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Review] 낭만과 비참 사이를 방랑하는 우리 시대의 노마드들

조건준(산업노동정책연구소 기획실장)
2021-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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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드랜드 - 낭만과 비참 사이를 방랑하는 우리 시대의 노마드들


- 조건준 산업노동정책연구소 기획실장


죽는 것보다 오래 사는 것이 더 두렵다고? 이게 뭔 헛소린가. 악착같이 오래 살려는 것이 인간 아닌가. 노마드랜드(Normadland)는 낭만과 자유가 넘칠 것 같은데 아니었나? 지금도 멋진 여행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선망을 가득담아 '노마드'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나.


금융위기로 거품이 폭싹 꺼지고 찾아온 대침체, 부동산을 사들여 안락한 생활을 꿈꾸던 미국 사람들이 쫄딱 망해 찾은 곳이 바로 '노마드랜드'다. 2016년 기준으로 900만명 가까운 65세 이상의 미국인들이 고용되어 일한다. 10년 전보다 60퍼센트 늘어난 수치란다. '은퇴의 종말'과 함께 노동으로부터 졸업하는 황혼은 사라졌다. 늙은 몸으로 죽을 때까지 일하는 고통이 죽음의 공포보다 강력해진 곳에 노마드랜드가 있다.


대학교수, 기업의 회계사, 전세계를 누비던 소프트웨어사 임원 등 대박을 누리던 사람도 쪽박 차고 바퀴달린 집에서 산다. 이동하는 차량을 집으로 삼은 사람들에겐 길과 주차하는 모든 곳이 사는 마을이다. 저자 제시카 부르더는 집 잃고 자산도 없이 내몰린 그들과 3년을 함께하며 노마드의 삶을 세밀하게 드러낸다.



노마드들은 독립기념일 폭죽 판매, 크리스마스트리 판매, 시즌 선물 판매, 사냥꾼 검문소, 놀이동산에서 기구를 돌리는 일, 캠핑장 청소와 관리, 사탕무 수확, 아마동물원(Amazoo)으로 부르는 아마존에서 "사악한 소비자 제국의 온라인 악의 축을 위해 창고에서 일하는 공범"이 되어 "똥같은 물건들"의 목록을 작성하고 분류한다. 


노마드들은 교육 없이 바로 사용 가능하고, 필요할 때 반짝 쓰며, 필요한 때와 장소에 나타나고, 노조를 만들 만큼 오래 머물지 않으며, 취약계층 고용으로 국가의 돈을 받아 사용하기 편리한 완벽한 본보기다. 디지털 자본주의는 서로를 드러내려는 인스타그램과 유튜버의 광고와 데이타로 돈벌이를 하는 '주목 경제'를 탄생시켰다. 동시에 쉽고 싸게 모아서 쓰다 버리는 '그림자 경제'를 확대한다. 


노마드랜드를 늙은이의 예비지옥으로 단정하지 말자. '워캠퍼'를 비롯해 다양하게 불리는 이들에게 나름의 문화, '서브컬쳐'가 있다. 노마드는 일상의 접촉과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를 만들어 정보를 교류한다. 금광으로 몰려들던 '골드러시'에 빗대어 '올드러시'라고 불리는 대규모 회합과 축제를 연다.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얻는 GTG(Get together)를 위해서 RTR(타이어 떠돌이들의 랑데뷰-The Rubber Tramp Rendezvous)를 통해 하나의 '부족'이 된다.


저자가 3년간 함께한 린다는 60대 여성이다. 혼자 생활하는 노인 여성 6분의 1 이상이 빈곤선 이하 생활을 하며 남성에 비해 생애임금도 적고 누적 저축액도 적지만 수명은 더 긴 여성들도 노마드로 살아간다. 일상의 혐오와 폭력에 시달리다가 갑자기 총에 맞아 죽을 수도 있는 유색인종이 노마드로 살아가는 것은 위험하다. 노마드의 압도적 다수는 백인이다. 캠핑을 즐길 수 있는 것도 백인의 특권이다. 노마드가 될 수 없는 유색의 노인들은 어디로 갔을까.


저자는 “격차가 아닌 차라리 단절”이라고 한다. 상위 1퍼센트가 하위 50퍼센트의 81배를 벌고 약 1억 1700만 명에 이르는 미국 성인들의 소득은 1970년대 수준 그대로다. 부자 동네와 가난한 동네로 나뉘던 도시는 더 나아갔다. 도시에서 밀려난 자들로 외계를 만들었다. 코로나19로 재난기를 거치면서 전 세계는 ‘양극화’를 넘어 '외계화'로 가고 있지 않나.


"신경을 갉아 먹는 불안정한 존재"들이 어떻게 미치지 않고 살까. 인간은 '정신승리'로 비참을 견딘다. 그들은 자신을 '홈리스'가 아닌 '하우스리스'라고 한다. 가정을 잃은 것과 집을 잃은 것 사이에 심오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정주민이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스스로를 "망가지고 타락해가는 사회질서에서 빠져나온 양심있는 이의 제기자"라고 한다. 그러나 미국은 홈리스를 범죄로 여기는 법률을 제정하고 있단다. 떠나버린 노마드 친구를 애도하며 "마침내 빚진 돈 없이 영원히 살 집을 찾았"다며 애도하는 그 영원한 집이 피할 수 없는 유일한 미래다.


이 책을 읽으며 미국 젊은 여성들이 쓴 책들이 떠올랐다. 「하틀랜드」와 「커밍업쇼트」다. 미국에 50개 주가 있다지만 내겐 두 개의 땅이 보인다. 하나의 땅은 탐욕적 월스트리드와 기술권력이 탄생하는 실리콘밸리와 같은 축복받은 장소들이고 다른 하나의 땅은 어른이 되지 못한 젊은이의 하틀랜드와 죽음에 이르지 못한 노년들의 노마드랜드다. 젊으냐 늙으냐를 넘어선 두 땅은 서로 다른 계급의 땅이다. 미국의 얘기로만 치부한다면 난독증이다. 존버정신은 청년만이 아니라 죽지 못한 노년의 세대정신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양심있는 이의 제기자"로 머물면 될까. 결말쯤에 이르면 시답잖은 노인정책 때려치우고 ‘빛나는 황혼당’을 만들고 화염병이라도 들어야 할 것만 같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