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 고통을 권하는 사회

1968년, 이탈리아의 정신과의사 프랑코 바잘리아는 깊은 회의감에 젖어있었다. 그는 수년 간 동료들과 함께 정신병원의 환자들에게 자유를 돌려주기 위해 싸워왔다. 병동을 개방했고, 외출을 허용했으며, 병원 운영을 결정하는 환자 총회를 열었다. 그리고 조반니 미클루스가 외출 허가를 받고 귀가했다가 아내를 살해했다. ‘환자의 범죄를 의사가 예견했어야 한다’는 논리는 법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바잘리아는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그가 이끌던 정신의학 개혁은 정치적으로도 상징적으로도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 자유와 통제를 둘러싼 사회적 갈등이 폭발했고, 바잘리아는 개혁을 그만두고 병원을 닫아야 하는지까지 고민했다. 이후 1978년 180호법이 제정되며 이탈리아에서는 단계적 정신병원 폐쇄와 함께 지역사회 정신보건 체계가 시작되었고, 1998년에는 공립 정신병원이 완전히 문을 닫았다.
이탈리아의 공립 정신병원이 완전히 문을 닫은 바로 그 해, 미국에서는 마이클 라우도어가 임신한 약혼녀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1960-70년대 미국에서는 ‘정신질환은 권력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 ‘광기는 국가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저항이자 빛나는 정신’이라며 정신질환 자체를 해체하려는 급진적 반(反)정신의학이 지지를 받았다. 1963년 케네디 대통령은 입원 중심 치료에서 지역사회 정신보건 체계로의 전환을 담은 법에 서명했다. 정신감정 결과 마이클은 살인 당시, 약혼녀가 사람이 아닌 인형이나 로봇 같은 존재이며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믿음 속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증상을 숨겼고 치료를 강제할 방법도 없었다. 예일대를 3년 만에 졸업한 전도유망한 청년이 치료 공백 끝에 범죄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다시금 자유와 공적 책임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불러일으켰다.
이탈리아와 미국은 비극을 거쳐 정신건강을 치료 이상으로 사람들의 자유와 사회적 책임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으로 다루었다. 그러나 반세기가 지난 2026년의 한국에서는 여전히 사적인 비극만 존재할 뿐, 공적 질문으로까지 확장되지 못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코로나 팬데믹 이후 개인의 ‘내면’이 사회적 의제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사회적 유대가 약화되고 고립과 외로움이 다수의 경험이 되면서 정신과 외래 이용률은 증가했고, 정부는 전문 심리상담을 지원하는 ‘전국민 마음투자 지원사업’을 추진했다. 시민들 역시 앞으로는 정신건강 문제가 더욱 늘어날 것이라 예감하고 있다.1)
일상에서는 자존감이나 회피형·불안형(애착), 라포(rapport)와 같은 심리학 용어뿐만 아니라 ADHD, 우울증, 조울증, PTSD같은 임상적 진단 용어도 매우 흔하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MBTI 유형으로 자신을 설명하는 일은 과거의 혈액형이나 별자리만큼이나 대중화되었다. 동시에 범죄 보도에서는 ‘사이코패스’, ‘우울증’, ‘경계선 지능’, ‘지적장애’ 등이 헤드라인에 인용되며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모으기 시작했다. 이제는 조현병 같은 중증 정신질환뿐만 아니라 ‘심리적 문제’ 그 자체가 잠재적 위험의 신호처럼 소비된다. 한국에서 정신건강은 분명 과거에 비해 익숙한 주제가 되었으나, 주로 치료와 돌봄 혹은 치안과 위험관리 차원에서 호출되며 자유와 시민권의 문제로는 좀처럼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
1960~70년대 정신의학 개혁이 사회에 던진 건 인간의 자유를 어떻게 이해할 것이고 그 자유가 방치가 되지 않도록 사회가 어떻게 책임질 것인지, 그럼으로써 시민의 범위를 어디까지 확장할 것인지에 관한 정치적 질문이었다. 바잘리아는 조현병 환자 이전에 정신병원에 갇힌 ‘인간’을 보았으며, 자유를 완치되었을 때 주어지는 보상이 아니라 회복의 전제로 보았다. 그에게 있어 자유란 구체적인 인간의 삶이었으며, 불가침의 영역이자 추상적 원칙 같은 게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에서 정신건강은 이런 의미의 자유와 거의 연결되지 못할 뿐 아니라 정치적 의제로조차 다루어지지 않는다. 정신건강은 사람들이 자유로운 주체로 살아가기 위한 기본 전제라기보다, 개인이 사회적으로 얼마나 잘 기능하는지를 평가하는 기준으로 사용되고 있다. 자유는 상황에 따라 주어지거나 거두어들이는 행정적 재량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기 위한 명분도 아니지만 신자유주의적 질서가 굳어진 사회에서 자유는 무관심에 기반한 방치로 이해되고 있다.
