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Review] 젠더갈등 속 공백, “남성 문제” - 소년과 남자들에 대하여 / 리처드 리브스

공식 관리자
2025-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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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Review]

 

 젠더갈등 속 공백, “남성 문제”  

소년과 남자들에 대하여 - 오늘날 남성은 왜 뒤쳐지는가? / 리처드 리브스 / 민음사


- 정채연 정치발전소 이사 / 임상심리사




불과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찻잔 속 태풍처럼 여겨졌던 ‘젠더갈등’은 이제 한국사회의 주요한 균열로 자리매김했다. 많은 이들의 노력과 헌신 덕에 각종 성평등 정책과 지원체계는 꾸준히 확장되었음에도, 최근 2030 세대에서는 젠더갈등을 이념이나 빈부만큼 심각한 사회갈등이라 인식하며 상호 적대는 점점 더 극단화되고 있다. 왜 이런 간극이 발생하는가? 우리는 어디에서 해법을 찾아야하는가?

 

리처드 리브스의 『소년과 남자들에 대하여』는 이 질문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그리고 여성 문제 중심의 젠더갈등에서 “남성 문제”라는 공백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기에 매우 도전적이고 흥미롭다. 저자는 성평등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며, 여성의 권리 신장을 훼손하지 않고도 남성이 처한 위기를 이해하고 지원할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오히려 성평등을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지금까지 충분히 다루어지지 않았던, 남성들의 삶에서 벌어진 균열을 분석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여러 통계를 통해 오늘날 남성의 위기가 개인의 성격이나 태도 문제가 아닌, 사회구조적 변화 속에서 형성된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교육 영역에서는 남녀 간 뇌 발달 궤적의 차이로 인해 남성의 학업 격차가 계속 벌어지고 있다. 경제적으로는 산업 구조가 변화하면서 여성의 중위임금은 상승한 반면, 남성은 변화한 노동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일자리에 직접적 충격을 크게 받았다. 문화적으로는 '가족을 부양하는 가장'이라는 전통적 남성성이 해체되었지만, 이를 대체할 새로운 남성성은 제시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구조적 변동의 결과는 매우 치명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남성들은 여성에 비해 훨씬 더 빈번하게 약물중독, 음주, 자살 등 '절망의 형태'로 죽음을 맞는다. 한국에서는 2024년 사망원인통계에서 처음으로 40대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이 되었다. 세부적으로 들여다보자면 30대부터 50대까지 모두 남성 자살률이 급격히 증가했고 성별 간 차이 역시 확인되고 있다. 이러한 남성 자살률의 상승세는 남성의 위기가 이미 한국에서도 현실화된 문제임을 시사한다.


이렇듯 남성 문제가 현실에 존재하고 있음에도, 저자는 진보와 보수 모두 ‘남성’을 제대로 보지 않았다고 비판하고 있다. 보수는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남성성’으로 돌아가자고 사람들을 헛것에 매달리게 만들고, 진보는 남성성 자체를 병리화함으로써 스스로가 ‘잘못된 존재’인 것처럼 느끼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양극단은 모두 남성의 실제 고통을 해결하려는 의지가 없다는 점에서 닮아 있으며, 오늘날 정치에서 젠더갈등은 사회구조적 문제를 가리고 지지자를 결집시키는 감정 동원체계로써 매우 효과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런 정서의 핵심기반은 ‘절대적 빈곤’이 아니라 ‘상대적 추락’이다. 특히 한국은 비교 기준이 뚜렷한 사회라 경제적 현실과 별개로 패배감과 미래에 대한 불안은 훨씬 더 크게 경험될 수 있다. 즉, 한국 사회는 경쟁과 비교가 일상화된 구조 속에서 ‘남성의 역할’에 대한 사회적 기대가 쉽게 내면화된다. 그러나 그 역할을 실현할 수 있는 조건은 이미 해체되었고, 역할의 의미 역시 사라졌다는 간극에서 절망이 발생한다. 이렇게 수많은 사람이 절망하고 있다면 단순히 개인의 감정으로만 치부할 게 아니라, 이 사회가 사람들에게 어떤 기대를 형성하게끔 만들었고 그 기대를 어떻게 좌절시켰는지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미국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젊은 남성층의 우경화가 두드러지고 있다. 그러나 이는 ‘남성이 본래 보수적이어서’가 아니라, 절망을 해소할 언어와 정치적 통로가 부재하기 때문일 수 있다. 지금의 젠더갈등은 보수주의자들이 말하듯 페미니즘이 과하게 퍼져서 생긴 게 아니다. 오히려 페미니즘이 대중화되지 못해서 생긴 공백을 극단주의가 차지했기에 발생한 것이다. 디지털 환경은 사람들의 절망을 혐오로 전환시켰고, 현실에서 길을 잃은 이들의 감정은 온라인에서 극단화되고 전염되었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시민들은 이렇게 형성된 ‘여론’에 무의식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따라서 이 책은 제목과 달리 단순히 남성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으며, 지금 “남성 문제”를 공적 의제로 다루지 않는다면 ‘절망한 남성’ 이상의 거대한 집단이 더 빠른 속도로 극우와 혐오정치에 흡수될 수 있다는 정치적 경고에 가깝다.

 

그러나 전망이 비관적이지만은 않다. 나는 지금의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이 명료화되지 않은 채 많은 사람들에게 내재되어 있다고 믿는다. 만약 당신이 지금의 젠더갈등이 너무나 심각하고 세상이 진보하기는커녕 후퇴하고 있다고 느낀다면, 각 진영이 같은 이야기만 반복하고 있고 실제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다고 느낀다면, 그리고 문제를 해결해야할 책임이 스스로에게 있다고 느낀다면 이 책은 어떤 실마리가 될 수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미 달라졌고 성평등의 지평 또한 다시 설계해야한다. 우리에겐 익숙한 금기를 넘어설 용기와 치열한 논쟁, 무엇보다 변화한 세상에 걸맞는 새로운 목표가 필요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