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말의 힘 | ④ ‘냉소의 정치’는 우리를 분열시키고, ‘희망의 정치’는 우리를 담대하게 만든다 : 버락 오바마 <2004년 민주당 전당대회 연설>
2019-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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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의 연설을 보다 보면, 수사학에 대한 그의 이해가 매우 깊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에서부터 현대 수사학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발전해 온 수사학의 풍부한 유산을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키케로의 수사학을 가장 가깝게 구현한 정치가라 할까, 아니면 가장 대중적이면서도 가장 지적인, 오바마만의 연설 스타일을 구현했다고 할까, 아무튼 오바마는 ‘정치 연설의 클래스’를 제대로 보여 준 정치가다.
정치적 말의 힘 ④
‘냉소의 정치’는 우리를 분열시키고, ‘희망의 정치’는 우리를 담대하게 만든다 : 버락 오바마 <2004년 민주당 전당대회 연설>
글쓴이 |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
1. 현대 정치 연설의 신기원을 이룬 오바마
오바마의 연설을 보다 보면, 수사학에 대한 그의 이해가 매우 깊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에서부터 현대 수사학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발전해 온 수사학의 풍부한 유산을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1) 로마 공화정의 수사학을 대표하는 키케로의 기준에서 보더라도, 오바마 연설은 제대로 수사학적이다.
키케로는 그가 후마니타스(Humanitas)라고 부른 인문학적 교양을 강조했고, 그 기초 위에서 말과 글의 힘을 발전시킬 것을 중시했다. 그런 점에서 키케로의 수사학을 가장 가깝게 구현한 정치가라 할까, 아니면 가장 대중적이면서도 가장 지적인, 오바마만의 연설 스타일을 구현했다고 할까, 아무튼 오바마는 ‘정치 연설의 클래스’를 제대로 보여 준 정치가다.
2. ‘현대의 키케로’로 평가받는 오바마
굳이 아리스토텔레스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우리 인간은 공동체와 국가의 일원으로 태어났고 또 그 일원으로 살 때만 ‘목적을 가진 존재’가 될 수 있다. 국가 공동체를 갖지 못한 난민의 삶을 권장하는 정치학은 없다. 국가 공동체의 운영과 통치에 참여하는 것을 통해, 공화주의자들이 오피시움(officium)이라고 정의하는, 일종의 공적 의무를 실천해야 하는 정치가가 말과 언어의 힘을 갖추지 못한다면 그것은 비극이다.
키케로만큼 이를 강조한 철학자도 없었는데, 그는 수사학을 공익 내지 공공선(public good, commonwealth)을 위한 실천적 학문으로 이해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과 수사학을 계승 발전시키는 일에 헌신했다. 실제 정치가로서 공화정을 지키고자 했던 그의 정치적 이상은, 말이 자유롭고 풍부한 나라에 있었다. 설득의 힘을 최대화하는 것이야말로 좋은 정치의 기초라 보았으며, 반대로 독선이나 일방적 주장이 지배하는 나라에서는 필연적으로 폭력과 억압이 커질 수밖에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가라면 누구나 나의 말이 합리적 설득의 기초를 둔 것인지 아니면 분열과 적대를 위한 것인지 늘 돌아봐야 한다.
정치란 분열을 위한 것이 아니라 협력을 위한 것이라는 이 규범을 준수하는 일에 있어서 오바마만큼 철저한 정치가는 흔치가 않다. 그는 당파적이기만 한 연설은 하지 않았다. 당파적인 내용을 말할 때도 그것이 공익의 증진과 병행할 수 있다는 확신이 없이는 말하지 않았다. 상대 당이나 정치인을 야유하거나 냉소하는 언어는, 적어도 오바마의 연설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그는 진심으로 정치적 예의를 실천하고, 진심으로 연대와 협력을 말하며, 공익에 헌신하는 자세에 있어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우리 정치인들의 경우는 그 반대다. 어떤 자리에서든 상대 당파를 공격하고 야유함으로써 지지자들에게 잘 보이려는 것이 전형적인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시민들도 누구나 정치 이야기를 할 때면 개탄과 냉소, 경멸조의 표현을 즐겨 쓰게 되는 것이다. 정치에 관심이 많은 시민일수록 말이 거칠고 적대적이다. 한국 정치에서 말은 동료 정치인이나 동료 시민들에게 날카로운 흉기가 된지 오래다.
오바마 정치 연설은 무엇보다 내용이 아름답다. 자신들만의 세계를 고수하는 편협함이 없다. 언제나 전체 공동체에 대한 애정과 헌신이 그 중심이다. 표현 방식은 물론 연설의 기법도 훌륭하다. 인용, 반복, 대조, 비유, 직유, 환유는 때에 따라 차분하고, 때에 따라 정서적 점증으로 이어진다. 어떤 때는 열정을 불러일으키고 어떤 때는 감정의 공유를 경험하게 한다. 연설의 내용과 기법 모두 그를 진실한 사람으로 느끼게 만든다는 것만큼 그의 연설이 갖는 힘을 잘 표현하는 것도 없다.
3. 연설의 능력을 자각한 오바마
“내 안의 연설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오바마의 자전적 책,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에 나오는 이야기이자, 오바마가 LA에 있는 옥시덴탈칼리지에 다니면서 학생운동을 했을 때의 한 일화다.2) 오바마와 그의 선배 및 동료들은 학생운동이나 시위에 관심이 없는 대학 내 분위기 때문에 고심했다. 그래서 인권운동을 탄압하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부를 규탄하는 시위를 퍼포먼스 형식으로 해보기로 했다.
오바마에게는 인권운동가 역할이 맡겨졌고 그가 연설하는 도중 경찰과 기관원 역할을 맡은 선배, 동료들에 의해 제압당하고 연행되는 장면을 연출하면 되었다. 선배들은 오바마에게 별거 아니니 연설하는 척만 하면 된다며 오바마가 긴장하지 않게 했다. 준비했던 퍼포먼스 스타일의 시위가 시작되었고 오바마가 등장했다.
오바마의 표현에 따르면, 그는 “자기도 모르게 진짜로 연설을 했다.” 그가 연설을 하자, 풀밭에서 원반던지기를 하던 남학생들도 던지던 원반을 손에 쥔 채 자신을 향해 돌아섰다. 벤치에 앉아 입 맞추던 커플도 입술을 떼고 자신의 연설에 눈과 귀를 열었다. 경찰과 기관원들 역할을 맡은 선배들에게 연행되면서, 오바마는 역할극을 한 게 아니라 진짜로 끌려가는 느낌을 받았다.
이날 시위를 통해 오바마는 그때 자신에게 말의 힘, 주변 사람들을 귀 기울이게 만드는 능력이 있다는 생각을 했는데, 정작 그날 밤 그는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시위를 마치고, 우리식으로 말하면, 뒤풀이가 있었다. 오바마의 선배들은 새로운 형식의 시위에 반응이 좋았다며 즐거워했다. 오바마에게도 “버락! 잘했어, 너 오늘 진짜 같이 연설하던데.”라고 칭찬을 했고, 그렇게 오랫동안 술자리가 이어졌다.
