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아벨리의 편지 Book Review] 데이비드 런시먼 <쿠데타, 대재앙, 정보권력>

강양구(과학큐레이터)
2020-05-11
조회수 1638



데이비드 런시먼 <쿠데타, 대재앙, 정보권력> 

(원제 : How Democracy Ends)


- 강양구 과학큐레이터


코로나19 바이러스를 놓고서 국가별 성적표가 하나둘씩 나오 고 있다. 그 가운데 한국은 단연 돋보인다. 대구-경북 대량 감염 사 태와 같은 아찔한 순간이 있었지만 최선을 다해 상황을 수습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바이러스 유행을 지켜봐 야겠지만 지금처럼만 관리한다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 대목에서 흥미로운 토론 거리가 있다. 한국의 방역 성공을 놓고서 ‘투명성’에 기반을 둔 ‘시민 참여’가 중요한 조건이었다고 말한다. 슬쩍 ‘폐쇄성’에 기반을 둔 ‘정부 강제’로 바이러스 유행을 막은 중국과 비교한다. 중국의 ‘권위주의’가 아니라 한국의 ‘민주주의’가 성공한 것이라는 확대 해석도 있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의아해진다. ‘권위주의’와 ‘민주주의’를 대 비하려면, 중국과 한국을 비교할 게 아니라 중국과 유럽 혹은 중국 과 미국을 비교해야 한다. 지금 대의 민주주의의 종주국이라 할 수 있는 유럽과 미국의 여러 곳에서는 재난 화에서나 나옴직한 끔찍한 일이 일상생활처럼 진행 중이니까.


더구나 한국의 방역이 정말로 ‘민주주의’와 가까운 것이었는지도 토론 거리다. 예컨대, 한국의 ‘투명성’은 시민의 프라이버시를 희생한 결과다. 유럽, 미국과 비교했을 때, 프라이버시에 둔감한 한국 사회는 이런 방역 당국의 조치를 토론다운 토론 하나 없이 승인했다. ‘시민 참여’는 어떤가? 바이러스가 유행할 때, 사회적 거리 두기 (social distancing)에 많은 시민이 적극적으로 동참한 일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바이러스 공포에 짓눌린 시민의 집단행동을 마냥 ‘시민 참여’로 규정하는 것도 과하다. 더구나 한국은 오랫동안 국가 정책에 시민을 동원해 온 ‘국가 동원’의 전통이 있다.


<사진출처 : https://www.latimes.com/world-nation/story/2020-04-06/coronavi-social-distancing-around-the-world >


 이런 점을 염두에 두면 ‘투명성’에 기반을 둔 ‘시민 참여’는 ‘개인의 권리를 희생한 국가 동원’의 다른 모습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니까, 지금 한국의 방역 정책은 유럽, 미국의 민주주의에 기반 을 둔 것이라기보다는 한국 현대사의 특수성에 기반을 둔 ‘강한국가’의 유산에 가깝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흥미롭게도 초기 방역에 성공한 동아시아 국가 모두 ‘강한 국가’ 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타이완, 베트남, 싱가포르 등이 그렇다(싱가포르는 초기 방역의 성공에 취해서 잠시 방심하다가 이 글을 쓰는 4월 23일 현재 걷잡을 수 없이 상황이 악화되고 있다). 그러니까 타이완, 베트남, 싱가포르, 한국은 미국, 유럽보다 중국에 오히려 가깝다.


이 대목에서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한다. 우리가 그토록 신봉하는 민주주의는 과연 바이러스 유행과 같은 위기 상황에서도 지속 가능 할까? 영국의 정치학자 데이비드 런시먼이 『쿠데타, 대재앙, 정보 권력』에서 답하고자 노력하는 것도 바로 이 질문이다. 코로나 시대에도 민주주의는 우리의 희망일까? 한국어판 제목처럼 런시먼은 ‘쿠데타’, ‘대재앙’, ‘정보 권력’의 가능성을 검토하면서 민주주의의 지속 가능성을 논한다. 사실 런시먼이 이 책에서 민주주의의 가장 큰 위협 요소로 보는 것은 인공지능(AI), 로봇, 구, 아마존, 페이스 북 같은 거대 디지털 기업으로 상징되는 정보 권력이다(‘은밀한 쿠데타’와 ‘정보 권력’을 다룬 1장과 3장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 책이 코로나19 같은 감염병(전염병) 사태를 겪고 나서 나왔다 면 ‘대재앙’ 부분의 비중이 훨씬 더 커졌으리라. 왜냐하면 전염병 유행 같은 “대참사로 인한 민주주의 실패는 쿠데타와 상당히 다르기” 때문이다. “쿠데타가 발생하면 민주주의에는 재앙이지만 삶은 계속된다. 다시 말해 사회는 살아남는다.” 하지만 대참사는 사회의 존재 자체를 위협한다. 이렇게 사회의 존재를 위협하는 재앙이 바로 ‘실존적 위기’(Existential risk)다. 



예를 들어, 지금 우리가 지켜보는 바이러스 유행은 실존적 위기의 특징을 갖는다. 런시먼은 “민주주의는 실존적 위험을 제어 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유권자는 “먹고사는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세상의 종말”에 신경 쓰지 않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바이러스 유행만큼이나 실존적 위기인 지구온난화가 초래하는 기후 위기를 둘러싸고 보이는 미국의 대응이 좋은 예다. 다분히 대통령 자신의 철학에서 비롯된 오바마 행정부 의 적극적인 기후 변화 대응은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서자마자 ‘파 리 협정’ 탈퇴 같은 조치로 무력화되었다.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만 든 미국 민주주의의 나쁜 결과다. 반면에 중국은 어떤가? 지난 10년간 권위주의 중국은 민주주의 국가인 인도보다 환경문제를 해결하는 데 훨씬 더 유능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더 나아가 시진핑 치하의 중국은 권위주의 ‘그린 뉴딜’이라고 부를 법한 변화를 이끌고 있다. 대기오염을 해결하려는 여러 시도(재생 가능 에너지 확대, 전기 자동차 보급 등)는 그 자체로 기후 위기 대응이기도 하니까.


바이러스 유행도 마찬가지다. 권위주의 중국의 강력하고 무식하기까지 한 ‘봉쇄’는 결과적으로 코로나19 바이러스에 가장 맞춤 한 대응이었다. 데이터 조작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아주 짧은 시간에 최악의 상황을 극복하고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다. 여기에 ‘강한 국가’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한국, 타이완, 베트남 등이 그 뒤를 따르고 있다. 반면에 현대 대의제 민주주의 종주국이라 할 수 있는 유럽(영국, 프랑스 등)과 미국의 모습은 어떤가? 군경을 동원해 국경을 폐쇄하고 이동을 가로막는, 중국과 같은 ‘봉쇄’를 결국 피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의료 체계가 붕괴되어 수많은 사망자가 발생하는 일까지 똑같이 겪고 있다. 상황은 비슷하고 수습은 굼뜨다. 역시 민주주의의 실패다. 물론 한 번의 전염병 유행을 놓고서 현대 민주주의의 미래를 전 망하는 일은 섣부르다. 하지만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민주주의의 지속 가능성을 둘러싼 토론은 불가피해 보인다. 이 과정에서 런시먼의 『쿠데타, 대재앙, 정보권력』은 원제 “How Democracy Ends?”(민주주의는 어떻게 끝장나는가)처럼 좋은 발제가 될 것이 다.


<사진출처 : https://www.whatsonglasgow.co.uk/ >


*이 글은 <마키아벨리의 편지> 5월달 꾸러미의 가이드북에 실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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