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통령 탄핵과 정권 교체라는 성과를 얻고 3년이 흐른 지금, 우리 진보 정치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날로 심해지는 정치적 양극화 속에 한국의 진보 정당들 또한 자기 지향과 책임을 상실한 채 방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나라와 유사한, 진영 간 대립의 정치로 위기에 빠진 미국 민주주의를 두고 진보 정치가 가야 할 길을 밝힌 미국의 진보파 정치학자 마이클 왈저(Michael Walzer)의 글을 번역해 소개한다. ‘민주대연합’이 아닌, 진보가 가야 할 연합 정치의 길이 무엇인지 궁금한 이들에게 특히 큰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이 글의 필자 마이클 왈저는 미국을 대표하는 정치철학자이자 진보적 지식인이다.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캠브리지 대학에서 수학했고, 하버드 대학원(정치학과)을 졸업한 후 프린스턴 대학과 하버드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30여 년간 미국의 대표적인 진보 저널 <디센트>(Dissent, 이견)의 편집인으로 일했다. 현재는 프린스턴 소재 고등연구소의 사회과학부 명예 교수이자 <디센트>의 명예 편집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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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다수파를 형성할 것인가?
좌파가 작고 약한 시기에 이념적 순수성은 자멸만 초래할 뿐이다.
우리는 가능한 한 모든 세력을 찾아 그들과 연대해야 한다.
두 도시 이야기
나는 펜실베이니아 주 존스타운에서 자랐다. 존스타운은 내가 살던 1940년대에서 1950년대 초반에 철강 도시로 알려져 있었다. 이 도시는 1941년부터 노동조합이 지배하는 곳이기도 했다. 한때는 공화당 텃밭이었지만, 철강 노동자들이 노조 위원회 결성을 위한 찬반 투표에서 4 대 1의 비율로 찬성한 이후 확실한 민주당 지지 지역이 되었다. 나는 1948년 해리 트루먼이 마지막 칸 기차 끝에서 연설하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트루먼은 이 도시에서 큰 표 차로 승리했다. 오늘날 존스타운은 러스트벨트(Rust Belt) 도시 가운데 하나이며, 공장들은 문을 닫았고, 인구는 1940년대의 3분의 2 정도로 줄어들었다.
러스트벨트(Rust Belt) 미국 중서부와 북동부에 위치한 대표적인 공업 지대였으나 제조업이 쇠퇴하면서 ‘녹슨 공장만 남은’ 지역으로 불리게 되었다. 2016년 대선 당시 세계화와 자유무역주의로 피해를 입은 이 지역 백인 노동자들이 트럼프의 보호무역주의와 반이민 정책을 지지하며 그의 당선에 기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사진 설명> 미국의 '러스트벨트' 지역. 사진출처_Business Insider
지금 나는 뉴저지 주의 대학 도시 프린스턴에서 살고 있다. 이 도시는 다수의 부유층 의사들과 변호사들, 매일 뉴욕으로 출퇴근하는 금융인들과 은행원들이 거주하는 곳이기도 하다. 프린스턴은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10대 도시 안에 들지는 못하지만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이 도시 거주민들 가운데는 흑인과 히스패닉 소수집단도 있지만, 백인이 다수인 매우 부유한 지역공동체라고 봐도 좋다.
이 두 도시를 통해 2016년 선거 결과를 효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존스타운은 거의 2 대 1의 비율로 트럼프를 지지했고, 프린스턴은 놀랍게도 8 대 1의 비율로 힐러리를 지지했다. 이것은 과거와 다른 현상이며, 계급 정치에 관한 전통적 이론들이 말하는 것과도 다르다. 민주당의 사회적 기반은 교육 수준이 높은 전문직 종사자들, 지금은 많지 않지만 아마도 계속 증가할 유형에 속하는 기업인들, 그리고 강력한 지지 동기를 갖고 있지만 아직 충분히 동원되지는 않은 소수집단 연합(주로 흑인과 히스패닉)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을 모두 합하면 선거에서 다수파를 형성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 현실에서 그들은 대선의 경우 절반 정도만 참여했고, 주나 지역 단위 선거에는 그보다 훨씬 더 적게 참여했다. 전통적 산업 노동자 계급은 과거와 달리 더 이상 민주당의 주요 지지 기반이 아니다. 심지어 노동조합으로 조직화된 노동자들조차 확실한 민주당 투표자로 볼 수 없다.
존스타운과 프린스턴을 비교하면서 알 수 있는 이 상황은 지난 40년에 걸쳐 서서히 진행되어 온 것이다. 그 정점이라 할 수 있는 2016년 트럼프의 승리는 흔히 두 가지 관점으로 이해되는데, 하나는 대실패의 결과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최근 몇 년간 민주당과 좌파의 부분적 성공에 대한 반작용이라는 것이다. 첫 번째 관점은 세계화의 경제적 영향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실패의 결과로 일자리 감소, 복지 축소, 지역의 쇠락, 계층 하락이 좌절과 분노의 정치를 낳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난 선거는 경제적 이유로 패배했고, 여기서 이슈는 계급이다. 두 번째 관점은 차별 시정 조치(affirmative action)의 (제한적) 성공, 히스패닉과 아시아인 다수의 이민, 경찰의 흑인 살해와 대규모 투옥 정책에 대한 반대 운동이 백인들 사이에서 분노의 정치를 야기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난 선거는 인종주의로 말미암아 패배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하나 더 덧붙이자면, 우리 시대 좌파의 가장 중요한 승리라 할 수 있는 페미니즘과 동성애 해방의 성공이 종교적으로 독실한 다수의 미국인에게 불편함과 적대감을 불러일으킨 점도 있을 것이다. 이런 근거에서 지난 선거는 전통주의자들의 문화적 반작용 때문에 패배했다고 말할 수 있다.
