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아벨리의 편지 Book Review] 포퓰리즘은 민주적인가? - 박상훈

박상훈(정치발전소 학교장)
2020-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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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퓰리즘은 민주적인가?


박상훈Ⅰ정치발전소 학교장




1. 포퓰리즘은 포퓰리스트에 의해 만들어진 개념이 아니다. 포퓰리스트들에 의해 옹호된 것도 아니다. 그들에 의해 이론화된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포퓰리스트들의 말과 행위를 비판하고자 한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고 그렇듯 대개는 부정적인 낙인을 위해 사용되는 용어이기에, 포퓰리즘에 대한 논의는 늘 주관적이고 혼란스러울 때가 많다. 말하는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일 때도 많다.

이 짧은 글은 매우 단순한 목표만을 갖는데, 그 단순한 목표란 포퓰리즘 문제에 대한 필자의 평소 생각을 가능한 한 명료하게 표현해 보는 것이다. 이로써 필자는 이 글이 얼마나 보편적이고 다른 관점과는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논의의 부담을 피하게 되고, 독자로서는 각자 자신의 생각과 견주어서 포퓰리즘에 대한 좀 더 좋은 판단을 발전시켜 볼 기회가 된다면 그것으로도 가치 있는 일이 아닐까 한다.


2. 필자는 민주주의와 포퓰리즘이 한 가지 중요한 원리를 공유하고 있다고 본다. 그것은 정치체제의 운명은 민중(people)의 의지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는 데 있다. 이를 가리켜 ‘민중 주권(popular sovereignty)’의 원리라 하는데, 민주주의와 포퓰리즘 사이에 다른 게 있다면 민중을 이해하는 방법과 민중의 주권이 정치과정에서 실현되는 절차와 과정에 대한 매우 상이한 해석에 있는 게 아닌가 한다.

민중에 대한 포퓰리즘적 이해의 핵심은 ‘권력을 갖지 않은 정치 밖 순수 국민’으로 집약할 수 있다. 따라서 포퓰리스트일수록 민중 주권을 반엘리트론 내지 반권력론적 관점에서 이해하는 경향이 강하다. 반대로 민주주의를 일정 임기 동안 공동체 운영을 맡길 대표를 구성원 개개인이 자유롭고 평등한 의사를 통해 결정하는 원리로 이해할수록 포퓰리즘에 대한 비판적 거리는 커진다.

그렇다면 민중의 적법한 대표로 선출된 엘리트에 대한 포퓰리즘의 비판은 반민주적이거나 비민주적일까? 필자는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적법하게 선출된 대표들에게 민중 주권을 제도적으로 구현할 통치권을 갖게 하는 동시에, 언제든 그들을 비판할 자유를 갖는 정치체제다. 따라서 정치가들은 물론 정당과 의회 정치가 민중 주권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포퓰리즘적 도전이 커지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민주적 현상’일 뿐 아니라 규범적으로도 바람직한 일로 여긴다.

민주주의가 민중 주권이라는 원리 하나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 민주주의가 곧 포퓰리즘은 아니지만, 민중의 자유로운 비판과 반대의 표출 없이 냉정한 합리성에 따른 절차와 제도로만 움직인다면 그게 더 ‘민주적 위협’이 될 거라고 필자는 판단한다.


3.

그렇다면 포퓰리즘의 도전이 성공해서 기존의 정치체제를 붕괴시키거나 대체시키기를 바라는가? 그건 아니다. 그 이유는 포퓰리즘에서 정당화하고 있는 민중 개념과 민중 주권의 실현 방법에는 민주주의에 반하는 것이 존재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포퓰리즘의 도전을 맞이해 기존의 민주주의 정치체제가 좀 더 반응적이고(more responsive) 좀 더 책임 있고(more accountable) 좀 더 효과적인(more effective) 방향으로 변화되거나, 아니면 포퓰리즘 운동이 현대 민주주의의 운영 원리에 적응해 민주적으로 변화•발전하기를 바랄 뿐, 포퓰리즘의 요소 그대로를 가지고 성공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우선 포퓰리즘은 현대 민주주의가 전제하고 있는 다원주의와 충돌한다. 포퓰리즘에서 민중은 하나의 동질적 집단의지를 갖는 존재로 이해하는 바, 그때의 민중은 역사주의적이고 낭만주의적인 의미로 표현될 때가 많다. 이런 민중관이 민주주의의 발전과 양립할 여지는 크지 않다. 민중은 직업과 소득, 연령, 성, 지역 등에 따라 이익과 열정을 달리하는 ‘다원적 구성체’로 이해되어야 하고, 그들 사이의 갈등을 조정과 협상, 타협을 통해 민주주의가 운영된다는 생각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본다.