심리적 고통은 개인의 기질이나 성격에 의해서만 발생하지 않으며, 불안정한 노동과 주거, 빈곤, 교육, 차별, 고립과 같은 사회환경에 강하게 영향을 받는다. 회복에 필요한 공간이나 휴식, 관계망, 치료접근성과 같은 자원 역시 사람들에게 균등하게 분배되어 있지 않다. 정신건강이 개인의 의지만으로 지켜질 수 없고 악화와 회복이 사회환경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면, 이는 더 이상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시민이 사회에 요구할 수 있는 권리의 문제다.
그러나 오늘날 개인은 자신이 겪는 심리적 고통이 모두 자신의 책임이라 느낀다. 도움을 요청할 수는 있지만 그 요청과 이후의 부담마저도 개인의 몫으로 남는다. 이로 인한 결과는 결국 개인의 실패로 귀속되며, 사회적 책임의 공백은 인식조차 되지 않는다. 우리 사회의 논의 역시 한편으로는 전문가의 치료 영역에, 다른 한편으로는 위험을 관리하는 행정의 영역에 머물며 ‘마음건강’ 수준을 넘어선 사회구조적 차원까지는 나아가지 않고 있다.
그 결과 한국에서 고통받는 인간은 시민이기보다 치료의 대상이거나, 위험 인물로 의심받거나, 그 사이에서 스스로를 책임져야 하는 개인에 위치하게 된다. 다양성의 가치가 약화되고 획일적 규칙에 사람들이 더 쉽게 이끌리게 된 지금 같은 시대에는 이런 공백이 더욱 위험하다. 인간의 복잡성과 차이가 수용되기 어려운 사회에서 자유와 분리된 정신건강은 정상과 비정상, 적응과 부적응의 잣대이자 ‘제대로 기능하는 사람’을 가려내는 억압적 규범으로 작동할 수 있다.
또한 치료나 돌봄이 확대되더라도 정신건강을 시민권의 문제로 이해하지 않는다면 점점 더 ‘병리’와 ‘안전’ 차원에서 선별적이고 조건부로 다루어지게 된다. 이미 사회 전반에 광범위하게 경험되고 있는 심리적 고통은 ‘다 그렇게 사는 거지’라거나 ‘그 정도는 알아서 해야지’라며 방치되고 있다. 그 중 몇몇 고통이 극단적으로 표출되고 나서야 ‘진짜’ 아프다는 걸 인정받아 협소한 지원이나마 받을 수 있다. 우리가 추구해야할 건 발병 전 예방이 아니었던가?
정신건강을 말한다는 건 곧 우리 사회가 고통받는 인간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를 묻는 일이다. 개인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불안이 커지고, 심리적 고통이 만연해지고 있는 이 시대에 정신건강은 특정 집단만을 대상으로 한 복지가 아니다. 우리는 인간에게 내재된 취약성과 이를 증폭시키는 사회구조를 함께 바라보며 지금과 같은 시대 변화 속에서도 시민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나가야 한다. 정신건강은 시민의 기본권이다.
1) 한국리서치, 「정신건강에 대한 인식과 정책 수요」, 『여론 속의 여론』, 2026. 3. 17.