전형적인 트럼프 지지자의 윤곽을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그려 볼 수 있다. 옛날에는 철강 노동자였으나 지금은 월마트에서 일하며, 동성애에 대해 오랜 혐오를 지니고 있고, 차별 시정 조치란 게으른 흑인들에게 좋은 일자리를 주는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선거 결과를 이해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앞에서 말한 두 가지 변수의 결과로 인해 사람들이 매우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계급·인종·문화 간에 겹쳐지는 부분이 있는 것도 분명하지만 이와 같은 정체성들이 서로 간에 갈라지는 측면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바꿔 말해, 자신의 경제적 상황에 좌절한 노동자들은 샌더스에게 투표했고, 실업 또는 불완전 취업 상태에 있는 미국인들은 (그들 중 다수는 흑인인데) 힐러리에게 투표했다. 심지어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조차 사회경제 문제에 있어서는 좌파적 관점을 가진 경우가 있다. 그리고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정말로 전형적인 트럼프 지지자는 (좌절과 분노에 찬 백인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라) 자기 삶에 만족하는 상냥한 부르주아라는 사실이다.
베트남 전쟁과 그 이후
계급·인종·문화는 미국뿐 아니라 서유럽 중도좌파 정당이 우측으로 이동한 것을 설명하는 여러 요인 가운데 일부였다. 그러나 노동자 계급에서 전문가 계급으로의 지지 기반 변화는 미국과 이스라엘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났는데, 이들 두 나라에서는 전쟁과 안보 문제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미국 사례에 초점을 두면서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려 하는데, 그 이유는 두 문제가 다른 문제들보다 더 중요해서라기보다는 우리가 처한 상황의 어려움을 명확히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다른 것들’에 대한 설명은 잠시 후에 다룰 것이다.)
미국 정치가 우측으로 이동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의 급진주의 붕괴와 베트남전 종전 이후, 즉 1970년대 중반부터였다. 이스라엘도 거의 비슷한 시기인 1973년 욤 키푸르 (아랍-이스라엘) 전쟁 이후부터 우측으로의 이동이 시작되었다. 두 나라 모두에서 좌파는 애국적이지 못하고, 공산주의에 온건하며, 친아랍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좌파 정당은 아니지만 중도좌파를 대표하는 민주당 역시 같은 취급을 받았다. 안보 문제에 유약하고, 해외의 위협에 대처하는 데 있어 믿음직스럽지 못하다는 것이다. 나는 좌파와 민주당에 대한 이 강력한 낙인찍기의 시작을 1967년 매사추세츠 주 캠브리지에서 목격했는데, 이는 존스타운과 프린스턴에 이은 또 다른 도시의 이야기라 할 수 있겠다. 반전 운동가들은 베트남전에 대한 찬반 여부를 묻는 주민 투표(referendum)를 추진했고, 유권자들 중 40%는 전쟁에 반대표를 던졌다. 미군 병사들이 여전히 전투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상황을 감안할 때, 이 수치가 승리는 아니어도 상당한 성과였음은 분명하다. <디센트(Dissent)>에 실린 젊은 사회학과 대학원생의 분석에 따르면, 그 투표 결과는 다가올 정치 변화를 시사하는 것이었다. 반전 운동가들은 (나도 그들 중 하나였는데) 캠브리지의 모든 노동자 밀집 지역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지불하는 임대료가 높을수록, 보유한 주택 가격이 높을수록, 전쟁 반대에 투표할 가능성도 높았다. 당시 반전 운동의 지지 기반은 60년 후 프린스턴에서 힐러리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던 이들과 같은 종류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존스타운에서 트럼프에게 투표했던 이들과 같은 종류의 사람들에게서는 지지를 받지 못했다. 1967년에는 그들 대다수가 좋은 일자리를 갖고 있었음에도 그랬다.

<사진 설명> Michael Walzer (1935~), 마이클 왈저는 <Dissent>의 공동편집인이자 <The New Republic>의 편집인이기도 하다. 사진출처_ias.edu
그 사이 많은 일들이 있었다. 하지만 좌파와 민주당이 ‘우리 군인들’에게 신뢰를 보내지 않고, 우리의 적들에 대해 강경하지 않다는 인식은 계속 이어졌다. 똑같은 소리를 트럼프에게서도 들을 수 있는데, 민주당 행정부에서 ‘대폭 삭감된’ 국방 예산을 늘리겠다는 공약 그리고 시리아와 이라크에 있는 이슬람 국가(ISIS, Islamic State of Iraq and Syria)를 폭격할 것이며, 세계 곳곳에서 펼치는 드론 전쟁에 대한 모든 규제를 철폐하겠다는 공약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이처럼 민주당을 향해 제기되는 비난에 대한 대응은 민주당 스스로에게 맡겨 두겠다. 그러나 민주당 내 좌파를 포함한 좌파 진영의 대응은 어떠한가? 첫 번째로 말해야 할 것은 무엇이든 대응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멍청아, 문제는 경제야!”처럼 정치적으로 국내 이슈에만 집중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좌파는 해외에서 미국이 보여 준 맹목적 애국주의에 대해 일관된 의견을 제시할 수 없고, 안보가 중요한 시기에 미국인들의 생명을 지키는 데 헌신하는 태도를 미국인들에게 보여 줄 수도 없다.