진짜로 인권상황을 고발했고, 진짜로 부당하게 끌려갔던 감각을 기억하고 있던 오바마에게 그날 뒤풀이는 낮에 있었던 자신들의 행동을 기만하는 행사 같았다. 퍼포먼스는 그저 하게 되어 있는 연기였을 뿐, 시위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실체적 진실은 사라져 버린 느낌이 들었다. 그런 고민 속에서 오바마는 대학 1, 2학년을 술과 마리화나, 담배로 보냈고, 긴 방황과 번민 끝에 학생운동을 그만두기로 결심한다.
대학 3학년으로 편입한 뉴욕의 콜롬비아 대학에서 그는 국제정치학을 전공했다. 부전공으로는 영문학을 했다. 그 가운데도 셰익스피어 관련 과목을 열심히 들었다. 적나라한 힘이 부딪히는 현실주의의 학문인 국제정치학을 전공하면서, 온갖 형용 모순적인 표현을 통해 인간의 내면세계가 가진 복잡한 측면을 밝혀준 셰익스피어의 문장을 익혔다는 뜻이다. 이때 오바마는 학과 수업에 충실했을 뿐 아니라, 틈틈이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와 같은 중요 고전들을 열심히 독서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기독교 신앙을 실제의 정치 문제와 접목시킨 칼 폴 라인홀드 니부어(Karl Paul Reinhold Niebuhr, 1892년 ~ 1971년)의 대표작. 1932년에 출간되었다. 이 책으로 그는 기독교 현실주의자로 불리게 되었다. 개인은 양심과 합리성, 체면과 같은 도덕적 자원을 갖고 있지만 사회는 그렇지 못하며, 개인은 교육을 통해 이타주의적이 되게 할 수 있지만 사회를 그렇게 바꿀 수 없는 이유를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책이다.
졸업 후에는 (뉴욕, LA와 함께 미국 3대 흑인 공동체 도시인) 시카고로 옮겨가 “지역 공동체 조직가(community organizer)” 즉, 흑인 빈민 지역 활동가로 3년간 헌신했다. 그 뒤 “가난이나 불평등과 같은 구조적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그간 가졌던 권력에 대한 나의 태도를 바꿀 필요가 있다.”는 자각과 함께 정치의 길을 준비하게 된다. 하버드 대학 로스쿨에 입학했고, 흑인 최초로 “하버드법률평론(Harvard Law Review)” 편집장으로 선출됨으로써 전국적으로 유명인이 되었다. 학업 성적도 뛰어났다. 최종적으로 차석 졸업을 한 후 시카고로 돌아왔다. 운동가로서가 아니라 정치가로서 제2의 시카고 인생을 시작한 것이다.
버락 오바마, 케냐 출신 흑인 아버지와 캔자스 출신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고, 인도네시아에서 엄마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하와이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친 뒤, LA에서 대학 생활을 시작해 뉴욕에 있는 콜롬비아 대학을 거쳐 시카고에 정착할 때까지 긴 여정을 거친 그는, 마치 운명에 이끌리듯 정치가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연설의 힘을 가진 정치가’로서 그는 어떤 성취를 보여주었을까?
4. 오바마의 비상(飛上)
첫 번째로 살펴볼 것은, 일리노이 주 상원의원을 하고 있던 젊은 오바마를 전국적 스타로 만든 2004년 민주당 전당대회 연설이다. 이 연설을 한 뒤 이듬해 연방 상원의원에 당선되고, 2007년 대통령 출마 선언을 한 뒤, 드디어 2008년 대통령이 되었다!
오바마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상을 통해 본 사실이지만, 이 연설 직전 오바마는 자신의 차례가 호명되기 전 무대 뒤에서 미셸과 있었다. 드디어 차례가 되자 미셸과 포옹하고 무대 위로, 마치 마장용 말이 가볍게 걷듯, 경쾌하게 연단으로 나아갔다. 농구선수 선수답게 긴 팔을 뻗고 큰 손을 높이 든 채 무대의 중심에 섰다. 연설이 시작되었다.
사람들이 천천히 그의 말에 빨려들었고, 점차 사람들이 환호하기 시작했다. 맨 앞쪽에 앉아 있던 민주당 대선 후보 존 케리는, 뭔가에 홀린 듯 입을 벌린 채 연설 중인 오바마를 올려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겼다. 이 대목에서 나는 영화, <빌리 엘리어트>의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다.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발레리노로 성장한 주인공 소년 빌리. 그를 보러 탄광 노동자인 그의 아버지와 형 그리고 어린 시절의 친구가 왔다. 무대 뒤에서 그들이 왔다는 이야기를 전달받은 빌리, 드디어 무대가 열리자 멋진 등 근육을 움직여 긴장을 풀고는 가볍게 무대를 가로질러 달려가며 높이 도약한다. 최고의 발레리노로 성장한 빌리의 비상, 그 아름다운 장면을 지켜보는 늙은 광부 아버지의 딱 벌어지는 입, 그야말로 경탄 그 자체였다.
오바마가 연설을 마치자 청중석 맨 뒤에서 한 여성이 거의 깡충깡충 뛰듯 두 손으로 있는 힘껏 박수를 오래도록 쳤다. 한동안 카메라가 그녀를 잡아 주었다. 힐러리 클린턴이었다. 민주당의 젊은 스타 정치인의 등장을 누구보다도 환영하던 그때 그녀는 상상이나 했을까? 4년 뒤 저 오바마가 자신을 꺾고 민주당 대선 후보가 되고 또 대통령이 될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제 연설 내용을 보자.
5. 오바마의 2004년 민주당 전당대회 연설
“감사한다. 여러분. 정말 감사한다. 딕 더빈 상원의원님. 당신은 우리 모두를 자랑스럽게 해준다. 미국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교차로이자, 링컨의 땅, 위대한 일리노이 주를 대표하여, 전당대회에서 연설할 수 있는 특별한 권리를 갖게 된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한다. 나에게 오늘 저녁은 대단히 영광스러운 시간이다. 솔직히 말해, 내가 오늘 이 연단에 서 있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
나의 아버지는 유학생이었다. 그는 케냐의 작은 마을에서 나고 자랐다. 아버지는 염소를 치면서 컸고, 양철 지붕의 판잣집에서 학교를 다녔다. 아버지의 아버지, 그러니까 나의 할아버지는 영국인 가정에서 요리사를 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에 대해서만은 큰 꿈을 품었다. 아버지는 노력과 인내 끝에 마법과도 같은 곳에서 공부할 수 있는 장학금을 받았다. 바로 미국이었다. 아버지 이전의 수많은 이민자에게도 자유와 기회의 빛을 비춰준 등대 같은 곳이다.
