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위험한가>
수치심을 견디고 찾아야 할 것
박유진, <애증의 정치클럽> 에디터
<애증의 정치클럽>의 다른 구성원은 미국에서 자랐습니다. 저는 한국 토박이고요. 가끔 그에게 미국 생활은 어떤지 전해 들을 때마다 한국과 미국의 차이에 놀라곤 합니다. 사소하게는 분리수거의 유무부터 크게는 투표 방식까지 너무나 다른 두 사회입니다. 저희 둘 사이 의견차가 발생하면 "대표님이 미국인이셔서 그렇다"고 농담을 던질 정도인데요.
정신의학자 제임스 길리건이 <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위험한가> 에서 제시된 미국 정치의 모습은 놀랍게도 한국과 흡사합니다. 길리건은 폭력 문제를 연구하던 중 1900년부터 2007년까지의 미국 자살률과 살인률이 집권 정당에 따라 극적으로 오르내렸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민주당 집권기에는 두 수치가 함께 줄었고, 공화당 집권기에는 늘었습니다. 한국을 살아가는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러한 통계의 유사성보다는, 통계적 사실에서 길리건이 끌어낸 분석이 한국사회의 모습과 얼마나 비슷한지입니다.
길리건은 자살과 살인은 절망이 폭력으로 표출되는 다른 방식이라고 설명합니다. 나 자신을 향한 폭력, 또는 타인을 향한 폭력으로 전환되는 절망은 단순히 '부정적인 감정'이면 충족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절망은 '수치심'이라는 매우 구체적인 형식을 갖고 있습니다. 길리건은 수치심은 특히 남에게 휘두르는 폭력을 유발한다고 말합니다. 나의 수치심을 남에게 떠넘기기 위해서입니다. 수치심은 내가 타인보다 나은 존재임을 증명해야 누그러지고, 이에 대립하는 명예는 독립적인 존재로서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아야만 충족됩니다. 이러한 윤리관을 길리건은 '수치심의 윤리'라 정의합니다.
수치심의 윤리는 한국 사회의 멘탈리티에도 매끄럽게 들어맞습니다. 최근 몇 년간 우리 사회의 키워드가 된 능력주의가 그렇습니다. 능력은 오직 개인의 노력과 자질을 통해 성취된다고 여겨지는 세계관에서, 능력은 곧 윤리적인 것이 됩니다. 능력에는 명예와 존경이라는 미덕이 따라오고, 능력이 없다는 건 불명예, 즉 수치가 됩니다. 능력이 없어서 수치심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능력주의의 연장선상에서, 개인이 수치심을 느끼게 되는 대표적인 일은 실업입니다. 길리건은 실업률이 자살률 및 살인율을 높이는 핵심 요인이라고 분석합니다. 그리고 실업률을 높이는 배경은 불평등입니다. 소수의 상류층을 위한 정책은 필연적으로 실업률을 높입니다.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선 노동자의 '몸값'을 낮춰 언제든 대체할 수 있는 자원으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상류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보수정치는 이 구조에 호응하고자 약자들 사이의 갈등을 증폭시킵니다. 불평등을 증가시키는 정책에 그 피해자들이 찬성하게 하려면, 상대적으로 더욱 가까이에 있는 갈등에 집중하게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는 이 전략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가 인종과 범죄입니다. 한국에서도 유사한 현상이 관찰됩니다. 중국동포와 이슬람교를 다루는 방식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한국에서 범죄보다 더 강력한 키워드는 '무임승차'가 아닐까요. 이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것이 최근 국민의힘에서 나온 '시럽급여' 논란입니다. 노동정책 관련 공청회에서 여성, 청년, 계약직 실업급여 수급자를 비하하고 중년 남성 노동자와 비교하는 발언이 나와 논란이 됐습니다. 약자들 사이의 피가해 관계에 주목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진짜 약자'와 '무늬만 약자'를 구별하는 모습입니다. 길리건의 논리를 적용한다면, 이 전략은 약자에게 '약자답지 못함'에 대한 수치심을 주입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는 자신의 분석을 고려할 때 투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며 책을 마무리합니다. '결국 민주당만 정치해야 한다는 거냐'며 너무 편향적인 결론이 아닌가 비판해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서 보수의 가치는 전혀 없다는 건가?'라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사회의 절반을 차지하는 이 세력과 결코 갈라설 수 없기에 반드시 해야 할 고민이기도 합니다.
길리건은 어디까지나 정신의학자이고, 정책을 전문적으로 다뤄온 사람이 아니라는 한계도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를 명확히 인지하고 어디까지나 의학자의 입장을 견지했기에, 그의 분석에서 또 다른 의미를 도출해볼 수도 있겠습니다. 바로 보수가 역설할 수 있는 그들의 가치입니다.
길리건은 보수정치의 폐해를 지적하는 데 책의 절반 이상을 할애하고, 그들을 모순덩어리의 무능한 집단으로 평가하면서도 이 모든 후과가 의식적으로 도출된 것은 아닐 수 있다고 서술합니다. 보수정당은 사람들이 더 많이 죽기를 바랐을 것이고 이를 이용해 자신들의 이익을 챙긴 '악마'라고 손가락질하지 않습니다. 그는 의학자로서, 담배를 많이 피우면 폐암에 걸릴 가능성이 올라가듯 인과관계가 있을 것이 유력한 어떤 현상을 기술할 뿐입니다.
수치심의 윤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극단으로 나아간 수치심의 윤리가 문제적일 뿐, 적당한 수치심은 오히려 자기발전의 계기가 될 수 있다고도 말합니다. 문제는 수치심이 불러오는 폭력성을 바람직하게 배출할 수 있는 영역이 부족하다는 겁니다. 현대 사회에서 보수의 가치는 이 장에서 정교화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끝>.
