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review]존중받지 못하는 자들을 위한 정치학_박선민 국회보좌관

공식 관리자
2022-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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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중받지 못하는 자들을 위한 정치학


박선민 국회보좌관


뉴스를 보다 보면 화가 나다 어느 순간 굉장히 슬퍼질 때가 있다. 저 사람은 왜 범죄자가 되었을까. 저 사람은 왜 죽음을 택했을까. 왜 그랬을까. 약자와 약자가 싸우고, 약자가 약자를 괴롭히고, 약자가 더 약한 사람의 존엄성을 짓밟는 상황은 슬프다 못해 참혹하다. 총과 칼로 서로를 죽이는 전쟁은 끝났지만 우리는 지금 새로운 전쟁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참담한 상황을 막기 위해 존재하는 게 정치라면, 인간의 동기와 행동을 이해하려는 노력도 필요하다.


이 책에서는 인간을 움직이는 강력한 동기로 ‘우월 욕망’과 ‘대등 욕망’을 꼽는다. 우월 욕망은 남들보다 더 훌륭한 존재인 자신의 우월함을 인정받으려는 욕망이다. 귀족과 엘리트들의 우월 욕망은 사회질서 유지에 막대한 역할을 했다. 문제는, 소수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열등한 존재로 여겨졌다는 점이다.


대등 욕망은 남들과 같은 동등함을 인정받으려는 욕망이다. 과거에는 우월 욕망이 사회를 이끌었다면 근대 민주주의에 이르러서는 대등 욕망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사회 구성원 모두는 평등하다. 이것이 근대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다. 정치 시스템 역시 개인의 평등한 권리를 폭넓게 인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시민들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실질적 행위자로 자리매김된 것이다. 또한 한 사람 한 사람이 개인으로서 갖는 존엄성 역시 평등하게 인정받게 되었다. 공식적 권리의 확장과 함께 실질적 자존감도 확보할 수 있었다.


여기서 등장하는 게 ‘정체성’이다. 나의 시민적 권리는 확대되었는데, 나의 존엄성과 자존감은 그에 못 미친다면? 대등 욕망이 꿈틀거린다. 정체성의 기본 토대는 내적 자아와 외부 세계를 구분하는 자각이다. 사람들은 내부에 숨겨진 자신의 진정한 모습과 외부 세계가 불화할 때 ‘과연 나는 누구인가?’를 질문하게 된다. 이 질문은 단순히 자신이 누구인지 알기 위한 것이 아니다. 스스로 내적 자아를 받아들임과 동시에 공적으로도 인정받아야 물음표는 해소된다. 정체성이 정치적 요구로 발전한 것이 ‘정체성 정치’다. 정체성 정치를 이끄는 힘은 소외되고 배제된 사람들이 사회에서 평등한 존재로 인정받으려는 욕구다.


정체성 정치는 구체적 개인과 집단이 겪는 부당함에 주목한다. 이런 노력은 불평등을 개선했고, 그들이 더 공정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또한 제도와 정책만이 아니라 사회 문화와 사람들의 행동 양식에도 긍정적 영향을 끼쳤다. 사람들이 잘못이라 인식하지 못했던 행동에 대해 돌아보게 만들었다. 미투 운동이 없었다면 성희롱, 성폭력에 대한 인식 변화는 훨씬 더 오래 걸렸을 것이다. 정체성 정치는 자신에 대한 자각과 평등에 대한 의식이 높아진 시대에 정치가 해야 할 마땅한 역할을 했고, 그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진보 정당(좌파)이 정체성 정치에 공을 들인 것도 이런 맥락에서 자연스럽다고 본다. 그렇다면 왜 정체성 정치를 두고 논란이 발생하는 것일까?