미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아버지는 어머니를 만났다. 어머니는 케냐의 지구 반대편 캔자스 주에서 태어난 분이었다. 어머니의 아버지는 대공황 시기 내내 유정과 농장에서 일했다. 진주만 사태가 발발한 다음 날, 외할아버지는 군에 입대했다. 그리고 패튼 장군의 지휘 아래 유럽 대륙을 누볐다. 그동안 외할머니는 집에서 아기를 돌보면서 폭격기 조립 라인에서 일했다. 전쟁이 끝난 이후 두 분은 GI 법안3)의 보조를 받아 학업을 마쳤다. <연방주택국> 대출을 받아 집을 샀다. 나중에는 서쪽의 머나먼 하와이로 기회를 찾아 떠났다. 그 두 분 역시 딸에 대해서 큰 꿈을 품었다. 멀리 떨어진 두 대륙에서 품어진 꿈이었지만, 그것은 하나의 같은 꿈이었다.
연설의 첫 번째 주제는 꿈(dream)이다. 그것도 하나의 같은 꿈이다. 케냐 출신 아버지와 미국 남부 출신 어머니, 그리고 그들의 부모들이 꾼 꿈. 더 넓히면 이민자들로 이루어진 미국이라는 나라의 꿈을 다뤘다. 흔히 아메리칸 드림이라고 불리는 이 주제를 가장 감각적으로 잘 다룬 대표적인 연설이 아닐 수 없다.
나의 부모님은 불가능에 가까운 사랑을 나눴다. 뿐만 아니라 이 나라의 장래에 대해 굳건한 신념을 공유했다. 부모님은 버락이라는, 아프리카 말로 “축복받은”이라는 의미의 이름을 지어주셨다. 미국이라는 관용적인 나라에서는 이름으로 인해 차별을 받지 않으리라 믿으셨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부자가 아니셨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땅에서 최고의 학교에 가기를 기대하셨다. 미국이라는 관대한 나라에서는 돈이 있어야만 잠재력을 발휘할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은 두 분 모두 돌아가셨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하늘에서 자랑스럽게 나를 내려다보고 계시리라고 생각한다.
나는 내가 물려받은 유산의 다양함에 대해 감사한다. 부모님의 꿈이 소중한 나의 두 딸을 통해 지속될 거라는 사실 또한 명심하고 있다. 나는 나의 이야기가 방대한 미국의 이야기를 구성하는 일부라는 사실, 이는 앞서 살았던 모든 선조들 덕분이라는 사실, 지구상 다른 나라에서라면 나의 이야기가 불가능했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오바마는 개인사를 좋아한다. 개인사를 곧 미국의 역사와 연결시키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다. 이민자 개인의 역사는 곧 전체로서의 미국사를 구성하는 부분들이고, 그게 미국의 장점이자 자랑거리라는 것이 오바마의 일관된 메시지다. 그래서 알렉스 헉슬리의 『뿌리』를 연상시키는 오바마 개인의 역사는 미국이 가진 다양성의 원천이자 발전의 원동력으로 이해되게 만든다. 이 뿌리와 원천에 대한 이야기는, 출간 후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올랐던 그의 책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에서 훨씬 풍부하게 다뤄진 바 있다.
우리는 오늘 저녁 이 나라의 위대함을 확인하기 위해서 모였다. 우리가 높은 빌딩을 갖고 있어서 위대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군대가 강해서 위대한 것도 아니다. 우리의 경제 규모가 커서도 아니다. 우리가 가진 자부심의 원천은 다음과 같은 아주 간단한 명제에 있다. 그것은 이백 년 전의 어느 한 선언문에 정리되어 있다. “우리는 다음의 것들을 자명한 진리라고 생각한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 창조주께서 그들에게 불가침의 권리를 주셨다. 그 권리 중에는 생명, 자유, 행복 추구가 있다.”
미국이 가진 진정한 특별함은 바로 여기에 있다. 소박한 소망들에 대한 신념, 그리고 작은 기적들에 대한 확신이 그것이다. 그것은 밤에 아이들을 편안히 잠재울 수 있다는 데 있다. 아이들을 굶주리지 않고 따뜻하게 입히며 위험으로부터 안전하게 지킬 수 있다는 데 있다. 우리의 생각을 자유롭게 말하고 가감 없이 쓰더라도 갑작스레 누군가 우리 집에 들이닥칠까 봐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데 있다. 좋은 아이디어가 생겼을 때 뇌물을 바치지 않고도 사업을 시작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하면서 보복을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지 않는다는 데 있다. 우리의 한 표가 선거 결과에 반영될 거라는 데에 있다. 늘 그렇지는 않을지 몰라도, 대개의 경우 우리는 이러한 소박한 소망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다.
올해 선거에서 우리 모두는 우리가 가진 가치와 그에 대한 헌신을 재확인하라는 부름을 받았다. 오늘의 현실과 냉정하게 견줘보고, 과연 우리가 선조들의 유산과 후대의 기대에 얼마나 부응하고 있는지 확인해야 할 것이다.
드디어 이 부분에서 오바마는 자신의 장기 가운데 하나인 ‘반복을 통한 감정의 점증’을 고조시키고 있다. 실제 연설을 보면 앞서 조용히 오바마의 개인사를 듣던 청중들이 열광적으로 화답하기 시작한다. 젊은 오바마의 패기 넘치는 연설이다. 대통령이 된 다음에는 중저음의 톤으로 바뀌었지만, 이때 오바마는 확실히 젊고 도전적인 연설 태도를 보였다. 내용도 훌륭하다. 미국의 전통과 가치, 그 위대함에 대한 오바마의 매우 인상적인 해석이 잘 드러난다. 그것은 흑인 진보파와 백인 진보파 사이의 갈등과 차이를 효과적으로 통합하는 시각이자, 히스패닉과 무슬림을 포함해 다양한 집단의 존재와 그들의 정체성을 분열이 아니라 공존하게 하는, 일종의 다원주의적 가교의 역할을 하는 정치론이라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오바마는 “흑인 맞아?” 혹은 “진보 맞아?”와 같은 냉소와 의심을 받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최대 다수의 인종 연합을 가능케 하고 그를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만든 정치론이 아닐 수 없다. 그에게서 ‘오바마주의’라고 부를만한 특별함이 있다면, 개인과 집단의 차이를 넘어 미국 사회를 통합으로 전통과 가치에 대한 그의 확고한 믿음이다. 그것은 인종과 계급의 차이와 상관없이 평등한 자유와 권리에 대한 모두의 존중을 요청하는 그의 연설에서 잘 나타나 있다.
동료 미국 시민 여러분, 민주당원 여러분, 공화당원 여러분, 비당원 여러분, 감히 말씀드리건대 아직 우리에게는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 일리노이 주 게일스버그 시에서 만난 노동자들을 위해 해야 할 일이 우리에게 있다. 멕시코로 이전하는 메이태그 사 공장에서 근무하다가 갑자기 실직하고 나서는 시급 7달러 일자리를 두고 자식들과 경쟁해야 하는 그 노동자들을 위해 할 일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 일자리를 잃고 나서 한 달에 4,500달러나 하는 아들의 약값을 의료보험 없이 어떻게 대야 하나 눈물을 삼키며 걱정하던 아버지를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 세인트루이스시 동쪽에 사는 어느 젊은 여성의 경우에서처럼 학점도 좋고 추진력과 의지도 있지만 학비가 없어서 대학에 가지 못하는 수천 명의 사람들을 위해 우리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다.
