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다수파를 형성할 것인가? ② ∥ 진보 정치철학자 마이클 왈저의 조언

홍수민(정치발전소 번역모임)
2020-04-28
조회수 1631



대통령 탄핵과 정권 교체라는 성과를 얻고 3년이 흐른 지금, 우리 진보 정치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날로 심해지는 정치적 양극화 속에 한국의 진보 정당들 또한 자기 지향과 책임을 상실한 채 방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나라와 유사한, 진영 간 대립의 정치로 위기에 빠진 미국 민주주의를 두고 진보 정치가 가야 할 길을 밝힌 미국의 진보파 정치학자 마이클 왈저(Michael Walzer)의 글을 번역해 소개한다. ‘민주대연합’이 아닌, 진보가 가야 할 연합 정치의 길이 무엇인지 궁금한 이들에게 특히 큰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마이클 왈저는 미국을 대표하는 정치철학자이자 진보적 지식인이다.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캠브리지 대학에서 수학했고, 하버드 대학원(정치학과)을 졸업한 후 프린스턴 대학과 하버드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30여 년간 미국의 대표적인 진보 저널 <디센트>(Dissent, 이견)의 편집인으로 일했다. 현재는 프린스턴 소재 고등연구소의 사회과학부 명예 교수이자 <디센트>의 명예 편집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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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다수파를 형성할 것인가? ② 

좌파가 작고 약한 시기에 이념적 순수성은 자멸만 초래할 뿐이다.

우리는 가능한 한 모든 세력을 찾아 그들과 연대해야 한다.



자본주의

다시 원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흑인, 여성, 동성애자들이 정치적 승리를 거둔 바로 그 시기에 불평등이 증가한 원인은 무엇인가? 그 승리는 지극히 불완전한 것이다. 그것은 미국 사회의 위계질서에 더 큰 영향을 미쳐야 했다. 우리가 바라는 만큼 많은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 이유는 오늘날의 자본주의가 가진 특징과 관련되어 있다. 이것은 금융 자본주의, 때로는 ‘후기’ 자본주의라 불리기도 하는데, 나는 그 수식어가 지나치게 낙관적인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바로 지금 자본가들은 계급투쟁에서 승리하고 있다. 현재의 자본주의는 자본가들을 위한 성공 모델로, 그들은 미국의 부(富) 가운데 자신들이 가져가는 몫을 엄청나게 증가시켰다. 그러한 성공의 대가로, 다른 수많은 미국인들은 극단적인 경제적 취약성 속에 살아가고 있다. 이것은 새로운 형태의 배제이다.

그렇게 해서 극단적으로 파편화된 계급이 창출되었고, 그들은 미국 사회 밖으로 혹은 주변부로 밀려나고 있다. 산업 노동자 계급과 달리, 이 사람들은 무리 지어 있지도 않고 생산 수단과 가까이 있지도 않으며, 상대적으로 조직하기도 쉽지 않다. 그들은 파편화되어 있고 분산되어 있으며 대다수는 생산 작업으로부터 단절되어 탈중앙집중화된 서비스 경제에 고용(또는 미고용)되어 있다. 하지만 그들이 겪는 어려움은 유사하다. 6천만 명에 가까운 미국인들은 시간당 15달러 미만의 급료를 받고 일하며, 그들 중 다수는 빈곤선 아래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은 그 빈곤의 문턱에서 중증 질병, 해고, 압류 위협, 화재, 허리케인 등 그 어떤 위기에도 대처할 만한 자원을 갖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이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 중 흑인과 히스패닉의 비율은 미국 내 인종 비율보다 훨씬 더 높다. 물론 가장 많은 인구 집단은 백인이고, 여성들도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그러나 이러한 인구학적 구성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 이따금씩 ‘프리케리아트’로 불리는 그들 모두는 인종이나 성별과 관계없이 새로운 포용의 정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다.