우리에게는 익숙하지 않지만 서구에서는 민족주의와 이슬람주의를 정체성 정치로 간주한다. 저자는 이들의 문제로 사람들이 느끼는 외로움과 혼란의 이유를 설명해 주는 이데올로기를 제공하고 개인의 불행한 상황을 외부 집단 탓으로 돌리는 피해 의식을 퍼트린다는 점을 꼽는다. 또 모든 인간이 아니라 특정한 민족 또는 종교 집단의 구성원들에 대한 인정을 외친다는 점도 문제다. 즉, ‘제한된’ 정체성 인정 요구라고 할 수 있다. 시작은 대등 욕망이지만 이는 쉽게 우월 욕망으로 이어진다. 최악의 경우 자신들을 인정해 달라는 요구가 타자에 대한 폭력으로 전개된다. 정체성 정치의 암울한 미래다.


주로 좌파의 영역이던 정체성 정치는 계급과 결합한 것이 아니라 “잘못 배달되어” 민족주의와 종교 집단의 도구가 되었다. 게다가 이제는 우파도 정체성 정치의 언어를 사용한다. 저자는 대표적으로 ‘내가 속한 집단이 피해자다. 우리 집단이 처한 상황과 우리가 겪는 고통은 사회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 책임 있는 사회 및 정치 구조를 깨부숴야 한다’는 표현을 꼽는다. 좌우 어느 집단이 써도 자연스럽다. 이와 같은 도구로서의 정체성 정치는 긍정적 영향력보다 부정적 효과가 크다. 소수자의 권리 획득을 위한 목적보다 ‘분노의 정치’를 위해 활용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분노를 자극하는 건 정치적 동원에 매우 효과적이다. 정책과 비전을 제시해 시민들을 설득하는 것보다 혐오에 편승해 표를 얻는 게 훨씬 쉽다. 경제적 고통이 큰가? 모욕당한다는 감정이 결합되는 순간 훨씬 더 큰 파급력을 갖는다. 분노가 정치를 지배하게 되면 관용과 타협은 설 자리를 잃는다. 좌파와 우파 모두 점점 더 작은 집단의 정체성을 보호하는 정책을 추구하게 된다. 결국 소통의 가능성은 차단되고, 사회는 점점 더 작고 이기적인 집단들로 분열된다.


저자는 진보 세력에게 더 강한 경고를 보낸다. 물론, 진보 정당에서 일하고 있는 내 입장에서 더 크게 들리는 목소리일 수도 있다. 정치 영역에서 일하는 누구든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정체성 정치를 ‘무능함의 대용물’로 삼지 말라는 것이다.


지난 30년간 사회경제적 불평등은 심화되었다. 전통적으로 진보 정당은 불평등 개선을 요구해 왔고, 사회 안전망 확대라는 매우 명확한 현실적 해법도 가지고 있었다. 지지 기반은 노동자 계층, 경제적으로 착취당하는 이들이었다. 우리 사회의 가장 커다란 다수 집단이기도 하다. 진보 정당은 이들을 중심으로 결속을 강화하고, 불평등 심화에 대해 더 진지하게 고민하고 효과적 대책을 차근차근 만들어 더 많은 이들을 설득했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노력을 기울이기는커녕, 좁디좁은 영역만 들여다보고 있다는 것이다. ‘좁은 영역’의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자신들의 무능력과 게으름, 안일함을 눈가림하기 위해 소외된 작은 집단을 활용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한국의 진보 정당에게 참으로 뼈아픈 지적이 아닐 수 없다.


나아가 정체성 정치가 지닌 고유의 문제도 있다. 바로 민주주의 유지에 필수적인 이성적 토론을 위협할 수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정체성에 대한 집착이 깊은 숙고를 통한 토론의 필요성과 충돌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정체성 정치는 ‘정치적 올바름’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특히 좌파 정체성 정치의 특징은 특정 정체성만 인정하고 다른 정체성을 무시하거나 폄하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 이에 대한 거부감이 우파 세력을 결집시키는 주요 동력이 됐다고 주장한다. 자, 이제 서로를 위협적으로 보는 정체성 집단이 무럭무럭 성장할 토양이 갖춰졌다. 정체성 정치는 특성상 반대급부의 정체성 정치 출현을 막지 못한다. 한 집단의 대등 욕구가 다른 집단의 대등 욕구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소외되었던 집단이 전면에 나서게 되면 다른 집단은 자신들의 지위가 격하된다고 느낀다. 분노와 반발은 양측 모두를 점점 더 좁은 정체성으로 향하게 한다.


