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스에 갇힌 노조와 담론 - 노동발전소 토론 후기 (조건준 노동발전소/아무나유니온)

공식 관리자
2026-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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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파악


어떤 것의 위치를 안다는 것은 생각보다 그리 만만치 않다. 간단한 물건의 위치 파악도 아니고 특히 무형의 사회적인 것의 위치를 파악한다는 것은 더 그렇다. 노동의 위치를 어디에 둘 것인가. 서사나 담론에 대한 발제를 마치고 논의를 하자니 세 명의 발제 모두가 만만치 않은 주제라 토론을 잇기 쉽지 않았다. 


"세 분의 발제 각각을 다 동의하고 그런데, 이걸 어떻게 연결해서 논의해야 할 지 잘 모르겠어요" 다들 그런 느낌이 들었을 것 같다. "근데 이해는 가던가요. 저 형 발제는 거의 전문용어들로 꽉 차 있는데 뭔 소리를 하는지 이해는 하는 건가" 발제문 중 딱 하나만 읽었는데 하필 그 내용이 너무 어려웠다고 솔직히 털어놓는 분이 있었다. 


일주일 전, 첫번째 발제자가 마지막에 제기한 노동문제를 다룰 때에 민주주의라는 것으로 접근하는 것이 충분한가에 대해 쭉 생각에 왔다. 오늘 발제를 듣고 난 후에도  그 생각이 맴돌고 있었다. 


세번째 발제자는 노조의 민주주의가 진짜 민주주의 였는가를 물었다. 민주노조의 민주주의는 사실 이견을 인정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적과 싸우는 것이 중심이고, 그래서 이견을 허용하지 않는 것을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는가.(맞다고 본다. 그런데 모든 민주주의는 특수한 형태로 다양하게 적용되지 않을까. 뒤에 다시 나온다) 


삼국 각각 다른 길이 있다


(정규직의 노동1국, 비정규직의 노동 2국, 독립영역인 노동3국 등 '노동삼국론'을 바탕에 두고) 세번째 발제자가 토론에서 말한 것은 1국은 구조개혁의 대상이 아닌가를 얘기를 했다. 이들의 변화는 큰 위기가 닥쳐야 가능한 것이 아니냐고 했다. 


논쟁적인 문제다. 당사자인 양노총은 자신들이 개혁이나 변화의 주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니들은 개혁 주체가 아닌 대상이라고 하면 반발할 것이다. 2국의 비정규직은 자신의 생존전략을 중심에 두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3국은 노동권이라는 것이 있는데 우리도 보장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해야 하는데, 물론 그 경로는 좀 달라야 할 것이다. 


세번째 발제가가 토론에서 말한 것은 노동사회를 3국으로 본다면 당연히 다뤄야 할 중요한 주제다. 그러나 논의가 이 방향으로 진행된 것은 아니다. 요즘 청년의 우경화를 비롯해 우경화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분은 민주주의의 효능감을 느낄 수 있어야 그런 경향에서 빠져 나올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세 가지 발제를 종합해서 자신이 이해한 방식으로 들려 주었다. 


AI의 등장으로 노동의 위치에 대한 고민은 또 다시 도전받고 있다. 이 문제도 중요하다. 그런데 이런 시대에 노동의 위치를 "수호하면서" AI에 대한 사회적 통제를 얘기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한 분이 얘기했다. 'AI와 노동'이라는 주제는 그 자체로 긴 토론이 필요하다. 


문제적인 '고용박스'


한마디하라는 주문에 따라 몇마디 하다가 길어졌다. 두번째로 발제한 후 나는 과연 '노동의 서사'라는 긴 역사에 걸친 이 주제를 토론이 가능하게 얘기한 것인지, 내 생각의 틀에 갇힌 채 말한 것은 아닌지를 생각했다. 그런데 얘기를 요구받고 '우리가 노동담론이나 노동서사를 토론하려고 했던 것은, 어떤 지점에서 서사나 담론이 막혀 있는가를 보면서 그것을 넘어서자는 취지였다'는 점을 상기했다. 


