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말의 힘 | ① 정치 연설의 고전 : 페리클레스의 전몰 용사 추도사

2019-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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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중요하다. 좋은 말은 ‘가능의 공간’을 확대하고 나쁜 말은 ‘있던 가능성’마저 사라지게 한다. 서로 다른 시민들이 협력하고 연대할 수 있도록 ‘심리적 기반’을 만드는 것은 ‘말’이다.

정치에서 말은 더더욱 중요하다. 민주주의에서 정치란 말의 힘을 통해 작동한다. 권위주의나 전체주의가 ‘강제’와 ‘배제’를 통해 일하는 체제라면, 민주주의는 ‘설득’과 ‘동의’를 통해 일하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정치적 말의 힘"을 연재하며

말은 중요하다. 좋은 말은 ‘가능의 공간’을 확대하고 나쁜 말은 ‘있던 가능성’마저 사라지게 한다. 서로 다른 시민들이 협력하고 연대할 수 있도록 ‘심리적 기반’을 만드는 것은 ‘말’이다. 인간 공동체를 상처로 얼룩지게 하는 것도, 사람들을 생각의 지옥으로 이끄는 것도, 인간의 마음을 절반쯤 ‘살해’하는 것도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만큼 이를 강조한 철학자도 없다. 말은 인간을 이성적이고 도덕적으로 이끄는 자연의 선물이고, 이 때문에 인간은 삶의 목적을 가진 유일한 피조물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말이 나쁜 인간, 그래서 덕성을 상실한 인간은 야수보다 더 잔혹한 존재가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점을 단호하게 말했다.


정치에서 말은 더더욱 중요하다. 민주주의에서 정치란 말의 힘을 통해 작동한다. 권위주의나 전체주의가 ‘강제’와 ‘배제’를 통해 일하는 체제라면, 민주주의는 ‘설득’과 ‘동의’를 통해 일하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민주 정치가에 대한 가장 짧은 정의는 ‘공적으로 발언하는 일을 직업으로 가진 사람’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갈등과 싸움의 문제를 다뤄야 하는 정치가 좋은 말에 의해 이끌리기보다 나쁜 말에 이끌리면 어떻게 될까? 상처는 증오가 되고 적대와 분열은 사회를 정신적 내전 상황으로 이끈다. 오늘의 한국 정치는 어느덧 그 길로 접어들고 말았다. 상대 진영에 대해서는 누가 더 잘 모욕할 수 있는가를 두고 경쟁하는 듯하고, 자기 진영에 대해서는 상대의 잘못을 누가 더 잘 고자질할 수 있는가를 두고 잘 보이기 경쟁을 하는 듯하다. 우리 정치가 ‘나쁜 말의 경쟁 체제’로 퇴락하도록 방치할 수는 없을 텐데, 그렇다고 말의 문제를 법으로 규제하고 처벌로 강제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달리 뾰족한 수를 찾기보다 정치 언어와 관련된 새로운 정치 규범이 성숙해지기를 끈기 있게 촉구해야 할 것 같다.


이상과 같은 생각으로 정치에서 말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해볼 수 있는 대표적 명연설을 하나씩 소개할까 한다. 연설이란 (개회사, 축사, 추도사, 주례사, 모두 발언, 시정 발언, 발의와 심의, 변론과 반론 등을 포괄하는) 공적 언어 행위의 대표적인 장르이다. 개인 간의 사적 세계에서도 좋은 말로 대화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은 훌륭한 인간이 되는 데 꼭 필요한 자질이겠지만, 그렇다고 그런 능력을 갖추는 것을 의무나 책임으로 부과할 수는 없다. 반면에 공적 행위자로서 말하고 대화하고 연설하는 실력을 갖추는 일은 의무이자 규범이다. 어떤 인간 공동체에서든 좋은 말의 효과 없이 집단적 결정이 평화롭고 가치 있게 이루어지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연설은 이러한 집단적 결정을 이끄는 지도적 혹은 주도적 인간 활동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정치 행위이며, 좋은 연설을 하는 능력이야말로 정치가에게 필요한 으뜸의 덕목인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좋은 정치가로 성장하려면 위대한 인물의 풍모, 즉 그들의 말과 행동을 따르고 모방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좋은 정치 연설의 사례를 살펴보려는 이 연재가 우리 정치가들에게 마키아벨리의 권고를 실천하는 한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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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말의 힘 ①
정치 연설의 고전 : 페리클레스의 전몰 용사 추도사

글쓴이 |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


고대 아테네 민주주의에서는 일반 시민 역시 정치에 참여할 다양한 기회를 가졌고, 또 그런 기회를 활용해 ‘평등한 발언권’(isegoria)을 행사하는 것을 ‘시민의 자유’라 여겼다. 이로 인해 소피스트라고 불리는 지식인 집단이 출현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시민들에게 민회에서 발언하고 법정에서 변론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일로 생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그때에도 시민 대중을 이끄는 정치가의 역할은 중요했는데, 당시 정치가는 대중 앞에서 말로 연설하는 사람, 즉 오라토르(orator)로 불렸다. 이들을 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rhetorike)이라는 제목의 강의록을 통해 다양한 설득의 기술을 가르쳤다. 정치의 목적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철학이 필요했지만, 그러한 목적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수사학이라는 ‘정치적 실천론’이 필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수사학은 (사사로운 대화나 사적 언어가 아닌) ‘공적인 언어(rhe)’를 ‘말하는 사람(tor)’이 ‘발휘해야 할 실력과 솜씨(ike)’를 함양하는 일에 대한 것이자, 학자보다는 정치가가 더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할 분야라 할 수 있다.


