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아벨리의 편지 Book Review] 힘든 시대를 위한 좋은 경제학

강양구 TBS 과학전문기자
2020-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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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 시대를 위한 좋은 경제학  - 아비지트 배너지, 에스테르 뒤플로



강양구ⅠTBS 과학전문기자



『힘든 시대를 위한 좋은 경제학󰡕(Good Economics for Hard Times)(생각의힘)은 아비지트 배네르지(배너지)와 에스테르 뒤플로 두 경제학자가 쓴 책이다. 배너지와 뒤플로는 작년(2019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부부다. 특히 1972년생 뒤플로는 두 번째 여성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이자 케네스 애로(1972년, 만 51세)가 가지고 있었던 최연소 타이틀을 갈아 치웠다.

배너지와 뒤플로는 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빈곤 문제를 극복하는 데 어떤 사회정책이 효과가 있는지를 연구해 온 개발 경제학자다. 특히 과학이나 의학 분야의 ‘무작위 대조 시험’(Randomized Controlled Trials)을 사회정책의 효과를 따지는 데 활용해서 주목을 받았다. 이념과 모델에 기반을 뒀던 경제학이 ‘실험’ 연구로 검증받아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무작위 대조 시험은 보통 의학 분야에서 약이나 치료법의 효과를 확인할 때 쓰는 방법이다. 신약을 개발하고 나서, 어떤 환자에게는 신약을 주고 다른 환자에게는 위약을 줘서 그 효과를 확인하는 것이다. 배너지와 뒤플로는 바로 이런 무작위 대조 시험을 지역 현장에서 적용해 실험했다.

‘살충제 처리를 한 모기장을 무료로 나눠주는 정책이 과연 말라리아 퇴치에 도움이 될까?’ 이런 질문에 어떤 경제학자는 말라리아 예방은커녕 모기장이 고기 잡는 그물로 쓰일 것이라고 비웃었다. 반면에 배네르지와 뒤플로는 현장 실험을 통해 실제로 모기장을 나눠준 지역과 다른 지역의 말라리아 발병률을 비교해서 모기장의 효과를 입증했다.


배너지와 뒤플로가 책의 뒷부분에서 옹호하는 기본소득의 효과 역시 마찬가지다. 두 사람은 현장 실험을 활용해 기본소득의 효과를 여러 증거를 통해 살펴보고 있다. 여러 쟁점 가운데 하나만 볼까. 기본소득이 마뜩찮은 사람은 이렇게 따져 묻는다. ‘기본소득을 주면 사람들이 일하지 않을 거야!’ 배너지는 실제로 그런지 실험을 해보기로 했다.

우선 아프리카 가나의 가난한 여성에게 가방을 만들게 한 후 이를 비싼 값에 사줬다. 그러고 나서 한 집단의 여성에게는 염소도 키우게 했다. 염소를 키워서 나오는 소득이 있으니 굳이 가방을 많이 만드느라 더 고생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실험 결과는 상식 밖이었다. 염소를 키우게 한 여성이 가방도 더 많이 만들어 팔아 돈도 더 많이 벌었으며, 심지어 가방의 디자인이나 품질도 더 좋았다. 기본소득(염소)으로 생계 걱정을 덜자 추가 소득(가방)을 올리고자 더욱더 박차를 가했다.

가난한 나라에서나 통하는 이야기라고? 다른 증거도 있다. 미국의 체로키 원주민(인디언) 보호 구역은 카지노를 운영한 수익금으로 성인 원주민들에게 1인당 연간 4000달러(약 500만 원)를 나눠줬다(미국 원주민 가구의 1인당 소득은 2000년 기준 약 8000달러로 낮다). 이렇게 현금을 받은 원주민과 그렇지 않은 원주민을 비교해 보니, 일을 더 하고 덜 하는 데 차이가 없었다.


복지국가로 유명한 핀란드 정부는 2017년부터 2018년까지 실직자 2000명을 무작위로 선정해서 매월 560유로(약 75만 원)를 주고 나머지(17만3222명)와 비교했다. 그랬더니 기본소득을 받은 실직자는 복지 혜택(실업 급여 등)을 받은 다른 실직자와 비교했을 때, 삶의 만족도가 높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일하는 날도 늘었다.

최소한의 생계를 꾸릴 돈이 꼬박꼬박 들어오는데도 일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은 어떨까. 그 답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다. 먹고사는 걱정을 항상 하다 보면 미래를 준비하기 어렵다. 닥치는 대로 질 낮은 일자리에 목매다 포기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일단 먹고살 걱정을 덜면 자신이 하고 싶은 좀 더 나은 일자리를 찾아 좀 더 나은 미래를 준비할 수 있다.