1968년, 이탈리아의 정신과의사 프랑코 바잘리아는 깊은 회의감에 젖어있었다. 그는 수년 간 동료들과 함께 정신병원의 환자들에게 자유를 돌려주기 위해 싸워왔다. 병동을 개방했고, 외출을 허용했으며, 병원 운영을 결정하는 환자 총회를 열었다. 그리고 조반니 미클루스가 외출 허가를 받고 귀가했다가 아내를 살해했다. ‘환자의 범죄를 의사가 예견했어야 한다’는 논리는 법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바잘리아는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그가 이끌던 정신의학 개혁은 정치적으로도 상징적으로도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 자유와 통제를 둘러싼 사회적 갈등이 폭발했고, 바잘리아는 개혁을 그만두고 병원을 닫아야 하는지까지 고민했다. 이후 1978년 180호법이 제정되며 이탈리아에서는 단계적 정신병원 폐쇄와 함께 지역사회 정신보건 체계가 시작되었고, 1998년에는 공립 정신병원이 완전히 문을 닫았다.
이탈리아의 공립 정신병원이 완전히 문을 닫은 바로 그 해, 미국에서는 마이클 라우도어가 임신한 약혼녀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1960-70년대 미국에서는 ‘정신질환은 권력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 ‘광기는 국가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저항이자 빛나는 정신’이라며 정신질환 자체를 해체하려는 급진적 반(反)정신의학이 지지를 받았다. 1963년 케네디 대통령은 입원 중심 치료에서 지역사회 정신보건 체계로의 전환을 담은 법에 서명했다. 정신감정 결과 마이클은 살인 당시, 약혼녀가 사람이 아닌 인형이나 로봇 같은 존재이며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믿음 속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증상을 숨겼고 치료를 강제할 방법도 없었다. 예일대를 3년 만에 졸업한 전도유망한 청년이 치료 공백 끝에 범죄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다시금 자유와 공적 책임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불러일으켰다.
이탈리아와 미국은 비극을 거쳐 정신건강을 치료 이상으로 사람들의 자유와 사회적 책임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으로 다루었다. 그러나 반세기가 지난 2026년의 한국에서는 여전히 사적인 비극만 존재할 뿐, 공적 질문으로까지 확장되지 못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코로나 팬데믹 이후 개인의 ‘내면’이 사회적 의제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사회적 유대가 약화되고 고립과 외로움이 다수의 경험이 되면서 정신과 외래 이용률은 증가했고, 정부는 전문 심리상담을 지원하는 ‘전국민 마음투자 지원사업’을 추진했다. 시민들 역시 앞으로는 정신건강 문제가 더욱 늘어날 것이라 예감하고 있다.1)
일상에서는 자존감이나 회피형·불안형(애착), 라포(rapport)와 같은 심리학 용어뿐만 아니라 ADHD, 우울증, 조울증, PTSD같은 임상적 진단 용어도 매우 흔하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MBTI 유형으로 자신을 설명하는 일은 과거의 혈액형이나 별자리만큼이나 대중화되었다. 동시에 범죄 보도에서는 ‘사이코패스’, ‘우울증’, ‘경계선 지능’, ‘지적장애’ 등이 헤드라인에 인용되며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모으기 시작했다. 이제는 조현병 같은 중증 정신질환뿐만 아니라 ‘심리적 문제’ 그 자체가 잠재적 위험의 신호처럼 소비된다. 한국에서 정신건강은 분명 과거에 비해 익숙한 주제가 되었으나, 주로 치료와 돌봄 혹은 치안과 위험관리 차원에서 호출되며 자유와 시민권의 문제로는 좀처럼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
1960~70년대 정신의학 개혁이 사회에 던진 건 인간의 자유를 어떻게 이해할 것이고 그 자유가 방치가 되지 않도록 사회가 어떻게 책임질 것인지, 그럼으로써 시민의 범위를 어디까지 확장할 것인지에 관한 정치적 질문이었다. 바잘리아는 조현병 환자 이전에 정신병원에 갇힌 ‘인간’을 보았으며, 자유를 완치되었을 때 주어지는 보상이 아니라 회복의 전제로 보았다. 그에게 있어 자유란 구체적인 인간의 삶이었으며, 불가침의 영역이자 추상적 원칙 같은 게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에서 정신건강은 이런 의미의 자유와 거의 연결되지 못할 뿐 아니라 정치적 의제로조차 다루어지지 않는다. 정신건강은 사람들이 자유로운 주체로 살아가기 위한 기본 전제라기보다, 개인이 사회적으로 얼마나 잘 기능하는지를 평가하는 기준으로 사용되고 있다. 자유는 상황에 따라 주어지거나 거두어들이는 행정적 재량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기 위한 명분도 아니지만 신자유주의적 질서가 굳어진 사회에서 자유는 무관심에 기반한 방치로 이해되고 있다.