로마 공화정에서도 정치가들은 연설하는 법, 즉 공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방법을 배워야 했다. 키케로의 책 『수사학』은 대표적인 교재였다. 이 책을 통해 키케로는 설득의 효과를 높이는 기법만이 아니라 철학적 주제를 통합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춰야 ‘완벽한 연설’을 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런 의미에서 수사학을 ‘화려한 표현이나 미사여구(eloquence)’ 혹은 ‘실체적 진실을 가리기 위한 화술(sophism)’ 정도로 이해하는 것은, 인간 삶에서 정치 행위가 갖는 진정한 의미를 폄훼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현대 민주주의 제도 가운데 하나인 의회(parliament)라는 용어 역시 말 혹은 대화를 뜻하는 고대 불어 ‘parler’에서 왔다. 그래서 의회는 곧 ‘자유롭게 의견을 말하고 설득력을 갖춰 논의하는 시민 정치가의 집’이라는 뜻을 갖는다. 의회에서 말이 좋지 않다면 민주주의는 ‘가련한 빈집’에 갇히는 운명을 피할 수 없다.


20세기 초에 활동했던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말마따나 “정치의 고향은 민주주의”다. 2천5백 년 전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대화와 강의에 기원을 두고 있는, 철학과 정치학이라는 학문 역시 민주주의의 산물이 아닐 수 없다. 아테네 민주주의에 대해 플라톤이 얼마나 비판적이었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얼마나 온정적이었는지 등의 문제와 상관없이, 그들이 서양 정치철학의 원조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체제가 민주주의였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아테네 민주주의는 정치 언어의 역사에 있어 가장 풍부한 보물 창고를 우리에게 남겼다. 당시를 대표하는 누군가의 정치 연설을 꼽으라면 단연 페리클레스의 연설이다. 기원전 431년 혹은 430년 겨울에 행해진 것으로 추정되는 그의 장례 연설은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기록 덕분에 잊히지 않고 살아남았다.


스파르타(정식 명칭은 라케다이몬)와의 전쟁에서 희생된 전몰자를 추념하는 이 장례식은, 마지막 순서로 아테네를 대표하는 시민의 연설을 듣는 관례를 따랐다. 전쟁에서는 장군 즉, 시민 총사령관이었고, 정치에서는 ‘제1시민’(the first citizen of Athens), 즉 민주정 지도자였던 페리클레스가 마지막 연사로 나섰다. 긴 연설이었지만 상투적인 표현도, 듣기 좋은 말이나 아첨도 없었다. 전몰자들의 희생을 두고 누구 때문이라며 탓하고 비난하는 내용도 없다. 죽음을 감수하면서도 지킬 만한 소중한 것이 있고, 남은 자들 역시 그런 순간이 오면 같은 선택을 해야 할 ‘이유’를 말할 뿐이다. 그 이유야말로 이 전쟁에서 아테네 인들이 보여 준 위대함인데, 이는 군사적인 강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법 앞의 평등과 시민적 자유를 가능케 하는 민주주의 정치체제의 특징에서 발원한 것임을 이보다 더 설득력 있고 감동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전몰자들이 이미 행동으로 보여 준 용기와 위대함을 어느 한 개인의 연설에 맡겨 평가하는 무모한 일을 내가 왜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라는 식의 격조 있는 유머로 시작해 “자, 이제 각자 연고가 있는 전몰자들에 대한 애통함은 충분히 풀었으니 모두 이곳을 떠나시라.”로 끝날 때까지, 그가 말한 연설의 내용은, 한마디로 당당하기 그지없다. 무엇이 페리클레스에게 판에 박힌 위로나 듣기 좋은 연설이 아닌, 역사에 남을 위대한 연설을 하게 만들었을까? 내 대답은 이렇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따르면, 페리클레스는 지나치게 긴 얼굴을 감추고자 늘 투구를 썼을 만큼 인간적 한계를 가진 사람이었다. 자신의 자식들을 먼저 보내야 했을 만큼 인생의 아픔도 간직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진정으로 자신의 도시국가를 사랑하고 자신의 시민들을 신뢰했던 정치가였다. 비극과 불행을 어떻게 해서든 피해 보려는 겁쟁이가 아니라, 존엄하게 죽을 수 있는 삶의 자세를 용기 있게 견지한 인간이었다. 이 연설을 마친 이듬해 페리클레스도 죽음의 운명을 맞이했다. 그러나 그의 연설은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그 가치를 중시하는 사람들에게 ‘정치 연설의 고전’으로 영원히 남았다. 이제 연설의 내용으로 들어가 보자.


