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떠나보낼 용기 -
드라마 <참교육>과 새로운 사회적 약속

넷플릭스 드라마 <참교육>의 인기, 촉법소년 연령 하향 논쟁, 급증하는 청소년 자해·자살과 고등학교 자퇴율 등 청소년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이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에 더하여 배재고의 ‘스타벅스 가야지’ 응원 사건은 청소년 사이에 만연한 조롱 문화에 대한 논의를 부상시켰다.
모두가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낀다. 그렇기에 무엇이 잘못된 건지, 왜 잘못되었는지에 대해서 다양한 주장들이 펼쳐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학부모와 학생을 준엄하게 꾸짖으면 정신을 차릴 것이라는 류의 의견이 주로 나타난다는 건 매우 흥미로운 지점이다. 지금의 사회 현상은 뉴스에서 보도되는 사례 속의 사람들을 꾸짖는 것으로만 해결될 일이 아닌데다,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몇몇 개인의 인성 문제로 해석하도록 유도하는 방식이 여전히 강력하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폭력을 통한 통제의 시대를 지나, 욕구를 조절할 규범이 부재한 방임의 시대를 거쳐 지금에 도달했다. 아이들은 성적과 진로에서는 강하게 통제되면서도 자신의 욕망을 어떻게 다루고 좌절을 어떻게 견딜지에 대해서는 거의 배우지 못했다. 이제 새로운 시대에서 통제와 방임은 모두 나쁜 것으로 여겨지는데 반해, 정작 우리는 여전히 폭력적 권위없이 욕구를 지연시키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새로운 것이 도래했는데 답을 알지 못할 때 사람들은 주로 과거로 돌아가고자 한다. 새로운 가능성 속 모호함은 불안하고, 과거에 증명된 익숙함은 안정적이다.
그러나 인간은 늘 미래를 향해 나아가며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다. 폭력 없이 어떻게 욕구를 지연시킬 것인가? 우선적으로 우리가 그 동안 폭력을 없애자는 정당한 과제에 집중한 나머지 필요한 논의를 놓쳐왔다는 반성이 필요하다. 우리는 폭력을 제거하면 아이가 자연스럽게 자유롭고 성숙한 인간이 될 것이라 믿었고, 욕구를 존중하는 것과 모든 욕구를 즉시 충족시키는 것을 혼동했으며, 권위주의를 없애는 것과 권위 자체를 없애는 일을 구분하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도래한 새로운 시대는 이전에 비해 사람의 욕망을 훨씬 많이 자극시키고 과잉시키는 세계이다. 시장과 미디어는 갖고 싶지 않은 것도 갖고 싶게 만들고, 할 생각조차 없던 것도 하게 만든다. 틱톡과 릴스를 통해 각종 유행이 반짝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남을 따라가지 못하면 뒤처지는 것이라는 한국 사회 특유의 경쟁 및 성취 압박은 이제 입시를 넘어 생활 수준에서까지 광범위하게 퍼지며 더 가혹해졌다. 즉, 욕망은 무한히 자극받는데 좌절을 견디는 법은 배우지 못하고, 동시에 성취 압력에 극도로 노출된 세대가 탄생했다는 접근을 취할 필요가 있다. 그 속에서 아이들은 왜 학교에 가야하는지, 왜 어른들이 말하는 규범을 지켜야하는지, 애초에 왜 이 모든 걸 참으면서까지 살아야하는지 의미를 찾지 못하고 당장의 재미에 몰두하거나 학교를, 세상을 떠나고 있다.
