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 박상훈 (전 정치발전소 학교장)

2024-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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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 박상훈

 

첫째, 대통령의 역할은 끝나가고 있다. 우리는 또 한 번 실패한 대통령을 마주하게 되었다. 대통령직이 이토록 잘하기 어렵고 위험한 것인데도, 왜들 그렇게 집착하고 열망하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대통령의 실패 그 이면에는 한국 정치의 실패가 자리하고 있다. 이 문제도 균형 있게 살펴야 할 시점이다.

 

 

둘째, 대통령은 떠날 준비를 해야겠지만, 우리가 할 일은 남았다. 어떤 방법으로 직무를 중단시키고 조사와 책임 문제를 진행해 갈지에 대한 결정부터 차기 대통령 선출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 간단한 일이 아니다. 대통령이 분노하고 흥분해서 결정을 내리면 어떤 불행을 가져오는지를 지켜본 우리는 다르게 대응해야 한다. 냉정한 상식을 유지하며 일을 마무리해야 한다.

 

 

셋째, 우리 앞에는 좋은 경로와 나쁜 경로가 있다. 좋은 경로는 여야가 합의하는 길이고, 나쁜 경로는 여야가 대립하는 길이다. 여야 합의 여부는 시민불안∙정국혼란∙위헌논란이 최소화될지 아니면 최대화될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변수다. 우리도 경험한 바 있고, 중남미 여러 국가의 대통령 탄핵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 적법하게 위임된 주권을 중도에 해지하는 일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분열의 상처를 남긴다. 그 상처를 최소화하는 유일한 방법은 여야의 합의에 있다. 8년 전의 탄핵이 우리 사회를 그나마 더 분열시키지 않고 마무리될 수 있었던 것도 당시 입법자의 절대다수가 합의해서 일을 처리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했는데도 우리가 감당해야 했던 고통은 결코 작은 게 아니었다. 그렇기에 10년도 안 되어 다시 마주한 이번 사태가 미칠 영향은 훨씬 더 크고 오래갈 수밖에 없다. 최소한 그때보다 더 잘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 앞에 지금 우리가 서 있다.

 

 

넷째, 여야가 합의하는 길에는 두 가지 선택이 있다. 하나는 대통령 조기 사퇴에 이어 빠르면 내년 2월과 3월 사이에 대선을 치르는 것이다. 선거는 가장 권위 있는 시민총회이고, 사태를 수습하는 데 이보다 더 강력한 정당성을 제공하는 것은 없다. 다른 하나는 여야가 12월 어느 날을 사퇴 시한으로 특정하고 대통령이 거부하면 그다음 날짜로 탄핵을 가결하는 선택이다. 이 경우 헌법재판소는 일을 서둘러서 늦어도 내년 5월까지는 대선을 치를 수 있게 해줘야 한다. 여야가 합의해서 조기 대선을 무리 없이 마친다면, 양극화 정치를 개선하고 의회정치와 정당정치를 발전시키는 계기를 만들 수도 있다.

 

 

다섯째, 여야 합의 없는 길에도 두 가지 선택이 있다. 하나는 야당 일방적으로 탄핵 가결을 주도하고 거리에서는 탄핵 시위를 이어가는 선택이다. 이 길은 여당 의원 가운데 일부가 여론의 압박에 굴복해 가결에 참여할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다른 하나는 여당 일방적으로 탄핵 없는 정국 수습책을 고집하는 선택이다. 이 길은 국힘당과 보수 여론의 분열 정도에 따라 그 지속 여부가 결정될 것이다. 여야 합의 없는 이 두 길은 정치 양극화의 심화는 물론 사회와 여론도 더 깊이 분열시키는 결과를 동반할 것인바,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는 오랜 시간이 지나야 아물 수 있는 상처를 안게 될 수밖에 없다.

