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극우화’라는 말이 가리는 것

지방선거가 끝나고 투표율이 공개됨에 따라 2030 세대의 보수 정당 선택에 대해 여러 이야기가 회자되고 있다. 어떤 이는 2030 세대를 잃어버린 세대처럼 다루며 과거 ‘20대 XX론’의 명맥을 잇고 있고, 어떤 이는 2030 세대가 처한 안타까운 현실을 나열하며 온정적 시각을 보인다. 또다른 이는 반민주당과 반페미니즘을 중심으로 2030의 선택을 해석하려 하고, 보수정당을 찍었다는 것 자체를 극우화로 연결시키기도 한다. 이는 각각 부분적으로는 설명력이 있겠으나, 지금 시대의 변화를 전체적으로 조망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오늘날 사회 환경과 디지털 환경 속에서 사람들의 정치적 선택과 극우적 감정이 서로 가까워지고 있음을 놓치게 만든다.
2026년 한국의 주거형태 1위는 1인가구로 40%에 육박한다. 가족과 학교, 지역공동체는 해체된지 오래이며 직장마저도 과거처럼 오랜 근속을 통해 다른 이들과 교류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카페나 술집, 스터디카페 정도가 아니라면 사람들이 모여서 무언가를 도모할 수 있는 공간은 거의 없다. 공유오피스는 말그대로 공간을 공유할 뿐 그 안에서 자발적 활동을 통한 관계는 잘 형성되지 않는다. 결혼은 물론이거니와 연애도 잘 하지 않는다. 굳이 밖을 나가지 않아도 스마트폰 앱을 통해 의식주를 거의 대부분 해결할 수 있다. 2030 세대들의 여가 중 가장 많은 퍼센테이지를 차지하는 건 OTT와 유튜브 시청이며, 그 외에도 인스타그램과 유튜브에 머무는 시간이 하루에 대부분을 차지한다. 유튜브에는 자극적 주장이 넘쳐나며, 인스타그램은 사람들에게 전형적으로 ‘전시하는 삶’을 부추긴다. 모두가 행복하고 잘 사는 모습을 스토리에 촘촘히 바느질함에 따라 ‘평범’에 대한 기준이 비현실적으로 높아졌다. 그러나 매일같이 접하는 자극이 바로 그 비현실이라면, 현실과 교차검증하는 건 쉽지 않다. 나도 저만큼은 보여줘야 할 것 같고, 하고 싶은 것도 갖고 싶은 것도 점점 더 많아지지만 이런 욕망은 대개 좌절될 수 밖에 없다. 오프라인 관계를 대체한 디지털 환경은 서로가 연결되어 있다는 환상으로 실존적 고립을 가리며 사람들을 끊임없이 불행하게 만들고 있다.
사람은 추상적 당위만으로 타인을 고려할 수 없다. 실제로 만나고, 부딪히고, 신세를 지는 경험 속에서만 타인의 존재를 구체적으로 배울 수 있다. 물리적으로도 관계적으로도 ‘나’만이 존재하는 시대에 사회적 금기와 터부가 어떤 억제력을 가질 수 있을까?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데 타인의 미묘한 불편이 무슨 문제란 말인가? 접촉하지 않는, 그저 있다고 어렴풋하게 인식하는 다른 사람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나? 왜 NPC에 불과한 타인을 위해 언제나 좌절되고 있던 나의 욕망을 또 절제해야한단 말인가? 왜 나의 공정보다 타인과의 연대가 중요한가?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의 정서나 인식의 차이가 생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과거와 달리 오늘날에는 이런 삶의 형태가 보편화되어 있다는 것이 중요한 차이점이다. 지금은 관계적 고립이 표준이 된 시대다. 과거에 비해 집합적 경험을 할 만한 기회도, 소속도 획득하기가 어렵다. 급변하는 AI 기술은 향후에 이런 파편화를 더욱 심화시킬 가능성이 높다. 현재 한국의 민주주의와 정치가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예측하기 위해서는 이런 사회적 조건 속에서 젊은 세대들의 정치적 감정과 선택이 형성되고 있다는 맥락에의 이해가 필요하다.