<사진 설명> 필립 폰 폴츠의 1853년 작품 ‘추도 연설을 하는 페리클레스’_출처 위키피디아


"앞서 이 연단에 섰던 사람들 대부분은, 장례 행사의 마지막을 추도 연설로 마무리하도록 법을 만든 사람에게 경의를 표하곤 했다. 연설을 통해 전몰자들을 명예롭게 해야 한다거나, 그렇게 하는 것을 가치 있는 일로 여겼던 모양이다. 나는 생각이 다르다. 전몰자들은 자신들이 칭송받을 만한 이유를 이미 행동을 통해 충분히 보여 주었다. 그렇기에 그들의 명예는 지금 여러분이 보고 있듯, 우리 도시국가가 마련한 장례 행사처럼 행동으로 칭송하는 것이 중요하지, 그 이상 말로 표현할 것까지 있나 하는 것이 내 생각이다. 죽은 자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행동으로 보여 준 용기를, 우리가 얼마나 큰 믿음을 갖고 보고 있는가 하는 문제가, 어느 한 개인의 연설에 맡겨져 그 사람의 서툴거나 뛰어난 연설로 평가받게 한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기 때문이다.

첫 단락부터 연설자 페리클레스는 자신감과 함께, 스스로가 가진 권력감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처음부터 자신의 개성적 힘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 역시 수사학의 한 기법이 아닐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연설을 이끄는 수사학적 요소를 파토스(pathos), 에토스(ethos), 로고스(logos)로 구분했다. 그리고 이 가운데 에토스를 가장 중요시했다. 로고스가 연설 ‘내용’(contents)의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합리성의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라면, 파토스는 듣는 이(hearers)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그와 공유할 수 있는 삶의 경험(life experience)을 중시하는 요소이다. 그에 비해 에토스는 ‘말하는 사람’(speaker)의 인격(character), 권위(authority), 신뢰(trust)를 가리키는데, 이 첫 단락만큼 에토스적인 측면이 두드러진 곳도 없다. 물론 좋은 연설이라 해서 꼭 에토스적인 요소를 앞세우고 부각시켜야 하는 것은 아니다. “페리클레스의 추도 연설을 273자로 줄인 연설”이라는 별칭을 가진 링컨의 게티즈버그 추도 연설은 일인칭 ‘나’(I, me, my)를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에토스적인 측면을 의도적으로 축소했지만 또 하나의 위대한 연설이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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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하게 균형 잡힌 연설을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믿음을 주지 못하는 한 그럴 수밖에 없다. 죽은 사람과 친했거나 호의를 가졌던 사람들에게는 연설이, 말해 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나 죽은 사람에 관해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에 비해 뭔가 부족하다는 인상을 준다. 죽은 사람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질투심에서 연설이 과장되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남들에 대한 찬사란, 자신도 할 수 있다고 자부하는 선까지만 용납되고, 그 이상은 시기와 불신을 낳기 때문이다. 그렇기는 해도 옛사람들이 이런 관습을 좋은 법으로 인정한 이상, 그 법에 따라 여러분의 생각과 희망을 표현하도록 노력하는 일이 나의 의무일 것이다.

똑같은 주장도 유형화의 틀을 사용해 설명할 때 설득력은 커진다. 즉 “죽은 사람과 친했거나 호의를 가졌던 사람”과 “죽은 사람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의 전형적인 심리 상황을 나눠 본 뒤, 그 가운데 어느 쪽을 보더라도 자신의 연설이 환영받지 못할 수밖에 없는 논리적 뒷받침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인간들이란 본래 그런 존재론적 한계를 가졌다는 진술도 자신의 논리적 판단을 강화한다. 하지만 서둘러 이 문제를 마무리한다. 아무리 그래도 최선을 다해 연설에 임하는 것이 자신에게 맡겨진 의무라며, 본격적인 주제로 들어가기 위해서다. 화제를 전환하는 솜씨라고도 할 수 있는데, ‘효과’나 ‘사실성’보다 법에 따라야 하는 자신의 ‘책임성’을 더 중요한 윤리적 요청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야말로 누구도 반론하기 어려운 논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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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도시국가를 세운 우리 선조의 이야기로 연설을 시작하고 싶다. 이런 기회에 그들을 생각하며 경의를 표하는 것이 올바르고 또 적합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처음 이 땅을 차지해 살게 된 이후 그들은 용기를 발휘해 나라를 잃지 않고 지켜 냈고 그 결과 자유로운 도시국가를 후대에 물려줄 수 있었다. 우리의 옛 선조들이 이런 칭송을 받을 만했다면 우리의 부모 세대들은 더더욱 칭송받아 마땅하다. 왜냐면 그들은 선조들로부터 이어받은 것에 자신들의 분투와 노력을 덧붙여,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대단한 통치 체제를 물려주었기 때문이다. 그 뒤 오늘 여기 모인 우리의 나이든 시민들은 우리의 통치 체제를 가꾸고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용기를 보여 주었고, 전시에건 평시에건 우리의 도시국가를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데 기여했다.


