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아벨리의 편지 Book Review] 인간적 한계와 삶의 가능성 - 소설 <누운 배>

김성희 정치발전소 이사
2020-07-07
조회수 960


인간적 한계와 삶의 가능성 - 소설 <누운 배> 



이 소설 <누운 배>는 나이 50이 넘은 사람이 읽기에 적당한 소설이 아니다.


인간은 신이 아니고 삶이란 현실에서 부여받는 인간적 한계 속에서 번민하게 된다. 이것을 머리가 아니라 직관으로 이해하기 시작할 무렵이라면, 이 소설은 별로 흥미 있는 읽을거리가 못 될지도 모르겠다.


소설 속 화자인 문 대리가 회사를 떠날 즈음, 그의 업무를 인수인계 받았던 ‘지혜로운’ 하 고문의 말(“사는 거 별거 아이데이. 지금이야 막막하고 답답하겠지만, 별별 생각 다 들겠지만 살아보면, 살고 보면 참 별거 아이라. 사는 기……연연할 것 없는 기라. 지나고 나면 좋은 것만, 좋았던 것만 남는데이.”)처럼 짧은 인생이지만 인간적 한계에 절망하거나 뒤척이기에 삶이 보여 주는 세계는 훨씬 더 풍부하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한 사람의 인간이 평생을 통해 이룰 수 있는 일이 기실 별 대단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두려움에 몸살을 앓을 무렵에 삶은 내게 다른 차원을 열어 준다는 경험은 이 소설을 읽으며 수시로 부딪치게 되는 기시감의 근원이었다.


                                                                     


혹자는 이 소설을 재난 소설이라고 하고 혹자는 기업 소설이라고 했다. 솔직히 그런 기대감 또는 편견을 갖고 소설을 읽기 시작했지만, 소설을 다 덮고 난 후 내 느낌은 달랐다. 내게 이 소설은 민주화 이후 강한 자의식을 갖고 성장한 세대(그들의 나이가 지금 몇 살이든 관계없이)의 보편적 경험과 감수성을 담고 있는 당대 인간에 대한 소설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나는 소설 속 화자와 비슷한 경험을 했다. 나는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거대한 기업 조직이 스르르 허물어지는 과정을 내 직장 생활의 초창기에 직접 경험했다. 나의 첫 직장은 대마불사이고 무너지기엔 너무나 완벽한 사회경제적 기반, 규율, 체계를 갖고 있는 대기업이었다. 간혹 진보적인 언론이나 비평가들이 거대 기업 붕괴의 ‘위험성’을 경고하기는 했어도, 당시에는 아무도 그 생명력을 의심하지 않는 조직이었다.


“대기업(조직)은 다 갖춰 놓고 시스템만으로 돌아가는 것 같지만, 웃기는 소리지. 일해 본 사람은 알아. 같은 원칙, 같은 규정이라도 해석하는 사람마다 다 다른 거고 빠져 나가려면 빠져나갈 구석이 다 있는 거야. 당연하지, 사람이 만들었으니까”(296쪽).


                                                   


한순간이었다. 하나의 큰 조직이, 그리고 평생을 자부심을 갖고 근무했던 회사가, 신뢰나 위계, 규율이 붕괴되고, 조직적으로 해체되는 데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속에서 오랫동안 조직이라는 외피 속에 감춰져 있던 수많은 인간의 군상이 인상적으로 드러났다. 당시에는 그런 모습 하나하나가 불편했고, 배신감도 들었으며, 안타깝고 아팠다.


시간이 오래 지난 후 가끔, 함께 조직 생활을 시작했던 친구들을 만났다. ‘회사’라는 하나의 경험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만나면 과거 이야기가 중심이 되기 마련이다. 지금보다 젊었을 때는 술기운이 오르면, 상사나 당시 그룹 리더들에 대한 비난이나 뒷담화가 꽤나 거칠게 오가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삶이 깊어진 만큼 사람에 대한 이해도 깊어지는 것 같다.


참 좋은 리얼리즘 소설을 한 권 잘 읽었다. 선박에 대한 전문용어와 조직 생활을 꼼꼼하게 기록한 대목이 독서를 지체시켰지만, 다 읽고 난 무렵엔 나의 20~30대를 다시 한 번 훑어본 느낌이 들었다. 

반복하지만, 이 소설은 분명 50대를 넘은 사람이 읽기에는 적당한 소설이 아닐지 모른다.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50대를 넘은 사람이 읽게 된다면, 삶의 가능주의를 좀 더 뚜렷하게 이해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차갑고 때로는 고달픈 현실을 해부하듯 그린 소설이 주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이다. <끝>.



* 이 글은 <마키아벨리의 편지> 7월의 책 '이혁진 작가'의 <누운 배>를 읽고 김성희 국회 보좌관(이은주 의원실)이 보내온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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