'고용박스'는 노동담론의 지체의 원인을 지목한 표현이다. 고용을 중심으로 노동을 보는 사고, 고용된 정규직을 중심으로 보는 사고 방식이 오늘날 노동담론 발전을 지체시키는 가장 큰 원인이 아닌가. 이미 노동사회는 3국으로 분할 되었는데, 그 중에 하나인 1국 중심으로만 본다면 전체를 볼 수 없다. 그러니까 고용박스에 갇힌 1국을 비판하고 공격하면 노동담론이 발전한다는 것은 아니다. 2국의 비정규직은 1국으로 이민을 꿈꾸고, 정규직이 되고 싶고, 연공급을 적용받고 싶어한다. 그래서 이런 고용중심적 사고를 벗어난 3국에서 가능성을 발견하고, 이것을 키워나가자는 것이다. 


"고용박스라는 표현을 쓰는데, 냉소적인 시각이 담겨있는 것 같다. 고용박스를 해체하자는 것인가. 고용이라는 것은 노동자들이 싸워서 사회적 계약을 획득함으로서 지위를 만든 것인데, 이걸 냉소적으로 보는 것 같다" 한 분이 내 시선에 날카롭게 파고들었다.(바로 앞에 앉아 있는데 대놓고 이런 식으로 얘기해서 미안하다고 했지만, 천만에요. 이런 제기 좋습니다) 그리고 참가자들 얘기가 이어졌다.


"자원에 대해 얘기했는데, 3국의 자원은 무엇인가. 다른 방법이 없고 결국 그것을 국가적 차원에서 가져와야 하는 것이 아닌가" 물론 국가에서 삥 뜯자는 것이 아니라 국가를 활용해야 한다는 의미로 한 얘기라고 했다. 


"다정서사가 중요하다고 했는데, 왜 다정 서사가 중요한지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필요하지 않나. 사실 투쟁 없이 쟁취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그래서 다정서사만이 아니라 전쟁서사도 필요하지 않은가" "고용박스와 아닌 것으로 이분법으로 나누면 안되든 것 아닌가. 고용박스와 아닌 것의 경계에도 사람들이 많다" 


"저는 고용박스에 대한 비판을 미리 공유한 자료에 나오는 '불리한 편입'이라는 차원에서 이해했다. 제도 밖에 있는 존재를 포용한다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닐 수 있다. 그 포용의 과정에서 불리하게 흡수되는 측면에 대한 비판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토론 전에 하나의 자료를 보내주셨던 분의 얘기다.


지금 필요한 민주주의를 말하자


고용박스를 언급한 후 이어진 얘기들에 대해 '고용박스론'을 꺼낸 사람으로서 제기된 얘기들에 대한 생각을 말했다.(결국 내가 말 많아지는 이런 토론을 피하고 싶었지만 또 길게 얘기하게 되는 ㅠㅠ)       


먼저, 고용박스를 보는 시선에 냉소가 있음을 인정한다. 이 용어는 '맨박스'에서 착안한 것이다. 맨박스는 남성중심의 세계관으로 가득한 상자라는 의미다. 강력한 비판이 들어있는 개념이다. 그러니 여기에서 착안한 고용박스라는 표현은 고용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닫힌 상자의 세계를 비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언박싱'해서 고용박스를 다 없애고 고용계약 없는 세상을 만들자는 것은 아니다. 노동1국은 그들 나름대로 고용지키기에 몰입할 수 밖에 없다. 자기 조건에 충실한 것이다. 그들이 그 상자를 걷어차고 나올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내 시각은 냉소적이기도 하지만, 그들은 그들 나름 대로 상자를 지키고, 노동2국의 비정규직은 정규직 되기를 하는 것이고, 3국에서는 독립의 길을 찾아야 한다. 