 

 

여섯째, 윤석열로 끝내는 싸움인가, 다른 정치를 위한 싸움인가라는 선택도 있다. 전자는 지금의 정치를 그대로 두고 관련자를 처벌하는 것으로 마무리하는, 비교적 쉬운 싸움이다. 그러면 변화는 없을 것이다. ‘윤석열 없는 양극화 정치’는 그대로 갈 것이다. 다른 선택은 윤석열을 넘어 한국 정치를 바꾸는, 어려운 싸움이다. 이번 사태는 그간 민주주의를 잘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터진 게 아니다. 한동안 한국 정치는 정치가 아니었다. 권력자들이 서로 누가 먼저 죽을지를 두고 극단으로 대립한 ‘러시안룰렛게임’ 같은 정치였다. 상대가 죽기만을 바라는 ‘검투사 경기’ 같은 정치였다. 극렬 유튜버들이 지배하는 정치였고 마초와 스트롱맨들의 정치였다. 누군가 죽어야 하는 싸움이었고, 누군가 계속 죽어왔는데도 그 죽음조차 이용하는 정치였으며, 그래서 누가 죽어도 끝나지 않는 어두운 정치였다. 서로가 소리를 지르고 상대를 야유하고 자신만 옳다고 우기는 혐오와 적대의 정치였다. 민주주의도 잘못되면 얼마나 고통스러울 수 있는지를 지켜봐야 하는 정치였다. 윤석열 문제에서 멈출 일이 아니라 한국 정치가 바뀌어야 더 나은 미래를 만들 수 있다.

 

 

일곱째, 누구도 혼자 다 가지려 하면 안 된다. 권력은 그대로 두면 독점하게 마련이다. 지난 탄핵의 경험을 통해 얻게 되는 교훈이 있다면 바로 이 점이다. 분명 2016년의 촛불집회는 진보만이 아니라 중도는 물론 보수 시민의 상당수가 참여하고 지지했던 ‘시민 대연정’이었다. 뒤이은 대통령 탄핵은 야 3당과 집권당 내 상당수 의원이 참여한 ‘정치 대연정’에 가까웠다. 2017년의 조기 대선도 그랬다. 압도적 득표자 없이 40.08%에서 당선자가 나옴으로써 ‘온건 다당제’를 잘 이끌어 보라는 ‘시민 평결’이었다. 대통령 탄핵을 함께 이끌었던 네 당이, 폭넓은 시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광범한 정치 연합을 형성해, 박근혜 정권에서 있었던 문제를 함께 개선하는, 공동통치(co-governance)를 제도화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못했다. 승자는 다 가지려 했고, 패자에게는 기회를 주지 않으려 했다. 촛불 ‘대연정’은 촛불 ‘혁명’이 되었다. 다당제는 극단적인 양당제로 퇴락했다. 시민 대연정은 ‘문빠·태극기부대·이대남·극렬유투버’들로 공중분해 됐다. 박근혜 정권의 “좌익 세력 10년 적폐 청산”의 진보판이라 할 “적폐의 철저하고도 완전한 청산”이 제1호 국정 과제로 선포되었다. 검찰 권력은 윤석열을 통해 다시 동원되었다. 우병우 민정수석의 역할은 조국 민정수석으로 이어졌다. 여야가 국정 동반자가 되는 일도 없었다. 박근혜식 ‘국민 직접 정치론’의 진보판이라 할 ‘청와대 국민청원’으로 세상을 흥분시켰고, 국회와 정당을 우회한 ‘청와대 정부’가 다시 등장했다. 여야는 극단적으로 대립했다. 시민사회는 한강을 사이에 두고 광화문집회와 서초동집회로 분단되었다. 이렇게 될 일이 아니었는데, 그렇게 되고 말았다. 이때의 일이 반복되지 않아야 한다.

 

 

여덟째, 정치는 정치다워야 한다. 정치가 들어서야 할 자리에 처벌과 복수의 열정이 채우게 해서는 안 된다. 대화와 타협, 조정이라는 정치의 미덕을 버리면 안 된다. 그러면 진영이 다른 상대는 물론이고 같은 진영 안에서도 혐오를 동원하는 사람들만 기세를 높일 것이다. 극단적 선택을 반복하는 일은 세상을 비인간적인 열정으로 지배당하게 만든다. 동의와 타협을 통해 느리지만 앞으로 나아가는 사회, 점진적인 변화를 추구하며 협동의 가능성을 키우는 사회, 증오보다는 신뢰를 쌓아 갈 수 있는 사회, 이런 사회를 위한 정치가 훨씬 더 인간미 있는 미래를 만든다. 정치 없는 민주주의는 비극이다. 그 길은 거리에서 시민이 격돌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정치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고 정치가 늘 성공적인 것만도 아니지만, 꼭 필요한 역할을 한다. 정치란 우리가 서로 다르기에 불러들여진 인간 활동이다. 우리가 쉽게 같아질 수 있고 언제나 일치할 수 있다면 정치는 없어도 될 일이다. 그렇지 않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정치의 역할이 필요하다. 상대를 적으로 만드는 싸움은 전쟁이지 정치가 아니다. 정치는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좋은 사회를 위해 누가 더 현명한 싸움을 선택하는지를 둘러싼 경쟁에 가깝다. 여야를 달리 지지하는 시민들을 서로 증오하게 만드는 것은 정치가 아니다. 여야는 지혜롭게 싸우면서 실질적 변화를 이어가는 정치를 해야 한다. 그런 일에서 보람을 찾는 이가 정치를 해야 시민도 살고 사회도 산다.

