절한 권력 이양을 보장할 것이다. 우리가 직면한 많은 도전을 우리 정부가 해결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게 하는 것,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일이다.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도전에 맞서 우리의 과업을 실천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 지금 우리는 지구상에서 가장 부유하고 가장 강력하며 존경받는 국가로 남아 있다. 우리의 젊음, 우리의 투지, 다양성과 개방성, 위험을 감수하고 새로운 변화를 만들려는 우리의 무한한 능력은 미래가 우리 것임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잠재력은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조건에서만 실현될 것이다. 우리의 정치가 우리 시민의 품위를 더 잘 반영할 경우에만 가능할 것이다. 우리 모두가 당파성이나 특수 이익에 상관없이 지금 당장 절실히 필요로 하는 공통의 목표를 다시 가질 수 있을 때만 실현될 것이다.
우리가 패자일 때도 민주주의는 가치가 있다. 패자라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잘못이다. 민주주의에서는 패자도 여전히 기회와 가능성을 갖는다. 패자도 미국 민주주의가 갖는 공동의 가치들과 공통의 목표를 존중해야 한다. 당파성 이전에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존중이 있어야 한다. 이 부분은 전형적인 로고스 부분에 해당하지만, 선거 결과에 승복할 수 없다는 일부 시민들의 태도에 오바마가 단호하게, 원치 않는 결과와 상관없이 민주주의 원칙을 존중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 대목은 참으로 인상적이다. 선거 때마다 패자 진영에서 승복을 둘러싼 정당성 시비를 책임 모면용처럼 제기하는 우리의 경우를 비춰볼 때 시민의 품위를 높이는 정치 지도자의 태도가 왜 중요한지를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우리 정치인들 가운데는, 자신의 행동이 시민의 품위를 높일 수도 있고 반대로 시민들을 더 사납게 만들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많아 보인다.
내가 오늘 밤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의 민주주의가 처한 상황에 대한 것이다. 우선 민주주의는 획일성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 건국자들은 논쟁을 벌이며 싸웠고 결국 합의에 도달했다. 그들은 우리가 그들처럼 하기를 기대했다. 그들은 민주주의가 기본적으로 연대감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우리가 가진 외관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는 함께이며, 함께 일어서고 함께 넘어질 수밖에 없다는 신념이었다.
우리가 살아온 역사에서 그 연대를 위협했던 순간들이 있다. 지금의 21세기가 그렇게 시작되었다. 좁아진 세계, 커지는 불평등, 인구 통계학적 변화와 테러의 공포가 그것이다. 이 힘들은 우리의 안전과 번영만이 아니라 민주주의도 시험에 들게 하고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이 도전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이 문제가 우리 아이들을 잘 교육하고 좋은 일자리를 창출하고 이 나라를 보호하는 우리의 능력을 결정할 것이다. 우리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다양성’과 ‘차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대’와 ‘함께함’, 나아가 이를 ‘미래’와 연결하는 것은 오바마의 장기다. 그는 늘 정치적 과업을 아이들(미래 시민) 세대의 변화와 희망, 가능성에 관한 주제로 표현함으로써 당파적 관점을 보편적인 것으로 만드는 신묘한 효과를 만들어 낸다. 이 부분이야말로 우리의 정치인들에게 꼭 필요한 자질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도 모든 사람이 경제적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인식이 없다면 민주주의는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박수갈채) 다행히 좋은 소식은 오늘날 우리 경제가 다시 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임금, 소득, 주택 가치 및 은퇴자 예금이 모두 다시 상승하고 있다. 빈곤은 다시 줄어들고 있다. (박수갈채) 부자들은 공정한 몫의 세금을 내고 있다. 실업률은 10년 사이 최저 수준에 가깝다. 무보험자가 지금보다 적었던 적은 없다. (박수갈채)
건강관리에 드는 비용의 증가는 50년 만에 최저가 되었다. 내가 말했듯이, 비용을 적게 들이고도 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건강관리 시스템을 향상시켜 나가야 한다. 전보다 더 나은 계획을 세울 수 있다. 나는 그런 변화가 추구될 때마다 이를 공개적으로 지지할 것이다. (박수갈채) 이는 궁극적으로 우리가 헌신해야 하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인기를 얻거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서다. (박수갈채)
우리가 이뤄 낸 모든 진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중산층과 중산층에 들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사다리를 차버리고 소수만 부유해지는 한, 우리 경제는 잘 작동하지도, 성장할 수도 없다. (박수갈채) 경제적으로 논쟁적인 주제라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명백한 것은, 불평등이 우리의 민주적 사고를 잠식한다는 사실이다. 상위 1%가 더 많은 부와 소득을 누리고 있지만, 도심부와 농촌 지역의 많은 가정이 뒤처진 삶을 살고 있다. 해고당한 공장 노동자, 웨이트리스, 보건 의료 종사자는 간신히 생활비를 벌며 살아야 하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들은 게임의 규칙이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설정되어 있다고 믿고 있다. 자신들의 정부가 힘 있는 사람들의 이익만을 위해 봉사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우리 정치에서 냉소주의와 양극화를 가중시키고 있다.
오래 지속돼 온 지금의 이런 상황에서 벗어날 획기적인 방법은 없다. 나는 우리 무역이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공정해야 한다는 점에 동의한다. 그러나 경제적 파급의 물결은 해외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중산층의 수많은 일자리를 쓸모없게 만드는 자동화의 끊임없는 흐름에서도 비롯된다. 그래서 우리는 아이들에게 필요한 교육을 보장하는 새로운 사회 협약을 만들어야 한다. (박수갈채) 노동자들에게 힘을 주기 위해서! (박수갈채) 더 나은 임금을 위해 노조를 설립할 수 있도록! (환호) 지금과 같은 삶의 상황을 반영할 수 있게 사회 안전망을 개선하기 위해서! (박수갈채) 그리고 이 새로운 경제에서 가장 많은 이익을 거두는 기업과 개인이 그들의 성공을 가능케 한 국가에 대해 해야 할 의무를 회피하지 않도록 세법을 더 개혁하기 위해서! (환호) (박수갈채)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는 최선의 방법이 무엇이냐를 두고 우리는 다툴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목표 자체와 관련해서는, 지금에 안주할 수 없다. 우리가 모든 사람들을 위한 기회를 창출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지연시킬 불만과 분열이 앞으로 수년 내에 더 예리해질 것이다.
불평등과 그로 인해 냉소와 양극화가 민주주의의 위협이 되고 있음을 강조하고, 기회의 평등함이 주는 가치에 대해서는 여야나 진보-보수를 가로지르는 합의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방법을 둘러싸고 논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목표 자체를 당파적으로 분열시키는 것에 대한 경고를 담고 있기도 하다. 자유기업도 그들의 성공을 가능하게 해준 국가와 사회에 책임감을 가져야 정의의 원칙에 부합하며, 중산층은 물론 노동자와 약자들에게 공정한 기회를 가져다주는 사회 협약도 정의의 원칙에 부합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다양성 속의 연대를 지향하는 ‘다원주의적 민주주의’에 대한 최대 위협은 불평등의 심화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민주주의에 대한 두 번째 위협이 있다. 그것은 미국 국가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문제다. 내가 당선된 이후 인종적 차이가 사라진 미국을 전망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러한 전망은 아무리 좋은 의도였다고 해도 결코 현실적이지 않았다. 인종 문제는 여전히 강력하게 남아 있다. (박수갈채) 이는 우리 사회를 분열시키는 힘이다.