오해하지 말길 바란다. 그곳이 작은 마을이었든, 큰 도시이든, 동네 식당이든, 상업 지구이든 간에, 내가 만난 그 사람들은 정부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길 기대하지 않았다. 그들은 성실하게 일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럴 준비도 되어 있다. 시카고 근교의 소도시들에 가보라. 시민들은 복지기관이나 국방성이 자신들의 세금을 낭비하는 게 싫다고 말한다. 도심 한복판의 동네에 가보라. 시민들은 정부의 도움만으로 아이들을 가르칠 수 없다고 말한다. 부모도 아이들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을, 아이들에 대한 기대수준을 높여야 한다는 것을, 텔레비전을 끄고 책 읽는 흑인 아이가 백인인 척한다는 냉소적 비아냥거림을 듣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을 그들은 분명히 잘 알고 있다.
시민들은 정부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기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뼛속 깊이 인지하고 있는 확고한 사실은 있다. 정책의 우선순위만 조금 바꿔도 미국의 모든 아이들에게 공정한 인생의 출발을 보장해주고, 기회의 문을 열어 줄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지금보다 나아질 수 있다는 사실, 시민들이 알고 있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그런 변화를 선택하고자 하고 있다.
역시 반복을 통한 감정의 점증이 이어진다. 주제로는 미국 정치에서 가장 어려운 일 가운데 하나는 정부의 적극적인 역할을 강조한다. 미국이라는 나라의 기원 자체부터가 유럽에서 정부의 박해를 피해 종교적 자유를 누리고자 하는 사람들에게서 시작되었고, 미국의 독립 혁명과 헌법 제정 역시 정부에 대한 깊은 의심을 전제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의 역할을 최소화해서 자유주의의 가치를 최대화할 수는 있겠지만 민주주의는 그럴 수가 없다. 정부 역할의 증대를 개인 자유의 침해와 동일시하는 미국적 전통 속에서 어떻게 정부의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역할을 옹호할 수 있을까? 이는 미국 민주주의의 중심 문제가 아닐 수 없는데, 오바마만큼 이 문제를 잘 다루는 사람도 드물다. 로널드 레이건의 “정부는 해결책이 아니라 정부 자체가 문제의 원인”이라는 주장이 늘 설득력을 갖는 상황에서, 그는 “정부가 완전한 해결책이라 말하는 사람은 없다. 다만 정책의 방향이나 예산 사용의 우선순위에 있어 작은 변화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가져다주는 기회와 가능성은 크다. 개인의 자조와 자립을 도와줄 수 있고 개개인을 더 책임감 있게 만들 수도 있다. 정부의 역할과 개인의 자율성은 배타적이 아니라 문제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양립될 수 있다.”는 논변을 그는 끊임없이 발전시켜왔다.
이번 선거에서 우리는 바로 변화의 선택을 제시하고 있다. 민주당이 이번 대선 후보로 내세운 사람은 이 사회가 추구해야만 하는 최고의 가치들을 두루 지닌 사람이다. 그 사람은 바로 존 케리이다. 존 케리는 공동체, 믿음, 봉사의 삶을 살아왔다. 베트남에서 용감하게 군 복무를 하던 시절부터, 검사 생활을 하고 부지사로 일하고, 그리고 미국 상원의원에 이르기까지 지난 20년 간 그는 이 나라를 위해 헌신해왔다. 우리는 그가 매번 쉬운 선택을 마다하고 어려운 선택을 하는 모습을 보아왔다. 그가 추구해온 가치와 지난 이력들은 우리가 이뤄가야 할 최상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확인시켜주고 있다. 존 케리는 성실함이 보상을 받는 미국을 생각한다. 그래서 일자리를 해외로 돌리는 기업에게 세금혜택을 주기보다는 국내에서 일자리를 창출하는 기업에게 혜택을 주고자 하는 것이다.
존 케리는 워싱턴의 정치인들이 누리는 것과 같은 의료보험의 혜택을 전 국민이 누리길 원한다. 존 케리는 에너지 자립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석유회사들의 이윤 논리와 해외 유전의 갑작스러운 생산 중단에 속박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존 케리는 전 세계가 부러워하는 우리 헌법에 보장된 자유를 믿는다. 그는 절대로 우리의 기본적인 자유를 희생시키거나, 종교적 신념을 이용하여 분열을 야기하지 않을 것이다. 존 케리는 험한 세상에서 때로는 전쟁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지만, 절대로 전쟁이 자연스러운 대안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얼마 전에 일리노이주의 이스트멀린에 있는 해외참전용사회관에서 시머스라는 청년을 만났다. 그는 훤칠하게 생긴 젊은이였다. 키 188에 또렷한 눈, 편안한 미소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해병대에 입대했고 다음 주에 이라크로 파병된다고 말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나라와 지도자들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 임무에 대한 헌신과 봉사의 자세를 볼 수 있었다. 이 젊은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자식을 키우면서 자라주기를 바라는 바로 그 모습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나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과연 시머스가 우리를 위해 헌신하는 만큼 우리도 시머스를 위해 헌신하고 있는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900명의 남녀, 그의 아들딸, 남편과 아내, 친구와 이웃들을 떠올려보았다. 이전보다 적은 수입으로 살아가야 하는 많은 가족이 떠올랐다. 또는 신체 일부가 절단되거나 신경이 손상되어 돌아왔지만 예비역이라는 이유로 장기 의료보험 보장이 안 되는 이들의 가족이 떠올랐다. 우리의 젊은이들을 사지로 보낼 때에는, 적어도 통계를 조작하거나, 참전 이유에 관한 진실을 숨기지는 말아야 한다. 그들이 떠나있는 동안 그들의 가족들을 돌보아주고, 그들이 돌아온 뒤에는 보살펴 주어야 한다. 승리, 평화, 세계인의 존경. 이를 얻을 만한 병력과 명분을 갖추지 못하는 한, 전쟁을 절대로, 절대로 시작하지 않아야 할 신성한 의무가 정부에게는 있다.