과거의 교육은 최소한 왜 참아야하는지에 대한 답을 부여했다. 좋은 대학에 가고 직장을 얻으면 부모보다 나은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미래의 보상을 제시하며 참으라고 했다. 그러나 그 사회적 약속은 더 이상 설득력이 없고 미래의 보상은 불분명하다. 사람들은 참아야하기 때문에 참기 보다, 참을 이유가 있어야 참는다. 우리 사회는 왜 참아야하는지 이유를 제시하지 못한 채, 아이들이 사회규범을 배우고 어른과 사회를 신뢰할 기반을 만들 귀중한 시간을 계속 흘려보내왔다. 그런데도 새로운 사회적 약속을 구축해야 할 국가와 교육부는 사회규범을 만들기 보다 지금의 문제를 사적 집단들 사이의 도덕적 책임 싸움으로 떠넘기고 있다. 처음에는 청소년을 꾸짖다가, 다음에는 교사를 탓하고, 이후에는 부모를 탓한다. 그러는 사이 아이들은 사회가 제시하는 미래 뿐만 아니라 어른도 믿지 않게 되었다. 부모와 교사도 서로를 믿지 않는다. 겉으로는 온통 분노뿐인 것 같지만, 이 현상의 기저에는 짙은 비애감이 깔려 있다.
이제 우리 사회는 단호한 해법이라는 환상을 넘어 어떻게 자제와 좌절, 책임과 기다림에 대한 사회규범을 세울 것인가에 대해 논쟁해야 한다. 특히 몸은 다 자랐는데 마음은 아직 아이이거나, 마음은 성숙했는데 몸이 따라가지 못하는 등 정신과 신체의 발달적 격차로 인해 더욱 혼란을 겪을 수 있는 아이들에게, 에너지를 발산하고 조절하는 긍정적 통로를 만드는 일이 시급하다. 지나치게 긴 교육시간을 줄이고 이를 신체활동 위주의 부활동으로 전환하여 협력과 협동, 패배에 대한 경험 등을 통해 규범을 몸으로 익히는 시간을 꾸준히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부모나 교사 개인의 카리스마와 권위에 기대지 않는 규칙의 실효성을 강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현재는 생활기록부 외에 제어력을 지닌 수단이 거의 없으며 그마저도 현장에서 효력을 잃고 있거나 사법 분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인간은 기록 그 자체보다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인정과 소속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한다. 따라서 공동체에 계속 참여하기 위해 지켜야 할 규칙과, 그 위반에 따른 책임을 예측가능하도록 명확히 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 때에 규칙을 세우고 책임을 지는 이 역시 분명해야 규칙이 추상적 명령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재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 또한 스마트폰과 같이 아이들의 욕구를 과잉시키는 수단 자체를 제어하고, 이미 발생한 욕망은 다른 활동과 관계로 전환하는 투 트랙을 병행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이 문제를 학부모와 학생, 교사 가운데 누가 더 잘못했는지를 따지는 싸움에서 벗어나야 한다. 학교의 교육시간, 스마트폰 규제, 생활규범, 교권보호, 방과 후 활동 등의 정책을 펼칠 권한과 책임 모두 국가와 교육부에 있다. 개인의 선의와 헌신만으로는 사회규범을 세울 수 없다. 어떤 교사는 엄격하고 어떤 교사는 허용적이며, 어떤 부모는 학교의 결정을 따르고 어떤 부모는 끝까지 문제를 제기하는 상황에서 아이들이 배우는 것은 일관적이고 안정적인 규범이 아니라 힘의 크기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는 사실일 뿐이다. 규칙이 사람에 따라 달라지고, 책임의 범위가 매번 협상된다면 공동체나 미래에 대한 신뢰는 생길 수 없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엄한 부모나 희생적인 교사가 아니다. 그동안 국가와 교육부가 한 발 물러선 채로 자신의 역할을 개인의 선의와 갈등으로 떠넘겨온 점부터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우리 사회가 아이들에게 사회구성원으로서 함께 살아가는 법을 어떻게 알려줄 것인지에 대해 정말 공적이고 치열한 논쟁이 필요하다.