인종 간의 관계가 10년, 20년 혹은 30년 전보다는 더 개선되었고, 나는 그 점을 알 수 있을 정도로는 오래 살았다. (박수갈채) 이는 통계로만 알 수 있는 사실이 아니다. 정치적 스펙트럼을 가로질러 존재하는 젊은 미국인들의 태도에서 우리는 그것을 본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아직 우리 모두가 해야 할 더 많은 일이 있다. (박수갈채)
모든 경제적 문제가 근면한 백인 중산층과 무가치한 소수 인종 사이의 다툼으로 규정된다면, 그늘 속에 있는 모든 노동자들은 부스러기만을 위해 싸우게 될 것이다. 부유층은 그들만의 조세 피난처로 더 많은 돈을 가져갈 것이다. (박수갈채) 우리가 모습이 다르다는 이유로 이민자 자녀들에게 투자하기를 꺼린다면, 우리 자신의 아이들이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줄이게 된다. 그 갈색 피부의 아이들이 결국 미국 노동력의 큰 부분을 제공할 텐데도 말이다. (박수갈채)
그간 우리는 경제가 반드시 제로섬 게임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게 되었다. 작년에는 모든 인종, 모든 연령층, 남성 및 여성의 소득이 올랐다. 인종차별에 대해 앞으로도 진지하게 접근한다면 고용, 주택 및 교육, 그리고 형사 사법 제도에서 차별을 금지하는 법률을 준수해야 할 것이다. (박수갈채) 그것이 우리의 헌법과 가장 고결한 이상이 요구하는 바이다. 그러나 법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마음이 바뀌어야 한다. 하룻밤 사이에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사회적 태도가 바뀌는 데는 수 세대가 걸리기도 한다. 그러나 점점 더 인종적으로 다양해지는 상황에서 우리의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우리 각자는 미국 소설 속 위대한 등장인물의 하나인 애티커스 핀치(Atticus Finch 『앵무새 죽이기』의 주인공)의 충고에 유의해야 한다. 그는 말했다. “누구든 그의 살갗 안으로 들어가 그를 느낄 때까지... 그의 관점에서 사물을 생각하기 전까지는 결코 진실로 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제 다루기 조심스러운 인종 문제에 대한 주제로 넘어왔다. 아마 재임 기간 8년 내내 인종 문제에 대해 이보다 더 직접적으로 표현한 연설은 없었던 것 같다. 다만 전과 마찬가지로 인종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정의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은 똑같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인종 문제에 대한 당사자로서의 느낌을 전보다 더 강조한다는 생각은 든다. 많은 정치학자들이 지적하듯, 미국에서 “인종 문제는 계급 문제와 거의 수학적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오바마는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 인종주의적 차별, 미국 민주주의의 치부이지만 난 특정 집단을 소외시키고 또 배제하는 심리에 있어서는 한국 사회도 별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런 문제와 관련해 자극적인 표현을 절제하고 문제를 좀 더 실체적으로 다루려는 성실하고 책임 있는 노력, 즉 오바마 같은 접근이 부족한 게 아닌가 싶을 때도 많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이렇다. 흑인들과 여타 사회적 약자들과 관련해 우리 자신의 정의를 세우는 매우 현실적인 투쟁, 바로 이 투쟁에 이 나라의 많은 이들이 직면한 도전을 결합시키는 것이다. 난민이나 이민자, 농촌 빈곤층 혹은 트랜스 젠더, 나아가 중년의 백인 남성도 경제적・문화적・기술적 변화로 인해 자신의 세계가 거꾸로 처박히는 걸 보게 되었다. 우리는 그들에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박수갈채) 노예제도와 짐 크로우 법(Jim Crow laws, 1876년부터 1965년까지 존재했던, 기만적인 인종차별 법)의 영향이 1960년대에 홀연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의미다. 소수자 그룹이 불만을 표명할 때 그들은 단지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활동에 참여하거나 정치적 올바름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다. 평화로운 시위를 할 때도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특별한 대우가 아니다.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우리의 건국자들이 약속한 평등한 대우다. (박수갈채)
이것은 미국을 조국으로 삼아 태어난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상기시킨다. 오늘날 이민자에 관한 고정관념은 거의 글자 그대로 아일랜드인, 이탈리아인, 폴란드인에게도 부과된다. 그리고 그 결과가 보여 주듯이, 미국은 이 새로운 이주자들의 존재 때문에 약해지지 않았다. 새 이주자들은 이 나라의 신조를 받아들였고 이 나라는 더 강해졌다. (박수갈채) 그래서 우리가 처한 상황과 상관없이 우리 모두는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우리가 이 나라를 사랑하는 만큼, 동료 시민들도 이 나라를 사랑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해야 한다. 우리가 그러듯이 그들도 근면의 가치와 가정을 소중하게 여긴다고 전제해야 한다. 우리의 자녀들처럼 그들의 자녀들도 마찬가지로 호기심이 넘치고, 희망을 품고 있으며,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해야 한다. (박수갈채)
마키아벨리의 문장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민중은 고결하다. 민중은 귀족처럼 지배해야만 자신의 지위를 지키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단지 불평등하게 지배당하지 않기를 원할 뿐이기 때문이다.” 인종 문제 해결을 요구한다고 해서, 특별한 대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핵심은 평등한 대우다. 소수 인종도 아이를 사랑하고 애국심을 가지며, 동료애와 호기심을 발휘할 뿐 아니라 사랑받을 만한 존재라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하는 대목에서, 왜 약자들은 자신들의 부당한 처지를 설명하고 이해를 구해야 하는지가 슬플 뿐이다. 이를 넘어서 오바마가 흑인들에게 요청하는 것은 다른 소수자들, 백인 노동자 및 광범한 사회 하층과의 연대다. 그리고 이 지점이 흑인 사회운동 내 급진파들과 오바마가 대립하는 구분선이다. 그들이 흑인만의 정체성과 반체제적 비판 의식을 고조시키는 접근을 강조한다면 오바마는 언제나 체제 안에서의 더 넓은 연대를 통해 가능성을 확대해 가는 접근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기는 쉬운 것이 아니다. 우리 중 많은 이들은 이웃이나 대학 캠퍼스, 예배당, 소셜 미디어에서 자신의 세계에 머물기 쉽다. 자신과 비슷하게 생긴 이들과, 유사한 정치적 전망을 가진 사람들에 둘러싸인 채, 우리가 갖고 있는 가정을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느끼기 쉽다. 적나라한 당파성의 정치가 그렇게 만든다. 경제적·지역적・계층적 분열, 취향대로 갈가리 찢긴 우리의 언론, 이 모든 것은 편 가르기를 자연스럽고 심지어 불가피하게 보이게 만든다. 그리고 점점 더 그런 허상 속에 머무르는 것을 안전하게 여기면서 우리는, 실재하는 증거에 기초해 우리의 견해를 말하는 대신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우리의 의견에 맞는 정보만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박수갈채) 우리 민주주의에 대한 세 번째 위협은 바로 이것이다.
