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아벨리의 편지 Book Review] 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 - 브래디 미카코

박선민 보좌관
2020-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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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그린


- 박선민 국회의원 보좌관



처음에는 교육에 대한 책인 줄 알았다. 영국은 시험 성적, 학생 수와 교사 비율, 예산 등의 정보를 공개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 학교 랭킹이 공시된다고 한다. 학부모들은 수년 전부터 학교 랭킹을 보고 진학 계획을 세우는데, 이로 인하여 상위 학교 인근 집값이 치솟고 부자와 빈자의 거주자가 점점 분리되는 등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니 ‘강남 8학군’이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구나 싶었다. 시작은 그러했다. 랭킹 1위인 엄격한 가톨릭 학교에 다니던 아이가 백인 노동자 계급의 자녀들이 주로 다니는, 원래 ‘밑바닥 중학교’였다가 조금씩 순위가 올라와 현재는 중간쯤 되는 ‘구 밑바닥 중학교’에 다니게 된 것이다. 스스로 선택한 이유가 밴드와 음악실이고, 자유방임적인 교사들이 양념처럼 등장하는지라, 어쩐지 <죽은 시인의 사회> <스쿨 오브 락> <굿 윌 헌팅> 같은 영화가 떠올랐다. ‘백인 노동자 계급’의 자녀가 주로 다니는 중학교에 입학한 동양계 학생이 ‘혐오’와 ‘차별’을 극복해 가는 내용이라고 지레짐작했다. 일단 흥미진진했다. 뮤지컬 <알라딘> 연습을 시작했다!


한참 읽다 보니 ‘배고픈 아이들’의 이야기가 나오고 ‘계급 정치’가 언급된다. 빈부 격차가 커지고 계급이 고정되고 있으나, 빈곤이나 격차, 노동문제를 다루는 계급 정치는 잊힌 현실. 그러나 그 현실이 브렉시트 투표에 영향을 미쳤으며, 심지어 중학교 교실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복잡하고 어려운 이야기를, ‘가난뱅이’라는 놀림 때문에 발생한 싸움을 들어 더할 것도 보탤 것도 없이 설명한다. 싸운 두 아이를 화해시키려고 노력하는 아이 모습에 슬며시 미소가 나왔다.


사실 약간 불편한 점도 있었다. 저자의 아이는 세상 둘도 없는 모범생이다. 사려 깊고, 따돌림 당하는 친구와 편견 없이 친하게 지내고, 정치적으로 올바르며, 공부도 잘하고, 노래도 잘하고, 수영도 잘하고, 지구온난화를 걱정하고, 학생회장을 할 만큼 리더십도 있다. 심지어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일본인 외할아버지와도 잘 지낸다. 진보주의자 부모가 선호하는 완벽한 자녀의 모습 아닌가! 영국에서 살아가는 동양인-혼혈 가족의 입장이라지만, 어쨌거나 이들은 ‘평범한 정상 가족’이라는 우월한 지위를 가지고 있다. 인종적으로는 소수자이나 가족 구성의 범주에서는 다수자다. 저자는 전자의 입장에서 말했지만 나는 후자에도 시선이 갔다.