이것이 지금 필요한 민주주의 아닐까. 노동자 모두가 하나의 경로를 가는 것이 아니라 노동삼국 각각에 맞는 경로를 찾아가는 것. 이것이 경로다양성이고, 이런 다양성을 인정하는 민주주의가 지금 필요하고, 다양한 업종들로 구성된 3국에 특히 중요한 민주주의라고 생각한다. 


과거의 민주노조의 민주주의는 어떤 의미에서 민주주의가 아니라는 제기가 있었는데, 민주노조가 등장한 당시에는 군사독재였다. 그에 맞서는 노동자들은 전투적이어야 했다. 다양성보다는 독재에 맞서는 단일성이 중요했다. 그 때 노동운동은 혁명론에 영향 받았는데 그 혁명론에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민주집중제'가 있었다. 다양한 의견을 토론하되 결정되면 그것에 일사불란하게 따르는 것이다. 또한 대공장 줌심의 노조는 위계적 남성 중심의 관리체계를 가지고 있는데 이런 곳에서 저항의 민주주의는 리더를 중심으로 뭉쳐서 싸우는 것이 지연스럽다. 


정세, 이론, 장소를 반영하기 때문에 그때 노조의 민주주의는 그 때에 맞는 특수한 민주주의였다. 그런데 현재의 시각으로 그때의 민주주의를 평가하는 것이 담론 발전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 지금 필요한 민주주의에 집중하는 것이 어떨까. 1국은 1국에 맞게, 2국은 2국에 맞게, 3국은 3국에 적절한 경로를 만들어가는 '경로다양성'이 자금 필요한 민주주의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다.


자원이 부족한 3국은 어디서 자원을 얻을까


(인간에게 필요한 자원은 자연에 있다. 그래서 수렵채집할 때는 자연에 딱 붙어 있었다. 농경생활을 할 때는 논밭에 붙어 살았다. 근데 산업화로 자연에서 분리된 공장을 만들면서, 자연자원은 공장에 모이고, 사람도 공장에 모였다. 이렇게 자원은 기업으로 집결되었다. 그런 기업과 산업에서 탄생한 노조는 그곳에서 노조사무실과 전임자 임금도 받는다. 그런데 기업에 고용되지 않은 1인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그런 자원을 얻지 못한다)


자원이 부족한 프리랜서는 오직 자기 스스로 자원을 만들어야 한다. 스스로 브랜드를 만들고, 마케팅을 하며, 노동을 한다.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 자기개발을 해야 한다. 이것을 '자기 착취'로 보는 사람도 있다. 그게 '자기 개발'이든 '자기 착취'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원을 스스로 조달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프리랜서가 결사체를 만들면, 활동비와 사무실 비용은 어디에서 나올까. 이게 문제다. 


개인이 아니라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여전히 과거로부터 이어진 일부 운동권은 '국가고용책임'을  주장하기도 한다. 이게 맞을까. 그들의 사고에 깔린 국가주의를 진하게 느낀다.(이 대목에서 노동연구자에 비해 사회정책 연구자는 국가를 중심에 두는 경향이 있다는 얘기가 있었다) 그들은 여전히 국가주의를 사회주의와 혼동하고, 국가주의와 공공성을 동일한 것으로 여기는 것 같다. 


개인과 국가 사이, 그 사이에 아무것도 없는가. 있다. 나는 그것이 사회라고 본다. 프리랜서는 부족한 자원을 보완하기 위해서 자기 착취에 머물지 않는다. 커뮤니티를 만들고, 협동조합을 만들며, 협회에 가입해서 부족한 자원을 채우려 한다. 이것들은 국가도 아니고 개인도 아니다. 이런 결사들이 사회다. 노조도 그런 사회들의 하나다. 그래서 나는 노조를 경제의 영역에 두면서 이익단체로 보거나, (그 xx 같은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그렇듯이) 노조를 정치영역으로 끌고 가서 권력집단으로 만드는 것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다. 


