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
가난을 배제한 사회에 가난을 꺼내다
김은지 『별별 교사들 –
다양성으로 학교를 숨쉬게 하는 교사들의 이야기』 저자
이주 전 즈음 SNS에 올라온 책 제목을 보고서 언젠가 한 번은 읽게 될 책이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어떠한 미사여구도 없는 가난과 성장의 나열을 보며 순간 궁금증이 일었지만, 실체를 직시하는 것이 두려워 차마 바로 읽진 못했다. 책을 펴기 전 두 가지 마음이 들었는데, 고단했던 이들의 성장기를 지켜봐 주고 세상으로 끄집어내 준 것에 대한 고마움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래서 어떻게 어른이 됐는데? 어떻게 성장했는데? 하며 따져 묻는 얄팍한 마음이 불뚝 솟기도 했다. 빈한했던 그 시간마저 당사자가 아닌 타인의 언어로 세상에 등장할 수밖에 없음이 속상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부제에도 나와 있듯이 이 책은 8명의 청소년을 둘러싼 빈곤과 성장에 대한 10년의 기록을 담았다. 가난이라는 묵직한 주제와 10년이라는 긴 시간을 풀어내기에 한사람에게 주어진 지면이 짧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담담히 정돈된 인터뷰와 그 과정을 오롯이 따라가는 작가의 시선 또한 담백하게 쓰여져 서사를 통한 안쓰러움이나 불편함에만 매몰되지 않고 전달하려는 핵심 메시지를 명확하게 읽을 수 있다.
가난에 대해 작정하고 접근한 만큼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가난 투성이다. 덕분에 ‘가난’과 뗄레야 뗄 수 없던 아홉 번째 아이의 시간을 톺아보게 된다. 십여 년 전 누군가 너는 눈치를 주지도 않았는데 눈치를 보고서 눈치를 챈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지난 했던 흔적을 들킨 것만 같아 정말 맞는 말이라며 애써 웃어넘겼지만 가난한 이의 삶은 눈치라도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걸 우린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그냥 잘 되고 싶었다는 ‘소희’의 바람을 보며 어떻게든 성공하겠다고 연고 하나 없는 서울로 꾸역꾸역 올라온 나의 지난날과 묘하게 닮아있음을 느낀다. 혼자서도 잘한다는 말이 무색하게 그저 견디는거라는 충돌의 기록을 보면서는 수없이 삼켰을 설움과 외로움이 억겁의 시간을 쌓고 있었음을 보게 한다. 방치한 부모를 원망하기는커녕 가족이 최우선이라 말하는 ‘영서’에게서 지난날을 투영하게 되는 것도 어찌 보면 자연스러울 만큼 가난은 비슷한 성질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폭력을 일삼던 계부를 십여년 만에 다시 만났을 때, “네 잘못도 있는거 알지?, 앞으론 잘해보자, 우린 가족이잖아”라는 시퍼런 말에 치를 떨면서도 한편으로는 사회가 규정한 정상 가족의 범주 안에 이제 나도 들어 갈 수 있는건지를 떠올렸다.
내가 겪은 가난한 아이의 성장은 바로 이런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사회가 규정하는 보편에 조금이나마 가까워지려 애쓰고 버티고 견디는 것, 사회로부터 철저하게 배제된 가난의 흔적을 개인의 몫으로 안고서 안간힘을 써 지우려 노력하는 삶 같은 거 말이다. 하지만 고맙게도 이 책은 가난이라는 두 글자에 개인의 삶을 뭉개지 않았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장기화된 가난의 역사를 세세하게 풀어내며, 사회의 무능과 기능하지 못함을 정확하게 꼬집고 있다. 어려운 가운데 이렇게나 잘 자랐음을 자랑하는 소수의 모범사례가 아니라 가난이 죄가 되는 사회에서 철저하게 개인의 몫으로 남겨진 현실을 직시하게 만든다.