분명히 해 둘 것이 있다. 세상에는 적들이 실제로 존재한다. 추적하고 찾아내고 응징해야 할 적들이 있다. 존 케리는 이 점을 알고 있다. 케리 중위가 베트남에서 함께 한 부하들을 보호하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것처럼 존 케리 대통령 또한 미국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라면 군사력을 사용하는 것에 한순간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부터 이 전당대회의 본래 목적인,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존 캐리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자신만의 정치관을 효과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이어지는 연설 내용이야말로 하이라이트다. 그는 존 캐리에 대한 지지를 말하면서, 그 이유를 자신의 정치관으로 채운다. 그것도 매우 열정적인 반복과 설득력 있는 희망의 열정을 통해서 말이다. 그는 사람들의 예상을 넘어 민주당 후보와 공화당 후보 사이의 선택이 아닌 지금까지의 정치와는 다른, 자신이 하고자 하고 청중에게 함께하자며 열정을 불러 있으키는, ‘변화의 정치’를 말한다. 이번 선거는 민주당과 공화당 사이의 선택, 진보와 보수 사이의 선택, 남부와 북부 사이의 선택이 아니다. 그것은 ‘양극화 정치’ 혹은 ‘적대와 분열의 정치’를 지속하는 선택일 뿐이다. 다른 선택은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다원주의 속에서의 연대와 협력의 정치’로 나아가는 선택이 그것이다. 변화의 정치인가 정체의 정치인가. 냉소의 정치인가 희망과 가능성의 정치인가. 미국 민주주의의 미래는 이 선택에 달려 있다. 오바마는 이러한 정치관을 이후 그가 대통령이 되고 퇴임한 뒤에도 언제나 견지해왔다. 그리고 언제나 이 부분에서 가장 열정적으로 연설했고 또 가장 열렬한 청중의 반응을 얻었다. 이제부터는 오바마가 청중의 파토스를 최고조로 이끌며 주고받는 단어의 매력을 감상할 차례다.
존 캐리는 미국을 믿는다. 오직 소수의 몇몇만 잘 사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미국의 가치 안에 깊이 자리잡은 개인주의의 다른 한편에 또 다른 요소가 합쳐져서 미국이라는 웅장한 전설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있다는 믿음이다. 만약 시카고 남부지역에 글자를 읽지 못하는 아이가 있다면, 그건 내 아이의 문제다. 어딘가에서 어떤 노인분이 약값을 낼 돈이 충분치 않아서, 약값과 집세 중에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그 건 내 삶이 궁핍해지는 일이 된다. 아랍계 이민자 가족이 법적 도움이나 적법한 절차도 거치지 않은 채 구속된다면, 그건 나의 인권이 침해당하는 일이다. 이러한 근본적인 믿음, 우리가 서로의 어려움을 돌봐주어야 할 형제자매라는 그 믿음 때문에 이 나라가 존재한다. 그 믿음 때문에 각자가 개인의 꿈을 추구하는 동시에 미국이라는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함께 모이게 되는 것이다. E pluribus unum(미합중국을 상징하는 문장 속에 새겨져 있는 문구). “여럿으로 구성된 하나!”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는 순간에도 우리를 분열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 여론을 호도하고자 하는 사람들, 흑색선전을 퍼뜨리는 사람들, 이들은 분열의 정치로 치닫는 일을 한다. 바로 지금, 그들에게 말해두고 싶은 게 있다. 진보적인 미국, 보수적인 미국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미합중국이 있다. 흑인들의 미국과 백인들의 미국과 라틴계의 미국, 아시아계 미국이 따로 있지 않다. 오직 미합중국이 있을 뿐이다.
정치 평론가들은 우리나라를 붉은 주와 파란 주로 잘게 썰고 나누길 좋아한다. 붉은 주는 공화당, 파란 주는 민주당을 나타낸다고 말한다. 그들에게도 말해 둘 것이 있다. 파란 주에 사는 사람들도 위대한 신을 경배한다. 붉은 주에 사는 사람들도 연방 수사요원들이 도서관에 기웃거리는 것을 싫어한다. 파란 주에 사는 사람들도 어린이 야구단 코치로 활동하고, 붉은 주에 사는 사람들도 동성애자 친구 하나쯤은 있다. 애국자 중에는 이라크 전쟁을 반대한 사람도 있고 이라크 전쟁을 지지한 사람도 있다. 우리는 하나의 국가다. 우리 모두 성조기를 보며 충성을 맹세하고 있고, 우리 모두 미합중국을 지키고 있다.
이번 선거의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 냉소의 정치인가, 희망의 정치인가. (청중들 Hope! Hope! 연호) 존 케리는 여러분을 희망의 정치로 부르고 있다. 존 에드워즈가 희망의 정치로 여러분을 부르고 있다. 나는 지금 맹목적인 낙관주의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마치 실업자 문제를 잊고 있으면 문제가 없어지는 것처럼, 마치 의료보험 사태를 무시하면 자연적으로 해결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문제를 회피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게 아니다.
그게 아니라 실질적인 희망을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모닥불 앞에 둘러앉아서 자유의 노래를 부르는 노예들의 희망을 이야기하자는 것이다. 머나먼 이국땅을 향해 떠나는 이민자들의 희망을 이야기하자는 것이다. 용감하게 메콩강 삼각주를 순찰하는 젊은 해군 중위의 희망을 말하자는 것이다. 불가능을 향해 도전하는 공장 노동자 아들의 희망을 노래하자는 것이다. 빼빼 말랐고 이름도 이상하지만 미국에 자신의 자리도 있다고 믿는 아이의 희망을 말하자는 것이다.
희망! 역경 속에서의 희망! 불확실함 속에서의 희망! 그 담대한 희망! 이것이야말로 신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자, 이 나라의 확고한 기반이다. 보이지 않지만 신념을 갖는 것. 더 나은 날들이 앞에 있을 거라는 그 믿음. 나는 중산층의 어깨에서 짐을 덜어내고 일하는 가정들에게 기회를 열어줄 수 있다는 믿음을 갖는다. 나는 실업자들에게는 직업을, 집 없는 사람들에게는 집을 제공하고, 그리고 전국의 각 도시에 사는 젊은이들을 폭력과 절망으로부터 구해낼 것이라 믿는다. 나는 지금 우리가 도덕적 정당성을 안고 있다고 믿는다. 역사적 기로 앞에서 올바른 선택을 내리고 우리 앞에 놓인 소명에 부응할 수 있으리라 나는 믿는다.
미국 시민 여러분! 오늘 밤 내가 느끼는 이 에너지를 당신도 느끼고 있다면, 이 절박함이 느껴진다면, 이 열정이 느껴진다면, 이 희망을 느끼고 있다면,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의무를 다한다면, 난 다음과 같은 사실을 굳게 믿는다. 전 국민이 플로리다주에서 오레곤주까지, 워싱턴주에서 메인주까지, 11월에 모두 일어나 나설 것이고, 존 케리가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존 에드워즈가 부통령에 취임하여 이 나라가 본래의 믿음을 되찾고 정치적 암흑기에서 벗어나 더 밝은 날을 맞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감사한다. 신의 은총이 여러분에게, 그리고 미국에도 함께 하기를 기도한다.”
오바마 2004년 전당대회 연설 영상. 출처_정치발전소
오바마 연설이 끝난 뒤 방송사들은 앞다퉈 전당대회 청중들의 반응을 담는 인터뷰 영상을 찍었다. 한결같이 흥분감을 표현했다. 민주당에 “라이징 스타가 출현했다.”는 것이다. 이 연설이 없었다면 오바마가 4년 뒤 미국 대통령이 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끝>
주석
1) 고대 수사학에서 현대 수사학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논의와 기법에 대한 자세한 논의에 대해서는, 호세 안토니오 에르난데스 게레로,마리아 델 카르멘 가르시아 테헤라 지음, 강필운 옮김, 『수사학의 역사』 (문학과지성사 2001) 참조할 것.