과거의 향수에서 벗어나 싸움의 방향이 바뀌어야 한다. 어른들이 어른의 역할은 하지 않은 채 서로의 잘못만을 따지는 동안, 아이들은 삶의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
넷플릭스 드라마 <참교육>의 인기, 촉법소년 연령 하향 논쟁, 급증하는 청소년 자해·자살과 고등학교 자퇴율 등 청소년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이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에 더하여 배재고의 ‘스타벅스 가야지’ 응원 사건은 청소년 사이에 만연한 조롱 문화에 대한 논의를 부상시켰다.
모두가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낀다. 그렇기에 무엇이 잘못된 건지, 왜 잘못되었는지에 대해서 다양한 주장들이 펼쳐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학부모와 학생을 준엄하게 꾸짖으면 정신을 차릴 것이라는 류의 의견이 주로 나타난다는 건 매우 흥미로운 지점이다. 지금의 사회 현상은 뉴스에서 보도되는 사례 속의 사람들을 꾸짖는 것으로만 해결될 일이 아닌데다,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몇몇 개인의 인성 문제로 해석하도록 유도하는 방식이 여전히 강력하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폭력을 통한 통제의 시대를 지나, 욕구를 조절할 규범이 부재한 방임의 시대를 거쳐 지금에 도달했다. 아이들은 성적과 진로에서는 강하게 통제되면서도 자신의 욕망을 어떻게 다루고 좌절을 어떻게 견딜지에 대해서는 거의 배우지 못했다. 이제 새로운 시대에서 통제와 방임은 모두 나쁜 것으로 여겨지는데 반해, 정작 우리는 여전히 폭력적 권위없이 욕구를 지연시키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새로운 것이 도래했는데 답을 알지 못할 때 사람들은 주로 과거로 돌아가고자 한다. 새로운 가능성 속 모호함은 불안하고, 과거에 증명된 익숙함은 안정적이다.
그러나 인간은 늘 미래를 향해 나아가며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다. 폭력 없이 어떻게 욕구를 지연시킬 것인가? 우선적으로 우리가 그 동안 폭력을 없애자는 정당한 과제에 집중한 나머지 필요한 논의를 놓쳐왔다는 반성이 필요하다. 우리는 폭력을 제거하면 아이가 자연스럽게 자유롭고 성숙한 인간이 될 것이라 믿었고, 욕구를 존중하는 것과 모든 욕구를 즉시 충족시키는 것을 혼동했으며, 권위주의를 없애는 것과 권위 자체를 없애는 일을 구분하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도래한 새로운 시대는 이전에 비해 사람의 욕망을 훨씬 많이 자극시키고 과잉시키는 세계이다. 시장과 미디어는 갖고 싶지 않은 것도 갖고 싶게 만들고, 할 생각조차 없던 것도 하게 만든다. 틱톡과 릴스를 통해 각종 유행이 반짝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남을 따라가지 못하면 뒤처지는 것이라는 한국 사회 특유의 경쟁 및 성취 압박은 이제 입시를 넘어 생활 수준에서까지 광범위하게 퍼지며 더 가혹해졌다. 즉, 욕망은 무한히 자극받는데 좌절을 견디는 법은 배우지 못하고, 동시에 성취 압력에 극도로 노출된 세대가 탄생했다는 접근을 취할 필요가 있다. 그 속에서 아이들은 왜 학교에 가야하는지, 왜 어른들이 말하는 규범을 지켜야하는지, 애초에 왜 이 모든 걸 참으면서까지 살아야하는지 의미를 찾지 못하고 당장의 재미에 몰두하거나 학교를, 세상을 떠나고 있다.