혼자가 된 개인은 주로 무력감과 불안을 경험하게 된다. 또한 개인과 사회를 잇는 중간 매개체(공동체·결사체)가 사라짐에 따라 자신이 느끼는 불안을 사회적으로 해석할 경로 역시 극히 협소해졌다. 자신을 확인해줄 타인이 없다면, 이 세상에서 나의 존재가 사라질 것 같다는 두려움을 느끼기 쉽다. 이는 곧잘 스스로를 입증할 ‘힘’에 대한 갈망으로 발현되며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에 범람하는 콘텐츠들은 권위와 폭력으로의 끌림을 자극하고 있다. 이렇게 힘에 이끌린다는 점에서 이들은 정치에 무관심하지 않으며, 오히려 과도하게 몰입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들의 세계관은 세상을 ‘우리’와 ‘적’으로 나누고, 적은 설득하거나 타협하기보다는 제압해야할 대상이며, 나의 공격은 폭력이 아니라 정의의 응징이라는 식의 양상을 보인다는 점에서 586 세대의 적대적 세계관과 닮아 있다. 그렇기에 지금의 극단화는 연대라는 내용은 빠진 채 기성세대의 전투적 정치문법과 형식을 계승한 결과라고도 볼 수 있다. 오늘날 2030은 아버지에게 저항하기보다 아버지가 쓰던 익숙한 언어를 통해 다른 적을 겨누고 있다.
‘함께 세상을 바꾸자’라는 요구보다 ‘내 몫을 빼앗은 적을 무찌르자’라는 요구가 주가 됨에 따라 이런 극단화는 극좌보다 극우로 발현되고 있다. 극우 정치는 실제로 누군가를 돌보거나, 갈등을 조율할 필요없이 같은 적을 미워하기만 하면 된다는 가장 쉬운 형태의 소속감과 공동체감을 제공하기에 고립된 개인에게 매우 매력적으로 다가갈 수 있다. 또한 추상적인 계급, 자본주의 같은 불평등보다 특정 집단의 특혜나 위선은 훨씬 직관적인 적으로 사람들에게 인식된다.
따라서 근래 두드러지고 있는 극우적 행태, 즉 물리적 폭력을 동원한 파괴적 행동, 음모론적 사고 방식, 민주적 규범을 무시하고 훼손하는 태도 등은 더 이상 극소수의 예외라고만 과소평가할 수 없다. 특정 이념이 아니라, 고립이 보편화된 사회 환경과 디지털 환경으로 증폭되고 있는 정서 상태로부터 기인하는 이런 행태는 앞으로 더욱 많은 이들에게서 나타날 수 있다.
보수 정당 지지와 극우화를 곧바로 연결짓는 경우가 잦으나 이를 한 덩어리로 바라본다면 극우적 행태의 정서적 기반도, 보수 정당을 선택하는 의식적 동기도 적절히 이해하기가 어렵다. 보수 정당에 대한 지지는 반민주당, 능력주의적 공정, 젠더 정책, 경제적 불안 등 여러 동기 속에서 형성되고 각 국면에 따른 변동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극우화는 그보다 훨씬 암묵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디지털 환경은 분노나 경멸같은 감정들을 반복적으로 자극하고, 밈이라는 희화화와 조롱의 형식으로 극우적 행위를 정당화하면서 더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것으로 만든다. 이러한 감정양식은 일면 직접적 폭력보다는 덜 파괴적이라 별 문제가 없어보이지만, 이념보다 훨씬 사람들 사이에 스며들기 쉬운데다 옳고 그름에 대한 경계를 흐린다는 점에서 더욱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극우적 감정양식이 굳어지는 시대에는 단순히 앞 세대가 보수적이면 뒷 세대가 진보적이고, 뒷 세대가 진보적이면 그 다음 세대는 보수적이라는 식의 순환이 성립되지 않는다. 이런 사회 환경과 디지털 환경 속에서 사람들은 점점 더 감정적이고 즉각적 보상이 주어지는 권위주의적 포퓰리즘 정치에 매력을 느끼게 된다. 청소년기·청년기에 형성된 성향은 보통 나이가 들수록 더 굳어지기에 미래를 낙관적으로 전망하기도 어렵다.