대외 정책 이슈에 소극적인 좌파의 모습은 버니 샌더스의 2016년 대선 선거운동에서 분명하게 드러났고, (문자 그대로) 다시 활기를 찾은 미국 민주사회주의자 협회(Democratic Socialists of America, 이하 DSA)의 (흥분으로 가득 찬) 2017년 총회에서도 다시 한 번 확연하게 드러났다. DSA 모임에서는 많은 결의안이 논의되었음에도 대외 정책에 대한 것은 단 하나뿐이었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배척(boycott)을 요구하는 결의안이었다. 시리아・아프가니스탄・이라크・예멘・북한・베네수엘라・우크라이나, 그리고 푸틴의 러시아에 관한 언급은 단 한 마디도 없었다. (그 이전 구(舊) DSA는 예측 가능한 대외 정책 노선을 채택했었는데, 예를 들면 예멘・소말리아・파키스탄에서 미국의 드론 공격에 반대했던 것이 대표적이다.) 아마도 2017년 총회에서는 침묵이 최선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에 대한 배척 이면에 있는 세계에 대한 비전은 아마 앞서 언급한 나라들 중 일부에 대해 낯선 입장을 만들어 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시점에선가 좌파는 우리 동료 시민들의 안전과 안녕에 대한 헌신과 충돌하지 않는 국제주의적 대외 정책 틀을 구성해야만 한다. 이스라엘과 미국에 대한 적대로 해석되는 반제국주의라는 그 흔한 구호는 분명 현실에서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 민주사회주의자 협회(DSA) 민주사회주의자, 사회민주주의자, 노동의 가치를 중시하는 회원들로 구성된 단체. DSA는 1973년 미국 사회당의 우경화에 따른 당내 분열 속에 결성된 이래 미국에서 가장 큰 민주사회주의자 단체로 남아 있다. 협회 결성 초기에는 약 6천 명의 회원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2016년 트럼프 당선 이후 그 수가 5만 명까지 늘었고, 회원들의 중위(median) 연령도 2013년 68세에서 2017년 33세로 낮아졌다. DSA 회원들 수십 명이 주 단위에서 선출직 대표로 활동하고 있으며, 2018년 선거에서는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Alexandria Ocasio-Cortez)와 라시다 털리브(Rashida Tlaib)가 연방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 |
포용의 정치
지난 수십 년간 좌파의 국내 정치는 급격하게 파편화되어 왔다. 여기에는 그동안 배제되었던 (여성을 제외한 소수집단) 사람들을 미국 사회로 통합하고 그들이 완전한 시민권을 누릴 수 있도록 도우려는 노력도 크게 작용했다. 그런 활동들은 ‘흑인은 아름답다’와 같이 특수주의적인 주장을 제기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래서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주변화되고 비하되어 온 정체성들을 회복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정당하다. 그것은 정치적 지지를 받을 만한 일이다. 특수주의가 평등에 기여할 때, 그것에 대해 우려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정체성 정치’라는 용어는 부적절한 명칭이다. 왜냐하면 이 정치의 주창자들 중 절대 다수는 그런 집단들의 지위 강화(다른 모든 이들에 우선하는 나의 정체성)가 아니라 포용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국가 공동체 안에 들어가기를 원한다. 즉 다른 시민들과 동등한 지위를 가진 구성원으로서 애국적인 미국 시민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좌파는 언제나 배제당한 소수자들을 지지해야 한다. 비록 우리가 평등한 시민권 그 자체를 넘어서는 목표를 가질 때조차 (그리고 우리들 중 일부가 애국심에 대해 우려할 때조차도) 그렇다.
‘흑인은 아름답다’(Black is beautiful) 운동 1960년대 미국에서 시작된 운동으로 흑인의 외모에 대한 인종차별적 편견을 없애는 것을 목표로 했다. 흑인의 피부, 얼굴, 머리카락이 ‘못생겼다’는 차별적 관념에 대항하며 그들의 인종적 특징을 없애려 하는 행위(예를 들어, 직모가 되기 위해 곱슬머리를 펴려 하거나 피부를 표백하려는 시도 등)를 근절하고자 노력했다. |

<사진 설명> 1997년 '백만 여성 행진(The Million Woman March)'에서 'Black is beautiful' 구호를 외치고 있는 모습. 사진출처_yourblackworld.net
미국이라는 정치 공동체를 하나의 밀폐된 공간이라고 생각해 보자. 이 곳에 처음 자리 잡은 이들은 백인이자 앵글로 색슨 계통의 개신교도인 사람들이다. 수 세기에 걸쳐 이 공간은 침입을 받아왔다. 처음에는 아일랜드계 가톨릭교도들이 들어왔고, 그 다음으로는 슬라브와 이탈리아계 가톨릭교도들, 유대인들, 여성들, 산업 노동자들, 흑인들, 히스패닉 사람들, 아시아인들, 동성애자들, 무슬림들 순으로 들어왔는데, 이 목록은 꽤나 길다. 이것이 우리가 아는 미국 이야기이고, 그것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 첫 번째 이유는 많은 침입자들이 아직 평등한 시민권을 얻는 데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새로운 배제에 대응해 더 많은 침입이 있을 것이며 그럴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배제는 오늘날의 미국 정치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사안이다.
우선 우리가 가장 잘 아는 지난 4~50년간의 정치투쟁에 대한 논의부터 시작해 보자. 흑인 민권 운동, 페미니즘, 성 소수자 권리 등, 포용을 위한 운동은 일정 부분 성공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미국에서 인종과 성에 대한 여러 가지 편견들은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고, 지난 몇 달 동안 우리는 무슬림과 유대인에 대한 혐오와 같은 새로운 편견의 출현과 오래된 편견의 재출현을 목격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오늘날 미국에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흑인 중산층이 존재하고,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여성들이 전문직, 기업 경영, 정치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그 어느 때보다 많은 미국인들이 동성혼을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비록 불완전하더라도 이는 분명한 승리이고, 여기에는 수많은 정치적 노고들이 녹아들어 있다.