나는 여러분들이 익히 잘 알고 있는 이야기로 이 연설을 지루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나는 우리 선조들이 전쟁에서 어떻게 싸웠고, 이민족 내지 다른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침공에 맞서 어떻게 싸웠는지 되풀이해 말하지 않겠다. 다만 어떠한 정신으로 우리가 직면한 역경을 헤쳐 왔는지, 그리고 우리를 위대하게 만든 우리의 정체(政體, Politeia, form of government)와 삶의 양식(way of life)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논의하고 싶다. 그런 뒤에 전몰자들을 기리는 말을 하도록 하겠다. 이 연단에서 우리의 정체와 삶의 양식이 어떤 것인지를 언급하는 일은 이 장례식에 제격일 뿐만 아니라, 아테네 시민이든 외국인이든 여기 모인 모든 청중에게 유익하리라 믿기 때문이다.

건국자(founder)에 대한 경의는 정치 연설의 가장 보편적인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이는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사이를 ‘운명과 기억의 공동체’로 묶어 준다. 그래서 많은 정치 연설이 과거사에 대한 해석이나 재해석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다만 이것이 과도하면 ‘관제 역사관’을 권위주의적으로 강요하는 부정적 효과를 낳을 수 있다. 이 때문에 페리클레스는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줄이고 곧바로 정치체제에 대한 주제로 넘어갔다. 민주정이라는 정치체제의 장점과 그것이 만들어 내는 문화적 양상에 대해 이보다 아름답게 표현하기는 어려울 만한 내용이 이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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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정체는 이웃 나라들의 제도를 흉내 낸 것이 아니다. 이 사실부터 말하고 싶다. 우리는 남을 모방하기보다 남들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우리의 정체는 민주주의라고 불린다. 권력이 소수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수 시민의 손에 있기 때문이다. 사적인 분쟁을 수습해야 하는 문제가 있을 때는 모두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군가를 공적 책임을 갖는 자리에 앉히고자 할 때 우리가 고려하는 것은, 그가 속한 계급이나 그가 가진 특권이 아니라 그가 보여 준 실질적 능력이다. 이 나라에 기여하는 한, 그 누구도 빈곤하다고 해서 정치적으로 무시당하는 일은 없다.


우리의 정치 생활이 자유롭고 개방적인 것만큼 일상생활 역시 그러하다. 이웃이 자신의 방식대로 삶을 즐긴다면 그것에 간섭하지 않는다. 실제로 해를 주지 않는 것은 물론, 감정을 상하게 할 험악한 얼굴로 대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생활에서는 자유롭고 관용을 베푼다. 하지만 공적 업무에서는 법을 준수한다. 법은 깊이 존중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 스스로 권위 있는 자리에 앉힌 자라면, 우리는 그에게 복종한다. 법 그 자체, 특히 억압받는 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을 준수한다. 위반하면 수치로 여기는 불문율에도 순순히 복종한다.


중요한 사실이 또 있다. 하루 일을 마쳤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과 정신 건강을 위해 모든 종류의 여가를 향유한다. 사계절을 통해 다양한 종류의 경기와 대회를 개최한다. 아름답고 유쾌한 개개인의 가정은 나날의 노고를 잊게 한다. 이 도시의 위대함 때문에 만물이 이 도시에 집결하고, 그래서 우리 아테네 인은 세상의 산물을 마치 이 땅에서 난 것인 양 즐긴다.


우리의 군사정책도 적과는 다르다. 먼저 우리 도시국가는 온 세계에 개방적이다. 외국인을 추방함으로써 이방인의 견문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 설사 이 개방성 때문에 적이 우리에게서 뭔가를 알아내 이익을 도모할지라도 장비나 책략보다 우리의 용기를 믿는다. 군사 교육에서도 적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엄격한 훈련으로 용기를 함양시키려 하지만, 우리는 자유롭게 살게 하면서도 그들에 맞서 조금도 밀리지 않고 있다. 예를 들어 라케다이몬 인(스파르타 인)은 단독으로 출병하지 않으며 모든 동맹군과 상의한 뒤에 우리의 영토로 출병한다. 이에 반해 우리는 우리 힘만으로 적에 맞서며, 다른 나라에서 싸울 때도 적을 어렵지 않게 제압한다.