포퓰리즘이 대표의 역할이나 대의제와 양립하기 어려운 점도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는 포퓰리즘이 민중에 대한 ‘직접적 호소’를 전형적인 여론 동원 양식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러한 방식의 여론 동원은 이익집단이나 정당, 선거, 의회의 역할을 부정의 대상으로 공격하려는 열정을 자극한다. 필자는 대의 민주주의의 참여 기반을 넓히고 대표의 범위를 확대하는 것이 중요하며, 노사 간 이익정치와 정당정치, 나아가 의회정치를 좋게 만드는 일이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다고 본다.



대의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길과 대의 민주주의를 직접 민주주의로 대체하는 두 길이 있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전자이며 포퓰리즘적 직접 정치의 길은 긍정적 효과보다 부정적 효과가 더 크다고 생각한다. 포퓰리즘이 정당의 형태를 띠는 것은 관용할 만하다. 포퓰리즘 정당도 성장하고 의회에 진입함에 따라 대의 민주주의의 원리에 적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압박에 직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와는 달리 사인화된 지도자를 중심으로 포퓰리즘 운동이 확대되는 것은 훨씬 파괴적이다. 특히 정치의 영역에서 훈련받고 성장한 사람이 아닌, 외부에서 구원자를 찾는 일이 자주 만들어지는 것이 문제다. 의회중심제보다 대통령중심제에서 이런 부작용은 더 쉽게 나타난다. 트럼프의 등장이 대표적인데, 그 결과 정치는 더욱 분열적이 되고 정당과 의회는 제 기능을 못하게 되기 쉽다.

포퓰리즘의 대중 동원이 분노의 열정과 결합해 민중들 사이에서 정치적 조급증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는 기성 체제나 정치 엘리트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의견을 달리 하는 동료 민중들에게 적대와 증오의 감정으로 이어지기 쉽다. 그 결과 합리적 공론장의 기능은 약화되고 독립언론의 역할 역시 제약되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다. 특히 SNS의 발달은 익명의 다중들이 무책임한 공격성을 표출하는 것을 조장하기도 한다. 합의의 공간은 줄고 모든 사안을 둘러싸고 승복이나 동의, 인정 없이 무한 논란으로 치닫는 양상이 심화될 수도 있다.


4.

포퓰리즘이 민중 주권의 원리에서 정당성을 찾는 것은 민주주의의 가치와 양립한다. 그런 점에서 포퓰리즘은 민주적이다. 때로 반체제적 열정이 기성 정치질서의 경직성에 긍정적인 충격을 주는 것도 좋게 평가할만하다. 포퓰리즘 운동이 정당의 형태를 띠고 기존 정당정치에 새로운 의제를 던지면서 성장하는 일은 특히나 포퓰리즘과 민주주의가 병행 발전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포퓰리즘의 퇴행적 발전은 민주주의에 위협적이고 지극히 유해한 효과를 낳는다. 특히 반다원주의적 경향이 심화되거나, 분노를 넘어 사회를 적대와 증오의 분열시키는 것, 충분한 심의와 논의 대신 당장에 즉시 해결이 안 되면 음모와 기만이 작용하는 것으로 보는 것은 신뢰라고 하는 사회적 자본을 심각하게 침해한다. 민주주의의 시간은 조금 오래 걸리더라도 오래 가는 변화를 지향하고, 가능한 한 숙의된 결정과 합의된 변화를 넓히려는 노력으로 채워져야 하는데, 포퓰리즘의 조급한 시간성은 이를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문제가 있다. 이런 포퓰리즘의 발전은 민주주의자로서 경각심을 갖고 견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본다.

누군가 포퓰리즘적 열정을 갖고 있다면 부디 정당을 만들고 자신들의 비전과 대안을 성실하게 마련하고, 선거에서 당선도 되고 입법자도 되는 선택을 중시하기 바란다. 그렇게 해서 기성 정당체계에 새로운 변화를 불어넣고 또 그렇게 해서 기존의 민주주의를 합리적으로 확장하게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