그렇다면 미국은 왜 그 모든 정치 활동에도 불구하고 과거보다 더 평등한 사회를 이루지 못했는가? 우리는 일련의 부분적 승리를 거두기도 했지만, 불평등이 전반적으로 증가하는 것 또한 지켜봐 왔다. 한 가지 흔한 설명은, 흑인 민족주의와 급진적 페미니즘 같은 소수집단 지위 강화 운동이 다수의 미국인들(주로 백인이며 종교적으로 독실한 사람들)을 소외시켰고 이로 인해 우익 세력이 승리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의 설명 요인이 된다 하더라도 나는 그것이 작은 요인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평등한 시민권을 위해 싸워 온 흑인과 여성의 절대 다수는 마틴 루터 킹 목사가 그랬듯이 미국 사회의 내부자적 가치와 함께 미국 역사를 통해 신성시되어 온 독립 선언문과 헌법 같은 문서에 호소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노골적인 인종차별과 성 차별이 더 나은 설명으로 보인다. 즉 다수의 미국인들은 이와 같은 투쟁이 시작되기 전에도 포용에 적대적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과 연결된 정치가 소외를 불러일으킨 사례들은 존재하고, 이에 대해 논의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흑인의 권리 강화는 법 집행에 있어 급진적 변화를 요구하는데, 여기에는 경찰의 인종차별 금지와 대규모 투옥 정책의 종식, 인종 비율을 반영한 경찰 인력, 군대화에 대한 거부, 경찰의 훈련 및 총기 사용 규율의 향상 등이 포함된다. 이것들은 매우 중요한 목표지만, 그렇다고 “모든 경찰은 개자식이다”(ACAB)의 정치를 필요로 하거나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경찰을 ‘돼지’라 부르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이는 경찰을 보호자로 생각하는 많은 미국인을 등 돌리게 만드는 확실한 방법이며, 실제로 그런 경우가 적지 않다.
대규모 투옥 정책 그 대상이 대체로 흑인인 문제를 말한다. 전체적으로 흑인은 백인보다 투옥될 확률이 6배 정도 높고, 히스패닉보다 3배 정도 높다. 그 원인으로는 경찰과 사법부의 판단에 인종적 편견이 존재하고, 과거의 범죄 기록이 현재의 판결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 등이 있다. |
경찰의 군대화 경찰 인력이 군사 장비 및 전략을 사용하는 것. 여기에 경찰의 자의적이고 인종차별적인 판단이 더해져 함부로 무기를 사용할 경우 무고한 흑인이 총에 맞아 죽거나 다칠 가능성이 크게 증가한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그런 사건이 몇 차례 발생했고, 그럴 때마다 흑인들은 차별 반대 시위를 펼쳤다. |
ACAB 운동 “모든 경찰은 개자식이다.”(All Cops Are Bastards)라는 말의 첫 글자를 딴 것으로, 경찰의 인종차별 같은 비윤리적 행동에 항의하기 위해 그래피티, 문신 및 기타 이미지에 들어가는 슬로건 내지 캐치프레이즈로 활용된다. 알파벳 순서에 따라 ‘1312’로 표현하기도 한다. |
이와 유사하게 성 평등을 위한 투쟁도 가부장적 가족 구조에 대한 비판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많은 미국의 아버지들을 포함해 미국인 다수가 지지할 만한 비판이다. 하지만 그 비판을 가족 그 자체로 확대해 ‘정상적인’ 가족도 강압적일 뿐이라고 하면, 우리는 대다수 아버지들과 어머니들의 지지를 잃어버릴 것이다. 가족과 경찰 모두에서 핵심적인 질문은 우리 정치를 효과적으로 만들려고 하는가, 아니면 표출적으로 만들려고 하는가에 있다. 우리는 다수를 만들기 위해 일하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의 주변화를 즐기고 있는가?
가장 주변화된 사람들 중 일부는 식자층으로 논문이나 칼럼을 쓰고 이론을 만드느라 바쁜 지식인들이다. 그들의 이론은 극히 분파적이며, 실용적인 정치의 관점에서 볼 때 놀랄 만큼 어리석은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그들은 한 가지 중요한 논점을 보여 준다. 그것은 미국에서 일상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불의와 부패를 감안할 때, 배제된 사람들과 외부자들 모두가 실제로 미국 사회에 동참하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다수의 전투적 운동가들은 이와 같은 동참을 일종의 타협, 즉 절대 수용하지 말아야 할 것을 수용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배제된 집단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그들의 의식을 고양하며, 역사를 다시 쓰고, ‘정체성’을 강화하는 그 모든 것을 타협을 넘어서는 대안으로 받아들인다. 사실 의식의 고양과 그 외 나머지 것들은 포용의 정치와 자연스럽게 함께 가며 포용에 성공한 후에도 계속된다. 우리는 포용을, 보다 큰 희망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불의와 부패에 대항하는 투쟁의 또 다른 시작으로 봐야 한다. 지금까지 배제되어 온 사람들에게 가져다주는 즉각적인 혜택과 그들에게 열어주는 정치적 기회를 고려할 때, 미국 사회에 동참하는 것은 그에 따른 타협을 감수하고도 남을 만큼 가치 있는 일이다.
포용은 다른 많은 가치들에 선행하는 가치이다. 오래된 금언 중에 “밥부터 먹이고 옳고 그름을 따지라.”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민주주의에서는 먼저 옳고 그름을 공적으로 따지며 조직하고 투표할 수 있도록 한 다음에야, 재분배 이슈를 다루며 모두가 밥을 챙겨 먹게 할 수 있다. 혹은 시민적 권리의 쟁취 그 자체가 정치권력의 재분배이며, 이를 통해 더 많은 재분배를 이뤄 낼 수 있다고 말하는 편이 좋겠다. 간단히 말해, 평등한 시민권은 사회주의나 다른 모든 평등에 선행한다는 것이다.