심리적 고통은 개인의 기질이나 성격에 의해서만 발생하지 않으며, 불안정한 노동과 주거, 빈곤, 교육, 차별, 고립과 같은 사회환경에 강하게 영향을 받는다. 회복에 필요한 공간이나 휴식, 관계망, 치료접근성과 같은 자원 역시 사람들에게 균등하게 분배되어 있지 않다. 정신건강이 개인의 의지만으로 지켜질 수 없고 악화와 회복이 사회환경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면, 이는 더 이상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시민이 사회에 요구할 수 있는 권리의 문제다.
그러나 오늘날 개인은 자신이 겪는 심리적 고통이 모두 자신의 책임이라 느낀다. 도움을 요청할 수는 있지만 그 요청과 이후의 부담마저도 개인의 몫으로 남는다. 이로 인한 결과는 결국 개인의 실패로 귀속되며, 사회적 책임의 공백은 인식조차 되지 않는다. 우리 사회의 논의 역시 한편으로는 전문가의 치료 영역에, 다른 한편으로는 위험을 관리하는 행정의 영역에 머물며 ‘마음건강’ 수준을 넘어선 사회구조적 차원까지는 나아가지 않고 있다.
그 결과 한국에서 고통받는 인간은 시민이기보다 치료의 대상이거나, 위험 인물로 의심받거나, 그 사이에서 스스로를 책임져야 하는 개인에 위치하게 된다. 다양성의 가치가 약화되고 획일적 규칙에 사람들이 더 쉽게 이끌리게 된 지금 같은 시대에는 이런 공백이 더욱 위험하다. 인간의 복잡성과 차이가 수용되기 어려운 사회에서 자유와 분리된 정신건강은 정상과 비정상, 적응과 부적응의 잣대이자 ‘제대로 기능하는 사람’을 가려내는 억압적 규범으로 작동할 수 있다.
또한 치료나 돌봄이 확대되더라도 정신건강을 시민권의 문제로 이해하지 않는다면 점점 더 ‘병리’와 ‘안전’ 차원에서 선별적이고 조건부로 다루어지게 된다. 이미 사회 전반에 광범위하게 경험되고 있는 심리적 고통은 ‘다 그렇게 사는 거지’라거나 ‘그 정도는 알아서 해야지’라며 방치되고 있다. 그 중 몇몇 고통이 극단적으로 표출되고 나서야 ‘진짜’ 아프다는 걸 인정받아 협소한 지원이나마 받을 수 있다. 우리가 추구해야할 건 발병 전 예방이 아니었던가?
정신건강을 말한다는 건 곧 우리 사회가 고통받는 인간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를 묻는 일이다. 개인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불안이 커지고, 심리적 고통이 만연해지고 있는 이 시대에 정신건강은 특정 집단만을 대상으로 한 복지가 아니다. 우리는 인간에게 내재된 취약성과 이를 증폭시키는 사회구조를 함께 바라보며 지금과 같은 시대 변화 속에서도 시민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나가야 한다. 정신건강은 시민의 기본권이다.
1) 한국리서치, 「정신건강에 대한 인식과 정책 수요」, 『여론 속의 여론』, 2026. 3.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