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념과 이해관계: 자본주의의 승리 이전에 등장한 자본주의에 대한 정치적 논변들>
- 정채연 정치발전소 이사 / 임상심리사
이 책은 자본주의가 부흥하기 전인 17세기부터 나타난 자본주의에 대한 논변과 그 흐름을 망라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한 개인이 책에 담긴 모든 자료를 찾아보고 소화하기란 대단히 어려운데, 우리는 저자의 노력 덕에 순식간에 300년을 훑고 숙고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정념이란 흔히 이야기하는 정서/감정보다 어떤 욕망을 충족하고자 하는 목적성을 내포하고 있는 개념으로, 사람을 추동하는 감정적 힘에 가깝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저자는 자본주의가 정념을 통제하는 또다른 정념으로서 옹호되어왔다는 낯선 이야기를 꺼낸다. 당시 ‘정념’이란 하루하루 살아내기 바쁜 영지민들, 노예들이 아닌 권력욕이나 명예욕 등을 가질 수 있는 군주나 귀족들에게 발생하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이해관계’는 관심과 열망, 이득을 포괄하는 용어로 이를 추구하기 위한 숙고와 계산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따라서 당시 이해관계가 정념을 통제한다는 말은 필연적으로 정치적인 상황을 전제했다. 군주와 귀족은 통치를 위해 무분별한 정념을 통제해야하며 이를 제어할 수 있는 또다른 정념을 총칭하는 언어로 이해관계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정치체제가 변화함에 따라 이해관계는 점차 물질적 복지 및 경제적 이익추구로 의미가 축소되었다. 19세기 이전의 세상은 폭력적인 정념이 넘쳐나는 곳으로 이해되었고, 사람들은 온화한 상업이 정념을 길들이고 통제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따라서 저자에 의하면 자본주의가 인간의 풍부한 전인격 발달을 저해한다는 비판은 불공평한데, 애초에 자본주의에 기대했던 바가 그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시간이 지나며 정념 역시 군주나 귀족같은 지배층만의 전유물이 아니게 되었으나, 물질적 복지로 논의가 한정됨에 따라 정치, 경제사에 있어 정념에 대한 탐구는 시들게 되었다.
특히 저자는 애덤 스미스 이후로 정념과 이해관계의 구별이 희미해지게 되었다고 말하는데, 그에게 있어 평범한 사람들은 정념이 없거나 있더라도 생계유지 혹은 물질적 조건이 개선되기만 하면 정념이 충족되는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애덤 스미스에 의해 정념은 서로 겨루는 것이 아닌, 하나의 집합체로서 서로를 뒷받침해준다는 식의 논의로 돌아가게 되었다.
즉 구도는 정념 대 정념이었으나, 논의의 맥락이 상실되며 정념과 이성의 구도가 형성되었고 그마저도 정념은 매우 협소한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저자의 작업에도 불구하고, 너무 오랜 시간 이런 맥락이 잊혀져 왔기에 여전히 이해관계, 이익, 이득은 경제 영역에 한정되어 있다는 고정관념이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이 책에 담겨 있는 역사적 맥락을 따라가며 그 고정관념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정치와 경제의 상호작용에 대해서도 여러 얘기를 해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들을 ‘정념과 이해관계’라는 틀을 통해 해석해볼 수 있다. 과연 지금의 사회 갈등들이, 사람들의 물질적 복지와 이익-즉 이해관계의 차이 때문에 발생하는 것일까? 최소한 계엄 이후 점점 더 극단적으로 표출되고 있는 한국의 진영갈등을 개인이나 집단, 계급적 이해관계의 차이로만 해석하기에는 어려워보인다. 특히 극우집단의 출현은 더더욱 그렇게 해석하기 어렵다고 본다. 보다 근본적으로, 우리는 인간 내면의 극히 일부분만을 다루어 왔던 것 아닐까?

<사진 : 엘버트 허시먼>
근래 전세계적으로 좌파가 몰락하고 우파가 권력을 쥐게 되면서, 좌우파 모두 포퓰리즘이 득세하고 시민들의 지지를 얻게 되면서 영미권의 여러 학자들이 약화된 공동체/연대 의식과 사회의 붕괴를 우려하며 이를 회복하거나 극복해나갈 수 있는 방안으로서 인간의 내면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했다. 주로 다양한 시민들이 가장 폭넓게 소속된 집단으로서의 국가, 그 국가를 함께 일구어왔다는 자부심으로서의 ‘애국심’을 고취하는 방향으로의 통합을 주장하나 한국 사회에서 애국심이 동일하게 작동할 수 있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분명, 야수화되고 있는 민주주의를 제어하기 위해 이러한 질문을 던져야하는 시점이 도래했다고 본다. 실제로 과거 계급적 이해관계라는 틀을 통해 정념을 제어해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왜 근래에는 이러한 통제가 이루어지지 않는가? 현재 민주주의 체제 하의 다양한 시민들은 어떤 정념(욕망)을 보유하고 있는가? 시민들의 다양한 정념 중 어떤 정념이 선별되어 표출되거나, 동원되고 있는가?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우리는 어떤 정념을 불러일으키고 이해관계를 재구성해야하는가?