프리케리아트(precariat)

‘불안정한’이란 뜻의 ‘precarious’와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의미하는 ‘proletariat’를 합성한 조어로, 불안정 고용 상태와 낮은 소득으로 고통 받는 비정규직 노동자, 저숙련 서비스 노동자, 프리랜서, 실업자, 노숙인 등을 뜻하는 말이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자본주의는 그 위계 구조의 상층에 소수의 여성들과 소수집단을 받아들일 수용할 수 있다. 심지어 인종 비율에 부합하는 전문직 흑인이나 기업 경영에 참여하는 여성도 자본주의에 위협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새롭게 배제된 다수의 대중이 조직을 구성해 스스로를 방어하도록 허용하지는 않는다. 이런 이유로, 그 경제 체제만큼이나 중요한 현재의 자본주의 정치는 노조를 파괴하고, 소수집단과 빈민들의 투표권을 제한하며, 정치 활동을 용이하게 해주는 공공서비스, 특히 공교육을 줄이는 데 그 목표를 두고 있다. 이와 같은 (현대 자본주의) 정치의 승리는 위계 구조를 확대하고, 소수의 세상과 다수의 세상 간 격차를 엄청나게 늘리며 민주주의에 점점 더 큰 위협을 가하고 있다. 한번 생각해 보라. 우리는 여성 참정권 보장이나 흑인 민권 운동 같은 투표권 획득 투쟁에서 승리했음을 확신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투표권이 공격받고 있는 여러 주(州)에서 방어에 급급하고 있다.


미국의 유권자 등록제와 그에 따른 투표권 제한 문제

미국은 한국과 달리 시민들이 ‘직접’ 유권자로 등록해야만 투표 자격을 갖는다. 유권자 등록 방법은 주별로 다양하지만, 특정 신분증을 구비해야 하고 투표 수개월 전 평일에 등록해야 하는 등의 요건으로 인해, 가난하거나 시간적 여유가 없거나 직업이 불안정하거나 시민권을 취득한 지 얼마 안 된 이들은 투표권을 얻기가 쉽지 않다. 즉 경제 여건에 따라 유권자 등록 가능성이 다른 것은 물론 백인보다 유색인종과 소수집단의 유권자 등록이 더 어렵다는 말이다.

이런 조건에서 공화당은 미국 내 유색인종 비율이 증가하는 추세에 대응해 이들 유색인종의 유권자 등록과 투표를 어렵게 만드는 전략을 취했고, 그것은 공화당이 장악한 주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예를 들어, 플로리다 주는 중범죄 판결을 받은 모든 사람을 유권자에서 제외했는데, 그 결과 흑인의 5분의 1이 투표권을 박탈당했다. 텍사스 주도 유권자 등록에 사용되는 신분증 종류를 엄격히 제한해 60만 명이 등록하지 못했다. 사우스캐롤라이나를 비롯한 몇몇 주는 투표 당일에도 유권자 등록을 허용했던 과거 제도를 폐지했다. 인디애나 주는 등록 유권자가 32만5천 명이 넘는 지역구의 조기 투표소를 한 곳만 운영하도록 했는데, 해당 지역구는 대부분 흑인 밀집 지역이어서 흑인 투표율이 26% 포인트나 떨어졌다.

공화당은 유권자 등록과 투표를 엄격히 관리하는 이유가 불법 이민자들의 부정 투표 등을 막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트럼프 역시 2016년 대선에서 “수백만 명의 시민권 없는 사람들이 불법적으로 투표했다”고 주장했지만, 8개월간의 조사에도 불구하고 그 근거를 찾을 수 없었다. 이런 이유로 공화당의 유권자 등록 정책은 흑인을 비롯한 소수집단의 참정권을 제한하는 차별 정책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다수’의 상당수는 분노와 원망으로 트럼프에게 표를 던졌다. 가장 가난한 미국인들 대다수는 민주당 편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주 법에 의해 투표권이 제한될 가능성이 매우 큰 사람들이다. 트럼프가 존스타운 같은 곳에서 자신의 지지자 다수를 찾았다면, 그들은 아마도 빈곤의 문턱 언저리에 있는, 일은 하고 있지만 직업 안정성을 잃어버린 채로 공포와 분노에 휩싸인 사람들일 것이다. (물론 전형적인 트럼프 지지자에 대한 설명과 달리 그들 중 일부는 버니 샌더스를 지지했다.) 트럼프 지지자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구래의 마르크스주의 관점에 따르면, 극우 포퓰리즘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는 쁘띠 부르주아룸펜 프롤레타리아이다. 노동계급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이러한 노력에는 일정 부분 진실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그 말은 트럼프와 같은 포퓰리스트를 지지하는 ‘타자’(他者)에 대한 우리의 관점에 문제가 있음을 시사한다.


