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엽의 도쿄일기] 도쿄의 서점들 ①

김진엽(연구자)
2021-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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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엽의 도쿄일기] 도쿄의 서점들①


 - 김진엽 전 정치발전소 사무국장

 

도쿄에서 인상적이었던 것 중 하나는 서점이 많다는 것이다. 내가 사는 동네에도 서점이 여럿 있다. 걸어서 5~10분 거리에 나름 구색을 갖춘 소형 서점이 두 곳, 중고서점도 한 곳이 있다. 또 작가 다자이 오사무(太宰治) 전문 서점도 있다. 동네를 벗어나 전철 역으로 나가면 서점들은 더욱 많아진다. 전철 역사 안에 서점이 둘이나 있고, 역 지근거리에는 두 층 규모의 대형서점이 있으며, 그 외에도 여기저기에서 중소형 서점과 중고서점들이 눈에 띈다. 내가 사는 이곳 미타카시(三鷹市)는 도쿄 도심에서는 조금 떨어진 전형적인 베드타운 중 하나 때문에 아마 도쿄의 다른 주거지역들도 비슷한 모습이지 않을까 싶다.

 

곳곳에 많은 서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점에는 늘 책을 고르는 사람들이 있다. 조그마한 동네서점이나 중고서점도 웬만하면 두 세 사람은 책 구경을 하고 있다. 호기심이 생겨 시간대를 바꿔가며 서점을 들러 봤는데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전철 역 근처의 큰 서점은 항상 사람들로 붐빈다. 전철 속에서는 스마트폰을 하는 사람들만큼이나 커버가 씌워진 책을 조심스레 읽는 사람들 역시 많다. 책을 사서 읽는 수요층이 기본적으로 많아 보인다.

 

 

<미타카시(三鷹市)에 있는 작가 다자이 오사무 전문 서점 <카페 포스포렛센스(カフェフォスフォレッセンス)>. 자그마한 서점이지만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 뿐 아니라 그의 작품에 대한 연구서, 생애에 대한 전기 등을 함께 진열해 놓고 있다. 다자이 오사무의 얼굴을 새긴 라떼도 함께 판매하고 있다.>

 

 

이곳의 사람들이 책을 즐겨 읽을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아마 여러 대답이 가능하겠지만, 가장 쉽게 꼽아볼 수 있는 이유는 그만큼 다양하고 재밌는 주제를 다루는 책들이 공급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 출판 문화의 대표적 특징 중 하나로 알려진 문고본 책이 대표적이다. 어느 서점을 가더라도 각 출판사별 문고본(文庫本) 시리즈가 매대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문고본 시리즈는 때로는 일본의 근대라는 거대한 질문을 다루기도 하고, 철도의 역사 같은 조금 더 작은 주제를 다루기도 하며, 영어 학습법 같은 실용적 주제를 다루기도 한다. 다양한 질문을 담은 문고본 시리즈 속에서 독자는 자신이 평소에 궁금증을 안고 있던 질문을 다룬 책을 고르거나, 혹은 유독 흥미가 가는 질문이 담긴 책을 부담 없이 고를 수 있다. 물론 책이 작고 얇다고 얕볼 수 없다. 출판사에 의해 잘 선별된 저자들은 짧은 분량임에도 그 속에 잘 간추려진 알맹이들을 녹여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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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 꽂혀 있는 책들을 둘러 보다 보면, 어떻게 이렇게 다양한 주제가 다뤄질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생기기도 한다. 다른 분야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앞으로 공부하고자 하는 정치학 분야에 대해서는 몇 가지 추측이라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정치학의 연구 대상이 되는 시기가 길다는 것을 하나의 이유로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예를 들면, 일본의 민주화(Democratization)는 언제 이뤄졌다고 볼 수 있을까? 가장 대표적인 대답으로 2차 대전 직후 미군의 점령과 개혁을 통해 이뤄졌다고 보는 접근이 있을 수 있다. 미국은 그들의 점령을 통해, 언론을 자유화하고, 군국주의적 교육을 철폐하였으며, 농지개혁, 재벌개혁, 노동조합을 육성하는 등의 사회경제적 개혁도 단행하였다. 또 천황을 국가의 상징으로서만 기능하게 만들었으며, 헌법도 민주적 헌법으로 바꿔 냈다. 일본은 미군의 점령과 개혁에 의해 비로소 정체(政體)가 바뀌었고 이를 지탱하는 사회경제적 기반 역시 크게 변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다시 몇 가지 질문을 안게 된다. 우선, 미국의 점령과 개혁에 의한 변화의 폭은 어느 정도인가? 예를 들면, 헌법의 내용은 무엇이 변하였으며, 천황의 역할은 무엇에서 무엇으로 변화된 것이며, 의회와 정당의 지위는 어떤 상태에서 어떤 상태로 변화한 것인가? 즉, 점령에 의한 변화 이전에 존재했던 근대 일본의 정치와 사회적 특징은 무엇이며, 그것은 점령에 의한 변화와 어떤 부분에서 얼마만큼 이질적이며,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조금 더 질문을 붙잡고 올라가다 보면, 미국의 점령 이전부터 존재했던 일본의 근대적 정치 체제의 몇 가지 구성 요소들은 애초에 누구에 의해, 무슨 이유로 받아 들여졌으며, 이들은 그것을 어떤 식으로 인식하고 있었는가 하는 점도 궁금해진다.