독립영역에 있는 시민들은 기업복지, 기업임금과 같은 기업의 자원을 기대할 수 었다. 그렇다고 국가가 알아서 복지와 권리를 선물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불가피하게, 거의 운명적으로 사회적 차원에서 자원을 획득해야 한다. 이미 있는 노조가 노동권이 없는 3국의 시민들에게 자원을 나누는 것도 사회적 차원의 자원획득 방식의 하나다. (이점에서 독립영역은 사회공장에 일하고, 사회적 교섭을 만들어야 하고, 사회적 자원을 획득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노사정 사회적 교섭 따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얘기는 3국의 가능성에 대해 별도 토론을 통해서 훨씬 풍부하게 다뤄야 한다)  





다정서사와 전쟁서사


전쟁 서사와 다정서사를 대비시키는 것은 이분법일까. 사실 이런 용어를 쓰기 전에 고민이 많았다. 이분법으로 보면 '전쟁-평화'의 쌍이 더 어울리는 단어다. "애증이 있죠. 사랑과 증오는 늘 한 묶음이고 빛과 그림자가 함께 하듯이. 내가 이 사람에게 다정한데 이 사람이 공격받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맞서 함께 싸워야죠. 다정하다는 것과 전쟁을 대립시켜서 쓰려는 생각은 없습니다"


예를들면 활동 예산도 없는 영세사업장 노동자나 프리랜서에게 기금을 기부하는 것. 화섬노조가 봉제노동자들에게 기금과 사람을 지원한 사례나 제조업 노조가 프리랜서와 수련회를 하면서 어울리고 기금을 지원하는 것은 투쟁연대라기 보다는 자원의 순환을 만들어 내는 다정함이다. 그래서 나는 '연대'에서 노동계 안의 자원 '순환'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엇이 필요하고 어떤 지원이 필요한가를 구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멀리서 조망하면서 제도를 논할 경우에 당사자의 목소리와 현실로부터 빗나간다. 노조 조직율 향상을 위해 정부가 노조 설립 필증을 잘 내준다고 노조가 많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정말 필요한 지원이 무엇인지 생생하게 파악하는 다정함이 먼저고, 그에 따른 지원과 제도를 설계할 때에 실효성이 있다. 그래서 노동3국을 말할 때, 무권리 상태의 독립영역에서 새로운 서사를 짓고자 할 때, 중요한 것은 3국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감각을 헤아리려는 '삼국 감성'을 말했다.


고용박스도 이분법일까


고용박스라는 언어가 박스 안과 밖을 둘로 나누는 이분법적 사고일까.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노동삼국시대라고 하지 않고 노동이국, 흔히 쓰는 '이중 노동시장'이라는 용어를 그냥 썼을 것이다. 


고용박스와 독립노동 사이에는 2국이 있다. 지금까지 비정규직이라고 분류해온 영역이다. 혹자는 고용박스가 녹아 내려서 생긴 노동을 '액화노동'이라고 했다. 이처럼 경계에 서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냥 모호한 존재가 아니라 비정규직, 2국이라고 부르는 영역이다.


"고용박스 안에 있다가 프리랜서로 가기도 하고, 프리랜서로 일하다가 고용박스 안으로 가기도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동의한다. 모든 노동을 고용박스로 집어넣거나 모든 고용박스를 깨고 독립영역으로 내모는 것은 합당치 않다. 문제는 자금 현실에서 이런 이동이 어렵다는 것이다. 수평이동이 가능해지려면 1국에 비해 현저히 처우가 떨어지는 3국을 강화해야 한다. 


바로 그것입니다


'불리한 편입'에 대한 자료를 공유해준 분의 고용박스에 대한 해석은 내가 말하고 싶은 의미를 딱 그대로 짚은 것이었다. '불리한 편입'이라는 개념 자체는 좀 어려워 보일 수 있지만, 프리랜서 당사자의 시각에서 본다면 매우 유용한 개념인 것 같다. 그분이 공유해준 자료에는 '불리한 편입'의 국제적 사례가 나온다. 