저자가 이러한 질문을 직접 던지고 있지는 않으며, 답은 더더욱 제시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민주주의에 내재된 문제 속 어떤 감정을 다루고 어떤 이익을 조직해야 하는가에 대한 실마리를 사려깊은 방식으로 제시하고 있다. 정치가 다시 정념을 다루어야 한다면, 우리는 어떤 정념을 말할 수 있어야 하는가? 그 고민의 시작점에서 이 책을 많은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정념과 이해관계: 자본주의의 승리 이전에 등장한 자본주의에 대한 정치적 논변들>
- 정채연 정치발전소 이사 / 임상심리사
이 책은 자본주의가 부흥하기 전인 17세기부터 나타난 자본주의에 대한 논변과 그 흐름을 망라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한 개인이 책에 담긴 모든 자료를 찾아보고 소화하기란 대단히 어려운데, 우리는 저자의 노력 덕에 순식간에 300년을 훑고 숙고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정념이란 흔히 이야기하는 정서/감정보다 어떤 욕망을 충족하고자 하는 목적성을 내포하고 있는 개념으로, 사람을 추동하는 감정적 힘에 가깝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저자는 자본주의가 정념을 통제하는 또다른 정념으로서 옹호되어왔다는 낯선 이야기를 꺼낸다. 당시 ‘정념’이란 하루하루 살아내기 바쁜 영지민들, 노예들이 아닌 권력욕이나 명예욕 등을 가질 수 있는 군주나 귀족들에게 발생하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이해관계’는 관심과 열망, 이득을 포괄하는 용어로 이를 추구하기 위한 숙고와 계산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따라서 당시 이해관계가 정념을 통제한다는 말은 필연적으로 정치적인 상황을 전제했다. 군주와 귀족은 통치를 위해 무분별한 정념을 통제해야하며 이를 제어할 수 있는 또다른 정념을 총칭하는 언어로 이해관계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정치체제가 변화함에 따라 이해관계는 점차 물질적 복지 및 경제적 이익추구로 의미가 축소되었다. 19세기 이전의 세상은 폭력적인 정념이 넘쳐나는 곳으로 이해되었고, 사람들은 온화한 상업이 정념을 길들이고 통제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따라서 저자에 의하면 자본주의가 인간의 풍부한 전인격 발달을 저해한다는 비판은 불공평한데, 애초에 자본주의에 기대했던 바가 그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시간이 지나며 정념 역시 군주나 귀족같은 지배층만의 전유물이 아니게 되었으나, 물질적 복지로 논의가 한정됨에 따라 정치, 경제사에 있어 정념에 대한 탐구는 시들게 되었다.
특히 저자는 애덤 스미스 이후로 정념과 이해관계의 구별이 희미해지게 되었다고 말하는데, 그에게 있어 평범한 사람들은 정념이 없거나 있더라도 생계유지 혹은 물질적 조건이 개선되기만 하면 정념이 충족되는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애덤 스미스에 의해 정념은 서로 겨루는 것이 아닌, 하나의 집합체로서 서로를 뒷받침해준다는 식의 논의로 돌아가게 되었다.
즉 구도는 정념 대 정념이었으나, 논의의 맥락이 상실되며 정념과 이성의 구도가 형성되었고 그마저도 정념은 매우 협소한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저자의 작업에도 불구하고, 너무 오랜 시간 이런 맥락이 잊혀져 왔기에 여전히 이해관계, 이익, 이득은 경제 영역에 한정되어 있다는 고정관념이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이 책에 담겨 있는 역사적 맥락을 따라가며 그 고정관념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정치와 경제의 상호작용에 대해서도 여러 얘기를 해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들을 ‘정념과 이해관계’라는 틀을 통해 해석해볼 수 있다. 과연 지금의 사회 갈등들이, 사람들의 물질적 복지와 이익-즉 이해관계의 차이 때문에 발생하는 것일까? 최소한 계엄 이후 점점 더 극단적으로 표출되고 있는 한국의 진영갈등을 개인이나 집단, 계급적 이해관계의 차이로만 해석하기에는 어려워보인다. 특히 극우집단의 출현은 더더욱 그렇게 해석하기 어렵다고 본다. 보다 근본적으로, 우리는 인간 내면의 극히 일부분만을 다루어 왔던 것 아닐까?
<사진 : 엘버트 허시먼>
근래 전세계적으로 좌파가 몰락하고 우파가 권력을 쥐게 되면서, 좌우파 모두 포퓰리즘이 득세하고 시민들의 지지를 얻게 되면서 영미권의 여러 학자들이 약화된 공동체/연대 의식과 사회의 붕괴를 우려하며 이를 회복하거나 극복해나갈 수 있는 방안으로서 인간의 내면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했다. 주로 다양한 시민들이 가장 폭넓게 소속된 집단으로서의 국가, 그 국가를 함께 일구어왔다는 자부심으로서의 ‘애국심’을 고취하는 방향으로의 통합을 주장하나 한국 사회에서 애국심이 동일하게 작동할 수 있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분명, 야수화되고 있는 민주주의를 제어하기 위해 이러한 질문을 던져야하는 시점이 도래했다고 본다. 실제로 과거 계급적 이해관계라는 틀을 통해 정념을 제어해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왜 근래에는 이러한 통제가 이루어지지 않는가? 현재 민주주의 체제 하의 다양한 시민들은 어떤 정념(욕망)을 보유하고 있는가? 시민들의 다양한 정념 중 어떤 정념이 선별되어 표출되거나, 동원되고 있는가?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우리는 어떤 정념을 불러일으키고 이해관계를 재구성해야하는가?
저자가 이러한 질문을 직접 던지고 있지는 않으며, 답은 더더욱 제시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민주주의에 내재된 문제 속 어떤 감정을 다루고 어떤 이익을 조직해야 하는가에 대한 실마리를 사려깊은 방식으로 제시하고 있다. 정치가 다시 정념을 다루어야 한다면, 우리는 어떤 정념을 말할 수 있어야 하는가? 그 고민의 시작점에서 이 책을 많은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