<다음글에서 계속>
옮긴이: 홍수민과 정치발전소 번역 모임
※ 원문 보기
정치발전소 번역 모임
정치발전소 활동을 통해 만난 사람들이 꾸린 정치 텍스트 번역 모임. ‘정치는 어떻게 해야 잘하는 걸까?’라는 의문을 갖고, 다른 나라 정치는 어떤지 알아보기 위해 청년 네 명이 모였다. 주로 해외 기사, 칼럼, 인터뷰, 소논문을 읽고 번역한다. 해외 사례를 살펴보고 우리와 비교해 봄으로써, 한국 정치를 좀 더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개선해 나갈 방법을 찾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해외의 좋은 글들을 읽으며 영감을 얻는 것은 즐거운 일이지만, 좋은 번역을 향한 길은 여전히 멀고 험하다. 노고를 통해 나온 번역물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닿아, 우리 정치를 되돌아보고 나아갈 방법을 찾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대통령 탄핵과 정권 교체라는 성과를 얻고 3년이 흐른 지금, 우리 진보 정치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날로 심해지는 정치적 양극화 속에 한국의 진보 정당들 또한 자기 지향과 책임을 상실한 채 방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나라와 유사한, 진영 간 대립의 정치로 위기에 빠진 미국 민주주의를 두고 진보 정치가 가야 할 길을 밝힌 미국의 진보파 정치학자 마이클 왈저(Michael Walzer)의 글을 번역해 소개한다. ‘민주대연합’이 아닌, 진보가 가야 할 연합 정치의 길이 무엇인지 궁금한 이들에게 특히 큰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이 글의 필자 마이클 왈저는 미국을 대표하는 정치철학자이자 진보적 지식인이다.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캠브리지 대학에서 수학했고, 하버드 대학원(정치학과)을 졸업한 후 프린스턴 대학과 하버드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30여 년간 미국의 대표적인 진보 저널 <디센트>(Dissent, 이견)의 편집인으로 일했다. 현재는 프린스턴 소재 고등연구소의 사회과학부 명예 교수이자 <디센트>의 명예 편집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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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다수파를 형성할 것인가?
좌파가 작고 약한 시기에 이념적 순수성은 자멸만 초래할 뿐이다.
우리는 가능한 한 모든 세력을 찾아 그들과 연대해야 한다.
두 도시 이야기
나는 펜실베이니아 주 존스타운에서 자랐다. 존스타운은 내가 살던 1940년대에서 1950년대 초반에 철강 도시로 알려져 있었다. 이 도시는 1941년부터 노동조합이 지배하는 곳이기도 했다. 한때는 공화당 텃밭이었지만, 철강 노동자들이 노조 위원회 결성을 위한 찬반 투표에서 4 대 1의 비율로 찬성한 이후 확실한 민주당 지지 지역이 되었다. 나는 1948년 해리 트루먼이 마지막 칸 기차 끝에서 연설하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트루먼은 이 도시에서 큰 표 차로 승리했다. 오늘날 존스타운은 러스트벨트(Rust Belt) 도시 가운데 하나이며, 공장들은 문을 닫았고, 인구는 1940년대의 3분의 2 정도로 줄어들었다.
러스트벨트(Rust Belt)
미국 중서부와 북동부에 위치한 대표적인 공업 지대였으나 제조업이 쇠퇴하면서 ‘녹슨 공장만 남은’ 지역으로 불리게 되었다. 2016년 대선 당시 세계화와 자유무역주의로 피해를 입은 이 지역 백인 노동자들이 트럼프의 보호무역주의와 반이민 정책을 지지하며 그의 당선에 기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진 설명> 미국의 '러스트벨트' 지역. 사진출처_Business Insider
지금 나는 뉴저지 주의 대학 도시 프린스턴에서 살고 있다. 이 도시는 다수의 부유층 의사들과 변호사들, 매일 뉴욕으로 출퇴근하는 금융인들과 은행원들이 거주하는 곳이기도 하다. 프린스턴은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10대 도시 안에 들지는 못하지만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이 도시 거주민들 가운데는 흑인과 히스패닉 소수집단도 있지만, 백인이 다수인 매우 부유한 지역공동체라고 봐도 좋다.
이 두 도시를 통해 2016년 선거 결과를 효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존스타운은 거의 2 대 1의 비율로 트럼프를 지지했고, 프린스턴은 놀랍게도 8 대 1의 비율로 힐러리를 지지했다. 이것은 과거와 다른 현상이며, 계급 정치에 관한 전통적 이론들이 말하는 것과도 다르다. 민주당의 사회적 기반은 교육 수준이 높은 전문직 종사자들, 지금은 많지 않지만 아마도 계속 증가할 유형에 속하는 기업인들, 그리고 강력한 지지 동기를 갖고 있지만 아직 충분히 동원되지는 않은 소수집단 연합(주로 흑인과 히스패닉)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을 모두 합하면 선거에서 다수파를 형성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 현실에서 그들은 대선의 경우 절반 정도만 참여했고, 주나 지역 단위 선거에는 그보다 훨씬 더 적게 참여했다. 전통적 산업 노동자 계급은 과거와 달리 더 이상 민주당의 주요 지지 기반이 아니다. 심지어 노동조합으로 조직화된 노동자들조차 확실한 민주당 투표자로 볼 수 없다.
존스타운과 프린스턴을 비교하면서 알 수 있는 이 상황은 지난 40년에 걸쳐 서서히 진행되어 온 것이다. 그 정점이라 할 수 있는 2016년 트럼프의 승리는 흔히 두 가지 관점으로 이해되는데, 하나는 대실패의 결과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최근 몇 년간 민주당과 좌파의 부분적 성공에 대한 반작용이라는 것이다. 첫 번째 관점은 세계화의 경제적 영향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실패의 결과로 일자리 감소, 복지 축소, 지역의 쇠락, 계층 하락이 좌절과 분노의 정치를 낳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난 선거는 경제적 이유로 패배했고, 여기서 이슈는 계급이다. 두 번째 관점은 차별 시정 조치(affirmative action)의 (제한적) 성공, 히스패닉과 아시아인 다수의 이민, 경찰의 흑인 살해와 대규모 투옥 정책에 대한 반대 운동이 백인들 사이에서 분노의 정치를 야기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난 선거는 인종주의로 말미암아 패배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하나 더 덧붙이자면, 우리 시대 좌파의 가장 중요한 승리라 할 수 있는 페미니즘과 동성애 해방의 성공이 종교적으로 독실한 다수의 미국인에게 불편함과 적대감을 불러일으킨 점도 있을 것이다. 이런 근거에서 지난 선거는 전통주의자들의 문화적 반작용 때문에 패배했다고 말할 수 있다.