3)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고 돌아온 220만 명의 군인들에게 사회에 적응하고 직장을 구할 수 있도록 재정과 교육을 제공하는 프로그램,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
정치학을 전공한 정치학자이다. 정치의 현장 가까이에서 읽고 쓰고 말하는 일을 한다. 실천으로서의 정치와 학문으로서의 정치학이 엄격하게 분리되기보다는 어느 정도 중첩되기를 바란다. 그것이 정치학의 본래 모습이자 애초의 이상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정치가의 존재를 시야에서 놓치지 않을 때 정치학적 논의 역시 훨씬 더 풍부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뿐만 아니라 다른 누구보다도 시민의 적법한 대표라 할 수 있는 정치가들이야말로 정치학의 개념과 이론을 선용할 수 있는 존재가 되길 바란다. 그래야 민주정치의 여러 규범과 가치가 시민들의 삶의 양식 속으로 더 깊이 파고들어 지속 가능한 전통으로 안착할 수 있으리라 본다.
오바마의 연설을 보다 보면, 수사학에 대한 그의 이해가 매우 깊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에서부터 현대 수사학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발전해 온 수사학의 풍부한 유산을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키케로의 수사학을 가장 가깝게 구현한 정치가라 할까, 아니면 가장 대중적이면서도 가장 지적인, 오바마만의 연설 스타일을 구현했다고 할까, 아무튼 오바마는 ‘정치 연설의 클래스’를 제대로 보여 준 정치가다.
정치적 말의 힘 ④
‘냉소의 정치’는 우리를 분열시키고, ‘희망의 정치’는 우리를 담대하게 만든다 : 버락 오바마 <2004년 민주당 전당대회 연설>
글쓴이 |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
1. 현대 정치 연설의 신기원을 이룬 오바마
오바마의 연설을 보다 보면, 수사학에 대한 그의 이해가 매우 깊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에서부터 현대 수사학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발전해 온 수사학의 풍부한 유산을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1) 로마 공화정의 수사학을 대표하는 키케로의 기준에서 보더라도, 오바마 연설은 제대로 수사학적이다.
키케로는 그가 후마니타스(Humanitas)라고 부른 인문학적 교양을 강조했고, 그 기초 위에서 말과 글의 힘을 발전시킬 것을 중시했다. 그런 점에서 키케로의 수사학을 가장 가깝게 구현한 정치가라 할까, 아니면 가장 대중적이면서도 가장 지적인, 오바마만의 연설 스타일을 구현했다고 할까, 아무튼 오바마는 ‘정치 연설의 클래스’를 제대로 보여 준 정치가다.
2. ‘현대의 키케로’로 평가받는 오바마
굳이 아리스토텔레스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우리 인간은 공동체와 국가의 일원으로 태어났고 또 그 일원으로 살 때만 ‘목적을 가진 존재’가 될 수 있다. 국가 공동체를 갖지 못한 난민의 삶을 권장하는 정치학은 없다. 국가 공동체의 운영과 통치에 참여하는 것을 통해, 공화주의자들이 오피시움(officium)이라고 정의하는, 일종의 공적 의무를 실천해야 하는 정치가가 말과 언어의 힘을 갖추지 못한다면 그것은 비극이다.
키케로만큼 이를 강조한 철학자도 없었는데, 그는 수사학을 공익 내지 공공선(public good, commonwealth)을 위한 실천적 학문으로 이해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과 수사학을 계승 발전시키는 일에 헌신했다. 실제 정치가로서 공화정을 지키고자 했던 그의 정치적 이상은, 말이 자유롭고 풍부한 나라에 있었다. 설득의 힘을 최대화하는 것이야말로 좋은 정치의 기초라 보았으며, 반대로 독선이나 일방적 주장이 지배하는 나라에서는 필연적으로 폭력과 억압이 커질 수밖에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가라면 누구나 나의 말이 합리적 설득의 기초를 둔 것인지 아니면 분열과 적대를 위한 것인지 늘 돌아봐야 한다.
정치란 분열을 위한 것이 아니라 협력을 위한 것이라는 이 규범을 준수하는 일에 있어서 오바마만큼 철저한 정치가는 흔치가 않다. 그는 당파적이기만 한 연설은 하지 않았다. 당파적인 내용을 말할 때도 그것이 공익의 증진과 병행할 수 있다는 확신이 없이는 말하지 않았다. 상대 당이나 정치인을 야유하거나 냉소하는 언어는, 적어도 오바마의 연설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그는 진심으로 정치적 예의를 실천하고, 진심으로 연대와 협력을 말하며, 공익에 헌신하는 자세에 있어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우리 정치인들의 경우는 그 반대다. 어떤 자리에서든 상대 당파를 공격하고 야유함으로써 지지자들에게 잘 보이려는 것이 전형적인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시민들도 누구나 정치 이야기를 할 때면 개탄과 냉소, 경멸조의 표현을 즐겨 쓰게 되는 것이다. 정치에 관심이 많은 시민일수록 말이 거칠고 적대적이다. 한국 정치에서 말은 동료 정치인이나 동료 시민들에게 날카로운 흉기가 된지 오래다.
오바마 정치 연설은 무엇보다 내용이 아름답다. 자신들만의 세계를 고수하는 편협함이 없다. 언제나 전체 공동체에 대한 애정과 헌신이 그 중심이다. 표현 방식은 물론 연설의 기법도 훌륭하다. 인용, 반복, 대조, 비유, 직유, 환유는 때에 따라 차분하고, 때에 따라 정서적 점증으로 이어진다. 어떤 때는 열정을 불러일으키고 어떤 때는 감정의 공유를 경험하게 한다. 연설의 내용과 기법 모두 그를 진실한 사람으로 느끼게 만든다는 것만큼 그의 연설이 갖는 힘을 잘 표현하는 것도 없다.
3. 연설의 능력을 자각한 오바마
“내 안의 연설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오바마의 자전적 책,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에 나오는 이야기이자, 오바마가 LA에 있는 옥시덴탈칼리지에 다니면서 학생운동을 했을 때의 한 일화다.2) 오바마와 그의 선배 및 동료들은 학생운동이나 시위에 관심이 없는 대학 내 분위기 때문에 고심했다. 그래서 인권운동을 탄압하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부를 규탄하는 시위를 퍼포먼스 형식으로 해보기로 했다.
오바마에게는 인권운동가 역할이 맡겨졌고 그가 연설하는 도중 경찰과 기관원 역할을 맡은 선배, 동료들에 의해 제압당하고 연행되는 장면을 연출하면 되었다. 선배들은 오바마에게 별거 아니니 연설하는 척만 하면 된다며 오바마가 긴장하지 않게 했다. 준비했던 퍼포먼스 스타일의 시위가 시작되었고 오바마가 등장했다.
오바마의 표현에 따르면, 그는 “자기도 모르게 진짜로 연설을 했다.” 그가 연설을 하자, 풀밭에서 원반던지기를 하던 남학생들도 던지던 원반을 손에 쥔 채 자신을 향해 돌아섰다. 벤치에 앉아 입 맞추던 커플도 입술을 떼고 자신의 연설에 눈과 귀를 열었다. 경찰과 기관원들 역할을 맡은 선배들에게 연행되면서, 오바마는 역할극을 한 게 아니라 진짜로 끌려가는 느낌을 받았다.