따라서 2030이 보수 정당을 선택했다는 이유만으로 이들을 극우화된 세대로 낙인찍는 것도, 반대로 어려운 현실 속에서 당연한 선택을 했다고만 이해하는 것도 충분하지 않다. 우리에게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시대가 도래했고, 사람들에게 민주주의를 경험하게 할 사회가 다방면에서 무너져버렸다는 구조적 통찰이 필요하다. 이대로라면 미래에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공동의 문제를 함께 해결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앞으로 정치와 사회운동의 주요 과제는 더 좋은 정책을 설계하고 공동체를 복원하는 것을 넘어 사회 자체의 재건이 되어야 한다. 고립된 개인에게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
지방선거가 끝나고 투표율이 공개됨에 따라 2030 세대의 보수 정당 선택에 대해 여러 이야기가 회자되고 있다. 어떤 이는 2030 세대를 잃어버린 세대처럼 다루며 과거 ‘20대 XX론’의 명맥을 잇고 있고, 어떤 이는 2030 세대가 처한 안타까운 현실을 나열하며 온정적 시각을 보인다. 또다른 이는 반민주당과 반페미니즘을 중심으로 2030의 선택을 해석하려 하고, 보수정당을 찍었다는 것 자체를 극우화로 연결시키기도 한다. 이는 각각 부분적으로는 설명력이 있겠으나, 지금 시대의 변화를 전체적으로 조망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오늘날 사회 환경과 디지털 환경 속에서 사람들의 정치적 선택과 극우적 감정이 서로 가까워지고 있음을 놓치게 만든다.
2026년 한국의 주거형태 1위는 1인가구로 40%에 육박한다. 가족과 학교, 지역공동체는 해체된지 오래이며 직장마저도 과거처럼 오랜 근속을 통해 다른 이들과 교류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카페나 술집, 스터디카페 정도가 아니라면 사람들이 모여서 무언가를 도모할 수 있는 공간은 거의 없다. 공유오피스는 말그대로 공간을 공유할 뿐 그 안에서 자발적 활동을 통한 관계는 잘 형성되지 않는다. 결혼은 물론이거니와 연애도 잘 하지 않는다. 굳이 밖을 나가지 않아도 스마트폰 앱을 통해 의식주를 거의 대부분 해결할 수 있다. 2030 세대들의 여가 중 가장 많은 퍼센테이지를 차지하는 건 OTT와 유튜브 시청이며, 그 외에도 인스타그램과 유튜브에 머무는 시간이 하루에 대부분을 차지한다. 유튜브에는 자극적 주장이 넘쳐나며, 인스타그램은 사람들에게 전형적으로 ‘전시하는 삶’을 부추긴다. 모두가 행복하고 잘 사는 모습을 스토리에 촘촘히 바느질함에 따라 ‘평범’에 대한 기준이 비현실적으로 높아졌다. 그러나 매일같이 접하는 자극이 바로 그 비현실이라면, 현실과 교차검증하는 건 쉽지 않다. 나도 저만큼은 보여줘야 할 것 같고, 하고 싶은 것도 갖고 싶은 것도 점점 더 많아지지만 이런 욕망은 대개 좌절될 수 밖에 없다. 오프라인 관계를 대체한 디지털 환경은 서로가 연결되어 있다는 환상으로 실존적 고립을 가리며 사람들을 끊임없이 불행하게 만들고 있다.
사람은 추상적 당위만으로 타인을 고려할 수 없다. 실제로 만나고, 부딪히고, 신세를 지는 경험 속에서만 타인의 존재를 구체적으로 배울 수 있다. 물리적으로도 관계적으로도 ‘나’만이 존재하는 시대에 사회적 금기와 터부가 어떤 억제력을 가질 수 있을까?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데 타인의 미묘한 불편이 무슨 문제란 말인가? 접촉하지 않는, 그저 있다고 어렴풋하게 인식하는 다른 사람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나? 왜 NPC에 불과한 타인을 위해 언제나 좌절되고 있던 나의 욕망을 또 절제해야한단 말인가? 왜 나의 공정보다 타인과의 연대가 중요한가?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의 정서나 인식의 차이가 생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과거와 달리 오늘날에는 이런 삶의 형태가 보편화되어 있다는 것이 중요한 차이점이다. 지금은 관계적 고립이 표준이 된 시대다. 과거에 비해 집합적 경험을 할 만한 기회도, 소속도 획득하기가 어렵다. 급변하는 AI 기술은 향후에 이런 파편화를 더욱 심화시킬 가능성이 높다. 현재 한국의 민주주의와 정치가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예측하기 위해서는 이런 사회적 조건 속에서 젊은 세대들의 정치적 감정과 선택이 형성되고 있다는 맥락에의 이해가 필요하다.