 

 

아홉째, 반(反)보수나 반(反)진보는 정치를 안 하겠다는 선언과 같다. 보수도 진보와 얼굴 붉히지 않고 토론할 수 있어야 한다. 진보도 보수를 경멸하지 않아야 일을 풀어갈 수 있다. 진정 정치적인 어떤 신조가 있다면 그것은 어렵기 짝이 없는 여러 사안을 두고 실현 가능한 해결책을 찾아내려는 힘든 조정의 반복 속에 있다. 노력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 그것이 인생이고 또 민주주의다. 정치 없는 민주주의는 육신을 떠난 영혼처럼 허망하다. 지난 촛불집회 이후 10여 년 가까운 기간 동안 우리도 그 허망함을 경험했다. 모두가 화를 내며 서로의 과거를 두고 싸우느라 공동의 미래를 이야기할 수 없는 민주주의였다. 늘 싸워야 하는 사회는 무언가 잘못된 것이다. 자유로운 인간이라면 모든 것을 걸고라도 싸워야 할 때가 있지만, 그게 일상일 수는 없다. 그런 위험한 일상을 살고 싶지 않아서 민주화 운동도 하고 촛불도 들었는데, 우리를 늘 싸우게 하는 정치를 계속할 수는 없다. 집권하면 상대를 청산의 대상으로 몰아가고, 야당이 되면 나라 빼앗긴 사람처럼 모든 것을 걸고 싸우는 일을 반복하지 않아야 한다. 일이 이번에도 일이 그렇게 되면 양당제는 더 심화될 것이다. 양극화된 싸움은 강자들만의 싸움이다. 다름과 차이를 존중해 더 풍부한 전체를 만들려면 다원주의적 민주주의의 길을 넓혀야 하는데, 지금처럼 가면 목소리 센 사람만 살아남는다. 우리를 과거에 묶어 두는 정치, 공동체의 미래를 함께 이야기할 수 없는 정치를 이번에는 넘어서야 한다.

 

 

열째, 정치가다운 사람에게 일을 맡겨야 한다. 앞으로 우리가 가야 할 길의 대부분은 불안과 갈등의 시간이다. 해방이 좌우 분열과 분단으로 이어진 것에서 교훈을 얻는다면, 이제부터는 자신의 야심을 실현하려는 이들이 시민들의 선의와 열망을 악용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그들의 특징이 있다. 그들은 자신이 옳기 위해 타인을 옳지 않은 사람으로 만든다. 자신의 권리와 자유만큼 타인의 권리와 자유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그들에게 자신과 생각이 다른 것은 틀린 것이고, 공격하고 파괴해도 되는 악이다. 그들은 이견을 이적시하고, 경쟁자를 쉽게 악마화한다. 다름으로부터 배울 수 없는 사람이고, 넓게 협동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들에게 기회를 주면 안 된다. 공동체의 적대와 분열을 걱정해야 하는 지금과 같은 시기에 그들만큼 위험한 존재는 없다. 침착한 사람에게 일을 맡겨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불모의 흥분상태로 이끌리지 않을 것이다. 시민적 예의를 존중하는 사람에게 역할을 줘야 한다. 그래야 앞으로 닥칠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가 서로를 신뢰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어떤 정치를 할 것인지가 분명한 사람이라야 한다. 그런 정치가라야 이 위험한 시간을 헤쳐 나가는 동안 길을 잃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