어떤 적이든 한 번도 우리의 전군(全軍)과 맞서 본 적이 없다. 우리는 해군을 증강하는 동시에 우리 자신의 육군을 각지에 파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 군의 일부와 교전해 승리를 얻으면 그 부분적인 승리를 가지고 우리 전체를 격파했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격파당하면 우리의 전 세력에 정복되었다고 말한다.


우리는 고된 훈련이나 엄격한 군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침착함과 함께 우리에게 익숙한 용기를 갖고 위험과 대면한다. 다가올 곤경 때문에 전전긍긍하지도 않는다. 전열에 서면 평소 휴식 없이 훈련에 시달렸던 자들보다 훨씬 용감하게 행동한다. 이상 이야기한 것만으로도 우리의 도시가 전시에든 평시에든 다름없이 가히 경탄하기에 충분하다는 점을 보여 주지만, 이게 다가 아니다.

스스로 만든 법에 스스로 복종하는 자치의 원리, 자의적 지배가 아닌 법의 지배의 원리에 대한 가장 고전적 진술은 물론이고, 세습이나 가문의 우월성보다 시민이라면 누구나 평등하게 공동체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민주주의의 기초 원리도 강조되었다. 폐쇄적 국가관보다 세계 시민으로서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삶의 가치가 인간을 더 용기 있게 만든다는 논리도 이어진다. 이 모든 것은 군사적 접근보다 정치적 접근이 왜 더 강한 국가를 만드는가에 대한 판단에 기초를 두고 있다. 군사 안보적 국가관은 두려움 혹은 두려움을 회피하고자 하는 소극적 심리와 쉽게 연결된다. 반면, 스스로 만든 정치체제를 지키는 일의 가치를 강조하는 것은 훨씬 더 적극적인 시민의 역할로 이어진다. 법 앞의 평등이나 민주주의와 같은 자유로운 삶의 양식은 군사적 방법만으로는 지켜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아테네 시민들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자유롭고 민주적인 삶을 옹호하는 자세는, 미국 독립 전쟁 직전 영국으로부터 비롯된 군사적 두려움에 굴하지 않고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했던 독립 운동가 패트릭 헨리(Patrick Henry)의 1775년 의회 연설에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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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면서도 사치에 빠지지 않는다. 지혜를 사랑하면서도 유약하지 않다. 부자는 부를 자랑하지 않고 단지 그것을 활동의 적절한 바탕으로 삼는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단지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그것을 이겨내는 노력을 게을리 하는 데 있다고 보고 있다.


각 개인은 자신의 일만이 아니라 도시국가의 일에도 관심을 갖는다. 자신의 일에 전념하는 사람도 정치 일반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다. 이것이 우리의 특징이다. 우리는 정치에 무관심한 사람을 그저 자기 일에만 신경 쓰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이곳 아테네에서 하는 일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우리만이 정책에 대한 결정을 우리 스스로 내리거나 적절한 토의에 부친다. 우리의 말과 행동 사이에 모순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나쁜 것은 결과에 대해 충분히 논의하지 않고 행동에 뛰어드는 것이다.


우리의 남다른 점은 또 있다. 우리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은 목적을 신중히 검토하는 자세와 그것을 과감하게 단행하는 능력을 아울러 지니고 있다. 이에 반해 다른 나라 사람들을 보면 무지가 만용을 불러일으키고, 신중하게 생각한답시고 망설이는 태도로 일관한다. 삶의 공포도 환희도 잘 알고, 게다가 위험에 겁을 먹지 않는 자라야 진정으로 강한 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나라에 대한 선행의 개념에서도 우리는 다르다. 우리는 남들과는 달리 선한 일을 통해 우방을 만들지, 혜택을 바라고 우방을 만들지 않는다. 선행을 베푸는 측은 상대가 느끼는 고마움이 사라지지 않도록 지속적인 선의를 보여 줌으로써 계속해서 더 큰 신뢰를 얻는다. 반면 의리상 은혜를 갚으려는 측은 자발적으로 선행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빚을 갚고자 하는 의도로 그리하기 때문에 진심을 잃게 된다. 우방을 돕는 방법도 특별한데, 우리는 손익을 따져 돕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 가치를 믿고 두려움 없이 돕는다.


이상과 같은 점들을 고려할 때, 나는 우리의 도시국가를 그리스의 학교(the school of Hellas)라고 감히 단언한다. 더욱이 우리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은 다양한 분야에서 삶을 향유하면서 자신만의 능력을 영예롭게 키워 나가고 있다. 이 나라의 장례 행사 자리라고 해서 이렇듯 호언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실체적 진실이라는 것은, 앞서 언급했던 우리의 자질로 인해 우리가 얻게 된 이 나라의 국력이 실증해 주고 있다. 여러 도시국가 가운데 시련을 통해 명성 이상의 힘을 보여 준 것은 오늘날 오직 우리뿐이다. 우리에게 패한 적도 우리에게만은 수치심을 느끼거나 한을 품지 않으며, 우리를 따르는 속국도 우리 이외에 자신들이 의무를 다할 적합한 맹주는 없다고 믿고 있다.