혼자가 된 개인은 주로 무력감과 불안을 경험하게 된다. 또한 개인과 사회를 잇는 중간 매개체(공동체·결사체)가 사라짐에 따라 자신이 느끼는 불안을 사회적으로 해석할 경로 역시 극히 협소해졌다. 자신을 확인해줄 타인이 없다면, 이 세상에서 나의 존재가 사라질 것 같다는 두려움을 느끼기 쉽다. 이는 곧잘 스스로를 입증할 ‘힘’에 대한 갈망으로 발현되며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에 범람하는 콘텐츠들은 권위와 폭력으로의 끌림을 자극하고 있다. 이렇게 힘에 이끌린다는 점에서 이들은 정치에 무관심하지 않으며, 오히려 과도하게 몰입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들의 세계관은 세상을 ‘우리’와 ‘적’으로 나누고, 적은 설득하거나 타협하기보다는 제압해야할 대상이며, 나의 공격은 폭력이 아니라 정의의 응징이라는 식의 양상을 보인다는 점에서 586 세대의 적대적 세계관과 닮아 있다. 그렇기에 지금의 극단화는 연대라는 내용은 빠진 채 기성세대의 전투적 정치문법과 형식을 계승한 결과라고도 볼 수 있다. 오늘날 2030은 아버지에게 저항하기보다 아버지가 쓰던 익숙한 언어를 통해 다른 적을 겨누고 있다.
‘함께 세상을 바꾸자’라는 요구보다 ‘내 몫을 빼앗은 적을 무찌르자’라는 요구가 주가 됨에 따라 이런 극단화는 극좌보다 극우로 발현되고 있다. 극우 정치는 실제로 누군가를 돌보거나, 갈등을 조율할 필요없이 같은 적을 미워하기만 하면 된다는 가장 쉬운 형태의 소속감과 공동체감을 제공하기에 고립된 개인에게 매우 매력적으로 다가갈 수 있다. 또한 추상적인 계급, 자본주의 같은 불평등보다 특정 집단의 특혜나 위선은 훨씬 직관적인 적으로 사람들에게 인식된다.
따라서 근래 두드러지고 있는 극우적 행태, 즉 물리적 폭력을 동원한 파괴적 행동, 음모론적 사고 방식, 민주적 규범을 무시하고 훼손하는 태도 등은 더 이상 극소수의 예외라고만 과소평가할 수 없다. 특정 이념이 아니라, 고립이 보편화된 사회 환경과 디지털 환경으로 증폭되고 있는 정서 상태로부터 기인하는 이런 행태는 앞으로 더욱 많은 이들에게서 나타날 수 있다.
보수 정당 지지와 극우화를 곧바로 연결짓는 경우가 잦으나 이를 한 덩어리로 바라본다면 극우적 행태의 정서적 기반도, 보수 정당을 선택하는 의식적 동기도 적절히 이해하기가 어렵다. 보수 정당에 대한 지지는 반민주당, 능력주의적 공정, 젠더 정책, 경제적 불안 등 여러 동기 속에서 형성되고 각 국면에 따른 변동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극우화는 그보다 훨씬 암묵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디지털 환경은 분노나 경멸같은 감정들을 반복적으로 자극하고, 밈이라는 희화화와 조롱의 형식으로 극우적 행위를 정당화하면서 더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것으로 만든다. 이러한 감정양식은 일면 직접적 폭력보다는 덜 파괴적이라 별 문제가 없어보이지만, 이념보다 훨씬 사람들 사이에 스며들기 쉬운데다 옳고 그름에 대한 경계를 흐린다는 점에서 더욱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극우적 감정양식이 굳어지는 시대에는 단순히 앞 세대가 보수적이면 뒷 세대가 진보적이고, 뒷 세대가 진보적이면 그 다음 세대는 보수적이라는 식의 순환이 성립되지 않는다. 이런 사회 환경과 디지털 환경 속에서 사람들은 점점 더 감정적이고 즉각적 보상이 주어지는 권위주의적 포퓰리즘 정치에 매력을 느끼게 된다. 청소년기·청년기에 형성된 성향은 보통 나이가 들수록 더 굳어지기에 미래를 낙관적으로 전망하기도 어렵다.
따라서 2030이 보수 정당을 선택했다는 이유만으로 이들을 극우화된 세대로 낙인찍는 것도, 반대로 어려운 현실 속에서 당연한 선택을 했다고만 이해하는 것도 충분하지 않다. 우리에게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시대가 도래했고, 사람들에게 민주주의를 경험하게 할 사회가 다방면에서 무너져버렸다는 구조적 통찰이 필요하다. 이대로라면 미래에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공동의 문제를 함께 해결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앞으로 정치와 사회운동의 주요 과제는 더 좋은 정책을 설계하고 공동체를 복원하는 것을 넘어 사회 자체의 재건이 되어야 한다. 고립된 개인에게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