예를 들면, 우리에게도 익히 알려져 있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메이지 헌법을 만드는 과정에서 독일과 영국에서 긴 시간 유학을 하며 헌법 연구를 했다고 한다. 헌법을 제정하는 회의 중에는 책상 위에 항상 미국의 <페더럴리스트 페이퍼>를 올려놓고 참고하였고, 후배 정치인들에게는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를 읽어볼 것을 자주 권유했다고 한다.


우리에게 조금 덜 알려진, 메이지 정부의 외무대신을 역임했던 무츠 무네미츠(陸奥宗光)는 젊은 시절 자유민권운동에 몸을 담아 투옥까지 되었는데, 감옥에서 그는 제러미 밴담(Jeremy Bentham)과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등의 영국 자유주의 철학자들의 책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들의 저작에 크게 흥미를 느낀 무츠는 감옥에서도 번역 작업에 몰두하였고, 출소 후에는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가 공부했던 것은 영국 의회의 “운영 방식”이었다. 당시 무츠는 영국 평민원의 사무총장(Clerk of the House of Commons)이자 영국 의회 내 운영 규칙에 대해 다룬 책 <의회의 법, 특권, 절차 및 관습(A Treatise upon the Law, Privileges, Proceedings and Usage of Parliament)>을 저술한 어스킨 메이(Erskine May)로부터 강의를 들으며 수십 권의 노트 필기를 남겼다고 한다.


이들은 그 당시에는 매우 이질적 문명으로 여겨졌을 헌법과 의회, 나아가서 정당에 대해서 어떤 인식을 갖고 있었고,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려 했을까? 또 그들의 인식 속에서 그것은 어떤 변용을 거쳤을까? 그리고 그들이 처한 당시 일본의 국내 정치적 상황들(예를 들면, 메이지 유신 시기 자신들이 활용했던 천황이라는 상징의 존재, 그리고 군부라는 현실적 힘의 존재)은 어떤 영향을 미쳤고, 어떤 변용을 만들어내게 되었을까?

 

나는 이러한 질문들을 다루는 연구서들은 소재 자체가 갖는 특징으로 인해 흥미로운 긴장감을 담아내게 된다고 생각한다. 전후(戰後) 개혁이 준 단절과 전전(戰前) 사회에서 연원하는 연속성 사이에서 나름의 규정을 가하는 것은 꽤나 어려운 일일 것이다, 또 헌법, 의회, 정당과 같은 정치적 제도들이 어떤 이질성을 갖고 있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받아 들여질 수 있었으며, 그 과정에서 무엇이 변용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과정, 그리고 이를 다시 당시 세계사적으로 나타났던 타국에서의 변화들과 비교하며 의미를 찾는 과정 역시 흥미로운 소재가 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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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연구의 대상이 되는 시기가 아무리 길고 소재가 다양하더라도 이것을 잘 엮어내지 못하면 재미있는 이야기는 탄생할 수 없다. 그러한 점에서 일본의 두터운 독서층을 만들어 내는 원인으로 출판사라는 공급자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도쿄에는 진보쵸(神保町)라는 헌책방 거리가 있다. 헌책방이라기보다는 고서점이라는 표현이 더 알맞다고 여겨질만큼 다양한 분야의 오래된 책들을 구비한 중고서점들로 이루어진 거리이다. 이곳에서 책을 구경하다 보면 몇 가지 특징들이 눈에 들어온다.

 

우선, 시리즈로 구성되어 출판된 책들이 꽤나 오래 전부터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정치사(政治史), 외교사(外交史)처럼 어떤 한 분야의 연구 대상을 역사로서 정리한 책들이 많다. 마지막으로 전문 분야를 쉽게 풀어낸 입문용 책들이 많다. 나는 이러한 특징들이 출판사의 역할에서 기인하는 것들이 아닌가 싶었다.