이날 시위를 통해 오바마는 그때 자신에게 말의 힘, 주변 사람들을 귀 기울이게 만드는 능력이 있다는 생각을 했는데, 정작 그날 밤 그는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시위를 마치고, 우리식으로 말하면, 뒤풀이가 있었다. 오바마의 선배들은 새로운 형식의 시위에 반응이 좋았다며 즐거워했다. 오바마에게도 “버락! 잘했어, 너 오늘 진짜 같이 연설하던데.”라고 칭찬을 했고, 그렇게 오랫동안 술자리가 이어졌다.
진짜로 인권상황을 고발했고, 진짜로 부당하게 끌려갔던 감각을 기억하고 있던 오바마에게 그날 뒤풀이는 낮에 있었던 자신들의 행동을 기만하는 행사 같았다. 퍼포먼스는 그저 하게 되어 있는 연기였을 뿐, 시위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실체적 진실은 사라져 버린 느낌이 들었다. 그런 고민 속에서 오바마는 대학 1, 2학년을 술과 마리화나, 담배로 보냈고, 긴 방황과 번민 끝에 학생운동을 그만두기로 결심한다.
대학 3학년으로 편입한 뉴욕의 콜롬비아 대학에서 그는 국제정치학을 전공했다. 부전공으로는 영문학을 했다. 그 가운데도 셰익스피어 관련 과목을 열심히 들었다. 적나라한 힘이 부딪히는 현실주의의 학문인 국제정치학을 전공하면서, 온갖 형용 모순적인 표현을 통해 인간의 내면세계가 가진 복잡한 측면을 밝혀준 셰익스피어의 문장을 익혔다는 뜻이다. 이때 오바마는 학과 수업에 충실했을 뿐 아니라, 틈틈이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와 같은 중요 고전들을 열심히 독서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기독교 신앙을 실제의 정치 문제와 접목시킨 칼 폴 라인홀드 니부어(Karl Paul Reinhold Niebuhr, 1892년 ~ 1971년)의 대표작. 1932년에 출간되었다. 이 책으로 그는 기독교 현실주의자로 불리게 되었다. 개인은 양심과 합리성, 체면과 같은 도덕적 자원을 갖고 있지만 사회는 그렇지 못하며, 개인은 교육을 통해 이타주의적이 되게 할 수 있지만 사회를 그렇게 바꿀 수 없는 이유를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책이다.
졸업 후에는 (뉴욕, LA와 함께 미국 3대 흑인 공동체 도시인) 시카고로 옮겨가 “지역 공동체 조직가(community organizer)” 즉, 흑인 빈민 지역 활동가로 3년간 헌신했다. 그 뒤 “가난이나 불평등과 같은 구조적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그간 가졌던 권력에 대한 나의 태도를 바꿀 필요가 있다.”는 자각과 함께 정치의 길을 준비하게 된다. 하버드 대학 로스쿨에 입학했고, 흑인 최초로 “하버드법률평론(Harvard Law Review)” 편집장으로 선출됨으로써 전국적으로 유명인이 되었다. 학업 성적도 뛰어났다. 최종적으로 차석 졸업을 한 후 시카고로 돌아왔다. 운동가로서가 아니라 정치가로서 제2의 시카고 인생을 시작한 것이다.
버락 오바마, 케냐 출신 흑인 아버지와 캔자스 출신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고, 인도네시아에서 엄마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하와이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친 뒤, LA에서 대학 생활을 시작해 뉴욕에 있는 콜롬비아 대학을 거쳐 시카고에 정착할 때까지 긴 여정을 거친 그는, 마치 운명에 이끌리듯 정치가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연설의 힘을 가진 정치가’로서 그는 어떤 성취를 보여주었을까?
4. 오바마의 비상(飛上)
첫 번째로 살펴볼 것은, 일리노이 주 상원의원을 하고 있던 젊은 오바마를 전국적 스타로 만든 2004년 민주당 전당대회 연설이다. 이 연설을 한 뒤 이듬해 연방 상원의원에 당선되고, 2007년 대통령 출마 선언을 한 뒤, 드디어 2008년 대통령이 되었다!
오바마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상을 통해 본 사실이지만, 이 연설 직전 오바마는 자신의 차례가 호명되기 전 무대 뒤에서 미셸과 있었다. 드디어 차례가 되자 미셸과 포옹하고 무대 위로, 마치 마장용 말이 가볍게 걷듯, 경쾌하게 연단으로 나아갔다. 농구선수 선수답게 긴 팔을 뻗고 큰 손을 높이 든 채 무대의 중심에 섰다. 연설이 시작되었다.
사람들이 천천히 그의 말에 빨려들었고, 점차 사람들이 환호하기 시작했다. 맨 앞쪽에 앉아 있던 민주당 대선 후보 존 케리는, 뭔가에 홀린 듯 입을 벌린 채 연설 중인 오바마를 올려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겼다. 이 대목에서 나는 영화, <빌리 엘리어트>의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다.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발레리노로 성장한 주인공 소년 빌리. 그를 보러 탄광 노동자인 그의 아버지와 형 그리고 어린 시절의 친구가 왔다. 무대 뒤에서 그들이 왔다는 이야기를 전달받은 빌리, 드디어 무대가 열리자 멋진 등 근육을 움직여 긴장을 풀고는 가볍게 무대를 가로질러 달려가며 높이 도약한다. 최고의 발레리노로 성장한 빌리의 비상, 그 아름다운 장면을 지켜보는 늙은 광부 아버지의 딱 벌어지는 입, 그야말로 경탄 그 자체였다.
오바마가 연설을 마치자 청중석 맨 뒤에서 한 여성이 거의 깡충깡충 뛰듯 두 손으로 있는 힘껏 박수를 오래도록 쳤다. 한동안 카메라가 그녀를 잡아 주었다. 힐러리 클린턴이었다. 민주당의 젊은 스타 정치인의 등장을 누구보다도 환영하던 그때 그녀는 상상이나 했을까? 4년 뒤 저 오바마가 자신을 꺾고 민주당 대선 후보가 되고 또 대통령이 될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제 연설 내용을 보자.
5. 오바마의 2004년 민주당 전당대회 연설
연설의 첫 번째 주제는 꿈(dream)이다. 그것도 하나의 같은 꿈이다. 케냐 출신 아버지와 미국 남부 출신 어머니, 그리고 그들의 부모들이 꾼 꿈. 더 넓히면 이민자들로 이루어진 미국이라는 나라의 꿈을 다뤘다. 흔히 아메리칸 드림이라고 불리는 이 주제를 가장 감각적으로 잘 다룬 대표적인 연설이 아닐 수 없다.