쁘띠 부르주아(petty bourgeoisie)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사이의 중간 계급으로, 부르주아가 아니면서도 부르주아적인 사고방식을 보이며, 때로는 파시즘의 강력한 지지자로 등장하기도 한다.

룸펜 프롤레타리아(lumpen proletariat)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밑바닥에 있는 극빈층으로, 실업 상태에 따른 고립과 무기력으로 인해 노동 의욕도, 노동자로서의 규율과 긍지도 상실한 부랑자, 범죄인, 마약 상습자 등이 여기에 속한다.



경멸

모든 종류의 좌파 정치로부터 다수의 빈곤층 미국인들(특히 백인들)이 소외감을 느끼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자신들은 지금 주변화되고 비천한 처지에 놓여 있는데 소수집단을 옹호하는 ‘엘리트들’이 자신들을 업신여긴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러한 믿음의 가치를, 이를테면 그 사람들의 하락하는 생활 수준과 관련지어 판단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 믿음은 불편하게도 진실을 담고 있다. 한 가지만 예를 들어 보자. 경멸이 가진 인과적 역할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경멸 자체가 존재한다는 단순한 사실이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늘 그렇겠지만, 좌파에게, 자신들이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경멸은 정치적으로 현명하지 않고 도덕적으로도 올바르지 않다.

지난해에 출간된 발레리아 루이셀리(Valeria Luiselli)의 책, <어떻게 끝날지 내게 말해 줘>(Tell Me How It Ends)는 미국의 이민 정책을 다룬 ‘용감하고 유려한’ 비평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은 작가의 ‘명민한 지성과 놀라운 문학적 상상력’으로 큰 호평을 받았다. (인용한 말은 책에 대한 광고 문구지만, 나는 이와 비슷한 말을 언급한 독자들을 알고 있다.) 정말이지 이 책은 비판, 그것도 신랄한 비판을 받아야 마땅한 정책들에 대한 설득력 있는 비평이다. 하지만 한 문단만 뽑아 그것을 큰 소리로 읽어 보자. 루이셀리는 애리조나 투손에서 불법 이민자들의 입국에 항의하는 델마 크리스티(Thelma Christie)와 돈 크리스티(Don Christie) 부부의 모습을 찍은 신문 사진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그들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이런 궁금증을 갖게 되었다. 델마와 돈 크리스티는 시위 피켓을 준비하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달력에 ‘미사 가는 날’과 ‘빙고 하는 날’을 써놓듯이 그 사이에 ‘시위하는 날’을 썼던 것은 아닐까?

한 친구가 내게 이 대목을 읽어 준 후 이렇게 말했다. “이게 힐러리가 선거에서 진 이유야.” 그렇다. 유일한 이유는 아니어도 내 친구는 문제의 핵심 중 하나를 파악하고 있었다. 지식인 엘리트 그리고 심지어 자신을 좌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그와 같은 태도로는 민주적인 연대의 정치를 형성할 수 없다.


<어떻게 끝날지 내게 말해 줘> 사진출처 : https://litres.com/


훨씬 더 우려스러운 것은 이들 강경파의 다수가 이민에 대해서는 완벽하게 진보적인 견해를 갖고 있지만 좌파의 다른 모든 입장들은 지지하지 않는, 이를테면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샌더스에 반대하며 힐러리를 지지하고, 오바마 케어의 강화를 원하지만 단일 건강보험(single-payer healthcare)에는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이와 유사한 경멸적 태도를 보인다는 사실이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가장 큰 적이라는 믿음은 좌파들 사이에서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이런 믿음에서 나온 정치는 우리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정치가 아니다.