 

시리즈로 구성되는 책들은 하나의 분야, 혹은 하나의 큰 문제의식을, 다양한 관점에서 접근하는 복수의 학자가 참여하게 된다. 한 시리즈가 어떤 문제의식을 관통하게 할 것인가, 또 여기에 맞춰 적절한 연구자를 어떻게 조직하고 배치할 것인가는 출판사의 기획과 역량에 의해 성과가 갈릴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여러 학자가 참여해 긴 시대를 나눠서 다뤄내는 정치사나 외교사도 마찬가지이다. 또 대중들을 대상으로 하는 입문용 서적의 경우, 서술의 난이도와 내용의 범위를 적절하게 조절하는 출판사의 역할은 더더욱 중요해진다. 서점에 진열된 책들은 출판사의 존재감을 짙게 풍기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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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역할을 잘 해내며 권위를 인정 받는 출판사들은 대부분 긴 역사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유히카쿠(有斐閣)는 1877년 서점으로 개업하여 1950년부터 출판업에 진출하며 설립되었고, 그 외에도 츄오코론(中央公論)은 1914년, 코우단샤(講談社)는 1909년 잡지 발간에서부터 시작해 출판업에 진출했다고 한다. 하나의 출판사가 좋은 글을 엮어 사회에 내보내는 공공재의 역할을 하기까지는 꽤나 긴 시간을 필요로 하는 듯 하다.


한국에서도 익히 알려진 일본의 대표적 출판사인 이와나미 쇼텐(岩波書店) 역시 긴 역사를 갖고 있다. 1913년 진보쵸에서 고서점으로 처음 문을 열었고, 1914년 출판업에 진출했다. 특히 이와나미 쇼텐이 출판업에 진출하며 처음 간행한 작품이 나츠메 소세키(夏目礎石)의 『마음(心)』이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개인적인 소감이지만, 나는 나츠메 소세키의 작품을 읽다보면 그가 ‘개인’이라는 이질적인 개념을 어떻게 일본인들에게 번역해 낼 것인가를 고민했던 것처럼 느껴진다. 소세키의 소설 『그 후(それから)』에서는 사회의 지배적 관습과 가문의 지시를 물리치고 자신의 감정을 쫓아 ‘개인적’ 판단을 내린 주인공이 온 세상이 갑작스레 붉게 보인다고 서술하며 소설이 마무리된다. 또 소설 『마음』에서는 가장 가까운 배우자마저 공감할 수 없는 개인의 비밀과 이로 인해 발생하는 단절된 내면을 묘사하고, 개인으로서 겪는 단절된 고독은 그를 결국 자살로까지 이끌 정도로 깊은 것임을 묘사해낸다. 그가 그러한 단절된 개인의 모습을 투영했던 인물들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하나는 서양에 대한 동경을 노골적으로 표현한다는 점이고, 또 한 가지는 서재에 많은 책을 갖고 있는 ‘책 읽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나는 소세키가 ‘개인’이라는 개념을 그 당시 일본에 존재하는 개념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이질적인 것으로서 받아들이고, 또 한편으로는 그러한 ‘개인적 내면’이 책을 읽는 데에서 만들어진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여튼 1914년 출판업에 진출한 이와나미 쇼텐은 이후 일본 최대의 출판사로 성장하였고, 소세키가 번역해 낸 ‘개인’도 이와나미 쇼텐이 성장한 만큼 더 많은 사람들의 손에서 읽히게 되었다. 100년 전부터 소세키의 소설을 읽기 시작한 일본인들도 그의 소설과 함께 소세키적인 ‘개인’이 되었을까?

 


개업 초기 진보쵸에 있던 이와나미 쇼텐(1918년 사진). 이와나미 쇼텐의 간판 글씨는 나츠메 소세키가 써주었다고 한다. (출처 : 이와나미 쇼텐 100주년 기념 홈페이지)

 

일본 근대 정치사 학자인 미타니 타이이치로(三谷太一郎)는 그의 책 『일본의 근대는 무엇이었나? 日本の近代とは何であったか』(이와나미쇼텐, 2017)를 통해, 일본에서 의회와 정당 같은 정치적인 현상들이 만들어지기 전에, 이것을 가능하게 만든 비정치적인 기반으로써 문예 공동체가 형성되는 과정을 추적한다. 메이지 유신 이전부터 문학작품에 대해 연구하고 토론하는 공동체가 각 지역에 만들어져 있었고, 또 이러한 공동체가 다시 전국적 규모로 연결되어 있었다는 점을 지목한다. 책을 중심으로 모여서 책에 대해 이야기 하는 개인들, 그리고 이러한 책을 만들어 공급하는 서점과 출판사들은 어쩌면 의회와 정당과 같은 미지(未知)의 현상들이 일본에 뿌리내릴 수 있게 한 가장 기초적인 토양이 된 것이 아닐까?

 

말과 글을 통해 움직이는 민주주의가 좋은 글이 만들어지는 토양 속에서 더 안정적으로 뿌리 내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좋은 출판사와 좋은 서점은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민주주의의 토양을 가꾸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키치죠지(吉祥寺)의 한 서점에서 고심하며 책을 고르고 있는 한 일본인을 보며 문득 들었다. <계속>


*[김진엽의 도쿄일기]는 현재 일본 도쿄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는 김진엽 전 정치발전소 사무국장이 도쿄에서 바라보는 일본 민주주의와 정치, 그리고 감상 등을 중심으로 연재 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