정치는 이념과 생각의 싸움이다. 이것이 우리의 민주주의가 설계된 방식이다. 건전한 토론 과정에서 우리는 서로 다른 목표와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의 우선순위를 정한다. 그러나 사실에 대한 공통된 기준이 없고, 새로운 정보를 인정하지 않고, 상대방이 공정한 지적을 할 수 있다는 것과, 과학과 이성이 중요하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서로는 계속해서 과거만을 이야기할 것이다. (박수갈채) 그러면 우리는 공통점을 찾거나 타협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이것이 우리를 그렇게나 자주 정치에 무관심하게 만드는 원인의 일부가 아니겠는가? 선출된 공직자가 기업을 위해 세금을 삭감하려는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아이들을 위해 유치원에 돈을 쓰고자 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분노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 당의 윤리적 과실을 눈감아 주면서 어떻게 다른 당의 같은 실수를 공격할 수 있는가? 그것은 단지 부정직함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사실(facts)을 입맛에 맞게 선별하는 것이고, 그것은 자멸하는 길이다. 내 어머니께서 말씀하시곤 했던 것처럼, 그렇게 되면 사실(facts)이 우리의 발목을 잡고 결국 우리를 무너뜨리게 만든다.
민주주의의 세 번째 위협으로 양극화 정치, 적대와 증오의 정치, 서로 다른 사실만 말하는 정치, 그 결과 사회를 냉소와 분열로 이끄는 정치에 대해 말한다. 자신들만 알고 있는 사실이 있다고 여기게 되면 협력은 어렵다. 하지만 의견은 달라도 공유할 수 있는 사실과 공통의 기반(common ground)은 언제나 넓게 열려 있다고 보는 사람이 오바마다. 그래서 이어지는 오바마 연설의 내용은 합의할 수 있는 미래 의제가 있는데도 양극화 정치 때문에 그 의제들을 다루지 못하면 그 부담은 미래 세대에게 떠넘겨질 수밖에 없음을 강조하기 시작한다. 이 대목에서 2015년 유승민 당시 새누리당 원내 대표가 진보와 보수 사이에도 합의의 여지가 넓다고 강조한 국회 연설이 생각났다. 그때 그 좋은 연설 때문에, 최근 유승민이 보여 주는 정치적 리더로서의 한계가 더 아쉽게 여겨질 정도다. 아무튼 차이와 분열의 효과를 갖는 말보다 공동의 목표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기반을 넓히는 말을 해야 정치가이지, 그렇지 않으면 말이 흉기가 되어 정치도 사회도 시민도 해결할 수 없는 분열의 상처를 안게 된다.
우리 모두 기후 변화의 도전을 받아들이자. 불과 8년 만에 우리는 외국 석유에 대한 의존도를 절반으로 줄였다. 우리는 재생 가능한 에너지를 두 배로 늘렸다. 지구를 구하기 위한 약속에 합의하도록 세계를 이끌었다. (박수갈채) 과감한 조치가 없으면 우리 아이들은 기후 변화의 문제를 토론할 겨를도 갖지 못한 채 그로 인한 결과를 처리하기에 급급해질 것이다. 더 많은 환경 재해, 더 많은 경제적 혼란, 피난처를 찾는 난민들의 파도. 이제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최선의 접근 방식에 대해 논의할 수 있고 또 논의해야 한다. 문제를 단순히 부인하는 것은 미래 세대를 배반할 뿐만 아니라 이 국가의 근본정신, 즉 우리의 건국자를 인도했던 혁신과 실용적인 문제 해결의 근본정신을 배반하는 것이다. (박수갈채) 바로 그 정신이 중요하다.
그것은 우리를 경제 강국으로 만든, 계몽의 정신이다. 키티 호크(Kitty Hawk, 라이트 형제의 첫 비행 장소)와 케이프커내버럴(Cape Canaveral, 미국 케네디 우주 센터가 있는 곳)에서 날아오른 정신, 질병을 치유하고 모든 사람의 주머니에 컴퓨터를 넣게 했던 바로 그 정신이다. 이성과 기업가 정신에 대한 믿음, 그리고 힘에 대한 권리의 우위는 대공황 기간 동안 파시즘과 폭정의 유혹에 저항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 때문에 우리는 다른 민주주의 국가들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질서를 구축할 수 있었다. 질서는 군사력이나 국가 간 관계에 기초를 둔 것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원칙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다. 법의 지배와 인권 그리고 종교선택의 자유와 언론·집회의 자유가 그것이다. (박수갈채)
질서와 안보에 대한 정치적 해석이 이제 시작된다. 여기부터는 페리클레스를 연상시킨다. 최고의 안보는 군사적이기보다는 법의 지배 및 평등한 자유와 같이 목숨 걸고 지킬 만한 공적 가치에 있다. 이런 가치를 위협하는 것 역시 군사적인 것이 아니다. 그건 공포와 두려움이다. 두려움과 공포의 동원은 정치적 지배의 가장 보편적 유형이지만, 그것이 시민과 사회를 분열시키는 부정적 효과를 낳을 때도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래서 오바마와 특히 미셀 오바마는 늘 두려워하지 말라고 강조한다. 두려움은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꺾는 가장 큰 위협이기 때문이다.
그 질서가 지금 도전받고 있다. 먼저 이슬람을 앞세우는 폭력적인 광신자들에게 도전받고 있다. 더 최근에는 전제적인 외국자본에 의해서도 도전받고 있다. 그들은 자유 시장과 열린 민주주의, 시민사회 그 자체를 그들이 가진 권력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한다. 이들이 민주주의에 주는 위험은 자동차 폭탄이나 미사일보다 훨씬 크다. 그들은 변화에 대한 두려움을 상징한다. 모습이 다르거나 말과 기도하는 법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이다. 지도자들에게 책임을 묻는, 법의 지배에 대한 경멸이다. 다른 의견과 자유로운 생각에 대한 불관용이다. 그것은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옳은지를 결정하는 궁극적 중재자는 칼이나 총, 폭탄 또는 선전, 선동에 있다는 믿음이다.
어떤 외국의 테러리스트 조직도 지난 8년 동안 우리 국토에 대한 공격을 성공적으로 계획하고 수행한 적은 없다. 제복을 입은 우리 남성과 여성의 놀라운 용기 때문이다. 우리 군대를 지원하는 정보 요원들과 법집행 기관들 그리고 외교관들 덕분이다. (박수갈채) (환호) 보스턴과 올랜도, 샌 버너디노, 포트 후드(테러가 발생한 대표적인 지역들)는 극단주의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었지만, 우리 법 집행 기관은 그 어느 때보다 더 효과적이었으며 경계심을 보여 주었다. 우리는 빈 라덴(Bin Laden)을 비롯한 수만 명의 테러 분자들을 제거했다. (환호) (박수갈채) 우리가 이끄는 세계적인 반테러 연합은 ISIL(대표적인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 단체)을 상대로 그들의 지도자를 제거하고 그들 영토의 절반 정도를 빼앗았다. ISIL은 파괴될 것이다. 미국을 위협하는 세력은 누구도 안전하지 않을 것이다. (환호) (박수갈채) 군에 복무하고 있거나 복무한 모든 사람들에게, 여러분의 최고 사령관이 된 것이야말로 내 평생의 영광이었다. (환호) 그리고 우리 모두는 여러분에게 깊은 감사의 빚을 지고 있다. (환호) (박수갈채)
그러나 우리 삶의 방식을 보호하는 데는 군대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민주주의는 두려움에 빠지면 좌절할 수 있다. 시민으로서 우리가 외부의 침략에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우리는 현재의 우리를 만든 가치를 약화시키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박수갈채) 그래서 지난 8년 동안 나는 테러와의 전쟁을 좀 더 확고한 법적 근거 위에 두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우리는 고문을 끝내고 관타나모 수용소를 폐쇄하고 사생활과 시민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감시에 관한 법률을 개정했다. (박수갈채)
나는 이슬람 미국인에 대한 차별을 거부한다. (환호) 그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애국심을 가지고 있다. (환호) (박수갈채) 그래서, (박수갈채) 우리는 (박수갈채) 그래서 우리는 민주주의와 인권, 여성의 권리와 성 소수자의 권리를 확대하기 위한 커다란 세계적 싸움에서 물러설 수 없는 것이다. (박수갈채) 우리의 노력이 얼마나 불완전하든, 그러한 가치를 존중하는 것이 당장 무슨 이익이 있냐는 회의적 견해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미국을 방어하는 일의 한 부분이다.