오바마는 개인사를 좋아한다. 개인사를 곧 미국의 역사와 연결시키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다. 이민자 개인의 역사는 곧 전체로서의 미국사를 구성하는 부분들이고, 그게 미국의 장점이자 자랑거리라는 것이 오바마의 일관된 메시지다. 그래서 알렉스 헉슬리의 『뿌리』를 연상시키는 오바마 개인의 역사는 미국이 가진 다양성의 원천이자 발전의 원동력으로 이해되게 만든다. 이 뿌리와 원천에 대한 이야기는, 출간 후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올랐던 그의 책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에서 훨씬 풍부하게 다뤄진 바 있다.
드디어 이 부분에서 오바마는 자신의 장기 가운데 하나인 ‘반복을 통한 감정의 점증’을 고조시키고 있다. 실제 연설을 보면 앞서 조용히 오바마의 개인사를 듣던 청중들이 열광적으로 화답하기 시작한다. 젊은 오바마의 패기 넘치는 연설이다. 대통령이 된 다음에는 중저음의 톤으로 바뀌었지만, 이때 오바마는 확실히 젊고 도전적인 연설 태도를 보였다. 내용도 훌륭하다. 미국의 전통과 가치, 그 위대함에 대한 오바마의 매우 인상적인 해석이 잘 드러난다. 그것은 흑인 진보파와 백인 진보파 사이의 갈등과 차이를 효과적으로 통합하는 시각이자, 히스패닉과 무슬림을 포함해 다양한 집단의 존재와 그들의 정체성을 분열이 아니라 공존하게 하는, 일종의 다원주의적 가교의 역할을 하는 정치론이라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오바마는 “흑인 맞아?” 혹은 “진보 맞아?”와 같은 냉소와 의심을 받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최대 다수의 인종 연합을 가능케 하고 그를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만든 정치론이 아닐 수 없다. 그에게서 ‘오바마주의’라고 부를만한 특별함이 있다면, 개인과 집단의 차이를 넘어 미국 사회를 통합으로 전통과 가치에 대한 그의 확고한 믿음이다. 그것은 인종과 계급의 차이와 상관없이 평등한 자유와 권리에 대한 모두의 존중을 요청하는 그의 연설에서 잘 나타나 있다.
역시 반복을 통한 감정의 점증이 이어진다. 주제로는 미국 정치에서 가장 어려운 일 가운데 하나는 정부의 적극적인 역할을 강조한다. 미국이라는 나라의 기원 자체부터가 유럽에서 정부의 박해를 피해 종교적 자유를 누리고자 하는 사람들에게서 시작되었고, 미국의 독립 혁명과 헌법 제정 역시 정부에 대한 깊은 의심을 전제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의 역할을 최소화해서 자유주의의 가치를 최대화할 수는 있겠지만 민주주의는 그럴 수가 없다. 정부 역할의 증대를 개인 자유의 침해와 동일시하는 미국적 전통 속에서 어떻게 정부의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역할을 옹호할 수 있을까? 이는 미국 민주주의의 중심 문제가 아닐 수 없는데, 오바마만큼 이 문제를 잘 다루는 사람도 드물다. 로널드 레이건의 “정부는 해결책이 아니라 정부 자체가 문제의 원인”이라는 주장이 늘 설득력을 갖는 상황에서, 그는 “정부가 완전한 해결책이라 말하는 사람은 없다. 다만 정책의 방향이나 예산 사용의 우선순위에 있어 작은 변화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가져다주는 기회와 가능성은 크다. 개인의 자조와 자립을 도와줄 수 있고 개개인을 더 책임감 있게 만들 수도 있다. 정부의 역할과 개인의 자율성은 배타적이 아니라 문제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양립될 수 있다.”는 논변을 그는 끊임없이 발전시켜왔다.
이제부터 이 전당대회의 본래 목적인,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존 캐리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자신만의 정치관을 효과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이어지는 연설 내용이야말로 하이라이트다. 그는 존 캐리에 대한 지지를 말하면서, 그 이유를 자신의 정치관으로 채운다. 그것도 매우 열정적인 반복과 설득력 있는 희망의 열정을 통해서 말이다. 그는 사람들의 예상을 넘어 민주당 후보와 공화당 후보 사이의 선택이 아닌 지금까지의 정치와는 다른, 자신이 하고자 하고 청중에게 함께하자며 열정을 불러 있으키는, ‘변화의 정치’를 말한다. 이번 선거는 민주당과 공화당 사이의 선택, 진보와 보수 사이의 선택, 남부와 북부 사이의 선택이 아니다. 그것은 ‘양극화 정치’ 혹은 ‘적대와 분열의 정치’를 지속하는 선택일 뿐이다. 다른 선택은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다원주의 속에서의 연대와 협력의 정치’로 나아가는 선택이 그것이다. 변화의 정치인가 정체의 정치인가. 냉소의 정치인가 희망과 가능성의 정치인가. 미국 민주주의의 미래는 이 선택에 달려 있다. 오바마는 이러한 정치관을 이후 그가 대통령이 되고 퇴임한 뒤에도 언제나 견지해왔다. 그리고 언제나 이 부분에서 가장 열정적으로 연설했고 또 가장 열렬한 청중의 반응을 얻었다. 이제부터는 오바마가 청중의 파토스를 최고조로 이끌며 주고받는 단어의 매력을 감상할 차례다.
오바마 2004년 전당대회 연설 영상. 출처_정치발전소
오바마 연설이 끝난 뒤 방송사들은 앞다퉈 전당대회 청중들의 반응을 담는 인터뷰 영상을 찍었다. 한결같이 흥분감을 표현했다. 민주당에 “라이징 스타가 출현했다.”는 것이다. 이 연설이 없었다면 오바마가 4년 뒤 미국 대통령이 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끝>
주석
1) 고대 수사학에서 현대 수사학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논의와 기법에 대한 자세한 논의에 대해서는, 호세 안토니오 에르난데스 게레로,마리아 델 카르멘 가르시아 테헤라 지음, 강필운 옮김, 『수사학의 역사』 (문학과지성사 2001) 참조할 것.
2) 버락 오바마 지음, 이경식 옮김,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 (랜덤하우스코리아 2007년)
3)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고 돌아온 220만 명의 군인들에게 사회에 적응하고 직장을 구할 수 있도록 재정과 교육을 제공하는 프로그램,
박상훈 | 정치발전소 학교장
정치학을 전공한 정치학자이다. 정치의 현장 가까이에서 읽고 쓰고 말하는 일을 한다. 실천으로서의 정치와 학문으로서의 정치학이 엄격하게 분리되기보다는 어느 정도 중첩되기를 바란다. 그것이 정치학의 본래 모습이자 애초의 이상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정치가의 존재를 시야에서 놓치지 않을 때 정치학적 논의 역시 훨씬 더 풍부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뿐만 아니라 다른 누구보다도 시민의 적법한 대표라 할 수 있는 정치가들이야말로 정치학의 개념과 이론을 선용할 수 있는 존재가 되길 바란다. 그래야 민주정치의 여러 규범과 가치가 시민들의 삶의 양식 속으로 더 깊이 파고들어 지속 가능한 전통으로 안착할 수 있으리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