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review] “아, 정말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회를 꿈꾸며"_ 정채연 / 임상심리사

공식 관리자
2023-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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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도사 사회>

 

“아, 정말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회를 꿈꾸며

정채연 / 임상심리사

 

정신과에서 일하다보면 ‘죽음’은 마치 친구처럼, 일상처럼 다뤄진다. 죽음을 꿈꾸는 이들에게 죽음은 두렵지도, 위협적이지도 않다. 이들에게 죽음은 고통을 끝낼 수 있는 방법이자 더 나은 내세에 대한 기대, 그리고 삶 속에서 자신이 유일하게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방안이기도 했다. 죽음을 꿈꾸는 이유는 모두 각양각색이었고 그 이유를 들으며 나는 그 열망이 현재의 삶으로 다시 향할 수 있기를 바라고, 도왔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순간순간 내가 실질적인 도움은 주지 못한 채 단순히 죽음을 지연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회의감이 들었다. 환자는 종종 뫼비우스의 띠처럼 좋아졌다 나빠졌다를 반복하며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 폭력과 차별, 고립과 빈곤에 시달리고 있기에, 지속되는 고통(삶)보다 한 순간의 고통(죽음)이 더 낫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의료진은 환자의 삶이 고통만은 아님을 함께 증명해나가고자 했지만, 이러한 증명은 당장 문 밖을 나서면 맞닥뜨리게 되는 냉혹한 현실 앞에서 곧잘 무의미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죽음을 꿈꾸는 이들이 아주, 아주 많았다.

 

그동안 죽음을 사회적으로 분석하려는 시도는 있어 왔으나 이렇게 죽음과 보건복지정책, 의료체계를 심도 있게 엮어낸 책은 많지 않았다. 그렇기에 <각자도사 사회>의 이야기는 매우 의미 있고, 또 반갑다. 자살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면서 결코 피할 수 없는 노화나 질병, 그로 인한 돌봄과 죽음이라는 흐름에 있어서 의료체계와의 연관성은 필수적이다. 저자는 실제 수행한 연구와 다양한 인터뷰를 통해 그간 국가가 어떻게 의료진과 환자, 보호자가 서로 신뢰할 수 없도록 만들었고 그 누구도 만족할 수 없는 제도를 지속해왔는지를 면밀히 살피고 있다.

 

또한 환자와 보호자, 의료진 사이에서만 다루어져왔던 각각의 ‘죽음들’을 세심하게 돌아보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사회적으로 구성된 ‘삶의 조건’과 죽음을 뒷받침하는 ‘돌봄’의 가치를 상기시킨다. 나아가 왜 모두가 각자 죽을 수밖에 없는지, 어떻게 ‘존엄한 죽음’이 ‘깔끔한 죽음’과 동의어가 되었는지 그 원인을 정치에서 찾고, 그런 상상력을 발휘하기를 촉구한다.

 

왜 정부 주도로 대대적으로 시행하는 ‘커뮤니티 케어(지역사회 돌봄)’ 정책에 대한 이해가 정부, 지자체, 의료 각 현장마다 모두 다른가? 왜 우리는 환자나 의료진, 심지어 국가조차 죽음에 있어서 가장 의존하고 있는 보호자(여성)의 돌봄은 논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가? 왜 우리는 존엄한 죽음(존엄사)이 존엄한 사회가 아닌 의료체계 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처럼 토론하고 있는가? 무엇보다, 존엄한 사회를 만들어내야 할 정치의 책임은 어디에 있는가?

 

현장에서의 불평등한 죽음은 정책과 의료체계의 혼란에서만 발생하지 않는다. 시대가 바뀌었고 사람들의 삶의 방식 역시 달라져, 인구증가가 곧 사회성장이라는 공식은 더 이상 성립하지 않는다. 정상가족 관념은 깨졌고 다양한 가족 형태가 일반화되고 있는지도 오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는 여전히 인간을 대하는 과거의 관점을 유지하며, 생산을 담당하고 노인을 부양해야하는 인구의 감소가 위기라고 이야기한다.

 

청년과 중장년들의 자살은 생산인구의 감소라는 측면에서 문제적인 반면, 다른 세대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은 노인자살률은 거의 화제가 되지 않아 왔다. 2021년 한국에서 만 65세 이상 노인 중 57.6%는 빈곤한 삶을 살고 있다. 그리고 노동능력이 없는 생산 불가 인구인 노인은 죽음마저도 이렇게 사회에서 소외된다. 인구의 감소가 위기가 아니라, 고루한 관점을 고수하는 정치가 위기인 것은 아닐까? 모두가 맞이해야하기에 평등하다고 여겼던 죽음이, 사실은 각자의 불평등한 삶에 따라 지극히 불평등하게 구성되고 있다는 게 진짜 위기가 아닌가?

 

인공지능 chatGPT가 화제가 되자 나는 <바이센테니얼 맨>이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인공지능로봇 앤드류는 자신이 인간임을 인정받기 위해 소송을 제기하고 끝내 ‘죽을 수 있게 됨’으로서 인간이라는 지위를 획득했다. 무엇이 인간을 결정하는지 진지하게 토론해야할 날이 정말로 머지 않았다. ‘죽음’은 인간 사회에서 점점 더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음에도 정치는 이를 따라잡기는커녕 과거에 머물러 있다.

 

오늘도 병원 대기실은 진료를 보고자 하는 이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붐비고, 진료는 바쁘게 돌아간다. 보호자의 손을 잡고 있는 아이들은 낯선 사람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고, 어른들은 초조하게 혹은 멍하니 자신의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리고 있다. 심리평가가 끝난 후 나는 그에게 ‘심적 고통을 완화하고 삶의 즐거움과 행복을 풍부하게 누릴 수 있도록 치료적 개입이 필요하다’고 기술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들이 삶을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는 세상을 정치가 만들어내야만 한다. 잘 죽기 위해 개인이 모든 것을 대비해야만 하는 세상, 아플 때의 돈도 마련해놓고, 좋은 의사를 인맥으로 두고, 자신을 돌보아줄 가족이나 친척들이 있어야만 하는 세상이 아니라 삶을 어떻게 끝맺을지 의료진을 비롯한 가까운 이와 함께 나누고, ‘아, 정말로 잘 살았다’는 뿌듯함을 느낄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내야만 한다.

 

그리고 언젠가, 지금의 삶에 너무나 만족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꿈꾼다는 이를 만나볼 수 있기를 바란다. 그 때야말로 우리는 진정으로 ‘존엄한 죽음’에 대해 함께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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