극단주의와 편협함, 종파주의와 국수주의에 맞선 싸움은 권위주의와 민족주의의 공격에 맞선 싸움의 일부이다. 자유와 법의 지배에 대한 존중의 범위가 전 세계적으로 줄어들면 국가 내부는 물론 국가 간 전쟁의 가능성은 증가하고 결국 우리의 자유는 위협받게 될 것이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맞서자. ISIL이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려고 하겠지만, 우리가 이 싸움에서 우리의 헌법과 우리의 원칙을 배반하지 않는 한 그들은 미국을 굴복시킬 수 없다. (박수갈채) 우리를 대변하는 가치들을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 작은 이웃 국가들을 괴롭히는 대국처럼 굴지 않는다면, 러시아나 중국 같은 우리의 경쟁 국가들이 전 세계에서 우리의 영향력에 맞설 수는 없다.
언론의 자유를 포함한 기본권이야말로 미국 사회를 안전하게 만드는 민주적 보루다. 미국은 전시에도 반전 집회를 할 수 있는 나라다. 베트남 전쟁 중에도 반전 집회가 열릴 수 있었고, 버락 오바마도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집회에서 인상적인 연설로 주목받는 정치가가 된 나라다. 그렇기에 테러 문제 역시 악과 싸우는 문제이기 이전에 기본권 보호와 법의 뒷받침을 더 단단히 하는 것이어야 한다. 무슬림은 잠재적 테러 분자로서가 아니라 보호되어야 할 인권을 가진 존재로 먼저 이해되어야 한다. 그들의 인권이 침해되면 곧 나의 인권 보호도 약해진다. 법 집행의 공정성과 평등함의 문제다. 두려움의 동원, 공포의 동원을 통해 기본권을 침해하는 양극화 정치에 대한 비판 내용이 좋다.
내가 말하려는 것의 마지막 요점은, 우리의 민주주의는 우리가 그것을 당연하게 여길 때마다 위협받는다는 점이다. (박수갈채) 우리 모두는 지지하는 정당에 관계없이 민주주의를 제도적으로 굳건히 세우는 일에 헌신해야 한다. (박수갈채) 미국의 투표율이 선진 민주주의 국가 중 가장 낮을 때, 우리는 투표를 하기 쉽게 만들어야지 더 어렵게 만들어선 안 된다. (박수갈채)
우리 공적 기관에 대한 신뢰가 낮을 때 우리는 정치에 미치는 돈의 부정적 영향을 줄이고 공공서비스의 투명성과 윤리의 원칙을 고수해야 한다. 의회가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우리는 자신의 지역구에서 극단적 발언을 하는 정치인의 기세를 꺾고 상식을 따르는 정치인을 격려해야 한다. (박수갈채) 그러나 이 모든 일은 저절로 일어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참여에 달려 있다. 권력의 추가 어느 방향으로 흔들리는지와 관계없이 시민권에 수반되어 있는 책임을 받아들이는 우리 각자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헌법은 놀랄 만큼 아름다운 선물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양피지에 불과하다. 그것 스스로는 힘이 없다. 우리, 시민이(We, the People 미국 헌법 전문의 첫 표현) 거기에 힘을 부여하는 것이다. 우리, 시민이 헌법에 의미를 부여한다. 우리의 참여와 선택, 그리고 우리가 만들어 낸 단결을 통해서다. 우리가 자유를 위해 일어설 수 있는지 아닌지, 우리가 법의 지배를 존중하고 이를 강제할 수 있을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미국은 깨지기 쉬운 나라가 아니다. 그러나 자유를 향한 우리의 오랜 여정이 가져올 성과는 보장된 것이 아니다.
고별 연설에서 조지 워싱턴은 자치(self-government)가 우리의 안전, 번영 및 자유의 토대라고 했지만, “각기 다른 원인 때문에, 또 각기 다른 영역에서 많은 고통이 생겨나 우리 마음속에 있는, 이 진실에 대한 믿음을 약화시킬 수 있다.”라고 썼다. 그래서 우리는 이 진실을 “우리 자신의 자랑스러운 열망”으로 지키고 보존해야 한다. “우리 조국을 분열시키려는 모든 시도,” 우리를 하나로 만드는 “그 신성한 유대 관계를 약화시키려는 모든 시도에 대해 시작부터 거부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수갈채)
그러한 신성한 유대 관계는 우리가 정치적 대화를 소모적인 것으로 만들 때마다 약화된다. 그러한 유대 관계가 약화되면 성실한 사람들이 공직에 들어오지 못한다. 의견이 다른 동료 미국인에 대해 적의를 품거나, 그를 잘못 이끌린 사람이 아니라 악의적인 사람으로 간주할 때마다, 우리는 그 신성한 유대 관계를 약화시키게 된다. 우리 중 누군가를 다른 사람보다 더 미국적라거나 덜 미국적이라고 정의할 때마다, 우리는 그러한 유대를 약화시킬 수 있다. (박수갈채) 우리의 전체 시스템을 필연적으로 부패할 수밖에 없다고 무책임하게 생각할 때마다, 그리고 우리가 지도자가 선출될 때 우리 자신은 무엇을 했는지 돌아보지 않은 채 그 지도자를 비난하기만 하면 그러한 유대는 약화될 수밖에 없다. (박수갈채)
견해가 다른 사람을 대하며, 그런 견해에 도달하는 논리적 과정이 잘못된 것에서 원인을 찾기보다 그 사람 자체를 혐오하고 공격하는 것은 비겁하다. 그건 합리적 논의나 건강한 경쟁을 망치는 데 그치지 않고 민주정치의 역할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자를 필요로 한다. 민주주의를 당연시하는 순간 민주주의도 자멸할 수 있다.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 자체도 중요한 공공 정책이다. 이런 내용을 말한 뒤, 이어지는 내용이 멋지다. 시민이라는 위대한 직분에 대한 강조가 그것이다.
우리의 민주주의를 지키려 애쓰고 수호하는 일은 우리 각자에게 달려 있다. 이 위대한 나라를 끊임없이 개선하도록 우리에게 부여된 이 즐거운 임무를 기꺼이 껴안자. 주어진 모든 외견상의 차이에도 우리 모두는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직분인 시민이라는 자랑스러운 역할을 똑같이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수갈채)
시민(Citizen), 그것은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우리 민주주의가 요구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여러분을 필요로 한다. 선거가 있을 때뿐만 아니라, 여러분 자신의 소소한 이해관계가 걸려 있을 때만이 아니라 일생의 전 기간에 걸쳐, 시민의 역할이 필요하다. 여러분이 인터넷에서 낯선 사람과 논쟁하는 것에 지쳤다면, 실제 생활 속에서 그들 중 한 사람과 이야기해 보라. (박수갈채) 뭔가를 고쳐야 할 필요가 있다면, 신발 끈을 매고 조직을 결성하자. (박수갈채) 선출직 공무원에 실망하게 되면 사람들의 서명을 받으러 나서고, 그 공직에 직접 출마하자. (박수갈채) 뒤로 물러나 있지 말고 현장에 나타나자. 그 안에 뛰어들자. 달아나지 말고 계속 노력하자.
