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Review] 도둑맞은 자부심, 도둑맞은 정치 - 정채연 정치발전소 이사(임상심리사)

공식 관리자
2025-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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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맞은 자부심, 도둑맞은 정치>

- 극우는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을 훔쳤을까 -



- 정채연 정치발전소 이사(임상심리사)


  이변이라 여겨졌던 극우의 등장은 이제 주변부가 아닌 합법적인 정치 세력이자 전세계의 흐름이 되었다. 트럼프는 재집권에 성공했고, 유럽에서도 극우정당들이 무시하지 못할 정도의 의석을 차지하고 있다. 게다가 이들은 모두 ‘선거’라는 민주적 절차를 거쳐 선출되었다. 즉,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과거에는 물론이거니와 현재에도 분명 ‘극단적’이라거나 ‘거칠다’ ‘과격하다’고 평가받는 생각, 행동들이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었나? 『도둑맞은 자부심』은 미국의 보수적인 시골지역인 켄터키주 북동부 파이크빌 주민들의 삶과 정치적 태도를 르포 형식으로 담아내며, 그 배경을 성실하게 풀어내고 있다. 저자는 우리가 막연히 ’우파‘라고 뭉뚱그려왔던 이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감정을 느끼는 사람인지를 보여준다.


  저자에 따르면 ’자부심‘은 곧 ’쓸모있음‘이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발생한 실업, 약물, 범죄 등으로 인해 이 사회나, 하다못해 가까운 관계에서조차 스스로가 쓸모있다고 느끼지 못하게 된 사람들이 늘어났다. 게다가 이 사람들은 자기 문제는 자신이 해결하는 게 곧 ’책임‘이자 ’남자다움‘이라 여긴다. 그렇기에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거나 받는 게 곧 치욕이 되는 ’자부심의 역설‘에 갇혀버렸다.


  이들은 스스로 누구보다 성실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이 겪는 실패도 자신의 탓이라 여기며 감내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내가 ‘백인’이기에 특권층이라고 말한다. 나는 어디에도 하소연할 수 없다. 그러던 와중, 비록 거칠고 무례하지만 ‘착한 불량배’인 트럼프가 나를 레드넥, 인종주의자라 비난하던 ‘나쁜 불량배‘인 민주당 놈들에게 한 방 먹여줬다. 뿐만 아니라 이젠 대통령이 되어서 내 자리를 돌려놓겠다고, 내가 다시 쓸모있는 사람이 될 거라고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이들은 트럼프에게 위안을 얻었고, 그렇기에 몇 가지 결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지지할 이유가 충분했다.


  물론 저자는 단순히 우파들을 온정적인 시각에서만 바라보고 합리화해주자고 주장하지 않는다. 저자는 다양한 사람들의 입을 빌려, 그간 우리가 정치에서 보조적 요인으로만 다루거나 경시해왔던 ’자부심’이나 ‘수치심’같은 감정이 사실은 시민들의 지지를 설명하는 핵심 요인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사람들이 놓인 빈곤과 불평등이라는 환경 뿐 아니라, 기저에 있는 이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않는다면 해결책을 모색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접근 방식은 극우 세력이 태동하는 단계에 놓여 있는 한국에서 특히 의미가 있다.



  트럼프가 ‘선거를 도둑맞았다‘는 주장을 널리 퍼트리며 다시 권력을 잡은 반면, 한국은 대통령을 끌어내리고 극우 세력이 주류로 성장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는 한국의 선거 제도가 특별히 더 철저하거나, 사회가 더 민주주의적이기 때문이라 보기 어렵다. 오히려 미국은 대륙이자 다인종 국가라는 약점을 갖고 있었기에 극우가 낯모를 이들에 대한 불안과 적대감을 조직하고 쉽게 결집할 수 있었다. 그에 반해 한국은 아직까지는 나눌 것이 성별 정도인데다, 다함께 좁고 인구밀도가 높은 땅덩어리에 살고 있다. 바로 곁에 있는 자국민을 성별이 다르다는 것만으로 적으로 돌리라고 하면 결집할 수 있는 세력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한국은 많이 해체되었다 하더라도 유럽이나 미국에 비해 사회적 규범이 강하게 남아 있는 나라다. 과거에는 남들과 다른 목소리를 억제해왔던 이 규범이, 의도치 않게 극우 세력의 출현도 억제하는 효과를 내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앞으로는 한국도 점점 더 많은 이주민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 한국은 미국과 달리 고향이라고 할 만한 곳을 갖기가 어렵고 관계망도 지속적이지 못해,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심리적 기반이 더욱 쉽게 흔들릴 가능성이 높다. 수십년 째 이어지고 있는 OECD 자살률 1위의 배경에는 이 세상에 내 자리가 없다는, 즉 ‘나는 쓸모없다’는 감각이 깔려 있다. 향후 다인종 사회가 되었을 때, 혹은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과 함께 살게 되었을 때 우리는 트럼프보다 더한 극우 세력을 맞이할 위험이 높다.


  그렇기에 그 전 단계에 놓여 있는 한국에서 오히려 이 책의 분석이 더욱 유효하게 작동한다. 우리는 시민들이 이 사회에서 자부심을 되찾을 수 있는 사회정책을 적극적으로 강구하고 만들어내야 한다. 일부러 상대를 모욕하고, 여론에게 비판받은 후 다시금 본인을 피해자화해서 공격의 정당성을 가져가려는 극우 정치인의 전략을 예민하게 캐치하고 대응해야한다. 그들에게 반격의 명분을 주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이 과정에서 진보진영의 자성이 요구된다. 세상을 더 좋게 만들기 위해,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그 상황마다 이유가 있었고 필요한 일이었지만 동시에 상대에게 공격할 빌미를 주었다는 성찰이 필요하다. 백래시를 막고자 했던 말과 행동들이 사실은 더 많은 백래시를 불러일으켰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 다음을 준비하기 어렵다.


“복지 혜택이 줄고 물가는 오르고 대량 해고까지 일어난다면 그 다음 역사의 향방은 민주당 지지자들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어요. 비아냥조로 모든 걸 트럼프 지지자들 잘못으로 돌리면 거센 역풍이 불수도 있습니다. 만약 좌파가 ‘당신네 트럼프 지지자들이 자초한 일이잖아, 하하’ ‘우리가 뭐랬냐?’ ‘누굴 탓하겠어?’ ‘당해도 싸지 뭐’ 이런식으로 꾸짖기 시작하면 이 지역 사람들은 상처를 주는 우파보다 비아냥대는 좌파 쪽에 더 분노할 겁니다. 그리고 트럼프는 제 갈 길을 가겠죠.”


  한 인터뷰이의 말처럼 극우 세력이 이미 뚜벅뚜벅 제 갈 길을 가고 있는 이 시대에, 생생하고 의미있는 경고로서 <도둑맞은 자부심>을 많은 이들에게 권하고 싶다. 사실과 논리로 설득하면 될 것이라는 낙관은 이미 오래 전에 힘을 잃었다. 우리는 사회 변화의 동력이자 갈등의 해결책으로서 시민들의 감정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해야한다. 이를 외면한 정치는 공허하고, 정치가 없는 감정동원은 위험하다. 우리는 이미 그 결과를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