분명한 증거를 가지고 그 힘을 보여 준 우리는, 오늘날의 사람들에게도 미래의 사람들에게도 경탄의 대상이 될 것이다. 있는 사실을 그대로 말하는 것으로 충분할 뿐, 우리에겐 호메로스의 찬가도, 잠시 귀를 즐겁게 하는 멋진 표현도 필요하지 않다. 우리의 용기 앞에 굴복한 온 바다와 육지는 길을 열어 우리를 받아들였다. 우리는 우방에게 베푼 선행으로, 그리고 적에게 가한 고통의 기억으로 세상 구석구석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기념비를 남겼다.


이토록 위대한 아테네를 위해 여기 이 사람들은, 이 도시국가를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과감한 결단으로 고귀하게 싸우며 최후를 맞이했다. 그런 까닭에 이 도시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쳐 고난을 헤쳐 나가야 하는 것은 여기 남은 우리에게도 의무가 아닐 수 없다.

가난과 부에 대한 페리클레스의 진술은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부는 좋은 활동의 기반이어야 하지 과시하거나 사치할 일이 아니라거나, 가난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을 하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1930년대 대공황 시기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연설 가운데 “우리가 두려워할 유일한 것은 두려움 그 자체다”(The only thing we have to fear is fear itself)라는 논지야말로 이 연설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민주적 삶의 양식에 대한 이상의 진술을 바탕으로 이제부터는 전몰자에 대한 칭송이 이어진다. 그런데 잘 보면 그 근거는 개인 권리나 공리적 판단이 아니라, 공동체를 지키고 자유에 헌신하고 이를 위해 용기를 발휘하는 ‘인간 행위의 위대함과 고귀한 명예’에 대한 것이다. 오늘날에는 이런 행동을 애국주의나 공화주의, 공동체주의 등으로 이야기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보아도 ‘공동체에 대한 사랑’이나 ‘동료 사회 구성원에 대한 헌신’과 같은 시민적 덕목 없이 민주주의가 튼튼한 사회문화적 기반 위에 서 있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제 이런 정치관 위에서 전몰자에 대한 추모나 칭송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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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도시국가에 관해 이토록 길게 이야기한 이유는, 우리와 전혀 비교될 수 없는 자들과의 싸움에 있어서 우리가 지키고자 한 것이 훨씬 더 가치 있음을 보여 줌으로써, 이제 이야기할 전몰자들에 대한 칭송에 확실한 근거를 부여하기 위해서였다. 우리의 도시국가를 찬양함으로써 전몰자들을 칭송하는 주된 근거는 거의 모두 말했지만, 그러나 여전히 우리의 도시국가를 빛낸 것은 오로지 여기에 잠든 사람들의 용기와 용맹함 덕분이라는 점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누군가의 공적과 그에 대한 예찬이 이곳에 묻힌 사람들처럼 서로 완전히 일치하는 예는 그리스 어디에서도 거의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안식하게 될 사람들이 맞이해야 했던 최후는, 그것이 처음 참여한 전투였든 마지막인 전투였든, 인간으로서의 가치와 탁월함을 보여 주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들 가운데 인간적인 실수를 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조국을 위해 싸운 무용이야말로 그 사람의 단점을 상쇄한다는 주장은 옳다. 선행은 악행을 덮어 주고, 개인으로서의 단점보다 공동체의 시민으로서 그가 보인 용기가 더 가치 있기 때문이다.


이들 가운데 누구도, 누리지 못한 부의 쾌락을 아쉬워하며 기가 꺾이거나, 언젠가 부의 기쁨을 누릴지도 모르는데 하는 기대 때문에 죽음을 망설이지 않았다. 그들은 적에게 복수하고자 했고, 이것이야말로 생명을 내던질 만한 비길 데 없는 영광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며 적을 섬멸하기로 결심을 굳히고, 다른 모든 것을 초월해 이 결의가 성취되길 기원했던 것이다. 전운이 확실치 않음에도 희망을 걸고, 스스로에 대한 확신으로 임무를 대담하게 수행해 내는 것이 마땅한 일이라고 보았으며, 그리하여 뒤로 물러나 생명을 보존하기보다는 맞서 싸우다 죽기를 택했다. 불명예스러운 기회주의적 태도 대신 온몸을 바쳐 전열을 고수한 그들은, 자신의 운명이 도달한 절정의 그 순간 두려워하기보다는 영광스럽게 죽음과 마주했다.