때로는 이기겠지만 때로는 질 수도 있다. 상대의 선의에 의존하는 것이 위험한 상황을 만들 수 있을지 모른다. 그 과정에서 당신은 실망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시민적 사업의 일부가 되어 참여하고 지켜내면서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 주게 만들 수 있는 행운을 만날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이 여러분에게 활력과 새로운 자극을 가져다 줄 수 있다. 그러면 미국과 미국인에 대한 여러분의 믿음이 확고해질 수도 있다. 내 경우에는 확실히 그랬다. (박수갈채) 지난 8년 동안 나는 젊은 졸업생들과 우리의 신입 군 장교들에게서 희망찬 표정을 보았다. 나는 찰스턴 교회에서 슬픔에 잠긴 가족과 함께 애도하며 은혜를 얻었다. 나는 우리 과학자들이 마비된 사람이 감각을 회복하도록 도와주는 것을 보았다. 나는 한때 죽은 것으로 치고 단념했던 상처 입은 전사들이 다시 걷는 걸 보았다.
의사와 자원 봉사자가 지진 발생 후 재건축을 하고 유행병을 퇴치하는 것을 목격했다. 어린 아이들을 보면서 우리는 피난민들을 돌보고, 평화 속에서 협력하고, 서로를 보살필 의무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평범한 미국인들에게 변화를 만들 힘이 있다는 그 믿음, 이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않은 곳에서 오래전 내가 갖게 된 그 믿음 덕분에 나는 내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보상을 받았다. 나는 여러분에게도 그런 믿음이 있기를 희망한다. 오늘 밤 여기에 있는 분들이나 집에서 지켜보는 사람들 중 일부는 2004년과 2008년, 2012년에 우리와 함께했다. (환호) (박수갈채) 아마도 여러분 가운데 일부는 우리가 이 모든 것을 함께 이끌어 냈다는 것이 여전히 안 믿겨질지 모르겠다. (환호) 당신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나도 안 믿겨진다. (웃음)
이제부터는 사적인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냥 읽기만 하면 된다. 그 끝은 희망, 담대한 희망이다. 우리는 할 수 있고, 해냈고, 앞으로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우리 스스로 중요한 사람이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희망은 가능의 정치가 필요로 하는 최고의 시민 정신이다!
미셸... (환호) (박수갈채) 사우스 사이드의 미셸 라본 로빈슨(Mihelle LaVaughn Robinson).(환호) (박수갈채) 지난 25년 동안 당신은 나의 아내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 아이들의 엄마였고 나의 가장 친한 벗이었다. (환호) (박수갈채) 당신은 당신이 원치 않았던 역할을 맡아야 했다. 그리고 당신은 우아함과 투지, 그리고 아름다움과 유머로 그 역할을 당신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환호) (박수갈채) 당신은 백악관을 모두를 위한 곳으로 만들었다. (환호) 그리고 새로운 세대는 당신을 역할 모델로 삼아 그 시야를 더 높은 곳으로 설정하고 있다. (환호) (박수갈채) 당신은 나를 자랑스럽게 했고, 이 나라를 자랑스럽게 만들었다. (환호) (박수갈채)
말리아와 사샤. (환호) 아주 낯선 상황에서도 너희들은 놀라운 젊은 여성으로 자랐다. (환호) 너희들은 현명하고 아름답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너희가 친절하고 사려 깊으며 열정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환호) (박수갈채) 너희는 수년 동안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부담을 잘 견뎌 냈다. 내 인생에서 한 모든 것 중에서, 너희의 아빠가 된 것을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박수갈채)
조 바이든에게 ... (환호) (박수갈채) 스크랜턴에서 태어난 놀라운 사람. (환호) 델라웨어(그의 지역구)가 가장 좋아하는 남자가 된 사람. 당신은 내가 대통령 후보 지명자로서 내린 첫 번째 결정이었고, 최고의 결정이었다. (환호) (박수갈채) 당신이 위대한 부통령이었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와 더불어 내가 형제를 얻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당신과 질(Jill, 아내)을 가족처럼 사랑한다. 당신이 보여 준 우정은 우리 삶의 큰 기쁨 중 하나였다. (박수갈채)
나의 뛰어난 직원들에게. 8년 동안, 그리고 여러분 중 일부의 경우 훨씬 더 오랜 기간 동안, 나는 여러분에게서 힘을 얻었다. 매일 나는 여러분이 보여 준 것, 여러분의 진심 어린 열정과 여러분이 가진 인격의 힘 그리고 여러분이 견지해 온 이상을 잊지 않고 되돌아보려고 노력했다. 나는 여러분이 성장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멋진 삶의 여정을 시작하는 것을 지켜봤다. 힘들고 좌절하게 만드는 시기였지만, 여러분은 워싱턴 D.C.의 나쁜 모습(권력과 영향력)에 물들지 않았다. 그간 우리가 이뤄낸 모든 성취보다, 앞으로 더 얼마나 놀라운 것을 성취하게 될 것인지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훨씬 더 여러분들이 자랑스럽다. (박수갈채)
그리고 여기 있는 여러분 모두에게, 익숙하지 않은 마을로 이사한 모든 선거 조직원 여러분, 이들을 환영해 준 모든 가족 여러분, 호별 방문을 위해 문을 두드린 모든 자원 봉사자 여러분, 처음으로 투표권을 행사한 모든 청년 여러분, 변화의 시기를 살면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모든 미국인 여러분, 여러분이야말로 누구나 희망하고 바라는 최고의 지지자이자 최고의 조직원이다. 나는 영원히 감사할 것이다. 여러분이 세상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박수갈채)
여러분이 실제로 그렇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 밤, 우리가 시작했을 때보다 더 낙관적인 마음으로 이 무대를 떠난다. 우리가 한 일은 미국 시민을 도운 것에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 많은 청년들에게 변화를 만들 수 있다고 믿게 만든 것도 여러분이었다. 각자의 마차를 자신의 것보다 더 큰 무언가에 연결하라고 용기와 영감을 줬다. 이기적이기보다는 이타적이고, 창조적이며 애국적인 다음 세대가 다가오고 있다. 나는 여러분을 이 나라 모든 곳에서 보았다. 여러분은 공정하고 정의롭고 포용적인 미국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다. 여러분은 끊임없는 변화가 미국의 특징이자,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받아들일 만한 것임을 알고 있다. 여러분은 기꺼이 민주주의를 전진시키는, 그 어려운 일을 수행할 것이다. 여러분 세대가 곧 우리 세대의 규모보다 많아질 것이다. 그래서 나는 미래가 잘 될 것이라고 믿는다. (박수갈채)
나의 동료 미국 시민 여러분, 여러분을 섬기는 것이야말로 제 삶의 영예였다. 나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남은 삶 동안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여러분과 함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여러분이 실제로 젊든 혹은 마음이 젊든, 여러분의 대통령으로서 마지막 부탁을 드리겠다. 여러분이 8년 전 제게 기회를 줬을 때와 똑같은 요청이다. 나는 여러분이 믿음을 갖기를 간청한다.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나의 능력이 아니라 여러분의 능력에 있다.