전형적인 트럼프 지지자의 윤곽을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그려 볼 수 있다. 옛날에는 철강 노동자였으나 지금은 월마트에서 일하며, 동성애에 대해 오랜 혐오를 지니고 있고, 차별 시정 조치란 게으른 흑인들에게 좋은 일자리를 주는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선거 결과를 이해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앞에서 말한 두 가지 변수의 결과로 인해 사람들이 매우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계급·인종·문화 간에 겹쳐지는 부분이 있는 것도 분명하지만 이와 같은 정체성들이 서로 간에 갈라지는 측면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바꿔 말해, 자신의 경제적 상황에 좌절한 노동자들은 샌더스에게 투표했고, 실업 또는 불완전 취업 상태에 있는 미국인들은 (그들 중 다수는 흑인인데) 힐러리에게 투표했다. 심지어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조차 사회경제 문제에 있어서는 좌파적 관점을 가진 경우가 있다. 그리고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정말로 전형적인 트럼프 지지자는 (좌절과 분노에 찬 백인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라) 자기 삶에 만족하는 상냥한 부르주아라는 사실이다.
베트남 전쟁과 그 이후
계급·인종·문화는 미국뿐 아니라 서유럽 중도좌파 정당이 우측으로 이동한 것을 설명하는 여러 요인 가운데 일부였다. 그러나 노동자 계급에서 전문가 계급으로의 지지 기반 변화는 미국과 이스라엘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났는데, 이들 두 나라에서는 전쟁과 안보 문제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미국 사례에 초점을 두면서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려 하는데, 그 이유는 두 문제가 다른 문제들보다 더 중요해서라기보다는 우리가 처한 상황의 어려움을 명확히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다른 것들’에 대한 설명은 잠시 후에 다룰 것이다.)
미국 정치가 우측으로 이동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의 급진주의 붕괴와 베트남전 종전 이후, 즉 1970년대 중반부터였다. 이스라엘도 거의 비슷한 시기인 1973년 욤 키푸르 (아랍-이스라엘) 전쟁 이후부터 우측으로의 이동이 시작되었다. 두 나라 모두에서 좌파는 애국적이지 못하고, 공산주의에 온건하며, 친아랍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좌파 정당은 아니지만 중도좌파를 대표하는 민주당 역시 같은 취급을 받았다. 안보 문제에 유약하고, 해외의 위협에 대처하는 데 있어 믿음직스럽지 못하다는 것이다. 나는 좌파와 민주당에 대한 이 강력한 낙인찍기의 시작을 1967년 매사추세츠 주 캠브리지에서 목격했는데, 이는 존스타운과 프린스턴에 이은 또 다른 도시의 이야기라 할 수 있겠다. 반전 운동가들은 베트남전에 대한 찬반 여부를 묻는 주민 투표(referendum)를 추진했고, 유권자들 중 40%는 전쟁에 반대표를 던졌다. 미군 병사들이 여전히 전투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상황을 감안할 때, 이 수치가 승리는 아니어도 상당한 성과였음은 분명하다. <디센트(Dissent)>에 실린 젊은 사회학과 대학원생의 분석에 따르면, 그 투표 결과는 다가올 정치 변화를 시사하는 것이었다. 반전 운동가들은 (나도 그들 중 하나였는데) 캠브리지의 모든 노동자 밀집 지역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지불하는 임대료가 높을수록, 보유한 주택 가격이 높을수록, 전쟁 반대에 투표할 가능성도 높았다. 당시 반전 운동의 지지 기반은 60년 후 프린스턴에서 힐러리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던 이들과 같은 종류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존스타운에서 트럼프에게 투표했던 이들과 같은 종류의 사람들에게서는 지지를 받지 못했다. 1967년에는 그들 대다수가 좋은 일자리를 갖고 있었음에도 그랬다.
<사진 설명> Michael Walzer (1935~), 마이클 왈저는 <Dissent>의 공동편집인이자 <The New Republic>의 편집인이기도 하다. 사진출처_ias.edu
그 사이 많은 일들이 있었다. 하지만 좌파와 민주당이 ‘우리 군인들’에게 신뢰를 보내지 않고, 우리의 적들에 대해 강경하지 않다는 인식은 계속 이어졌다. 똑같은 소리를 트럼프에게서도 들을 수 있는데, 민주당 행정부에서 ‘대폭 삭감된’ 국방 예산을 늘리겠다는 공약 그리고 시리아와 이라크에 있는 이슬람 국가(ISIS, Islamic State of Iraq and Syria)를 폭격할 것이며, 세계 곳곳에서 펼치는 드론 전쟁에 대한 모든 규제를 철폐하겠다는 공약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이처럼 민주당을 향해 제기되는 비난에 대한 대응은 민주당 스스로에게 맡겨 두겠다. 그러나 민주당 내 좌파를 포함한 좌파 진영의 대응은 어떠한가? 첫 번째로 말해야 할 것은 무엇이든 대응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멍청아, 문제는 경제야!”처럼 정치적으로 국내 이슈에만 집중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좌파는 해외에서 미국이 보여 준 맹목적 애국주의에 대해 일관된 의견을 제시할 수 없고, 안보가 중요한 시기에 미국인들의 생명을 지키는 데 헌신하는 태도를 미국인들에게 보여 줄 수도 없다.