이리하여 그들은 이 도시국가에 어울리는 합당한 자들이 되었다. 살아남은 우리가 더는 위험한 상황이 계속되지 않기를 희망하는 것은 당연하나, 우리 역시 전장에 나서면 이들 못지않게 담대함을 보일 각오를 해야만 한다. 누군가는 용감하게 도시국가를 지키는 것의 가치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를 되풀이해서 강조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말을 경청하는 것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우리 도시국가의 위대함을 생각하며 진심으로 이 나라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 도시국가의 위대함을 느낄 때마다 돌아봐야 할 것이 있다. 그러한 위대함은 전장에서 수치스러운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자신의 의무를 자각하며 비겁하지 않아야겠다고 결심한 사람들에 의해 획득된 것임을 말이다. 그들은 설령 시도하다가 실패하더라도 이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하려 하면서 가장 고귀한 헌신을 하겠다고 여긴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최고의 무덤과 함께 각자의 한 몸을 나라에 바쳐 더는 늙고 소멸할 수 없는 찬사와 영광을 얻었다. 지하에 묻히는 것으로 끝이 아니다. 그들의 영예로운 이름은 영원히 기억되고, 일이 있을 때마다 사람들의 말 속에서 기념될 것이다. 온 땅은 이 대단한 사람들의 묘지가 되어, 모국에서 묘석의 비문에 드러날 뿐만 아니라 아무 관련이 없는 땅에서도 무형, 무언의 기념비로서 사람들의 마음에 깃들 것이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내용은 ‘인간 삶의 비극적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전체 연설문 가운데 인간 감정을 가장 깊게 다루는 부분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적 관점에서는 에토스적 요소가 짙게 깔려 있다. 슬프지만 아름다운 내용이 아닐 수 없다. 익숙한 것으로부터의 갑작스러운 이별이나 상실만큼 인간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없다. 그러나 슬픔을 자각하지 않는 삶에 행복이 깃들 수도 없다. 누구든 죽는다. 그렇지만 그렇게 삶이 비극으로 끝나는 것만은 아니다.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한 노력, 명예를 사랑하는 마음, 죽음을 멀리하고자 하는 허망한 노력보다 경의를 표하는 방식 등등 우리의 삶이 더더욱 깊고 풍요로워질 수 있는 인식의 새 지평을 얻을 수도 있다. 버락 오바마는 2011년 애리조나 주에서 일어난 총격 사건 희생자에 대한 추모사에서 “갑작스런 이별은 우리를 되돌아보게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우리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에게 감사함을 표현했는지, 나로 인해 상처 입은 사람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은 했는지, 자신의 배우자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얼마나 자주 했는지를 돌아보게 한다는 것이다. 페리클레스의 연설 없이 오바마의 그런 연설이 가능했을까? 이어지는 내용은 우리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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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그들을 모범으로 삼아, 자유가 없는 곳에 행복이 없고, 용기가 없는 곳에 자유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전쟁의 위험 앞에서 조금도 망설여서는 안 될 것이다. 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을 견지하지 못하는 비참한 자라면 자기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싸울 필요가 없을지 모른다. 행운도 지나치면 악운을 초래할 수 있음을 감수하려는 사람들만이 생명을 걸고 행복을 지키려 한다. 긍지 있는 인간은, 조국을 위해 온 힘을 다하고 홀연히 죽어 가는 것보다 겁을 내고 살면서 수치를 당하는 것에서 더 고통을 느낀다.


그러므로 여기 모인 전몰자의 부모가 되는 여러분께 안타까운 애도의 말씀은 드리지 않으려 한다. 그보다 나는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는 위로의 말씀을 드리겠다. 우리가 태어나고 자란 이 세상이란 수많은 삶의 변천이 있는 곳임을 여러분도 잘 알고 있다. 그나마 여기 잠든 전몰자들처럼 영광으로 가득 찬 최후를 맞이하고, 여러분이 바치는 것과 같은 애도를 받을 수 있으며, 그 파란만장했던 생애의 종말에서 충실했던 사람들이야말로 행복한 최후였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여러분이 설득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여러분이 예전에 누렸던 기쁨을 오늘 이후로는 남들의 손에서 찾아야 할 때, 여러분은 수없이 슬픔을 느낄 것이다. 행복을 모르는 사람은 불행도 쓰라리지 않다. 고통은 오랫동안 익숙했던 행복을 상실하는 것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아직 자식을 낳을 수 있는 사람들은 태어날 자식에 대한 희망으로 견뎌야 한다. 새로 태어날 자식들은 가정에서는 죽은 자를 잊게 하는데 도움을 주며, 도시국가로서는 인구와 방위의 양 측면에서 필요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내 자식의 생명을 나라에 바치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공동체가 공평하고 정의롭게 운영되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여러분 가운데 나이가 있는 분들은 행복했던 인생이 요구하는 대가로 여기는 동시에, 슬퍼해야 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위안 삼아 죽은 사람들의 명예에서 마음의 안식처를 찾기 바란다. 명예를 사랑하는 마음만이 늙지 않는다. 누군가도 말했듯이 은퇴할 나이가 된 사람은 사리사욕을 따르지 않고 존경받는 데서 기쁨을 느낀다.