우리의 나라를 세운 여러 문서들 속에 적혀 있는 그 신념을 지키라는 부탁을 드린다. 노예들과 노예제 폐지론자들이 서로 속삭였던 그 생각, 이민자들과 정착민들, 정의를 위해 행진했던 사람들이 함께 노래 불렀던 그 정신, 외국의 전장에서 달의 표면에까지 깃발을 꽂았던 이들이 재차 확인했던 그 신조를 말이다. 그것은 앞으로 더 써내려 갈 이야기를 가진 모든 미국인의 가슴 깊은 곳에 있는 신념이다. 예스, 우리는 할 수 있다!(Yes, we can!) (박수갈채) 예스, 우리가 해냈다!(Yes, we did!) (박수갈채) 예스, 우리는 할 수 있다! (박수갈채) 고맙다. 신의 축복이 있기를. 계속해서 미국을 축복해 주시기를 바라며. 감사한다. (박수갈채)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
정치학을 전공한 정치학자이다. 정치의 현장 가까이에서 읽고 쓰고 말하는 일을 한다. 실천으로서의 정치와 학문으로서의 정치학이 엄격하게 분리되기보다는 어느 정도 중첩되기를 바란다. 그것이 정치학의 본래 모습이자 애초의 이상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정치가의 존재를 시야에서 놓치지 않을 때 정치학적 논의 역시 훨씬 더 풍부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뿐만 아니라 다른 누구보다도 시민의 적법한 대표라 할 수 있는 정치가들이야말로 정치학의 개념과 이론을 선용할 수 있는 존재가 되길 바란다. 그래야 민주정치의 여러 규범과 가치가 시민들의 삶의 양식 속으로 더 깊이 파고들어 지속 가능한 전통으로 안착할 수 있으리라 본다.
버락 오바마, 늘 인종적 편견에 시달린 희생자이면서 동시에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누구인가”를 묻는 여론조사에서 자주 1위를 하는 전직 정치 지도자다. 현직일 때보다 퇴임 후 더욱 사랑받는 남자로도 유명하다. 왜 여전히 오바마인가.
청년의 모습으로 시작한 정치가의 길이었지만 대통령 임기 8년 동안 너무 늙어 버린 모습을 보면서, 정치가라는 직업이 정신적으로 얼마나 고된 일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이런 정치가가 있다면 지지자나 시민 역할도 잘해 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정치적 말의 힘 ⑤
민주주의를 지켜야 한다 : 버락 오바마 <2017년 1월 10일 대통령 고별 연설>
글쓴이_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
버락 오바마, 늘 인종적 편견에 시달린 희생자이면서 동시에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누구인가”를 묻는 여론조사에서 자주 1위를 하는 전직 정치 지도자다. 현직일 때보다 퇴임 후 더욱 사랑받는 남자로도 유명하다. 왜 여전히 오바마인가.
그는 아프리카 흑인 노예의 후손이다. 그가 흑인이라는 사실을 빼고, 왜 오바마인가를 말할 수는 없다. 일반적으로 흑인 노예제는 “현대 서구 문명이 안고 있는 가장 큰 원죄(original sin)”라고 불린다. 미국은 그 대표적인 나라다. 미국 자본주의 발전을 흑인 노예제 없이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은 우리 모두 잘 아는 사실이다. 지금도 여전히 흑인의 검은 신체는 백인 인종주의자들에게는 물론 공권력에 의해서도 함부로 파괴되곤 한다. 아프리카를 포함해 비서구 지역 전반에 드리웠던 식민주의와 인종주의의 상처를 그대로 안고 있는 “흑인 노예의 후손”이 오바마다. 그런 그가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었다.
그는 소수 인종의 민주적 성취를 상징한다. 지금 미국의 전체 시민 가운데 흑인 시민은 얼마나 될까? 강의 때마다 수강자들에게 물어보는데, 대개는 실제보다 많게 생각한다. 여러분은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는가? 실제로는 약 8분의 1이다. 12퍼센트 정도 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 미국에서, 게다가 흑인 시민에 대한 인종차별이 심한 곳에서 소수 인종 대표로서만이 아니라 다수 시민의 지지를 얻어 최고 통치자 자리에 오른 것이다. 민주주의가 아니고서는 이룰 수 없는, 놀라운 정치적 성취가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진보적 이상을 간직한 사람이다. 흑인 노예의 후손이고 민주적 성취를 상징한다는 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그의 진보적 이상이 가진 인간적 가치가 아닌가 한다. 그는 보수적인 정치가를 자극하거나 모욕하는 것으로 자신이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는 비이성적 진보파들과 달랐다. 잘 알다시피, 그는 2008년 제44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2012년 재선에 성공해 2016년까지 8년 동안 미국의 ‘최고 시민 사령관’ 역할을 했다. 그 기간 동안 그는 전 세계에서 가장 환영받는 정치인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의 행적과 말은 언론 기사와 방송, 뉴미디어를 타고 세계 시민에게 회자되었다. 무엇 때문일까? 인종과 종교 등 인간 사회를 불평등하게 만드는 수많은 차별에 항의하면서 좀 더 공정하고 자유로운 인간 사회가 되기를 바라는 세계 시민의 바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다원주의적 평등을 실천한 사람이다. 오바마는 누구와도 친구처럼 대화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달리 말하면 평등하게 상대하는 것의 가치, 달리 말해 민주주의가 필요로 하는 ‘시민적 정중함’(civility)의 가치를 실천할 줄 아는 정치가였다.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상대를 비난하거나 큰소리치는 것이 아니라, 전보다 더 나은 가능성을 찾고 꾸준히 과업을 확대해 가는 일의 미덕을 강조했다. 소득 불평등과 인종차별을 포함해 여러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면 “화내는 것에서 멈추지 말고 노동조합을 찾아가라. 노조원이 되어 보라. 노조 조직률이 높은 지역이 교육적 성취도 높고 범죄로부터도 덜 고통 받는다는 것을 그간의 통계 지표가 보여 주고 있다.”고 말한, 내가 아는 유일한 현직 대통령이었다. “누군가 굶는 아이가 있다면 설령 그 아이가 내 아이가 아닐지라도, 그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 내 마음이 가난해진다.”고 말했던 정치인이었다. 무슬림들이 부당하게 차별당할 때 그들의 회당을 조용히 방문했고, 히로시마 원폭 피해에 대해 미국의 책임을 말할 수 있는 용기도 발휘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좀 더 평화롭고 좀 더 정의롭고 좀 더 공정한 세상을 향해 좌절하지 말고 꾸준히 노력할 것을 요청했던 민주주의 지도자였다.
그는 정치학의 교범 같은 사람이다. 민주주의는 시민이 주권의 최종적 행사자인 정치체제를 뜻한다. 그런데 그런 시민 주권은 좋은 정치가 없이는 실천될 수 없다. 시민은 모든 일을 스스로 할 수 없으며 또 그러고자 할 만큼 어리숙한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공동체를 이끄는 다양한 과업을, 정부라고 불리는 수많은 공적 기구와 제도를 통해 실천하고자 했다. 그렇다고 그런 기구와 제도를 ‘영혼 없는 시스템’이나 ‘냉혹한 법치’로만 운용되지 않게 했다. 그들은 그런 기구와 제도를 이끌 자신들의 대표를 직접 선출했는데, 그들이 바로 정치가이다. 민주주의와 시민 주권의 성패는 바로 여기에 달려 있다. 다시 말해, 시민이 자신들의 대표로서 좋은 정치가를 선발해 그로 하여금 공동체를 잘 운영하게 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서 민주주의는 승부가 난다. 그 일이 정치가 오바마에게 맡겨졌을 때, 그는 자신을 지지하는 시민들이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최고의 연설가로서 자신의 소명을 다하려 노력했다.