<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위험한가>
수치심을 견디고 찾아야 할 것
박유진, <애증의 정치클럽> 에디터
<애증의 정치클럽>의 다른 구성원은 미국에서 자랐습니다. 저는 한국 토박이고요. 가끔 그에게 미국 생활은 어떤지 전해 들을 때마다 한국과 미국의 차이에 놀라곤 합니다. 사소하게는 분리수거의 유무부터 크게는 투표 방식까지 너무나 다른 두 사회입니다. 저희 둘 사이 의견차가 발생하면 "대표님이 미국인이셔서 그렇다"고 농담을 던질 정도인데요.
정신의학자 제임스 길리건이 <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위험한가> 에서 제시된 미국 정치의 모습은 놀랍게도 한국과 흡사합니다. 길리건은 폭력 문제를 연구하던 중 1900년부터 2007년까지의 미국 자살률과 살인률이 집권 정당에 따라 극적으로 오르내렸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민주당 집권기에는 두 수치가 함께 줄었고, 공화당 집권기에는 늘었습니다. 한국을 살아가는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러한 통계의 유사성보다는, 통계적 사실에서 길리건이 끌어낸 분석이 한국사회의 모습과 얼마나 비슷한지입니다.
길리건은 자살과 살인은 절망이 폭력으로 표출되는 다른 방식이라고 설명합니다. 나 자신을 향한 폭력, 또는 타인을 향한 폭력으로 전환되는 절망은 단순히 '부정적인 감정'이면 충족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절망은 '수치심'이라는 매우 구체적인 형식을 갖고 있습니다. 길리건은 수치심은 특히 남에게 휘두르는 폭력을 유발한다고 말합니다. 나의 수치심을 남에게 떠넘기기 위해서입니다. 수치심은 내가 타인보다 나은 존재임을 증명해야 누그러지고, 이에 대립하는 명예는 독립적인 존재로서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아야만 충족됩니다. 이러한 윤리관을 길리건은 '수치심의 윤리'라 정의합니다.
수치심의 윤리는 한국 사회의 멘탈리티에도 매끄럽게 들어맞습니다. 최근 몇 년간 우리 사회의 키워드가 된 능력주의가 그렇습니다. 능력은 오직 개인의 노력과 자질을 통해 성취된다고 여겨지는 세계관에서, 능력은 곧 윤리적인 것이 됩니다. 능력에는 명예와 존경이라는 미덕이 따라오고, 능력이 없다는 건 불명예, 즉 수치가 됩니다. 능력이 없어서 수치심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능력주의의 연장선상에서, 개인이 수치심을 느끼게 되는 대표적인 일은 실업입니다. 길리건은 실업률이 자살률 및 살인율을 높이는 핵심 요인이라고 분석합니다. 그리고 실업률을 높이는 배경은 불평등입니다. 소수의 상류층을 위한 정책은 필연적으로 실업률을 높입니다.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선 노동자의 '몸값'을 낮춰 언제든 대체할 수 있는 자원으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상류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보수정치는 이 구조에 호응하고자 약자들 사이의 갈등을 증폭시킵니다. 불평등을 증가시키는 정책에 그 피해자들이 찬성하게 하려면, 상대적으로 더욱 가까이에 있는 갈등에 집중하게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는 이 전략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가 인종과 범죄입니다. 한국에서도 유사한 현상이 관찰됩니다. 중국동포와 이슬람교를 다루는 방식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한국에서 범죄보다 더 강력한 키워드는 '무임승차'가 아닐까요. 이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것이 최근 국민의힘에서 나온 '시럽급여' 논란입니다. 노동정책 관련 공청회에서 여성, 청년, 계약직 실업급여 수급자를 비하하고 중년 남성 노동자와 비교하는 발언이 나와 논란이 됐습니다. 약자들 사이의 피가해 관계에 주목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진짜 약자'와 '무늬만 약자'를 구별하는 모습입니다. 길리건의 논리를 적용한다면, 이 전략은 약자에게 '약자답지 못함'에 대한 수치심을 주입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는 자신의 분석을 고려할 때 투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며 책을 마무리합니다. '결국 민주당만 정치해야 한다는 거냐'며 너무 편향적인 결론이 아닌가 비판해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서 보수의 가치는 전혀 없다는 건가?'라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사회의 절반을 차지하는 이 세력과 결코 갈라설 수 없기에 반드시 해야 할 고민이기도 합니다.
길리건은 어디까지나 정신의학자이고, 정책을 전문적으로 다뤄온 사람이 아니라는 한계도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를 명확히 인지하고 어디까지나 의학자의 입장을 견지했기에, 그의 분석에서 또 다른 의미를 도출해볼 수도 있겠습니다. 바로 보수가 역설할 수 있는 그들의 가치입니다.
길리건은 보수정치의 폐해를 지적하는 데 책의 절반 이상을 할애하고, 그들을 모순덩어리의 무능한 집단으로 평가하면서도 이 모든 후과가 의식적으로 도출된 것은 아닐 수 있다고 서술합니다. 보수정당은 사람들이 더 많이 죽기를 바랐을 것이고 이를 이용해 자신들의 이익을 챙긴 '악마'라고 손가락질하지 않습니다. 그는 의학자로서, 담배를 많이 피우면 폐암에 걸릴 가능성이 올라가듯 인과관계가 있을 것이 유력한 어떤 현상을 기술할 뿐입니다.
수치심의 윤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극단으로 나아간 수치심의 윤리가 문제적일 뿐, 적당한 수치심은 오히려 자기발전의 계기가 될 수 있다고도 말합니다. 문제는 수치심이 불러오는 폭력성을 바람직하게 배출할 수 있는 영역이 부족하다는 겁니다. 현대 사회에서 보수의 가치는 이 장에서 정교화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