가난의 옛말인 간난(艱難)은 ‘몹시 힘들고 고생스러움’이라는 의미를 지녔다고 한다. 부자들의 삶이 그들의 노력으로만 이뤄진 것이 아니듯 몹시나 힘들고 고생스럽다는 가난한 삶 역시 노력이나 자처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노력하면 안될 것이 없다는 세상 무지한 말과 드디어 사라진 개천용을 완전히 보내며 책의 힘을 빌어 기회 불평등에 디딤돌을 놓을 수 있는 사회를 다시 한번 꿈꿔본다. 책장의 마지막을 덮을 즈음, 잘못은 가난이 아니라 가난을 지워버린 사회라는걸 정확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끝>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
가난을 배제한 사회에 가난을 꺼내다
김은지 『별별 교사들 –
다양성으로 학교를 숨쉬게 하는 교사들의 이야기』 저자
이주 전 즈음 SNS에 올라온 책 제목을 보고서 언젠가 한 번은 읽게 될 책이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어떠한 미사여구도 없는 가난과 성장의 나열을 보며 순간 궁금증이 일었지만, 실체를 직시하는 것이 두려워 차마 바로 읽진 못했다. 책을 펴기 전 두 가지 마음이 들었는데, 고단했던 이들의 성장기를 지켜봐 주고 세상으로 끄집어내 준 것에 대한 고마움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래서 어떻게 어른이 됐는데? 어떻게 성장했는데? 하며 따져 묻는 얄팍한 마음이 불뚝 솟기도 했다. 빈한했던 그 시간마저 당사자가 아닌 타인의 언어로 세상에 등장할 수밖에 없음이 속상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부제에도 나와 있듯이 이 책은 8명의 청소년을 둘러싼 빈곤과 성장에 대한 10년의 기록을 담았다. 가난이라는 묵직한 주제와 10년이라는 긴 시간을 풀어내기에 한사람에게 주어진 지면이 짧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담담히 정돈된 인터뷰와 그 과정을 오롯이 따라가는 작가의 시선 또한 담백하게 쓰여져 서사를 통한 안쓰러움이나 불편함에만 매몰되지 않고 전달하려는 핵심 메시지를 명확하게 읽을 수 있다.
가난에 대해 작정하고 접근한 만큼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가난 투성이다. 덕분에 ‘가난’과 뗄레야 뗄 수 없던 아홉 번째 아이의 시간을 톺아보게 된다. 십여 년 전 누군가 너는 눈치를 주지도 않았는데 눈치를 보고서 눈치를 챈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지난 했던 흔적을 들킨 것만 같아 정말 맞는 말이라며 애써 웃어넘겼지만 가난한 이의 삶은 눈치라도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걸 우린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그냥 잘 되고 싶었다는 ‘소희’의 바람을 보며 어떻게든 성공하겠다고 연고 하나 없는 서울로 꾸역꾸역 올라온 나의 지난날과 묘하게 닮아있음을 느낀다. 혼자서도 잘한다는 말이 무색하게 그저 견디는거라는 충돌의 기록을 보면서는 수없이 삼켰을 설움과 외로움이 억겁의 시간을 쌓고 있었음을 보게 한다. 방치한 부모를 원망하기는커녕 가족이 최우선이라 말하는 ‘영서’에게서 지난날을 투영하게 되는 것도 어찌 보면 자연스러울 만큼 가난은 비슷한 성질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폭력을 일삼던 계부를 십여년 만에 다시 만났을 때, “네 잘못도 있는거 알지?, 앞으론 잘해보자, 우린 가족이잖아”라는 시퍼런 말에 치를 떨면서도 한편으로는 사회가 규정한 정상 가족의 범주 안에 이제 나도 들어 갈 수 있는건지를 떠올렸다.
내가 겪은 가난한 아이의 성장은 바로 이런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사회가 규정하는 보편에 조금이나마 가까워지려 애쓰고 버티고 견디는 것, 사회로부터 철저하게 배제된 가난의 흔적을 개인의 몫으로 안고서 안간힘을 써 지우려 노력하는 삶 같은 거 말이다. 하지만 고맙게도 이 책은 가난이라는 두 글자에 개인의 삶을 뭉개지 않았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장기화된 가난의 역사를 세세하게 풀어내며, 사회의 무능과 기능하지 못함을 정확하게 꼬집고 있다. 어려운 가운데 이렇게나 잘 자랐음을 자랑하는 소수의 모범사례가 아니라 가난이 죄가 되는 사회에서 철저하게 개인의 몫으로 남겨진 현실을 직시하게 만든다.
가난의 옛말인 간난(艱難)은 ‘몹시 힘들고 고생스러움’이라는 의미를 지녔다고 한다. 부자들의 삶이 그들의 노력으로만 이뤄진 것이 아니듯 몹시나 힘들고 고생스럽다는 가난한 삶 역시 노력이나 자처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노력하면 안될 것이 없다는 세상 무지한 말과 드디어 사라진 개천용을 완전히 보내며 책의 힘을 빌어 기회 불평등에 디딤돌을 놓을 수 있는 사회를 다시 한번 꿈꿔본다. 책장의 마지막을 덮을 즈음, 잘못은 가난이 아니라 가난을 지워버린 사회라는걸 정확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