그는 말을 가치 있게 만든 정치인이다. 말과 연설을 정치적 흉기가 아니라 시민적 힘으로 승화시킨 사람이다. 그는 가난한 약자들을 대표하는 정치가가 민주주의의 언어 혹은 ‘정치적 이성’을 갖춘 말을 통해 어떻게 성장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었다. 그래서 나는 정치라는 인간 활동이 (권력 다툼과 음모, 간계와 같은 어둡고 부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동시에 그 속에서 변화와 개선을 만들어 갈 수 있다고 믿기에) 아름다울 수도 있다는 점을 이야기하면서 늘 추상적인 이론 책보다는 그의 연설을 사례로 들곤 한다. 이를 통해 민주정치가 가진 놀라운 가능성을 말할 수도 있었고, 이어서 정치철학과 이론을 어렵지 않게 설명할 수 있었다. 정말로 오바마는 “민주정치가 무엇인지를 말해 주는, 좋은 교과서의 역할을 한 정치가”라고 할 수 있다. 흑인을 포함해 인간 사회의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변화는 가능하다’는 희망을 갖게 하고, ‘민주주의는 당신의 참여와 역할을 필요로 한다.’는 부름(소명)을 끊임없이 말해 준 정치가였다.
대통령 퇴임 후 그의 인생이 어떻게 변할지는 누구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 그도 물론 인간적 한계를 가진 존재다. 현직에 있을 때 누구보다 골프를 많이 쳤고, 농구를 하다가 15바늘을 꿰맨 대통령이기도 했다. 스마트폰을 너무 많이 잡고 있다고 영부인인 미셸에게 늘 야단맞았던 그런 사람이었다. 주어진 휴가는 모두 즐겼고, 가족을 국가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것 아니냐는 비난도 받았다. 미국 내 진보파들로부터는 월가와 군산복합체 개혁을 포함해 해야 할 일을 소홀히 했다고 비판받았다. 현직에 있는 동안 한반도 평화 진작에 소극적이었던 것 역시 우리로서는 좋게 평가할 수가 없다. 영국의 토니 블레어나 힐러리 클린턴처럼 퇴임한 대통령으로서 고액 강연료나 받는 ‘민주적 신념을 버린 사익 추구자’가 될 수도 있다.
인간 삶의 변덕스러운 운명을 우리가 어찌 알까마는, 적어도 지금까지는 배워야 할 면이 많은 정치가의 모델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청년의 모습으로 시작한 정치가의 길이었지만 대통령 임기 8년 동안 너무 늙어 버린 모습을 보면서, 정치가라는 직업이 정신적으로 얼마나 고된 일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그렇기에 오바마가 자신의 정치적 경력 가운데 최고의 위치를 마무리하는 고별 연설에서 보여 준 모습은 인상적이다. 이런 정치가가 있다면 지지자나 시민 역할도 잘해 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50분에 걸친 긴 연설이지만 인내심을 갖고 살펴보자.
***
이 짧은 서두만으로도 열기를 느낄 수 있다. 연설은 2만 명이 모일 수 있을 만큼, 미국에서 가장 큰 실내 집회장인, ‘일리노이 매코믹 플레이스’에서 야간에 열렸다. 입장권은 무료였으나 일찍이 표는 동이 났다. 그 때문에 암표가 온라인에서 1백만 원 이상으로 거래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여러분이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었다.”라는 부분은 연설자에 대한 권위와 신뢰를 강조하는 에토스를, 파토스 즉, 청중과의 유대를 통해 강화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파토스로부터 끌어낸 에토스’라고나 할까. 혹은 고전적인 수사학의 여러 요소를 ‘서로가 공유하는 이야기 구조(narrative)’로 더 강하게 집약하는 효과를 갖게 하는, ‘오바마만의 스타일’이다. 연극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Who I am”, 이 부분을 활용한 점도 특별하다. 즉 나는 늘 내가 누구인가를 찾고자 노력했고, 당신들이야말로 내가 누구인가를 더 깊이 자각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결국 나도 더 나은 나를 만드는 부르심/소명을 받았고, 당신들도 그런 부르심을 받은 선택받은 사람이라는, 흑인 교회의 전형적인 설교에서 모티브를 따왔다고 하겠다.
자치와 민주주의, 시민적 평등에 대한 아름다운 해석이 있는 부분이다. 자유와 공동의 이익을 결합할 수 있는 민주주의의 도구들을 노예와 여성, 이주민, 노동자, 동성애자 등이 활용할 수 있게 한 것이야말로 미국이 자랑하는 전통이라는 해석도 가치가 있다. 수많은 소수로 이루어진 다수(a majority of minorities), 이를 향한 미국인의 꿈, 모두를 껴안는 끊임없는 전진과 변화 등 민주주의에 대한 진보적 해석을 귀에 거슬리지 않게 표현하는 것이야말로 그의 큰 능력이 아닐 수 없다. 그의 말에서 나는 인간미 있는 진보를 느낀다.
소망과 부르심 그리고 응답이라고 하는 기독교적 정의론을 효과적으로 활용한 부분이다. 오바마 연설이 전형적인 수사학과 다른 점은 흑인 교회의 설교 언어를 적절할 때 효과적으로 결합하는 그의 연설 기법에 있다. 그는 시카고의 유니언처치에서 제레미아 라이트 목사의 설교를 들으며 흑인 교회의 설교 양식의 강점을 유심히 관찰하고 받아들였음에 틀림없다. 실제로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에 보면 흑인 교회의 찬송가 속에서 그는 노예 출신 흑인들의 피를 타고 흐르는 종교적 믿음과, 슬픔을 딛고 솟아오르는 긍정적 힘에 진정으로 감동받는 대목이 나온다. 그 경험을 통해 오바마는 비로소 기독인이 되었다.
우리가 패자일 때도 민주주의는 가치가 있다. 패자라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잘못이다. 민주주의에서는 패자도 여전히 기회와 가능성을 갖는다. 패자도 미국 민주주의가 갖는 공동의 가치들과 공통의 목표를 존중해야 한다. 당파성 이전에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존중이 있어야 한다. 이 부분은 전형적인 로고스 부분에 해당하지만, 선거 결과에 승복할 수 없다는 일부 시민들의 태도에 오바마가 단호하게, 원치 않는 결과와 상관없이 민주주의 원칙을 존중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 대목은 참으로 인상적이다. 선거 때마다 패자 진영에서 승복을 둘러싼 정당성 시비를 책임 모면용처럼 제기하는 우리의 경우를 비춰볼 때 시민의 품위를 높이는 정치 지도자의 태도가 왜 중요한지를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우리 정치인들 가운데는, 자신의 행동이 시민의 품위를 높일 수도 있고 반대로 시민들을 더 사납게 만들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많아 보인다.
‘다양성’과 ‘차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대’와 ‘함께함’, 나아가 이를 ‘미래’와 연결하는 것은 오바마의 장기다. 그는 늘 정치적 과업을 아이들(미래 시민) 세대의 변화와 희망, 가능성에 관한 주제로 표현함으로써 당파적 관점을 보편적인 것으로 만드는 신묘한 효과를 만들어 낸다. 이 부분이야말로 우리의 정치인들에게 꼭 필요한 자질이 아닐 수 없다.