두 사람의 경력을 염두에 둔다면, 『힘든 시대를 위한 좋은 경제학』의 독특한 위상을 알 수 있다. 두 사람은 경제학의 특정 계보에 얽매이지 않고서, 일종의 경계인의 시각으로 오늘날 전 세계가 안고 있는 정치・경제・사회・생태 문제를 일별하고, 동료 경제학자의 진단을 비판적으로 소개한다.

이것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는 차고 넘친다. 경제학에는 문외한이지만, 국내에서 ‘사회문제의 해결책으로서 경제학’을 말하는 상당수가 (좌우를 막론하고) ‘우물 안 개구리’처럼 수십 년간 똑같은 이야기를 되뇌는 모습을 보면서 답답했다. 지금은 전후의 1940~50년대도 아니고, 1970~80년대도 아니며, 세기말도 아니다. 더구나 한국은 유럽이나 미국이 아니다.

적어도 이 책을 읽고 나면, 지금 세계가 안고 있는 문제가 무엇이고, 그것이 어떻게 얽혀 있으며, 그동안 경제학자들이 이를 어떻게 분석하고 저마다 처방을 내놓으려 노력했는지를 알 수 있다. 경제학으로 좀 더 나은 사회를 만들려는 생각이 있다면 일단은 이 책에서 소개한 정도의 교양은 깔아놓고서 논의를 시작하면 좋겠다.

예를 들어, 레이건과 대처 시기에 특히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불평등이 심화되기 시작했다. 저자들은 토마 피케티와 이매뉴얼 사에즈 같은 경제학자의 (“뛰어난, 그리고 각고의 노력이 들어간”) 연구를 소개하면서 이 명백한 사실을 짚는다. 하지만 익숙하고 빤한 이야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깊이 있는 논의로 우리를 이끈다.


“이 거대한 역전이 레이건과 대처 시기에 일어났다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꼭 레이건과 대처가 원인이라고 가정할 만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의 당선은 ‘성장의 종말’이라는 두려운 전망에 대한 공포에 온통 지배되어 있었던 당대 정치의 한 징후였다. 그들이 졌더라도, 누구라도 선거에서 이긴 사람은 동일한 길을 갔을 가능성이 있다."

더 중요하게, 레이건과 대처의 정책이 불평등 증가의 주된 이유라는 평가 또한 따져 보지 않고 받아들여도 될 만큼 꼭 그렇게 명백한 것은 아니다. 이 시기에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에 대한 진단, 그리고 그 진단에서 나오는 정책적 함의는 경제학계에서 아직 명확한 결론 없이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주제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토마 피케티 같은 사람은 전적으로 당시의 정책 변화에 탓을 돌리지만 다른 경제학자는 대체로 기술 변화를 포함한 경제의 구조적인 전환을 더 강조한다.

이 질문에 답하기 어려운 이유는 당시가 세계경제에 중대한 전환이 있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1979년부터 중국이 시장 개혁에 돌입했고, 1984년에는 인도가 자유화 조치를 시작했다. 곧 이 두 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큰 시장의 대열에 합류했다. 이 시기에 전 세계의 GDP 대비 무역 비중은 50퍼센트나 늘었고, 이는 3장(무역의 고통)에서 논의했던 결과를 낳았다(지구화).

컴퓨터 기술의 도래도 이 시기의 특징적인 변화다. …… 기술 변화와 지구화가 미국과 영국에서 발생한 불평등 증가를 어느 정도까지 설명할 수 있을까? 그리고 두 나라의 정책, 특히 조세정책은 불평등 증가에 어느 정도 역할을 했을까?”(408~409쪽).

여기에 더해서 저자들은 미국과 영국이 주도한 ‘금융화’의 영향을 비중 있게 언급한다. 그러니까, 지난 1970년대 말부터 레이건과 대처가 주도하고 2008년 세계 금융 위기로 그 민낯을 드러낸 대반동을 이해하는 일조차 사실은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이모저모를 동시에 살펴야 하는 복잡한 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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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가치 있다고 보는 이유는 ‘좋은 경제학’이라는 제목의 표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저자들이 옹호하고자 하는 사회 경제 정책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의 식견과 (그들이 옹호하는) 경제학자의 성과를 열거하면서 불평등, 자동화, 국가와 시장의 역할 등에 대한 나름의 진단과 처방을 조심스럽게 내놓는다. (생태 위기에 대한 견해는 불만족스러웠다.)

저자들은 책을 마무리하면서 이렇게 당부한다. 사실 좋은 사상, 좋은 생각, 좋은 경제학, 좋은 과학, 좋은 책, 좋은 방송, 좋은 기사 등을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어야 할 당부다.


“나쁜 사상의 영향을 막기 위해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신중하게 살피고, ‘자명’해 보이는 것의 유혹에 저항하고, 기적의 약속을 의심하고, 실증 근거가 무엇인지 질문하고, 복잡성에 대한 인내심을 갖고, 우리가 무엇을 알고 있으며 무엇을 알 수 있는지를 솔직하게 인식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