과거의 교육은 최소한 왜 참아야하는지에 대한 답을 부여했다. 좋은 대학에 가고 직장을 얻으면 부모보다 나은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미래의 보상을 제시하며 참으라고 했다. 그러나 그 사회적 약속은 더 이상 설득력이 없고 미래의 보상은 불분명하다. 사람들은 참아야하기 때문에 참기 보다, 참을 이유가 있어야 참는다. 우리 사회는 왜 참아야하는지 이유를 제시하지 못한 채, 아이들이 사회규범을 배우고 어른과 사회를 신뢰할 기반을 만들 귀중한 시간을 계속 흘려보내왔다. 그런데도 새로운 사회적 약속을 구축해야 할 국가와 교육부는 사회규범을 만들기 보다 지금의 문제를 사적 집단들 사이의 도덕적 책임 싸움으로 떠넘기고 있다. 처음에는 청소년을 꾸짖다가, 다음에는 교사를 탓하고, 이후에는 부모를 탓한다. 그러는 사이 아이들은 사회가 제시하는 미래 뿐만 아니라 어른도 믿지 않게 되었다. 부모와 교사도 서로를 믿지 않는다. 겉으로는 온통 분노뿐인 것 같지만, 이 현상의 기저에는 짙은 비애감이 깔려 있다.
이제 우리 사회는 단호한 해법이라는 환상을 넘어 어떻게 자제와 좌절, 책임과 기다림에 대한 사회규범을 세울 것인가에 대해 논쟁해야 한다. 특히 몸은 다 자랐는데 마음은 아직 아이이거나, 마음은 성숙했는데 몸이 따라가지 못하는 등 정신과 신체의 발달적 격차로 인해 더욱 혼란을 겪을 수 있는 아이들에게, 에너지를 발산하고 조절하는 긍정적 통로를 만드는 일이 시급하다. 지나치게 긴 교육시간을 줄이고 이를 신체활동 위주의 부활동으로 전환하여 협력과 협동, 패배에 대한 경험 등을 통해 규범을 몸으로 익히는 시간을 꾸준히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부모나 교사 개인의 카리스마와 권위에 기대지 않는 규칙의 실효성을 강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현재는 생활기록부 외에 제어력을 지닌 수단이 거의 없으며 그마저도 현장에서 효력을 잃고 있거나 사법 분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인간은 기록 그 자체보다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인정과 소속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한다. 따라서 공동체에 계속 참여하기 위해 지켜야 할 규칙과, 그 위반에 따른 책임을 예측가능하도록 명확히 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 때에 규칙을 세우고 책임을 지는 이 역시 분명해야 규칙이 추상적 명령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재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 또한 스마트폰과 같이 아이들의 욕구를 과잉시키는 수단 자체를 제어하고, 이미 발생한 욕망은 다른 활동과 관계로 전환하는 투 트랙을 병행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이 문제를 학부모와 학생, 교사 가운데 누가 더 잘못했는지를 따지는 싸움에서 벗어나야 한다. 학교의 교육시간, 스마트폰 규제, 생활규범, 교권보호, 방과 후 활동 등의 정책을 펼칠 권한과 책임 모두 국가와 교육부에 있다. 개인의 선의와 헌신만으로는 사회규범을 세울 수 없다. 어떤 교사는 엄격하고 어떤 교사는 허용적이며, 어떤 부모는 학교의 결정을 따르고 어떤 부모는 끝까지 문제를 제기하는 상황에서 아이들이 배우는 것은 일관적이고 안정적인 규범이 아니라 힘의 크기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는 사실일 뿐이다. 규칙이 사람에 따라 달라지고, 책임의 범위가 매번 협상된다면 공동체나 미래에 대한 신뢰는 생길 수 없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엄한 부모나 희생적인 교사가 아니다. 그동안 국가와 교육부가 한 발 물러선 채로 자신의 역할을 개인의 선의와 갈등으로 떠넘겨온 점부터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우리 사회가 아이들에게 사회구성원으로서 함께 살아가는 법을 어떻게 알려줄 것인지에 대해 정말 공적이고 치열한 논쟁이 필요하다.
과거의 향수에서 벗어나 싸움의 방향이 바뀌어야 한다. 어른들이 어른의 역할은 하지 않은 채 서로의 잘못만을 따지는 동안, 아이들은 삶의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