우리 모두 어떤 면에서는 다수자고, 다른 면에서는 소수자다. 우리는 누구나 지금 있는 곳에서는 다수자일지라도 다른 곳에서는 소수자가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다양성에 대한 존중’이다. 이 책의 표현대로라면 “다양성은 지긋지긋할 정도로 어렵고 귀찮지만, 무지를 없애기 때문에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당신이 누구든, 성별, 장애, 나이, 언어, 인종, 국적, 피부색, 혼인 여부, 임신 또는 출산, 가족의 형태, 종교, 사상,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 등과 상관없이 동등한 존엄과 가치를 지니고 있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이 책에는 책 속의 책으로 『사랑해 너무나 너무나』라는 동화가 나온다. 뉴욕 센트럴파크 동물원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사랑에 빠진 수컷 펭귄 두 마리의 이야기로 어린이집 아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책이었다고 한다. 아이들은 편견이 없고 그저 사랑에 관한 이야기라서 좋아한 것이다. 어린이집에는 다양한 가정의 아이들이 있었는데, 아이들은 자신의 가족이 다른 아이의 가족과 다르다는 점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고 한다. 각각 다른 게 당연하고, 다른 것이 좋은지 나쁜지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민주주의는 다양성을 바탕으로 한다. 사회가 단 하나의 가치, 단 하나의 이념, 단 하나의 선호로 구성된다면 그 사회는 더 이상 민주주의라고 부를 수 없을 것이다. 민주주의는 시민들에게 자신이 선호하는 가치가 절대적이거나 상대가 선호하는 가치보다 우월하지 않다는 점을 인정하고, 가치의 상대성에 기초한 공존을 받아들이라고 종용한다. 상대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포용할 때 갈등을 평화적으로 관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외국인 주민 수는 2백만 명이 넘는다. 2009년 첫 1백만 명을 넘긴 후 10년이 채 안 된 기간 동안 2배가 늘어난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4%이며 전라북도 전체 인구보다 많다. 외국인 주민이 1만 명 이상 또는 인구 대비 5% 이상 거주하는 시군구는 82개 지역으로, 경기도 23개, 서울시 17개, 경상북도, 경상남도 각 7개, 충청남도 6개 지역 등이다(행정안전부, 2019). 결혼 이민자 및 국적 취득자 수는 2007년 14만 명에서 2016년 32만 명으로 증가했으며 다문화 가족의 자녀는 같은 기간 4만4천 명에서 20만 명으로 증가했다. 국제결혼 비중이 높았던 2005~2008년 입국한 이들이 낳은 아이들이 자라 만 16세 이상이 된 아이들이 13만 명이나 된다. 우리는 이미 다문화 사회다.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도 차별적 시선은 여전하다. 외국인 노동자, 성 소수자, 비혼모나 비혼부, 한부모 가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다른 문화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배타적 태도, 누가 정했는지도 모를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나면 ‘비정상’으로 취급하는 사회적 토양에서 민주주의는 성숙할 수 없다. 이견에 도덕성의 잣대를 들이대서도 안 된다. 적대와 증오는 동의와 협력의 반대 지점에 있다.



저자는 우리에게 ‘엠퍼시’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영국은 물론, 전 세계 사람들에게 가장 절실하고 소중한 것은 엠퍼시empathy, 공감이라고 한다. 비슷한 단어로 심퍼시sympathy가 있다. 누군가를 가엾게 여기는 감정을 말한다. 심퍼시는 감정, 행위, 이해의 영역이다.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엠퍼시는 다르다. 자신과 이념이나 신념이 다른 사람, 게다가 그다지 가엾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공감하는 능력을 말한다. 이는 지적 영역이고 교육과 훈련을 통해 함양된다. 저자의 아이는 이를 ‘인간이 남의 신발을 신어 보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말하자면 불쌍한 사람에게 내 신발을 벗어 주는 것은 심퍼시이고, 상대와 바꿔 신어 보는 것은 엠퍼시다. 정치에서 필요한 것은 엠퍼시다. 다름을 인정하되, 공감해야 한다.


정치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사적 이해를 공적으로 관리하는 기능이다. 그런데 이익과 요구의 크기는 균일하지 않다. 권력은 힘이 센 집단 쪽으로 기울어지기 마련이다. 민주주의는 사회 구성원들의 동등한 참여를 제도화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그 바탕은 시민 집단들 사이의 다원적이고 갈등적인 이익의 자유로운 표출이다. 이러한 요구가 결사체를 통해 정치적 의사 결정 과정에 투입되는 것이 민주정치의 핵심이다. 만약 이 안에서 사회적 약자들의 이익과 요구가 배제되거나 단순히 온정의 대상이 된다면 정치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다원적 요구가 정치로 수렴되지 않는다면 극단주의 세력이 번성한다. 특히 포퓰리즘은 정치의 빈 공간을 양식으로 삼는다. 정치에서 배제된 시민들이 늘어날수록, 시민들이 정당과 정부가 자신들의 말을 무시한다고 느낄수록 포퓰리즘은 인기를 누린다. ‘부패한 엘리트’ 집단이 ‘이민자’를 보호한다는 주장이 먹히는 이유는 시민들이 정당과 정부가 더 이상 자신들을 대변한다고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정치가 머뭇거리면 약자를 향한 공격은 거세어진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당이 참여의 기반을 넓히고, 대표의 범위를 확대하여 분노와 갈등이 정치 안에서 집약적으로 다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가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그린”으로 변하는 순간이다. 옐로에 화이트는 변하지 않는 정체성이지만 블루는 그린이나 오렌지, 블랙, 핑크, 블링블링까지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 우리는 불완전하지만 성장하고 있고, 상대에게 공감할 능력이 있으며 정치를 통해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우리의 색깔은 우리가 정할 수 있다. 좋은 정치가 좋은 시민을 만든다. <!--[if !vml]--><!--[endi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