불평등과 그로 인해 냉소와 양극화가 민주주의의 위협이 되고 있음을 강조하고, 기회의 평등함이 주는 가치에 대해서는 여야나 진보-보수를 가로지르는 합의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방법을 둘러싸고 논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목표 자체를 당파적으로 분열시키는 것에 대한 경고를 담고 있기도 하다. 자유기업도 그들의 성공을 가능하게 해준 국가와 사회에 책임감을 가져야 정의의 원칙에 부합하며, 중산층은 물론 노동자와 약자들에게 공정한 기회를 가져다주는 사회 협약도 정의의 원칙에 부합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다양성 속의 연대를 지향하는 ‘다원주의적 민주주의’에 대한 최대 위협은 불평등의 심화에 있기 때문이다.
이제 다루기 조심스러운 인종 문제에 대한 주제로 넘어왔다. 아마 재임 기간 8년 내내 인종 문제에 대해 이보다 더 직접적으로 표현한 연설은 없었던 것 같다. 다만 전과 마찬가지로 인종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정의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은 똑같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인종 문제에 대한 당사자로서의 느낌을 전보다 더 강조한다는 생각은 든다. 많은 정치학자들이 지적하듯, 미국에서 “인종 문제는 계급 문제와 거의 수학적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오바마는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 인종주의적 차별, 미국 민주주의의 치부이지만 난 특정 집단을 소외시키고 또 배제하는 심리에 있어서는 한국 사회도 별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런 문제와 관련해 자극적인 표현을 절제하고 문제를 좀 더 실체적으로 다루려는 성실하고 책임 있는 노력, 즉 오바마 같은 접근이 부족한 게 아닌가 싶을 때도 많다.
마키아벨리의 문장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민중은 고결하다. 민중은 귀족처럼 지배해야만 자신의 지위를 지키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단지 불평등하게 지배당하지 않기를 원할 뿐이기 때문이다.” 인종 문제 해결을 요구한다고 해서, 특별한 대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핵심은 평등한 대우다. 소수 인종도 아이를 사랑하고 애국심을 가지며, 동료애와 호기심을 발휘할 뿐 아니라 사랑받을 만한 존재라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하는 대목에서, 왜 약자들은 자신들의 부당한 처지를 설명하고 이해를 구해야 하는지가 슬플 뿐이다. 이를 넘어서 오바마가 흑인들에게 요청하는 것은 다른 소수자들, 백인 노동자 및 광범한 사회 하층과의 연대다. 그리고 이 지점이 흑인 사회운동 내 급진파들과 오바마가 대립하는 구분선이다. 그들이 흑인만의 정체성과 반체제적 비판 의식을 고조시키는 접근을 강조한다면 오바마는 언제나 체제 안에서의 더 넓은 연대를 통해 가능성을 확대해 가는 접근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세 번째 위협으로 양극화 정치, 적대와 증오의 정치, 서로 다른 사실만 말하는 정치, 그 결과 사회를 냉소와 분열로 이끄는 정치에 대해 말한다. 자신들만 알고 있는 사실이 있다고 여기게 되면 협력은 어렵다. 하지만 의견은 달라도 공유할 수 있는 사실과 공통의 기반(common ground)은 언제나 넓게 열려 있다고 보는 사람이 오바마다. 그래서 이어지는 오바마 연설의 내용은 합의할 수 있는 미래 의제가 있는데도 양극화 정치 때문에 그 의제들을 다루지 못하면 그 부담은 미래 세대에게 떠넘겨질 수밖에 없음을 강조하기 시작한다. 이 대목에서 2015년 유승민 당시 새누리당 원내 대표가 진보와 보수 사이에도 합의의 여지가 넓다고 강조한 국회 연설이 생각났다. 그때 그 좋은 연설 때문에, 최근 유승민이 보여 주는 정치적 리더로서의 한계가 더 아쉽게 여겨질 정도다. 아무튼 차이와 분열의 효과를 갖는 말보다 공동의 목표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기반을 넓히는 말을 해야 정치가이지, 그렇지 않으면 말이 흉기가 되어 정치도 사회도 시민도 해결할 수 없는 분열의 상처를 안게 된다.
질서와 안보에 대한 정치적 해석이 이제 시작된다. 여기부터는 페리클레스를 연상시킨다. 최고의 안보는 군사적이기보다는 법의 지배 및 평등한 자유와 같이 목숨 걸고 지킬 만한 공적 가치에 있다. 이런 가치를 위협하는 것 역시 군사적인 것이 아니다. 그건 공포와 두려움이다. 두려움과 공포의 동원은 정치적 지배의 가장 보편적 유형이지만, 그것이 시민과 사회를 분열시키는 부정적 효과를 낳을 때도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래서 오바마와 특히 미셀 오바마는 늘 두려워하지 말라고 강조한다. 두려움은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꺾는 가장 큰 위협이기 때문이다.
언론의 자유를 포함한 기본권이야말로 미국 사회를 안전하게 만드는 민주적 보루다. 미국은 전시에도 반전 집회를 할 수 있는 나라다. 베트남 전쟁 중에도 반전 집회가 열릴 수 있었고, 버락 오바마도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집회에서 인상적인 연설로 주목받는 정치가가 된 나라다. 그렇기에 테러 문제 역시 악과 싸우는 문제이기 이전에 기본권 보호와 법의 뒷받침을 더 단단히 하는 것이어야 한다. 무슬림은 잠재적 테러 분자로서가 아니라 보호되어야 할 인권을 가진 존재로 먼저 이해되어야 한다. 그들의 인권이 침해되면 곧 나의 인권 보호도 약해진다. 법 집행의 공정성과 평등함의 문제다. 두려움의 동원, 공포의 동원을 통해 기본권을 침해하는 양극화 정치에 대한 비판 내용이 좋다.
견해가 다른 사람을 대하며, 그런 견해에 도달하는 논리적 과정이 잘못된 것에서 원인을 찾기보다 그 사람 자체를 혐오하고 공격하는 것은 비겁하다. 그건 합리적 논의나 건강한 경쟁을 망치는 데 그치지 않고 민주정치의 역할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자를 필요로 한다. 민주주의를 당연시하는 순간 민주주의도 자멸할 수 있다.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 자체도 중요한 공공 정책이다. 이런 내용을 말한 뒤, 이어지는 내용이 멋지다. 시민이라는 위대한 직분에 대한 강조가 그것이다.
이제부터는 사적인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냥 읽기만 하면 된다. 그 끝은 희망, 담대한 희망이다. 우리는 할 수 있고, 해냈고, 앞으로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우리 스스로 중요한 사람이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희망은 가능의 정치가 필요로 하는 최고의 시민 정신이다!
박상훈 | 정치발전소 학교장
정치학을 전공한 정치학자이다. 정치의 현장 가까이에서 읽고 쓰고 말하는 일을 한다. 실천으로서의 정치와 학문으로서의 정치학이 엄격하게 분리되기보다는 어느 정도 중첩되기를 바란다. 그것이 정치학의 본래 모습이자 애초의 이상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정치가의 존재를 시야에서 놓치지 않을 때 정치학적 논의 역시 훨씬 더 풍부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뿐만 아니라 다른 누구보다도 시민의 적법한 대표라 할 수 있는 정치가들이야말로 정치학의 개념과 이론을 선용할 수 있는 존재가 되길 바란다. 그래야 민주정치의 여러 규범과 가치가 시민들의 삶의 양식 속으로 더 깊이 파고들어 지속 가능한 전통으로 안착할 수 있으리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