오바마 케어(환자 보호 및 적정 부담 보험법, Patient Protection and Affordable Care Act, PPACA)

2004년 1월부터 시행된 오바마 행정부의 대표적인 개혁 정책으로, 차상위 계층을 위한 의료 혜택 보장과 건강보험 가입자 수 확대를 목표로 하였다. 주요 내용은 ①정부가 지정한 (저소득자용) 보험 상품에 보조금 제공, ②보험사의 가입자 차별 (건강상 이유로 인한 가입 기피 등) 금지, ③건강보험 미가입자에 대한 벌금 부과 등이다. 이 정책으로 2016년 기준 건강보험 미가입자 수가 대략 절반으로 줄어들어 2천~2천4백만 명이 건강보험 혜택을 받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단일 건강보험(Single-payer healthcare)

건강보험료를 시민들의 세금으로 충당하는 보편 건강보험 제도의 일종으로 모두를 위한 의료보험(Medicare for all)으로도 불린다. 이 제도에서 의료 비용은 단일한 공적 기구, 즉 국가의 담당 기관이 지불한다. 오바마 케어와 비교할 때, 가장 큰 차이는 단일 건강보험의 경우 모든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자동으로 보험에 가입하도록 함으로써 더 보편적으로 적용된다는 것이다.



연합

포용을 위한 투쟁은 언제나 연합 정치를 요구한다.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여성들조차 성 평등을 위한 투쟁에서는 연대 세력이 필요하다. 소수집단에게 그 필요성은 훨씬 더 크다. 외부자들은 내부자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며, 그들을 도와줄 내부자들은 늘 있게 마련이다. 사실 많은 좌파 활동가들은 교육 수준이 높고 경제적으로도 안정된 내부자들이다. 나 역시 그런 사람들에 속하기에 우리의 역할을 분명히 하고 싶다. 우리는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신념에 따라 행동하지만, 우리가 조직하려는 사람들은 대개 우리와 다른 신념을 갖고 있다. 우리들 대부분은 세속주의자인 반면 그들 중 다수는 종교적으로 독실하다. 우리는 국제주의자이지만, 그들 대부분은 애국적인 미국인들이다. 그들은 군인과 경찰로 일하는 자식들을 두고 있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좌파 정치에 필요한 첫 번째 연합은 좌파와 그 밖의 다른 사람들과의 연합이다. 바꿔 말해, 우리는 비록 이런저런 이슈와 관련해 일시적일지라도 우리와 함께하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그들과 연합을 이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를테면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강력한 좌파 후보를 위해 싸워야 하겠지만, 그 후보가 지더라도 승자들과 힘을 합쳐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와 그들이 함께 일할 만한 이슈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좌파의 목표는 모든 프리케리아트를 아우르며 그들을 미국 사회 속으로, 나아가 미국 민주주의의 미래로 끌어들이는 데에 핵심적인 이슈들, 예컨대 투표권과 공교육, 일자리와 직업 안정과 노조 조직화, 건강보험과 복지에 초점을 두는 새로운 다인종 정치 세력을 형성하는 (혹은 여기에 기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 세력이 ‘대자적’ 계급(class ‘for itself’), 즉 공통의 역사와 의식을 가진 계급으로 구성되지는 않을 것이다. 프리케리아트는 매우 다양해서, 그들의 정치투쟁은 조직하기 쉽지 않은 연합을 요구한다. 우리는 서로 간에 매우 다른 의제와 역사를 가진 수많은 조직들을 묶어 내야 한다. 즉 노조와 교회는 물론 지난 포용의 정치로부터 부상한 모든 결사체들, ‘흑인의 생명도 중요하다’로부터 전미 여성 기구까지, 좌에서부터 중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정체성들’을 가로지르는 모든 집단들의 힘을 모아야 한다. 이는 종종 실망스러운 일이 될 것이고, 일부 좌파들은 다수의 리버럴들과 많은 잠재적 연대 세력들을 저 뒤로 남겨 둘 것이 확실한 ‘혁명’을 위해 그 일을 피하고 싶어 할 것이다.


