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채연] 정신건강 민주주의
[정채연] 정신건강 민주주의

[정신건강 민주주의] 우리에겐 동굴이 필요하다

공식 관리자
2026-07-10
조회수 305

우리에겐 동굴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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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고르기(쉬었음) 청년과 고립은둔 청년을 대상으로 청년 참여소득을 지급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돌봄노동 시장에 참여할 경우 정부가 보충형 수당을 지급하는 방안으로, 돌봄 외 영역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숨고르기 청년 및 고립은둔 청년을 정부에서 직접 이야기하고, 관련 정책이 고려되며 실질적 방안이 나왔다는 건 반가운 일이나 다시금 현금성 지원에 논의가 한정된다는 건 아쉬운 일이다. AI 시대에 시민들의 소득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는 분명 중요한 논의이지만, 이번 방안 역시 소득을 ‘참여’와 결합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생산성과 기여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이 아쉽다.


우리 사회의 고립은둔·숨고르기 청년의 숫자가 점점 늘어가고 있다는 건 어떻게 해석해야할까? 정신건강 문제나 사회경제적 위치, 정치의 영향 등 다양한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겠지만, 이러한 상태가 장기화되고 누적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한국 사회 전반의 문화와 제도적 환경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고 바라볼 수 있다. 특히나 지난 20년 간 높은 자살률이 유지되어 왔고, 최근 청년층에서 자살률이 다시 증가하고 있음을 고려한다면 더욱 그렇다.


우리 사회는 ‘남들에 비해 뒤처진다’는 감각이 보편화되어 있는 사회다. 가만히 있거나 잠시 멈췄을 때 제자리에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올라가야하는 에스컬레이터에 탄 것처럼 뒤로 밀려날 수 있다는 두려움을 느끼기 쉬운 사회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끝없이 자기존재를 증명해내야한다는 입증책임을 느끼게 되며, 그에 실패했을 시 존재에 대한 수치심을 경험하기도 쉽다. 지금도 우리는 지친 사람에게까지 쉬기 위한 자격을 증명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두려움은 사람들 마음 속에만 존재하는 막연한 불안이 아니라, 실제로 부족한 복지 예산과 사회안전망이 빚어낸 결과이며 한 번의 실패로 모든 것이 무너질 수 있다는 경험에서 기인한 구체적 공포에 가깝다. 한국 사회에서의 휴식은 사회적 이탈로 간주된다. 학업과 취업, 경력에서 이탈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쉬었다’가 아니라 ‘뒤처졌다’는 평가를 받으며, 잠시 멈추는 사람일수록 오히려 다시 돌아갈 문턱이 높아지고 스스로도 수치심으로 숨어들게 된다. 


이러한 사회에서 사람들은 잠깐이라도 쉴 수 없다. 앞으로 계속 나아가야만 한다는 강박 아래에 휴식은 죄악처럼 여겨진다. 휴식을 위한 인프라가 잘 구축되어 있지 않다는 것도 어려움에 한 몫한다. 따라서 버티고 버티다 못해 아예 사회에서 튕겨져나온 결과가 높은 자살과 더불어 최근에는 고립은둔이라는 다른 방식으로도 표출되고 있다고 해석해볼 수 있다. 과거에는 생존하기 위해서라도 집 밖으로 나갈 수 밖에 없었지만, 오늘날에는 물류와 배달, 인터넷 및 비대면 서비스의 발달로 완전한 사회적 철수가 물리적으로 가능해졌다. 자살과 고립은둔은 한국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자, 쓸쓸한 구조신호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신호를 너무 오랫동안 외면해왔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적극적 참여를 요구하는 광장이 아니라, 편안하게 쉬거나 모일 수 있는 동굴이 필요하다. 다른 이들과 다시 연결되는 걸 넘어서 무언가를 기여하고 나를 증명해내야 한다는 압박, 다른 사람들의 평가적 시선으로부터 마음을 놓을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참여와 고립 사이의 중간지대를 촘촘히 만드는 작업이 있어야 한다. 말하지 않아도,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사람이라는 걸 증명하지 않아도, 취업이나 복귀같은 성과를 ‘약속’하지 않더라도 있을 수 있는 곳, 그러면서도 완전히 혼자이지는 않는 곳으로서의 동굴을 만들어야 한다. 이러한 공간은 식당, 카페, 놀이터, 공원, 도서관 등 다양한 형태로 구상될 수 있고 각종 공공 장소로서도 활용될 수 있다. 또한 ‘버티고 있음’을 선제적으로 알아챌 수 있고, 사람들도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정신건강 인프라의 구축이 절실하다. 지금의 한국은 병원의 문턱 뿐만 아니라 상담센터를 비롯한 모든 정신건강 기관의 문턱이 너무 높다. 지원체계 자체도 너무나 듬성듬성하다. 비용이나 낙인에 대한 걱정없이 가볍게 한 번 가볼 수 있는 정신건강 관련 기관이란 사실상 없다고 봐야 한다.


한국 사회는 오랜 시간, 사회와의 연결보다 적극적인 참여를 목적으로 하고 이를 독려해왔다. 왜 회복의 종착역은 언제나 ‘참여’여야 할까? 아무것도 증명할 필요 없이 잠시 머무를 수는 없는 것일까? 우리 사회는 그 동안 누군가가 완전히 무너진 뒤에야 그가 쉬었어야 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왔다. 그렇게 무너지기 전까지는 끝없이 참여하고 너를 증명하라고 요구해왔다. 그러나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에너지는 유한하고 누구든 반드시 쉬어야하는 때가 온다. 누군가는 잘 지내는 것 같아보여도, 혼자 죽을 힘을 다해 버티고 있는 중일 수도 있다.


그 팽팽했던 끈이 끊어질 때 우리는 뒤늦게 후회하게 된다. 닥쳐오는 AI 시대를 후회로 점철되게 만들 것인지는 지금 우리 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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