프리랜서 중에는 기업이라는 조직집단의 문화, 그 안에 갇혀서 받는 스트레스거 싫어서 더 자유로운 프리랜서를 선택한 분들이 있다. 그것이 자유인지 불안인지, 독립인지 고립인지, 늘 논란이 있다. 그러나 기업에서 돈을 더 준다고 하더라도 그것보다 자유로운 프리랜서를 선택한 사람에게 돈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을 고용박스에 집어넣은 다면, 이게 과연 좋은 일인가. 그에게는 고용박스가 고통이 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포용적인 편입이라는 것은 누군가에게는 불리하고 불합리하며 부당한 것이 될 수도 있다. 정규직의 1차 노동시장으로 모든 노동을 집어 넣겠다는 발상은 자칫 누군가에게는 매우 독선적이고 획일적이며 고통스런 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때문이 고용박스를 지키려는 1국의 정규직, 그 고용박스 안으로 들어가려는 2국의 비정규직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독립영역에서 살아가려는 3국의 시민에게 주목하자는 것이다. 그 자체를 존중하면서 고립이 아닌 독립, 불안이 아닌 자유를 찾아가는 경로를 만들자는 것이다. 


'노동삼국론'은 쓸만한 걸까


나아가 다음에 더 토론에서 무엇을 다뤄야 할 것인지 의견도 냈다. 3국의 부족한 자원을 어디에서 어떻게 만들까. 이들을 위한 제도가 먼저인가, 주체의 결사를 통한 자력을 만드는 것이 우선일까. 독립영역에서 교섭은 가능한가. 누구에게 교섭을 요구할 것인가. 우리의 토론은 이렇게 나아가야 한다. 사실 기획토론을 하기로 할 때에 다음 토론 주제가 바로 노동3국을 다루는 것이었다. 


예정된 계획에 따라 이를 충실히 토론할 수 있다면, 추상적이고 어려운 서사나 담론에 빠저 붕 뜬 논의가 아니라 구체적인 논의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오늘날의 노동담론이나 서사는 '고용박스'에 갇혀서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으로부터 탈출한 영역인 노동3국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삼국 감성'으로 '삼국의 가능성'을 추상적 차원이 아니라, 부족한 자원을 채우는 방법, 교섭을 만드는 경로, 서로를 연결하는 결사의 방식을 구체적으로 말해야 한다. 


"규범을 만든 역할" 이날 토론에서 마지막으로 자신은 1.1국에 있는 것 같다(일동 웃음)고 했던 한 노조 간부가 얘기했다. 바로 이것, 다정함, 자부심, 연결과 같은 얘기들이 나왔는데, 이런 것을 품은 규범을 만드는 것이 노조의 역할이라는 얘기가 반가웠다. 3국에만 가능성이 있고 1국은 버리거나 제거해야할 곳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노동계 안에서 가장 자원을 많이 가진 1국에서 자원을 순환시키는 노력을 기울인다면, 3국으로 갈라진 노동계는 다양한 통일성을 갖출 수 있을 것이다. 


토론 시간에 어떤 토론보다 생각이 복잡했다. 2차에서도 토론 내용에 대한 무성한 얘기가 나오기 어려운 토론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돌아와 다시 정리하면 할 수록 앞으로 나아가야 할 과제, 앞으로 논의해야 할 것들이 더 분명해지는 것 같다.(순전히 나의 뇌피셜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노동삼국론은 쓸만한 것인가' '노동삼국론은 어떤 가능성을 품었는가' '노동3국론은 어떻게 더 나아갈 수 있는가' 이런 토론을 다음에 할 수 있다면 좋겠다. 한가지 더 중요한 것은, 몇이서 발제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토론하는 형식이 아니라 훨씬 많은 사람들이 토론에 참가하는 방식. 말그대로 토론이 활발한 토론의 형식으로 토론할 수 있으면 좋겠다. 늘 발제한 나같은 놈들이 또 발제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수준이든, 설혹 어설픈 수준이라고 할지라도 짧게 주제에 대해 발제하고, 많은 이들이 토론에 참가하는 토론을 만들어 보면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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