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review]정치를 옹호함, 진보주의자의 생각을 건드리는 유쾌한 해독제_정혜윤 국회미래연구원 부연구원

공식 관리자
2022-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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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주의자의 생각을 건드리는 유쾌한 해독제



정혜윤Ⅰ국회미래연구원 부연구원

 

1.

진보적인 사람일수록 정치에 관해 의견을 말할 때면, 발본적 변화 없이 희망이 없다거나 지금의 정치인이나 정당들에게 기대할 것이 없다며 냉소를 표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과연 우리가 정치를 말하는 이유가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조금이라도 낫게 만들고자 함일까, 아니면 선명한 원칙만 강조해 복잡한 대안과 과정은 생략하고 내 ‘올바름’에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함일까. 20세기를 대표하는 영국의 정치학자이자 영국노동당의 중요 자문위원이었던 버나드 크릭은 “정치는 불의하다”고 여기는 진보주의자에게 심층적이면서도 유쾌한 해독제를 제공한다.

 

2.

복잡한 현실에서 ‘금지’, ‘철폐’, ‘청산’, ‘쟁취’, ‘처벌’ 등 선명한 구호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은 주장하는 이도 모르지 않으리라. 그러나 이런 부류의 반(反)정치주의가 횡행할 수 있는 이유는 선명한 논법이 우리에게 다른 형태의 안온함을 제공해서다. 사실 정치가 당장 줄 수 있는 이익은 매우 평범할 뿐 아니라, 그조차 선거 승리 후 여러 타협 속에서 제한적으로만 가능할 뿐이다. 시시한 변화를 위해 복잡한 조정을 고민하느니 현실을 초월해 정치를 공격하고 “푸르고 상쾌한 대지 위에 완전히 새롭게 세워지는 천국”을 꿈꾸며 선명한 비판을 내세우는 편이 마음이 편할 수 있다.


가령 ‘노동시장 이중구조’나 ‘한국 사회의 불평등’ 문제에 대해 원칙을 강조하며, 적폐 집단을 설정해 기득권을 빼앗으면 된다는 주장은 문제를 선명하게 해준다. 특히 정치권력이 기득권을 혁파하지 못했다며 의지나 진정성의 문제로 환원하면 피아 식별은 분명하고 해결책도 간단하다. 물론 타파할 대상이 처음에는 재벌이나 대기업, 기획재정부였는데, 지불 능력이 약한 자영업자부터, 노동시장 이중구조에 기여하는 대기업-공공기관 노동자나 노동조합, 청년 채용을 가로막는 중고령 노동자까지 그 전선이 계속 확대되니 그것만으로도 문제는 점점 단순하지 않아진다. 특히 이분법적 주장은 노동시장, 산업구조 및 재정이나 예산에 대한 촘촘한 지식을 토대로 하지 않으니 다양한 이해관계자에게 설득력을 가지기 어렵다.


저자는 이런 부류의 정치를 ‘학생 정치’라 규정하며, “인민의 궁전을 짓고 싶다면서도 현실의 사람들이 살고 싶어 하는 집을 짓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신랄한 논평을 잊지 않는다. 크릭은 대안이 수많은 이들에게 수용되어 문제 해결을 위한 조정이 이루어지려면 추상적인 비전으로 사람들을 폄하하며 대안을 윽박질러 봐야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며, 유튜브를 즐기고 부동산 대출금에 허덕이며 비트코인 가격을 실시간으로 확인하는 현실의 사람들에게 설득력 있는 비전이 되어야 한다는 조언을 잊지 않는다.


3.

이 책은 이데올로기·민주주의·민족주의·기술과 같이 ‘정치 아닌 것’과 정치가 어떻게 구분되는지를 설명하는데, 한국 사회 많은 진보주의자의 사고 근간을 건드리는 요소들로 상당하다. 2장 이데올로기 부분은 마르크스주의나 사회주의에 대한 열정을 가졌던 이들에게, 3장 민주주의 부분은 민주주의를 신성시하며 다수 민중의 의지를 강조하는 이들에게, 4장 민족주의 부분은 남북 및 통일 문제를 중심으로 사고하는 이들에게, 5장 기술로부터 정치를 옹호하는 부분은 과학주의나 데이터를 중시하는 관점을 가진 이들에게 도전적인 서술로 가득하다. 하지만 열린 마음으로 크릭의 논의를 따라가면 우리는 분명 정치의 가능성과 현실적 변화를 위한 고민을 새롭게 하도록 도와준다.

 

4.

영국노동당을 비롯해 해외 좌파 정당의 역사가 한국에 아예 알려지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치사에서 그들의 행로만이 아니라, 이들이 정치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노동자와 시민을 대표하는 유럽 사민주의자의 중요 축이 될 수 있었는지를 이론적이면서도 유쾌한 서술로 알려주는 경우는 드물다.


저자는 영국노동당을 하나의 정당으로 묶어 낸 것은 정치적 행동이자 정치의 경이로움이지 단일한 신조가 아니었으며 지적인 사회주의는 부분에 불과했다고 밝히고 있다. 선거 전략이나 신조를 넘어서 진보 정치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함께 읽으며,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을 찾으려는 풍성한 논의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