대외 정책 이슈에 소극적인 좌파의 모습은 버니 샌더스의 2016년 대선 선거운동에서 분명하게 드러났고, (문자 그대로) 다시 활기를 찾은 미국 민주사회주의자 협회(Democratic Socialists of America, 이하 DSA)의 (흥분으로 가득 찬) 2017년 총회에서도 다시 한 번 확연하게 드러났다. DSA 모임에서는 많은 결의안이 논의되었음에도 대외 정책에 대한 것은 단 하나뿐이었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배척(boycott)을 요구하는 결의안이었다. 시리아・아프가니스탄・이라크・예멘・북한・베네수엘라・우크라이나, 그리고 푸틴의 러시아에 관한 언급은 단 한 마디도 없었다. (그 이전 구(舊) DSA는 예측 가능한 대외 정책 노선을 채택했었는데, 예를 들면 예멘・소말리아・파키스탄에서 미국의 드론 공격에 반대했던 것이 대표적이다.) 아마도 2017년 총회에서는 침묵이 최선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에 대한 배척 이면에 있는 세계에 대한 비전은 아마 앞서 언급한 나라들 중 일부에 대해 낯선 입장을 만들어 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시점에선가 좌파는 우리 동료 시민들의 안전과 안녕에 대한 헌신과 충돌하지 않는 국제주의적 대외 정책 틀을 구성해야만 한다. 이스라엘과 미국에 대한 적대로 해석되는 반제국주의라는 그 흔한 구호는 분명 현실에서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 민주사회주의자 협회(DSA)
민주사회주의자, 사회민주주의자, 노동의 가치를 중시하는 회원들로 구성된 단체. DSA는 1973년 미국 사회당의 우경화에 따른 당내 분열 속에 결성된 이래 미국에서 가장 큰 민주사회주의자 단체로 남아 있다. 협회 결성 초기에는 약 6천 명의 회원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2016년 트럼프 당선 이후 그 수가 5만 명까지 늘었고, 회원들의 중위(median) 연령도 2013년 68세에서 2017년 33세로 낮아졌다. DSA 회원들 수십 명이 주 단위에서 선출직 대표로 활동하고 있으며, 2018년 선거에서는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Alexandria Ocasio-Cortez)와 라시다 털리브(Rashida Tlaib)가 연방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
포용의 정치
지난 수십 년간 좌파의 국내 정치는 급격하게 파편화되어 왔다. 여기에는 그동안 배제되었던 (여성을 제외한 소수집단) 사람들을 미국 사회로 통합하고 그들이 완전한 시민권을 누릴 수 있도록 도우려는 노력도 크게 작용했다. 그런 활동들은 ‘흑인은 아름답다’와 같이 특수주의적인 주장을 제기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래서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주변화되고 비하되어 온 정체성들을 회복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정당하다. 그것은 정치적 지지를 받을 만한 일이다. 특수주의가 평등에 기여할 때, 그것에 대해 우려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정체성 정치’라는 용어는 부적절한 명칭이다. 왜냐하면 이 정치의 주창자들 중 절대 다수는 그런 집단들의 지위 강화(다른 모든 이들에 우선하는 나의 정체성)가 아니라 포용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국가 공동체 안에 들어가기를 원한다. 즉 다른 시민들과 동등한 지위를 가진 구성원으로서 애국적인 미국 시민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좌파는 언제나 배제당한 소수자들을 지지해야 한다. 비록 우리가 평등한 시민권 그 자체를 넘어서는 목표를 가질 때조차 (그리고 우리들 중 일부가 애국심에 대해 우려할 때조차도) 그렇다.
‘흑인은 아름답다’(Black is beautiful) 운동
1960년대 미국에서 시작된 운동으로 흑인의 외모에 대한 인종차별적 편견을 없애는 것을 목표로 했다. 흑인의 피부, 얼굴, 머리카락이 ‘못생겼다’는 차별적 관념에 대항하며 그들의 인종적 특징을 없애려 하는 행위(예를 들어, 직모가 되기 위해 곱슬머리를 펴려 하거나 피부를 표백하려는 시도 등)를 근절하고자 노력했다.
<사진 설명> 1997년 '백만 여성 행진(The Million Woman March)'에서 'Black is beautiful' 구호를 외치고 있는 모습. 사진출처_yourblackworld.net
미국이라는 정치 공동체를 하나의 밀폐된 공간이라고 생각해 보자. 이 곳에 처음 자리 잡은 이들은 백인이자 앵글로 색슨 계통의 개신교도인 사람들이다. 수 세기에 걸쳐 이 공간은 침입을 받아왔다. 처음에는 아일랜드계 가톨릭교도들이 들어왔고, 그 다음으로는 슬라브와 이탈리아계 가톨릭교도들, 유대인들, 여성들, 산업 노동자들, 흑인들, 히스패닉 사람들, 아시아인들, 동성애자들, 무슬림들 순으로 들어왔는데, 이 목록은 꽤나 길다. 이것이 우리가 아는 미국 이야기이고, 그것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 첫 번째 이유는 많은 침입자들이 아직 평등한 시민권을 얻는 데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새로운 배제에 대응해 더 많은 침입이 있을 것이며 그럴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배제는 오늘날의 미국 정치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사안이다.
우선 우리가 가장 잘 아는 지난 4~50년간의 정치투쟁에 대한 논의부터 시작해 보자. 흑인 민권 운동, 페미니즘, 성 소수자 권리 등, 포용을 위한 운동은 일정 부분 성공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미국에서 인종과 성에 대한 여러 가지 편견들은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고, 지난 몇 달 동안 우리는 무슬림과 유대인에 대한 혐오와 같은 새로운 편견의 출현과 오래된 편견의 재출현을 목격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오늘날 미국에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흑인 중산층이 존재하고,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여성들이 전문직, 기업 경영, 정치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그 어느 때보다 많은 미국인들이 동성혼을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비록 불완전하더라도 이는 분명한 승리이고, 여기에는 수많은 정치적 노고들이 녹아들어 있다.