여기에 모여 있는 전몰자의 형제나 유자녀 여러분, 여러분의 앞날에 힘든 싸움이 기다리고 있음을 안다. 사람이 죽었을 때 그를 칭송하는 것은 세상의 관습이다. 비록 여러분이 영예로운 행동을 했을지라도 죽은 사람만큼의 명성을 얻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 어떤 것도 죽은 자들의 공적에 미치지 못한다고 간주될 것이기 때문이다. 살아있을 동안에는 모두 경쟁심 때문에 서로를 질투하지만, 세상을 떠나 버린 사람에게는 순순히 경의를 표하는 게 인간이다.


오늘 이후 미망인이 되는 분들에 대해 한마디 언급할 게 있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짧은 권고에 다 담겨 있다. 여러분이 타고난 본성에 따라 꿋꿋하게 살아가는 것이 큰 명성이 되겠지만, 그래도 가장 큰 명성은 좋게든 나쁘게든 남자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는 데 있다.


관습법에 따른 내 연설에서 내가 해야 할 말은 다했다. 여기에 안치된 사람들의 영예를 위해 거행되어야 할 의식도 이미 마쳤다. 그들의 자녀가 성인이 될 때까지 양육에 필요한 것은 도시국가가 책임진다. 이는 전몰자들과 그 유족들이 겪을 시련에 대해 나라가 해야 할 당연한 보상이다. 용기에 가장 큰 상을 주는 나라야말로 가장 훌륭하고 가장 용감한 시민들이 다스리는 곳이다. 자, 이제 각자 연고가 있는 전몰자들에 대한 애통함은 충분히 풀었으니, 모두 이곳을 떠나시라.”

위 단락 가운데 남자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여성이 되지 말 것을 부탁하는 대목은 페미니스트들의 비난을 받았다. 2천5백 년 전의 시대적 한계를 고려해야겠지만, 어쨌든 이 부분만큼은 좋게 평가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노인들에게 삶의 고통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위안 삼으라 한 것도 논란이 될 수 있다. 다른 부분도 보기에 따라서는 다소 냉정해 보일 수 있다. 반면 이처럼 당당하게 ‘가혹한 위로’를 할 수 있다는 것에 경탄할 수도 있다. 각자마다 평가의 기준은 조금씩 다르겠지만 실존하는 인간 존재에 대한 ‘두려움 없는 진술’이라는 점에서는 놀랍게 여겨진다. 인간으로서 시민 개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고, 이제 그 나머지는 “국가가 책임진다.”는 내용도 복지국가에 대한 고전적 관점을 보여 주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 애통함과 회한을 모두 풀었으니, 이제 이 자리를 떠나자!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의 현장으로 용기를 갖고 돌아가자! 이런 선언이야말로 용기 있는 통치자만이 할 수 있는 자세가 아닌가 한다. 정치사상가 셸던 월린(Sheldon Wolin)은 마키아벨리에 대한 해석을 통해 정치란 ‘도덕적 비애감’(moral pathos)을 뚫고 비상하는 인간 활동으로 정의한 적이 있는데, 페리클레스의 이 연설이야말로 이를 실증하는 정치 연설의 고전 가운데 고전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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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번역은 토머스 홉스의 영문판과 펭귄북스 영문판을 기본으로 삼았다.

● Thucydides. [1628]1989. (Tomas Hobbes Trans.)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 Thucydides, (Rex Warner Trans.)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Penguin Books 2000).

2. 그 밖에 참고와 대비를 위해 사용한 한글판과 영문판의 서지 사항은 다음과 같다.

● 투키디데스 지음, 천병희 옮김. 2011.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숲.

● 페리클레스・뤼시아스・이소크라테스・데모스테네스 지음, 김헌・장시은・김기훈 옮김. 2015. 『그리스의 위대한 연설』. 민음사.

● Thucydides. 1849. (Henry Dale Trans.)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H. G. Bohn.

● Thucydides. 1906. (William Jennings Bryan Trans.) The World’s Famous Orations.Funk & Wagnalls.

● Thucydides. 2004. (Richard Crawley Trans.)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Dover Publications Inc.


박상훈 | 정치발전소 학교장

정치학을 전공한 정치학자이다. 정치의 현장 가까이에서 읽고 쓰고 말하는 일을 한다. 실천으로서의 정치와 학문으로서의 정치학이 엄격하게 분리되기보다는 어느 정도 중첩되기를 바란다. 그것이 정치학의 본래 모습이자 애초의 이상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정치가의 존재를 시야에서 놓치지 않을 때 정치학적 논의 역시 훨씬 더 풍부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뿐만 아니라 다른 누구보다도 시민의 적법한 대표라 할 수 있는 정치가들이야말로 정치학의 개념과 이론을 선용할 수 있는 존재가 되길 바란다. 그래야 민주정치의 여러 규범과 가치가 시민들의 삶의 양식 속으로 더 깊이 파고들어 지속 가능한 전통으로 안착할 수 있으리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