가장 큰 문제는, 정체성 인정 요구는 대개 협상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당신이 나를 인정하거나 인정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뿐이다. 타협은 없다. 저자는 분노의 기저에는 종종 경제적 원인이 깔려 있지만, 정체성을 둘러싼 싸움은 바로 그 경제적 문제를 구체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정책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들곤 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따라서 정체성 집단을 중심으로 사회가 움직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미 정체성은 현대인들에게 깊숙이 들어와 있다. 자신과 사회를 바라보는 방식이기도 하다. 게다가 사회의 다양성이 훨씬 더 강해졌다. 정체성 정치에서 벗어날 길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엉킨 실타래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 저자는 ‘국민 정체성’에서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민주주의가 효과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들 간의 합의 수준이 높아야 한다. 다양한 이해관계와 갈등은 숙고와 토론을 통해서 평화롭게 관리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시민들은 때때로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결과도 받아들여야 한다. 관용과 상호 공감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지지하는 정당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른 시민들이라도 같은 정치 공동체의 일원이라고 느껴야 한다. 이것이 국민 정체성이다.


다시 정체성 정치 이야기로 돌아가자. 앞서 말했듯이 우리는 정체성이나 정체성 정치에서 벗어날 수 없다(실은 벗어나는 게 바람직한 것도 아니다). 대신 우리는 좀 더 넓고 통합적인 정체성 정치를 할 수 있다. 민주주의 기능을 더 확실하게 증진시킬 수 있다.


저자는 먼저 해야 할 노력으로 ‘각 집단의 정체성 주장을 가속화한 특정한 학대와 부당행위들을 저지할 것’을 꼽는다. 예컨대 직장과 학교, 가정에서 발생하는 성폭력 문제에 대해 당장 해결해야 할 시급한 문제가 아니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정체성 정치를 비판하는 사람이라도 말이다. 부당함과 불공정은 해결해야 한다. 그리고 그 요구는 더 커져야 한다. 작아질수록 타협의 여지도 좁아지기 때문이다. 정당들은 개별 집단들이 신뢰할 수 있는 거시적 의제를 개발해야 한다. 작은 집단을 더 큰 집단으로 통합하여 큼직하고 거대한 갈등으로 만들어야 한다. 나아가 정체성이 입헌주의, 법치주의 평등 같은 중요하고 본질적인 개념과 연결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정당들이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이다. 정체성은 분열로 가는 도구가 될 수 있지만 통합으로 향하는 강력한 동력이 될 수도 있다. 역시 정체성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언제나 그렇듯, 문제는 정치다.


나는 늘 더할 수 없이 절망적으로 보이는 정치에서도 희망을 꿈꾼다. 더 나은 세상에 대한 희망이 없다면 정치를 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저자 역시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충분히 상상해 볼 수 있다’고 말한다. 그가 생각하는 더 나은 세상은, 다양성이 증가하는 사회 현실을 고려하되, 그 다양성 속에서 공동의 목표를 추구하고 자유민주주의를 더욱 굳건하게 만들 비전을 제시하는 세상이라고 한다. 나에게 묻는다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존엄성이 평등하게 지켜지는 세상이며, 이는 결국 우리 모두에게 더 나은 세상이 될 것이라고 하겠다. 민주주의의 가치는 이 과정에서 증명될 것이다.


덧붙여,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말󰡕에서 트럼프를 언급했지만 그가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는 거의 짐작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 책은 트럼프가 당선됐기 때문에 쓴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저자가 책을 덮기 직전 마지막 문장에서 썼듯 포퓰리스트 정치를 치료하는 해법서인 이 책은, 말하자면 트럼프가 준 고마운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