그렇다면 미국은 왜 그 모든 정치 활동에도 불구하고 과거보다 더 평등한 사회를 이루지 못했는가? 우리는 일련의 부분적 승리를 거두기도 했지만, 불평등이 전반적으로 증가하는 것 또한 지켜봐 왔다. 한 가지 흔한 설명은, 흑인 민족주의와 급진적 페미니즘 같은 소수집단 지위 강화 운동이 다수의 미국인들(주로 백인이며 종교적으로 독실한 사람들)을 소외시켰고 이로 인해 우익 세력이 승리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의 설명 요인이 된다 하더라도 나는 그것이 작은 요인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평등한 시민권을 위해 싸워 온 흑인과 여성의 절대 다수는 마틴 루터 킹 목사가 그랬듯이 미국 사회의 내부자적 가치와 함께 미국 역사를 통해 신성시되어 온 독립 선언문과 헌법 같은 문서에 호소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노골적인 인종차별과 성 차별이 더 나은 설명으로 보인다. 즉 다수의 미국인들은 이와 같은 투쟁이 시작되기 전에도 포용에 적대적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과 연결된 정치가 소외를 불러일으킨 사례들은 존재하고, 이에 대해 논의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흑인의 권리 강화는 법 집행에 있어 급진적 변화를 요구하는데, 여기에는 경찰의 인종차별 금지와 대규모 투옥 정책의 종식, 인종 비율을 반영한 경찰 인력, 군대화에 대한 거부, 경찰의 훈련 및 총기 사용 규율의 향상 등이 포함된다. 이것들은 매우 중요한 목표지만, 그렇다고 “모든 경찰은 개자식이다”(ACAB)의 정치를 필요로 하거나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경찰을 ‘돼지’라 부르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이는 경찰을 보호자로 생각하는 많은 미국인을 등 돌리게 만드는 확실한 방법이며, 실제로 그런 경우가 적지 않다.
대규모 투옥 정책
그 대상이 대체로 흑인인 문제를 말한다. 전체적으로 흑인은 백인보다 투옥될 확률이 6배 정도 높고, 히스패닉보다 3배 정도 높다. 그 원인으로는 경찰과 사법부의 판단에 인종적 편견이 존재하고, 과거의 범죄 기록이 현재의 판결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 등이 있다.
경찰의 군대화
경찰 인력이 군사 장비 및 전략을 사용하는 것. 여기에 경찰의 자의적이고 인종차별적인 판단이 더해져 함부로 무기를 사용할 경우 무고한 흑인이 총에 맞아 죽거나 다칠 가능성이 크게 증가한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그런 사건이 몇 차례 발생했고, 그럴 때마다 흑인들은 차별 반대 시위를 펼쳤다.
ACAB 운동
“모든 경찰은 개자식이다.”(All Cops Are Bastards)라는 말의 첫 글자를 딴 것으로, 경찰의 인종차별 같은 비윤리적 행동에 항의하기 위해 그래피티, 문신 및 기타 이미지에 들어가는 슬로건 내지 캐치프레이즈로 활용된다. 알파벳 순서에 따라 ‘1312’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와 유사하게 성 평등을 위한 투쟁도 가부장적 가족 구조에 대한 비판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많은 미국의 아버지들을 포함해 미국인 다수가 지지할 만한 비판이다. 하지만 그 비판을 가족 그 자체로 확대해 ‘정상적인’ 가족도 강압적일 뿐이라고 하면, 우리는 대다수 아버지들과 어머니들의 지지를 잃어버릴 것이다. 가족과 경찰 모두에서 핵심적인 질문은 우리 정치를 효과적으로 만들려고 하는가, 아니면 표출적으로 만들려고 하는가에 있다. 우리는 다수를 만들기 위해 일하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의 주변화를 즐기고 있는가?
가장 주변화된 사람들 중 일부는 식자층으로 논문이나 칼럼을 쓰고 이론을 만드느라 바쁜 지식인들이다. 그들의 이론은 극히 분파적이며, 실용적인 정치의 관점에서 볼 때 놀랄 만큼 어리석은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그들은 한 가지 중요한 논점을 보여 준다. 그것은 미국에서 일상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불의와 부패를 감안할 때, 배제된 사람들과 외부자들 모두가 실제로 미국 사회에 동참하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다수의 전투적 운동가들은 이와 같은 동참을 일종의 타협, 즉 절대 수용하지 말아야 할 것을 수용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배제된 집단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그들의 의식을 고양하며, 역사를 다시 쓰고, ‘정체성’을 강화하는 그 모든 것을 타협을 넘어서는 대안으로 받아들인다. 사실 의식의 고양과 그 외 나머지 것들은 포용의 정치와 자연스럽게 함께 가며 포용에 성공한 후에도 계속된다. 우리는 포용을, 보다 큰 희망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불의와 부패에 대항하는 투쟁의 또 다른 시작으로 봐야 한다. 지금까지 배제되어 온 사람들에게 가져다주는 즉각적인 혜택과 그들에게 열어주는 정치적 기회를 고려할 때, 미국 사회에 동참하는 것은 그에 따른 타협을 감수하고도 남을 만큼 가치 있는 일이다.
포용은 다른 많은 가치들에 선행하는 가치이다. 오래된 금언 중에 “밥부터 먹이고 옳고 그름을 따지라.”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민주주의에서는 먼저 옳고 그름을 공적으로 따지며 조직하고 투표할 수 있도록 한 다음에야, 재분배 이슈를 다루며 모두가 밥을 챙겨 먹게 할 수 있다. 혹은 시민적 권리의 쟁취 그 자체가 정치권력의 재분배이며, 이를 통해 더 많은 재분배를 이뤄 낼 수 있다고 말하는 편이 좋겠다. 간단히 말해, 평등한 시민권은 사회주의나 다른 모든 평등에 선행한다는 것이다.
<다음글에서 계속>
옮긴이: 홍수민과 정치발전소 번역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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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발전소 번역 모임
정치발전소 활동을 통해 만난 사람들이 꾸린 정치 텍스트 번역 모임. ‘정치는 어떻게 해야 잘하는 걸까?’라는 의문을 갖고, 다른 나라 정치는 어떤지 알아보기 위해 청년 네 명이 모였다. 주로 해외 기사, 칼럼, 인터뷰, 소논문을 읽고 번역한다. 해외 사례를 살펴보고 우리와 비교해 봄으로써, 한국 정치를 좀 더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개선해 나갈 방법을 찾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해외의 좋은 글들을 읽으며 영감을 얻는 것은 즐거운 일이지만, 좋은 번역을 향한 길은 여전히 멀고 험하다. 노고를 통해 나온 번역물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닿아, 우리 정치를 되돌아보고 나아갈 방법을 찾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