사진출처 : https://www.weforum.org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흑인에 대한 폭력과 제도적 차별에 맞선 사회운동이다. 2013년 흑인 소년 트레이본 마틴(Trayvon Martin)을 총으로 살해한 자경단원 조지 짐머만(George Zimmerman)이 무죄 선고를 받으면서 해시태그 #BlackLivesMatter의 확산과 함께 시작되었다. 흑인에 대한 경찰의 가혹 행위, 미국 형사법 제도 내의 인종 차별 등을 개선하기 위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전미 여성 기구(NOW, National Organization for Women)

1966년에 창설된 페미니스트 운동 조직이다. 미국 50개 주 전체에 걸쳐 550개 지부를 두고 있다. 낙태 허용, 출산 보건 서비스 보장, 여성에 대한 폭력 근절, 다양성 증진, 인종차별 종식, 레즈비언의 권리 보장, 경제 정의 등을 위해 로비, 시위, 가두 행진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념적 순수성은 좌파 정치의 골칫거리이다. 그것은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정당을 만드는 끊임없는 분열의 원천이자, 연대해야 할 사람들에게 적대를 표출하는 기제이다. 만약 우리가 이제 곧 권력을 잡을 만큼 (즉 선거에서 승리할 만큼) 강력한 정치 세력이라면, 우리의 모든 활동가들에게 단일하고 일관된 정강 정책을 승인하라고 주장하는 것도 유의미할 수 있다. 그럴 때조차 다양성과 이견에 대한 관용이 필요하다고 믿지만, 규율에 대해서는 할 말이 있다. 오늘날 우리가 작고 약한 조건에서 규율은 거의 확실히 분열적이며 자멸적일 뿐이다. 우리는 가능한 한 모든 연대 세력을 찾아 그들과 연대해야 한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미국인들, 우리가 그들의 복지를 위해 헌신해야 할 미국인들 역시 마찬가지다. 작은 승리는 (사람들을 좀 더 잘살게 만들기 때문에) 급진적 정치를 더욱 어렵게 만든다는 구좌파의 믿음은 좌파의 나르시시즘을 보여 주는 사례일 뿐이다. 더 잘사는 것은 좋은 일이다. 좀 더 빨리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조건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그들의 복지에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면 프리케리아트에게 우리의 혁명을 기다려 달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낯선 이들과의 동침’을 말한 희곡 대사는 진실을 담고 있다. 만약 그 구절이 지나치게 친밀한 연대를 시사한다면, 우리의 깊은 신념은 아니라도 우리의 이해관계가 일치해서 한동안 함께 일해야 할 어색하고 잘 모르는 친구를 생각해 보라.

우리가 우리의 신념을 고수하는 한 반민주적 흐름에 저항하는 최선의 방법은 공동의 협력이다. 지금 당장은 그것이 유일한 길이다.


낯선 이들과의 동침

셰익스피어의 마지막 작품 <폭풍>(Tempest) 2막 2장에 나오는 대사이다. “이크, 또 폭풍이 오는구나. 내게 제일 좋은 수는 이 자의 옷자락 밑으로 들어가는 거다. 여기엔 그 밖에 다른 피난처도 없으니. 고난은 한 사람을 낯선 이들과도 동침하게 만드는구나.”



옮긴이: 홍수민과 정치발전소 번역 모임

※ 원문 보기


정치발전소 번역 모임

정치발전소 활동을 통해 만난 사람들이 꾸린 정치 텍스트 번역 모임. ‘정치는 어떻게 해야 잘하는 걸까?’라는 의문을 갖고, 다른 나라 정치는 어떤지 알아보기 위해 청년 네 명이 모였다. 주로 해외 기사, 칼럼, 인터뷰, 소논문을 읽고 번역한다. 해외 사례를 살펴보고 우리와 비교해 봄으로써, 한국 정치를 좀 더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개선해 나갈 방법을 찾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해외의 좋은 글들을 읽으며 영감을 얻는 것은 즐거운 일이지만, 좋은 번역을 향한 길은 여전히 멀고 험하다. 노고를 통해 나온 번역물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닿아, 우리 정치를 되돌아보고 나아갈 방법을 찾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